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비와 응답을 기다리는 백성
예레미야 14장은 메마른 땅에서 시작합니다.
귀족들이 사람을 보내 물을 구하지만, 그들은 빈 그릇을 들고 돌아옵니다. 농부들은 갈라진 흙 앞에서 머리를 덮습니다. 들판의 암사슴은 먹을 것이 없어 새끼를 버리고, 들나귀는 숨을 헐떡이며 바람을 들이마십니다.
물이 사라지자 사람과 동물의 삶이 함께 무너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여호와야훼만이 자신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를 금지하십니다. 금식해도 듣지 않겠고, 제물을 바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호한 심판 선언 뒤에 백성의 파괴를 슬퍼하는 눈물이 이어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시면서도 백성의 고통을 슬퍼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백성은 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들은 뒤에도 다시 기도합니까?
예레미야 14장은 이 긴장을 서둘러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뭄의 참상과 두 차례의 간구, 두 차례의 하나님의 응답, 그리고 눈물의 장면을 통해 그 긴장을 깊게 만듭니다.
물을 찾아 나섰지만 빈 그릇을 들고 돌아오다
본문은 가뭄에 관한 여호와야훼의 말이 예레미야에게 왔다고 밝힙니다.
유다는 슬퍼했다. 그 성문들은 쇠약해졌고, 땅에 내려앉아 어두워졌다.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올라갔다.예레미야 14:2 · 본디새김
고대 성읍에서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일 뿐 아니라 거래와 재판, 공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성문이 사람처럼 힘을 잃고 땅에 내려앉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평소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가득했던 도시의 중심부까지 침체되었다는 사실을 의인화하여 보여 줍니다.
도시 전체가 애도하는 사람처럼 변한 것입니다.
그들의 귀족들은 자기 아랫사람들을 물을 구하러 보냈다. 그들은 물웅덩이에 갔으나 물을 찾지 못했다. 빈 그릇을 들고 돌아와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당하며 머리를 덮었다.예레미야 14:3 · 본디새김
평소라면 귀족들은 자신의 지위와 사람들을 동원하여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뭄 앞에서는 그들의 권력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을 보낼 수는 있지만, 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물웅덩이는 비가 내려 고인 물을 이용하는 장소나 저수 시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유다 지역에서는 강수량에 따라 저장한 물이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찾아간 곳마다 물이 없습니다.
그릇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릇을 가지고 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장소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준비할 수 있는 수단과 인간이 실제로 확보할 수 있는 생명의 자원이 서로 분리된 것입니다.
머리를 덮는 행위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슬픔과 수치, 깊은 고통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등장합니다(사무엘하 15:30; 에스더 6:12). 그런데 4절에서는 농부들도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땅에 비가 오지 않아 흙이 갈라져 버렸으므로, 농부들은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덮었다.예레미야 14:4 · 본디새김
두 집단은 하는 일이 다르지만 같은 한계에 도달합니다. 귀족들의 아랫사람들은 물을 구할 수 없고, 농부들은 땅에서 작물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노동과 기술도 비가 내리지 않는 현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선은 인간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들판의 암사슴조차 새끼를 낳고 버렸다. 풀이 없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4:5 · 본디새김
생명이 탄생했지만, 그 생명을 돌볼 조건이 사라졌습니다.
