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하나님께 가까웠던 백성이 멀어지기까지

예레미야 13장은 뜻밖에도 허리띠 하나를 사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유다의 멸망을 보여 주는 단순한 상징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은 허리띠가 망가졌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먼저 그 허리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3장의 비극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 멸망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도록 부름받은 백성이 그 관계를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이 장에는 허리띠 외에도 여러 물건이 등장합니다. 포도주로 가득 찬 항아리는 서로 부딪쳐 깨지고, 왕의 머리에 있던 왕관은 떨어지며, 마지막에는 옷자락이 들춰져 숨겨진 치욕이 드러납니다.

몸에 두르고, 무언가를 담고, 머리에 쓰고, 몸을 가리는 물건들이 차례로 제 기능을 잃습니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심판을 보여 주지만, 모두 유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을 잃어 가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반복되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613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은 왜 허리띠를 유프라테스에 숨기게 하셨는가?

예레미야 13:1–11 본문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마포 허리띠를 구입하고 허리에 두릅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네가 쓸 아마포 허리띠를 사서 허리에 둘러라. 그것을 물에 넣지는 마라.」예레미야 13:1 · 본디새김

확실한 것은 예레미야가 허리띠를 자기 허리에 두른 다음,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따라 그것을 벗어 바위틈에 숨긴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유프라테스로 가서, 허리띠를 숨겨 둔 곳을 파고 그것을 꺼냈다. 보니 허리띠가 망가져 아무 쓸모도 없었다.예레미야 13:7 · 본디새김

여기서 「아무 쓸모도 없었다」는 표현은 10절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내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의 고집대로 걸으며,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엎드리려고 그 뒤를 따라간 이 악한 백성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이 허리띠처럼 될 것이다.」예레미야 13:10 · 본디새김

그렇다면 유다는 본래부터 쓸모없는 백성이었을까요? 11절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허리띠가 사람의 허리에 달라붙듯이, 나는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을 내게 달라붙게 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게 백성이 되고 명성과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 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예레미야 13:11 · 본디새김

허리띠는 사람의 몸에 밀착하는 물건입니다. 몸에서 멀리 떨어져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에 두르고, 몸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 물건의 의미는 주인에게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느냐와 관련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자신의 명성과 찬양과 영광이 드러나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6:18–19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특별한 백성이 되고, 찬양과 명성과 영광에 관련된 백성으로 높여질 것이라는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관계의 목적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우연히 길을 잃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집을 따라 걷는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이 자신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언약적 불순종 때문에 그들을 망가진 허리띠에 비유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망가뜨리겠다.」예레미야 13:9 · 본디새김

여기서 교만은 자기 능력에 대한 단순한 자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그 하나님을 듣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라 사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받은 영광을 자기들에게 본래부터 속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그 본래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의 교만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잊어버린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것을 물에 넣지는 마라」라는 명령에 대해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허리띠를 씻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한 것일 수도 있고, 이후 손상되는 과정과 관련된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망가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장에서 유프라테스라는 지명이 실제로 어디를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프라트는 일반적으로 유프라테스강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8:23에는 유다 가까운 베냐민 지역의 바라인 파라라는 지명도 나옵니다. 두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가까운 장소를 가리킨다는 이해도 가능성으로 제기됩니다. 유프라테스로 읽으면, 예레미야가 매우 먼 곳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됩니다. 이 경우 실제로 여러 차례 긴 여행을 수행했는지, 아니면 상징적인 계시의 형식으로 전달된 이야기인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본문은 이동의 거리나 방법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문제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포도주로 가득 찬 항아리가 왜 재앙의 상징이 되는가?

예레미야 13:12–14 본문 →

허리띠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새로운 비유가 등장합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 말을 전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모든 항아리는 포도주로 채워진다.』 그러면 그들은 네게 『모든 항아리가 포도주로 채워진다는 것을 우리가 어찌 모르겠소?』라고 말할 것이다.」예레미야 13:12 · 본디새김

이 대답에는 예언자의 말이 새로울 것이 없다는 반응이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를 담는 항아리가 포도주로 채워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야 합니까?

「그러면 너는 그들에게 말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을 이어 그의 왕좌에 앉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취기로 가득 채우겠다.』」예레미야 13:13 · 본디새김

그들이 너무나 잘 안다고 여긴 말이 자신들을 향한 심판의 선언이 됩니다.

그릇이 가득 찬다는 것은 대개 풍요나 만족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삶이 좋은 것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취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취한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부딪치기 쉽습니다. 14절에서는 그 결과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그들을 서로 부딪쳐 산산이 깨뜨리겠다. 아버지들과 아들들을 함께 그렇게 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나는 그들을 아끼지도, 가엾게 여기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멸망시키겠다.』」예레미야 13:14 · 본디새김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까지 파괴의 범위에 들어갑니다. 백성을 이끌고 보호하며 가르쳐야 할 이들이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왕의 권위도, 제사장의 지위도, 예언자의 직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삶을 정당화해 주지 못합니다.

