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딧기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9장 · 유딧의 등장

과부의 손에 힘을 주십시오

유딧은 적군의 진영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무기를 챙기거나 성문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먼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머리에 재를 얹고, 굵은 베옷을 드러낸 채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녀가 구하는 것은 뜻밖의 무기입니다.

유딧은 자신의 입술이 속임을 말하게 될 것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 속임이 적에게 상처가 되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 기도의 근거로 불러오는 사건입니다. 출애굽이나 다윗의 승리가 아니라, 자기 여동생을 욕보인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복수했던 시므온의 이야기입니다.

왜 유딧은 하필 이 사건을 기억할까요? 하나님께서 약한 사람의 편에 서신다는 믿음과 속임수와 폭력은 어떻게 한 기도 안에 놓일 수 있을까요?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예루살렘에서는 향이 오르고, 베툴리아에서는 기도가 오른다

유딧기 9:1 본문 →

유딧의 기도는 장소와 시간을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유딧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 머리에 재를 얹고, 입고 있던 굵은 베옷을 드러냈다. 마침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는 그날 저녁의 향을 바치고 있었다. 유딧은 주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유딧기 9:1 · 본디새김

성전에서는 하나님 앞에 향이 올라가고, 베툴리아에서는 유딧의 기도가 올라갑니다. 그녀는 성전에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 자신의 간구를 맞추고 있습니다.

시편 141:2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의 향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유딧기 9장이 그 시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과 기도를 함께 놓는 상징은 서로 통합니다.

성전은 아시리아 군대가 궁극적으로 위협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유딧이 지키려는 것은 베툴리아 주민들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소도 그들의 운명에 걸려 있습니다.

그녀는 재를 머리에 얹고 굵은 베옷을 드러냅니다. 애통과 낮아짐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창세기 37:34에서 야곱은 요셉의 죽음을 믿고 굵은 베옷을 입었고, 에스더 4:1–3에서는 유다인들이 멸망의 위협 앞에서 베옷과 재로 슬퍼합니다.

유딧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도와주시기를 구하지만, 먼저 그 계획을 가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는 현재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훨씬 오래된 가족의 상처를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왜 유딧은 시므온의 칼을 기억하는가

유딧기 9:2–4 본문 →

「주님, 제 조상 시므온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다른 겨레 사람들에게 복수하도록 그의 손에 큰 칼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처녀의 태를 열어 더럽히고, 넓적다리를 드러내 수치를 주고, 태를 더럽혀 치욕을 주었습니다. 당신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유딧기 9:2 · 본디새김

이 기도의 첫머리에는 아브라함도 모세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딧은 자기 조상 시므온을 부릅니다.

그녀가 떠올리는 사건은 창세기 3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의 유력자 세겜에게 성폭력을 당합니다. 세겜은 이후 디나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그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의 가족에게 혼인을 통한 결합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는 속임수를 꾸밉니다. 그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혼인을 허락하겠다고 말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이에 응하자,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이 아직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칼을 들고 들어가 남자들을 죽입니다. 이후 야곱의 아들들은 도시를 약탈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사로잡습니다(창세기 34:13–29).

유딧은 시므온이 얼마나 용감했는가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칼을 들었는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한 여인의 몸이 침해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수치와 치욕이 가해졌습니다. 유딧은 바로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금하신 악으로 묘사합니다.

기억된 사건과 원래 이야기 사이의 긴장

그녀는 시므온이 휘두른 칼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세겜 사람들의 살육과 약탈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아내들을 노략물로, 딸들을 포로로 넘기셨으며, 모든 노획물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들들이 나누어 갖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열심으로 열심을 냈고, 그들의 피가 더럽혀진 것을 역겨워했으며, 당신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하나님, 과부인 제 말도 들어 주십시오.」유딧기 9:4 · 본디새김

그러나 창세기 34장 자체는 하나님께서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 도시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그들의 행동 때문에 주변 민족들의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창세기 34:30). 이후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과 잔혹한 분노를 비판합니다(창세기 49:5–7).

창세기 34장은 디나에게 가해진 악과 그에 대한 복수가 낳은 또 다른 폭력을 함께 보여 줍니다. 반면 유딧의 기도는 시므온의 행동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악에 대한 심판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 기억에는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디나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복수가 결국 다른 여자들과 딸들이 노략물과 포로가 되는 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유딧의 기도를 아무런 윤리적 질문 없이 의로운 복수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듭니다.