들나귀들은 민둥 언덕에 서서 자칼처럼 헐떡이며 바람을 들이마셨다. 풀이 없어 그 눈들이 흐려졌다.예레미야 14:6 · 본디새김
들나귀가 바람을 들이마시는 모습은 생존을 위해 애쓰는 몸의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들이마시는 공기는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비는 여호와야훼가 주시는 생명의 선물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11:13–17에서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신명기 28:23–24에서도 언약을 거부한 백성이 겪을 재앙 가운데 하늘과 땅의 메마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14장의 가뭄은 단순한 기상 현상의 묘사에 머물지 않고 언약의 심판이라는 배경 속에서 읽힙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의 모든 가뭄이나 자연재해가 특정한 사람들의 죄 때문에 발생한다는 일반 원칙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예언자를 통해 특정한 유다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을 찾지 못하자 이제 하나님께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 땅의 길손 같으십니까?」 — 첫 번째 기도
7절에서는 기도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저희 죄악이 저희를 거슬러 증언하더라도, 여호와야훼여, 당신의 이름을 위해 행동해 주십시오. 저희의 배반이 많고,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4:7 · 본디새김
이것은 재판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피고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하나님께 행동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의 근거는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 행동해 주십시오」라는 간구는 시편 25:11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가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위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누구신지, 그분이 자신의 백성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지를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라는 사실에 기대어 간구합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여, 고난의 때에 그를 구하는 분이여, 왜 당신은 이 땅의 거류민 같으시며, 하룻밤 묵으려고 들른 길손 같으십니까?」예레미야 14:8 · 본디새김
거류민은 그 땅에 살지만 완전한 토착 구성원과는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길손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가 자신들 가운데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성막과 성전의 전통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9:45–46; 열왕기상 8:12–13).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만, 지금 그분의 행동은 마치 자신들과 별 관계가 없는 방문객처럼 느껴진다고 호소합니다.
9절에서는 비유가 더욱 강해집니다.
「왜 당신은 당황한 사람 같으시며, 구할 능력이 없는 용사 같으십니까? 여호와야훼여, 당신은 저희 가운데 계시고, 당신의 이름이 저희 위에 불려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예레미야 14:9 · 본디새김
백성은 하나님이 정말 무능하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현재 경험하는 현실 사이의 간격을 질문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탄식은 시편에서도 발견됩니다. 시편 44:23–26은 고난 가운데 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깨어나셔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합니다. 성경의 탄식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 경험하는 현실을 그분께 이해할 수 없다고 묻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현실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계시다는 고백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라는 사실이,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왔다는 사실까지 보장합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여호와야훼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길손이 아니라, 백성이 떠돌기를 좋아했다
10절은 앞의 기도에 대한 날카로운 반전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이 백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토록 떠돌기를 좋아하여 자기 발을 억제하지 않았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할 것이다.」예레미야 14:10 · 본디새김
백성은 하나님의 머무르심을 문제 삼았지만, 하나님은 백성 자신의 발걸음을 문제 삼으십니다.
예레미야 2:23–25에서도 유다는 다른 신들을 좇아 달리는 동물에 비유됩니다. 멈추지 않고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언약적 불성실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14:10의 「떠돌기」는 단순히 여행하거나 거주지를 옮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멀어져 다른 신들을 따르는 삶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응답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이 백성이 잘되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예레미야 14:1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기도 자체가 무의미하다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원칙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말씀을 전하고 간구하는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와야훼는 그가 백성의 번영을 위해 중보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언자가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해서 백성이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불순종의 결과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금식해도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겠다. 번제와 곡식 제물을 올려도 나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오히려 내가 칼과 굶주림과 역병으로 그들을 멸망시키겠다.」예레미야 14:12 · 본디새김
금식은 슬픔과 회개, 하나님을 향한 간구를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번제와 곡식 제물도 이스라엘의 예배에 속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런 행동 자체가 심판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거부되는 것은 단순히 종교 의식이라는 형식이 아닙니다. 그 형식이 실제적인 언약의 순종을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 점은 이사야 1:11–17이나 아모스 5:21–24에서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불의한 삶을 계속할 때 그들의 제사를 거부하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14장은 더욱 어려운 문제를 남깁니다.
백성은 앞에서 분명히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마지막 기도에서도 다시 죄를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백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입니까?
본문은 모든 기도자의 내면이 진실하지 않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여호와야훼가 지적하시는 것은 백성이 오랫동안 선택해 온 삶의 방향입니다. 죄를 인정하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는 일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이 왜 자신들의 미래를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평안을 약속한 예언자들이 오히려 재앙을 키웠다
13절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께 항의하듯 말합니다.
