유딧기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7장 · 포위된 베툴리아

칼보다 먼저 찾아온 목마름과 닷새의 기한

유딧기 7장에서 베툴리아 사람들은 적군의 칼에 죽지 않습니다. 성벽도 무너지지 않고, 적군이 도시 안으로 쳐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죽어 갑니다.

홀로페르네스의 군대는 도시 바깥의 물샘을 차지하고 산으로 오르는 길을 막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 안에 저장해 둔 물이 바닥나고, 어린아이들이 기운을 잃고, 여자들과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쓰러집니다.

마침내 백성은 자신들을 이끌던 지도자들에게 몰려가 항복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적군과 싸워 이기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더 이상 목말라 죽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장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쉽게 항복하려는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지도자의 결심이 충돌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까, 생명을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면서 그분께 기한을 정할 수 있습니까?

유딧기 7장은 이러한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독자를 물이 말라 가는 도시 안으로 데려갑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87장 본문 읽기 →

온 땅을 핥아 먹을 것 같은 군대

유딧기 7:1–5 본문 →

홀로페르네스는 베툴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킵니다.

그날 그들 가운데 싸울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진을 거두어 떠났다. 그들의 전투 병력은 보병 십칠만 명과 기병 만 이천 명이었다. 그들 가운데 걸어서 따라가는 사람들의 짐 행렬은 이 수에 들지 않았는데, 그 무리도 엄청나게 많았다.유딧기 7:2 · 본디새김

이 숫자는 본문이 묘사하는 군대의 압도적인 규모를 보여줍니다. 다만 유딧기가 역사적으로 일관된 연대기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숫자를 실제 전투 병력에 대한 독립적으로 검증된 통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 안에서 중요한 것은 베툴리아 사람들의 눈에 이 군대가 얼마나 거대하게 보였는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큰 무리를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저마다 이웃에게 말했다. 「이제 저들이 온 땅을 핥아 먹겠소. 높은 산들도 골짜기들도 언덕들도 저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소.」유딧기 7:4 · 본디새김

베툴리아 사람들은 적군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군대가 온 땅의 것을 다 삼켜 버릴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4장에서 이스라엘은 산의 높은 곳과 좁은 길을 방어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은 바로 그 산들조차 적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지형이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했지만 방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무기를 들고 망대에 불을 피웁니다. 밤새 자기 자리를 지키며 경계합니다.

그들은 적군이 성벽을 공격할 것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페르네스는 성벽보다 먼저 다른 것을 차지합니다.

물입니다.

가장 높은 곳을 지켰지만, 가장 낮은 곳을 빼앗기다

유딧기 7:6–18 본문 →

홀로페르네스는 기병을 이끌고 베툴리아 앞으로 나가 도시로 올라가는 길들을 살핍니다. 그리고 물샘의 위치를 확인한 뒤 병력을 배치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작전은 에서 자손과 모압의 지도자들, 해안 지방의 지휘관들이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인 이 백성은 자기들의 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사는 산의 높은 곳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산꼭대기들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유딧기 7:10 · 본디새김

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산을 더 신뢰했다는 객관적인 판정은 아닙니다. 적의 지휘관들이 이스라엘의 방어 전략을 해석한 말입니다. 독자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면으로 산을 올라가며 싸우는 것은 공격하는 쪽에 불리합니다. 홀로페르네스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그 군대로 성벽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조언을 듣습니다.

「그러니 나리, 전열을 맞대고 벌이는 싸움처럼 그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리의 군대에서는 한 사람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유딧기 7:11 · 본디새김
「군대의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며 나리의 진영에서 기다리십시오. 나리의 종들이 산기슭에서 솟아나는 물샘을 장악하게 하십시오.」유딧기 7:12 · 본디새김

앞에서 이스라엘은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좁은 길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적군은 산 아래에서 솟아나는 물을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이 확보한 것은 높은 지대이고, 적군이 확보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물입니다.

적군은 성벽을 무너뜨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 안의 사람들을 직접 공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차단하면 됩니다.

「베툴리아에 사는 사람은 모두 그곳에서 물을 긷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이 그들을 죽일 것이고, 그들은 자기 도시를 넘겨줄 것입니다. 저희와 저희 군대는 가까운 산꼭대기들로 올라가 그 위에 진을 치고, 도시에서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지키겠습니다.」유딧기 7:13 · 본디새김

여기서 목마름은 우연히 발생하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적군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죽음의 수단입니다.

그들은 물을 차단한 뒤 주변 산꼭대기까지 지키며 누구도 도시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물을 구하러 나갈 수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피할 수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들의 아내들도, 그들의 자녀들도 굶주림에 말라 갈 것이며, 큰 칼이 그들에게 닥치기도 전에 자기들이 사는 곳의 거리들에 쓰러져 누울 것입니다.」유딧기 7:14 · 본디새김

지휘관들은 자기 군대에서 한 사람도 죽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적의 도시 안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 가는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공격하는 군대의 희생을 줄이는 작전이, 포위된 도시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집중시키는 작전이 된 것입니다.