유딧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객관적인 선언만이 아니라, 자신이 물려받은 역사를 특정한 관점에서 읽어 내는 한 신앙인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차이를 기억하면 유딧의 믿음을 존중하면서도 그녀의 모든 판단을 무비판적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속임수와 앞으로의 속임수

유딧이 이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 폭력의 정당화에만 있지 않습니다.

9:3에서 ‘속임수’와 ‘속임을 당한’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9:10과 9:13에서도 ‘속임’이 반복됩니다. 창세기에서 시므온은 칼을 들기 전에 말로 적을 속였습니다. 유딧 역시 자신의 입술이 적을 속이는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딧은 아무 과거 이야기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사용하려는 수단과 닮은 사건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시므온은 여동생에게 가해진 폭력에 복수하지만, 유딧은 자기 민족과 성소를 위협하는 군대를 막으려 합니다.

그리고 4절 끝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하나님, 저의 하나님, 과부인 제 말도 들어 주십시오.」

시므온의 칼에서 과부의 기도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유딧은 조상들이 도움을 요청했던 하나님께 이제 자기 말도 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과거의 이야기는 여기서 현재의 기도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의 표현과 본문 전승에는 번역상 어려움이 있지만, 본디새김이 따르는 본문에서는 여인의 신체를 침해한 일이 거듭 강조됩니다. 특히 「당신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셨는데도」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두고 직접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창세기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디나에게 가해진 폭력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유딧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도 하나님 앞에 있다

유딧기 9:5–6 본문 →

유딧은 이제 과거의 한 사건에서 하나님의 통치 전체로 시야를 넓힙니다.

「당신께서는 그 일들보다 앞선 일들을 행하셨고, 그 일들과 그 뒤의 일들과 지금의 일들과 다가올 일들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에 두신 일들은 이루어졌고,」유딧기 9:5 · 본디새김

유딧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일들보다 앞선 일들, 그 뒤의 일들, 현재의 일들, 앞으로 올 일들까지 하나님의 계획 안에 놓습니다.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나타나 『보십시오,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길은 마련되어 있고, 당신께서는 미리 아시고 판결하시기 때문입니다.」유딧기 9:6 · 본디새김

마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그분 앞에 나타나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 모습입니다. 유딧은 자신의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베툴리아가 구원받을지, 자기 계획이 성공할지도 아직 결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미래가 인간에게 보이는 것처럼 불확실하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계획처럼 뜻밖의 사건 때문에 좌절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46:9–10에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 일을 알리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겠다고 선언하시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녀는 조금 뒤에 「제가 계획한 일을 이룰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9:9). 5–6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나오고, 9절에는 유딧이 계획한 일이 나옵니다.

두 계획이 나란히 놓이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딧의 계획이 곧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주셨다는 계시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유딧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아시고 다스리신다는 믿음 안에서 자기 계획을 실행할 힘을 구합니다.

이 고백은 곧바로 아시리아 군대에 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유딧은 이제 하나님의 시선 앞에 그들의 막강한 힘을 내놓습니다.

전쟁을 부수시는 하나님 — 아시리아의 힘은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

유딧기 9:7–8 본문 →

「보십시오, 아시리아 사람들은 군대의 수가 불어나, 말과 기병을 믿고 교만해졌으며, 보병들의 팔 힘을 뽐냈습니다. 그들은 방패와 투창과 활과 물매를 믿었고, 당신께서 전쟁들을 부수시는 주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유딧기 9:7 · 본디새김

유딧은 적군의 군사력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그 힘을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그러나 나열의 끝에서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와 병력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을 넘어서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홍해의 노래가 유딧의 기도 속에 다시 들린다

유딧기 9:7–8은 이 칠십인역의 표현과 ‘주는 당신의 이름입니다’라는 뒤따르는 구절을 거의 그대로 가져옵니다. 이는 단순히 비슷한 주제가 아니라 분명한 언어적 연결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뒤 부른 노래입니다. 이집트의 말과 병거와 군대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유딧은 이제 아시리아의 말과 기병을 바라보면서 바로 그 노래의 언어로 기도합니다.