내가 말했다. 「아, 주 여호와야훼여. 보십시오,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너희는 칼을 보지 않을 것이고, 너희에게 굶주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안을 주겠다.』라고 말합니다.」예레미야 14:13 · 본디새김
백성이 하나님의 경고를 거부하는 데에는 거짓 예언자들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12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칼과 굶주림과 역병으로 백성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들은 칼과 굶주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백성을 향해 정반대의 미래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워 평안을 약속합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미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부정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예언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고,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거짓 환상과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수를 너희에게 예언하고 있다.」예레미야 14:14 · 본디새김
예언자의 권위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을 전하는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지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를 보내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신지가 결정적입니다.
예레미야 1:7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자신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고 자신이 명령하시는 모든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자신의 판단과 희망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께 받은 말이 아닌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말은 백성이 처한 실제 위험을 가리게 합니다. 가뭄으로 땅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평안을 약속합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기를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된 희망은 위험이 없다고 말하는 데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위험을 직면하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을 찾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예언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으로 예언하며, 『이 땅에 칼과 굶주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예언자들은 칼과 굶주림으로 끝장날 것이다.」예레미야 14:15 · 본디새김
그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재앙이 그들에게 닥칩니다.
16절에서는 그들의 말을 들었던 백성도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아들들과 딸들이 칼과 굶주림으로 죽고, 묻어 줄 사람조차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아내들과 자녀들의 죽음까지 등장한다는 사실은 재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보여 줍니다. 본문은 그 가족 구성원 각각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두 똑같은 수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 추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공동체가 현실을 잘못 판단하도록 만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자는 자신이 전한 말에 책임을 집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 역시 자신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누구의 말을 신뢰해 왔는지에 대한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 말을 전해라. 『내 눈에서 밤낮으로 눈물이 흘러 그치지 않기를. 내 백성의 처녀 딸이 크게 부서지고, 몹시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4:17 · 본디새김
본디새김의 구성을 따르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시기를 바라시는 장면이 됩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파괴되는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처녀 딸」은 도시나 민족을 젊은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예언서의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유다가 크게 상처받고 부서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들의 무죄가 아닙니다. 심각한 상처를 입고 무너지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 할 백성이지만, 동시에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슬퍼하시기 때문에 심판을 취소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심판을 선언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무런 마음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이, 그 심판으로 상처 입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까지 없애지는 않습니다.
「『내가 들로 나가면, 보아라, 칼에 찔려 죽은 이들이다. 성읍에 들어가면, 보아라,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들이다. 참으로 예언자도 제사장도 알지 못하는 땅으로 떠돌아갔다.』」예레미야 14:18 · 본디새김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성벽 안으로 피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읍 안에도 안전은 없습니다. 바깥에서는 칼이 사람을 죽이고, 안에서는 굶주림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듭니다.
칼과 굶주림은 추상적인 심판의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고, 병들고, 도시가 무너지는 현실입니다.
문맥 전체에서 분명한 것은 예언자와 제사장조차 이 재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거짓 예언자들은 평안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이 전했던 말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격이 더는 감추어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이므로, 「내 눈」을 예레미야 자신의 눈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9:1에서도 예언자는 죽임당한 백성을 위해 밤낮으로 울고 싶다고 말합니다. 반면 본디새김처럼 「너는 그들에게 이 말을 전해라」 다음의 말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발언으로 읽으면, 이 눈물은 여호와야훼 자신의 눈물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인용의 경계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두 읽기가 가능합니다. 18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다소 난해합니다. 본디새김은 예언자와 제사장이 알지 못하는 땅으로 떠돌아가는 모습으로 읽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백성을 인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낯선 땅으로 내몰리는 장면이 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이들이 자기 땅에서 계속 활동하거나 돌아다니면서도 실제 상황을 깨닫지 못한다고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사용된 동사의 의미와 뒤따르는 「알지 못한다」의 연결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만으로 그들이 이미 유배되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의 언약을 깨뜨리지 마십시오」 — 두 번째 기도
19절에서는 다시 여호와야훼를 향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당신은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당신의 마음이 시온을 역겨워합니까? 왜 저희를 치셨으며, 저희에게는 치유가 없습니까? 저희가 평안을 기다려도 좋은 일은 없고, 치유의 때를 기다려도, 보십시오, 공포뿐입니다.」예레미야 14:19 · 본디새김
기도는 하나님께 다가오는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을 가능성을 두려워합니다.