홀로페르네스는 거대한 제국군을 거느리고 있지만, 산지의 지형과 주민들의 생활 방식을 아는 사람들의 조언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베툴리아의 군사적 약점보다 생활상의 약점을 더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외부 군대의 압도적인 힘과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의 지식이 결합된 것입니다.

홀로페르네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암몬 자손의 부대와 아시리아 병사 오천 명이 물샘을 장악하고, 다른 부대들은 산지와 평야에 진을 칩니다.

이제 도시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어선 뒤에 갇히게 됩니다.

물그릇이 비어 가면서 무너지는 마음

유딧기 7:19–22 본문 →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원수에게 에워싸여 그들 사이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마음이 꺾여 자기들의 주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유딧기 7:19 · 본디새김

이 표현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마음이 꺾인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극심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적의 군대가 모든 탈출로를 막았고, 물을 구할 길도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이 더욱 절망적입니다.

아시리아의 온 군대, 곧 그들의 보병과 병거와 기병이 그들을 에워싼 채 서른나흘 동안 머물렀다. 베툴리아에 사는 모든 사람의 물그릇마다 물이 바닥났고,유딧기 7:20 · 본디새김

이야기는 그동안 있었던 전투나 외교적 협상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과 물이 줄어들었다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물그릇이 비고, 물을 모아 둔 웅덩이도 비어 갑니다. 사람들은 물을 정해진 분량으로 나누어 마시며, 단 하루도 충분히 마시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군대가 땅을 뒤덮을 만큼 크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물그릇마다 물이 바닥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거대한 군대가 이동하는 사건이지만, 성 안에 갇힌 사람에게는 매일 마실 물을 얻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사람들의 몸에 나타납니다.

그들의 어린아이들은 기운을 잃었고, 여자들과 젊은이들은 목마름으로 기진맥진했다. 그들은 도시의 거리들과 성문 통로들에 쓰러졌으며, 더는 그들에게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유딧기 7:22 · 본디새김

앞에서 적군의 지휘관들은 칼이 닥치기 전에 사람들이 거리에서 쓰러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7:14). 이제 그들의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표현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기운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도시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을 이어 갈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먼저 언급됩니다.

그들은 군사적 판단을 내린 사람도 아니고, 적에게 저항할지 항복할지를 결정한 지도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물이 끊기자 가장 취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고통을 겪습니다.

본문은 이들의 고통을 이스라엘의 용기 부족에 대한 대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가 홀로페르네스의 작전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게 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시험받는 자리는 추상적인 생각 속이 아니라, 물을 마시지 못하는 몸과 죽어 가는 가족의 곁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이어지는 백성의 항복 요구를 너무 쉽게 비난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장면은 예레미야애가 4:4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젖먹이의 혀가 목말라 입천장에 붙고,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만 아무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두 본문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위된 도시의 고통을 어린아이들의 몸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된 모습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희 사이를 심판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딧기 7:23–25 본문 →

마침내 백성이 지도자들에게 몰려갑니다.

앞에서 물 부족 때문에 기운을 잃었던 사람들이 지도자들 앞에 모입니다. 그들은 이제 방어 계획을 논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러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희 사이를 심판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아시리아 자손과 평화를 논의하지 않아 저희에게 큰 불의를 저질렀습니다.」유딧기 7:24 · 본디새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위협은 성벽 바깥에서 왔습니다. 적군이 그들을 에워싸고 물샘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벽 안에서 지도자와 백성이 대립합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전쟁의 결과가 나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은 지도자의 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도자의 결정 때문에 공동체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들과 지도자들 사이의 심판자로 부릅니다.

그들은 지도자의 결정에 반대하면서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다음 말은 더욱 무겁습니다.

「이제 저희를 도울 이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들의 손에 팔아넘기셔서, 저희가 그들 앞에서 목마름과 참혹한 멸망 속에 쓰러지게 하셨습니다.」유딧기 7:25 · 본디새김

본문은 실제로 베툴리아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사람들이 목마름으로 쓰러지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팔아넘기셨다는 설명은 백성의 입에서 나옵니다. 서술자가 하나님의 행동을 그렇게 확정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아키오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다면 적군에게 패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현재 그들에게 죄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5:20–21). 그러나 베툴리아의 백성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근거로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팔아넘기셨다고 판단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과 하나님께서 실제로 버리셨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팔아넘기다’는 표현은 구약의 사사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학적 언어와 연결됩니다. 사사기 2:14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저버렸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사사기 3:8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왕의 손에 파셨다고 설명합니다. 사사기에서는 서술자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을 연결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유딧기 7장에서는 백성이 자신들의 고통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실제로 어떤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베툴리아를 적의 손에 넘기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노예가 되더라도 아이들이 살아남는다면

유딧기 7:26–29 본문 →

백성은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을 불러, 도시 전체를 홀로페르네스의 무리와 그의 온 군대에 약탈물로 넘겨주십시오.」유딧기 7:26 · 본디새김

여기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협상만이 아닙니다. 도시 전체를 적군에게 넘겨주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약탈당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저희는 노예가 되고 목숨은 부지할 것이며, 저희 어린아이들이 죽는 것과 저희 아내들과 자녀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저희 눈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유딧기 7:27 · 본디새김

그들이 선택하려는 것은 더 좋은 미래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는 것보다는 덜 끔찍하다고 여기는 미래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홀로페르네스가 베툴리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확정된 생존 조건이 아닙니다. 절망에 빠진 백성이 항복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입니다.