옛날에는 파라오의 군대였고 지금은 아시리아의 군대입니다. 두 군대 모두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군대의 규모에 종속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전쟁들을 부수신다’는 표현을 전쟁 자체를 언제나 평화적으로 중단시키신다는 의미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이집트 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유딧 역시 지금 적군의 힘을 꺾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기 15:2의 칠십인역에서 하나님이 ‘돕는 분’과 ‘감싸 지키는 분’으로 묘사되신다는 점입니다. 유딧은 11절에서 하나님을 낮은 이들을 돕고 버림받은 이들을 감싸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단지 홍해의 전쟁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찬양받았던 하나님의 성품까지 자신의 기도 안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적군이 겨누는 것은 성소다

「주는 당신의 이름입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의 힘을 내리치시고, 당신의 격분으로 그들의 힘을 꺾어 주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성소를 더럽히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쉬는 장막을 더럽히고, 쇠로 당신 제단의 뿔을 무너뜨리기로 꾀했기 때문입니다.」유딧기 9:8 · 본디새김

제단의 뿔은 제단의 네 모퉁이에 돌출된 부분입니다. 출애굽기 27:2에서 하나님께서는 번제단을 만들 때 네 모퉁이에 뿔을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제단의 뿔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의 일부를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거룩한 예배 장소를 공격하는 행위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쉬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성소에 머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8:27에서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조차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성전을 향해 기도합니다(열왕기상 8:29).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지만, 이스라엘의 성소는 그분의 이름과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시리아가 성소를 파괴하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만을 위협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격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는 그 거대한 군대를 무너뜨릴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그 방법은 더욱 뜻밖입니다.

칼이 아니라 입술로 — 유딧이 구하는 힘

유딧기 9:9–11 본문 →

「그들의 교만을 보십시오. 그들의 머리 위로 당신의 분노를 보내십시오. 제가 계획한 일을 이룰 힘을 과부인 제 손에 주십시오.」유딧기 9:9 · 본디새김

2절에서 하나님은 시므온의 손에 큰 칼을 주셨습니다. 9절에서 유딧은 자신의 손에 힘을 달라고 구합니다.

시므온의 손에는 칼이 있었고, 유딧의 손에는 아직 계획만 있습니다.

유딧이 과부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슬픔의 표현이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과부는 특별한 보호와 정의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출애굽기 22:22–24와 신명기 10:18은 과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만 유딧의 경우에는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녀는 재산과 종들을 소유한 여인입니다(8:7). 따라서 모든 경제적 자원을 잃은 빈곤한 과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력자도, 도시의 공식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적군의 군사력에 맞설 제도적 권력이 없습니다.

유딧은 바로 이 위치에서 하나님께 힘을 구합니다.

속임을 기도의 수단으로 내놓다

「속임을 말하는 제 입술로 노예를 우두머리와 함께 치시고, 우두머리를 그의 시종과 함께 치십시오. 여자의 손으로 그들의 높은 기세를 부수십시오.」유딧기 9:10 · 본디새김

3절에는 지도자들과 종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절에서는 유딧이 우두머리와 그를 섬기는 사람들을 함께 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반복은 과거 시므온의 행동과 유딧의 계획을 더욱 가까이 연결합니다. 그녀는 조상에게 일어났다고 믿는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다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속임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언제나 정당화된다는 원칙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유딧은 자기 계획의 도덕적 성격을 자세히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속임을 사용하겠다고 밝히고 하나님께 그것을 통해 적들을 무너뜨려 달라고 구합니다. 기도 속의 요청과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군대를 가진 자들은 말과 병거와 활을 의지합니다. 유딧에게 있는 것은 말할 수 있는 입술과 행동할 수 있는 손입니다.

그녀는 그 작은 수단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하나님이신가

「당신의 힘은 많은 수에 달려 있지 않고, 당신의 권세는 힘센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당신께서는 낮은 이들의 하나님이시고, 작은 이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며, 약한 이들을 붙드시는 분, 버림받은 이들을 감싸시는 분, 희망을 잃은 이들의 구원자이십니다.」유딧기 9:11 · 본디새김

‘많은 수’와 ‘힘센 이들’은 7절에 등장했던 아시리아의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나열됩니다.