13절에서 거짓 예언자들은 확실한 평안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평안을 기다렸지만 좋은 일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미래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앞의 17절에서는 백성이 크게 부서지고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기도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치유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여, 저희는 저희의 악과 저희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4:20 · 본디새김
첫 번째 기도에서도 백성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상들의 죄악까지 함께 고백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위기를 개인이나 한 세대의 일시적인 실수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조상들의 죄악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7:25–26; 11:9–10). 따라서 조상들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모든 책임을 과거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이 현재의 공동체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 저희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와 맺은 당신의 언약을 깨뜨리지 마십시오.」예레미야 14:21 · 본디새김
여기서 「영광스러운 왕좌」는 여호와야훼의 왕권이 드러나는 장소를 가리키며, 예루살렘과 성전의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3:17에서는 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의 왕좌라고 불릴 것이라는 약속도 등장합니다.
앞선 예레미야 11:10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미 자신의 언약을 깨뜨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언약을 깨뜨린 쪽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이 하나님께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대담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약에 충실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언약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맺으신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대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음 장에서 이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호소하는 말이 언제나 즉각적인 구원을 보장한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기도의 목소리를 누구의 것으로 이해할지는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백성을 대표하여 드리는 기도로 볼 수도 있고, 공동체의 탄식을 예언자가 전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릴 수 있습니까?
마지막 절은 14장의 시작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민족들의 헛된 것들 가운데 비를 내리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하늘이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여,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저희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4:22 · 본디새김
여기서 「민족들의 헛된 것들」은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기대어 얻으려 했던 풍요를 실제로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답이 여호와야훼라고 고백합니다.
「하늘이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이 말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자연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신학적 관점에서 하늘 자체가 하나님과 독립하여 생명에 필요한 비를 결정하고 공급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지만, 그 하늘조차 여호와야훼께서 만드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장 비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다른 신들도, 하늘 자체도, 자신들의 노력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다림을 곧바로 완전한 회개나 확실한 구원의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비를 내리실 수 있는 분이 여호와야훼뿐이라고 고백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보일지는 이 장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다려야 하는 분은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능력만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그들의 삶을 판단하시고, 거짓된 평안의 약속을 거부하시며, 죄에서 돌이키도록 부르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기다린다는 고백이 참되려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가나안 종교에서 바알은 폭풍과 비, 땅의 풍요와 관련된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다는 성경의 기록은 이러한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18장에서도 엘리야 시대의 가뭄과 비가 다시 내리는 사건은 바알 숭배와 여호와야훼의 권능을 둘러싼 대결 속에서 전개됩니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지만, 그 하늘조차 여호와야훼께서 만드셨다는 고백은 예레미야 5:2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는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추수의 계절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하나님의 눈물 사이에서
그들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지만 자신의 백성을 향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 두 현실 사이에서 기도가 계속됩니다.
그들은 갈라진 땅 위에 서 있습니다.
빈 그릇은 여전히 비어 있고, 들판에는 풀이 없습니다. 헛된 평안의 약속은 무너졌으며, 기도에 대한 응답도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다른 곳으로 물을 구하러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비를 내리실 수 있는 분을 알고 있지만 아직 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메마른 땅에서 그분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지 않은 자리에서, 백성의 마지막 말은 기다림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