본문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원칙을 몰라서 항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요구를 단순히 비겁하거나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하면 본문이 보여주는 인간의 고통을 충분히 읽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백성의 요구가 절박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내린 모든 판단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은 자신들의 요구를 더욱 엄숙하게 만듭니다.

「저희는 하늘과 땅과 저희 하나님이자 저희 조상들의 주를 증인으로 삼아 여러분에게 엄히 간청합니다. 저희 죄와 저희 조상들이 지은 죄에 따라 저희를 벌하시는 그분께서, 오늘 이 말들대로 행하지 않으시도록 말입니다.」유딧기 7:28 · 본디새김

분명한 것은 백성이 자신의 절박한 요구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인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크게 울었다. 그들은 주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유딧기 7:29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적의 손에 넘기셨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분께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시편 22:1–2에서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탄식하면서도 계속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탄식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관계 안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는 표현은 구약의 언약적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30:19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놓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다만 28절의 마지막 표현은 해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이 말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목마름과 멸망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으면, 백성은 하나님께 그 재앙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셈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지금 요구한 일과 관련된 심판을 피하려는 간구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닷새만 더 — 믿음의 고백인가, 하나님께 정한 기한인가

유딧기 7:30–31 본문 →

백성의 울음과 간구가 끝나자 웃시야가 대답합니다.

웃시야가 그들에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닷새만 더 견딥시다. 그동안 주 우리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를 다시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내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유딧기 7:30 · 본디새김

백성이 자신과 지도자들을 향해 불의를 저질렀다고 비난했지만, 웃시야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말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닷새입니까?

본문은 하나님께서 닷새 안에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습니다. 웃시야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웃시야가 백성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한 기간입니다.

「그러나 그날들이 지나고도 우리에게 도움이 오지 않으면, 여러분의 말대로 하겠습니다.」유딧기 7:31 · 본디새김

그는 실제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입니다. 백성에게 무조건 더 견디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목마름으로 죽어 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닷새라는 기한을 제시한 데에는 신앙적인 기대와 현실적인 책임이 함께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한에는 신학적 긴장도 있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그 자비가 언제 나타나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닷새 안에 행동하셔야 한다는 근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이 행동하실 시간을 인간이 확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는 이유로 백성이 죽어 가는 현실을 무시한다면, 그것 역시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무런 신중한 판단 없이 즉시 항복한다면, 적군이 실제로 그들을 살려 줄 것인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공동체를 또 다른 위험에 넘길 수도 있습니다.

웃시야는 이 두 가능성 사이에서 닷새라는 절충안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가 잘못된 지도자라고 명시적으로 판정하지도 않습니다. 독자는 웃시야가 처한 어려움과 그가 하나님께 정한 기한이 갖는 문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베툴리아의 아이들은 실제로 목마름 때문에 힘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지도자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보호받아야 할 생명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웃시야의 말을 아무런 조건 없이 본받아야 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의 신앙적 확신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그 결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94:14은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소유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31–33에서도 주께서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며, 근심하게 하시더라도 풍성한 사랑으로 긍휼히 여기신다고 고백합니다. 웃시야의 확신은 이러한 하나님 이해와 통합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께 언제까지 자신을 잊으실 것이냐고 묻습니다(시편 13:1–2). 그러나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과 하나님께 반드시 특정 날짜까지 응답하셔야 한다고 조건을 거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벽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유딧기 7:32 본문 →

유딧기 7장의 마지막은 매우 조용합니다.

그는 백성을 자기들의 진영으로 흩어 보냈다. 그들은 자기 도시의 성벽과 망대로 갔다. 그는 여자들과 자녀들을 그들의 집으로 보냈다. 그들은 도시 안에서 몹시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유딧기 7:32 · 본디새김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처음에 등장했던 망대가 다시 나타납니다. 1–5절에서 백성은 무기를 들고 망대 위에 불을 피우며 밤새 경계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도 사람들은 성벽과 망대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두 장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는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긴장하며 전투에 대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목마름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고, 지도자는 닷새라는 기한을 약속했으며, 공동체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성벽은 여전히 서 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힘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질문

유딧기 7:1–32 본문 →

이 장은 어느 쪽의 결정을 단순한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죽음의 위협 앞에서 서로 다른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인간의 두려움도, 인간의 신앙적 확신도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아직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베툴리아의 밤이 다시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성벽과 망대에 올라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도시는 아직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빈 물그릇은 그대로 있습니다.

웃시야는 닷새만 더 기다리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도 성벽 바깥의 물샘은 적군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베툴리아에는 아직 다섯 날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섯 날을 견딜 물이 남아 있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유딧기 7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도시 안에는 목마름과 울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도우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