낮은 이들, 작은 이들, 약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희망을 잃은 이들.

이것은 단순한 동정의 대상 목록이 아닙니다. 유딧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사무엘상 2:4–8에서 한나는 힘센 자들의 활이 꺾이고, 약한 자들이 힘으로 무장하며, 가난한 이들이 낮은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합니다. 한나의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강한 사람이 약해지고 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단순한 역할 교환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의 높고 낮음을 뒤집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딧의 기도도 같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특히 유딧은 ‘버림받은 이들을 감싸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표현은 출애굽기 15장의 구원 언어와 연결됩니다.

그분은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싸시기 위해 군대의 힘을 꺾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유딧은 과부입니다. 베툴리아는 강대한 군대 앞에서 희망을 잃어 가는 작은 도시입니다. 둘 다 아시리아가 자랑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숨겨진 강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강함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딧이 자신의 손에 힘을 달라고 구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드보라의 노래에는 여인 야엘의 손으로 적장이 쓰러진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사기 4:17–22; 5:24–27). 이 본문들이 말하는 구원의 방식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이 예상하는 권력과 힘의 질서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 기도의 마지막 간구

유딧기 9:12–14 본문 →

기도가 끝을 향하면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들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조상의 하나님, 상속 재산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여, 물들을 지으신 분이시여,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것의 왕이시여, 당신께서 제 간구를 들어 주시고,」유딧기 9:12 · 본디새김

유딧의 기도는 한 사람의 조상인 시므온의 하나님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하늘과 땅의 주인, 모든 피조물의 왕이신 하나님으로 넓어집니다.

베툴리아가 겪는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물 부족입니다. 아시리아 군대가 물 공급을 차단하면서 주민들은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사람들이 물을 얻는 길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물을 통제함으로써 도시를 굴복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통제하려는 물 자체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유딧이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시리아는 강대한 제국을 세우고 여러 민족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딧은 바로 이 구별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말이 무기가 되고, 구원이 하나님을 알게 한다

「제 말과 속임이 그들에게 상처와 멍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언약과 거룩하게 된 당신의 집과 시온의 꼭대기와 당신의 아들들이 차지한 집을 거슬러 모진 일을 꾀했습니다.」유딧기 9:13 · 본디새김

보통 상처는 칼이나 창으로 입힙니다. 그러나 유딧은 자신의 말이 적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잘해서 적군의 생각을 바꾸겠다는 계획이 아닙니다. 상대를 속여 실제로 타격을 입히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일을 계획하십니다(9:5–6). 유딧도 행동을 계획했습니다(9:9). 아시리아 역시 하나님의 언약과 성소를 거슬러 모진 일을 계획했습니다(9:13).

그런데 이 세 계획은 같은 권위를 지니지 않습니다.

아시리아의 계획은 하나님의 언약과 성소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유딧의 계획은 그 위협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딧은 그 모든 일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맡깁니다.

「당신의 온 민족과 모든 지파가 깨닫게 하시어, 당신께서 모든 능력과 힘의 하나님이시며, 당신 말고는 이스라엘 겨레를 감싸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유딧기 9:14 · 본디새김

아시리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전쟁들을 부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유딧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하나님만이 자신들을 감싸 지키시는 분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적군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알게 되어야 합니다.

그 사이에 유딧의 기도가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앎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과 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 말고는 자기 백성을 궁극적으로 지킬 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유딧은 자신의 행동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과부의 기도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유딧기 9:1–14 본문 →

그녀의 기도는 자기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한 단순한 확신의 선언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역사에 대한 특정한 해석과 자신이 사용하려는 수단에 대한 대담한 요청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독자는 이 긴장을 남겨 둔 채 유딧이 믿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아직 적군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베툴리아에는 여전히 물이 부족하고, 유딧은 성문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직접 대답하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한 장면이 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저녁 향이 오르고 있습니다. 멀리 베툴리아에서는 과부 한 사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습니다.

그녀는 아시리아의 칼과 창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없는 힘을 자랑하는 대신, 낮은 이들을 도우시고 약한 이들을 붙드시는 하나님께 자기 손을 내어 놓습니다.

아직 그 손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손이 무엇을 하게 될지는, 기도가 끝난 뒤에야 드러날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