14절의 세 번의 부정은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긍휼이 전혀 없다는 일반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같은 예레미야서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31:20; 33:6–9).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교만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더는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3:12의 히브리어 네벨은 포도주를 담는 통이나 용기를 가리킵니다. 가죽으로 만든 통으로도, 항아리 같은 용기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14절에서 서로 부딪쳐 깨지는 장면과 연결하여 항아리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들과 아들들을 함께 그렇게 하겠다」라는 표현이 모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실제로 싸움이 벌어진다는 예언인지, 세대 전체가 함께 파괴된다는 비유인지는 세부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내부의 결속과 안전이 무너지는 심판을 묘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예레미야 13:15–17 본문 →

앞의 두 비유는 파괴적인 심판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이르면 예레미야는 다시 백성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교만해지지 마라. 여호와야훼가 말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3:15 · 본디새김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보다 자기들의 고집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들어라」라는 요청과 「교만해지지 마라」라는 명령이 함께 나옵니다.

예레미야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조용히 앉아 설교를 듣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길을 그 말씀 앞에서 다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둠을 내리기 전에, 너희 발이 황혼의 산들에서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영광을 돌려라. 너희가 빛을 기다려도 그는 그것을 죽음의 그늘로 바꾸고 짙은 먹구름으로 만들 것이다.」예레미야 13:16 · 본디새김

여기에는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을 때에는 발밑의 길을 살피며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길에 어둠이 내리면 어디에 돌이 있는지, 어느 곳이 위험한지 알아보기 어려워집니다.

「영광을 돌려라」라는 말은 이 문맥에서 예배의 표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분이 옳으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교만한 길에서 돌이키라는 요청과 연결됩니다.

이 점은 여호수아 7:19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요구할 때, 그것은 단순히 찬양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진실하게 드러내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백성은 어둠이 찾아와도 결국 빛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기대를 뒤집으십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요청이 주어졌습니다. 아직 들을 수 있을 때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청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뜻밖에도 예언자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영혼은 그 교만 때문에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다. 내 눈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양 떼가 사로잡혔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3:17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는 그 심판을 생각하며 웁니다.

「여호와야훼의 양 떼가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닥칠 포로 생활을 이미 눈앞의 현실처럼 바라보게 합니다. 아직 백성에게 경고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이 그 경고를 듣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닥칠지 알기에 슬퍼합니다.

예레미야는 심판을 말하는 사람이지만, 심판을 기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백성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정당함을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자신은 홀로 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진지하게 전하는 일과 심판받을 사람들의 고통을 슬퍼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물로 바라보던 포로 생활의 장면이 곧바로 구체화됩니다.

조금 더 깊이

문맥상 여기의 일인칭 화자는 예레미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에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가, 그들이 듣지 않을 경우 자신이 울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관이 떨어지고, 맡겨진 양 떼가 사라진다

예레미야 13:18–21 본문 →

18절에서는 말씀의 대상이 왕과 왕의 어머니로 좁혀집니다.

「왕과 왕의 어머니에게 말해라. 『낮은 자리에 앉아라. 너희 머리에서 너희의 영화로운 왕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3:18 · 본디새김

왕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의 머리에 놓인 왕관은 권위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스스로 낮아지기 전에 그들을 높여 주던 지위 자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 장면은 9절에서 여호와야훼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망가뜨리겠다고 선언하신 말씀을 왕실의 자리에서 보여 줍니다.

19절에서는 왕실의 몰락이 나라 전체의 유배로 확대됩니다.

「『네게브의 성읍들이 닫혔고, 열어 줄 사람이 없다. 유다 전체가 유배되어 갔다. 모조리 유배되어 갔다.』」예레미야 13:19 · 본디새김

네게브는 유다 남부의 건조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곧이어 20절에서는 북쪽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고 합니다. 남쪽의 성읍들은 닫혀 있고, 북쪽에서는 적대적인 세력이 다가옵니다.

이 지리적 대조는 유다가 처한 위기를 넓게 보여 줍니다.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재앙입니다.

「너희는 눈을 들어 북쪽에서 오는 자들을 보아라. 네게 주어진 양 떼, 네 자랑이던 그 양 떼는 어디 있느냐?」예레미야 13:20 · 본디새김

앞서 17절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의 양 떼」가 사로잡힌 것 때문에 울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네게 주어진 양 떼」라고 부릅니다. 양 떼가 여호와야훼께 속해 있다는 사실과, 그 양 떼를 누군가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이 함께 드러납니다.

백성은 마음대로 다룰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돌보고 책임져야 할 양 떼였습니다.

이 질문은 지도자의 실패를 단지 개인적인 권력 상실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졌던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21절에서는 다시 한 번 관계가 뒤집힙니다.

「네가 몸소 친한 벗이 되도록 길들인 그들을 그가 네 위에 우두머리로 세울 때,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이 낳는 여인처럼 진통이 너를 움켜쥐지 않겠느냐?」예레미야 13:21 · 본디새김

이것은 주변 강대국들과 맺었던 정치적 관계가 오히려 유다의 지배와 굴욕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옵니다.

그들이 자랑하고 의지하던 것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유다 왕국에서 왕의 어머니는 궁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5:13에서는 아사가 마아가를 왕의 어머니로서 차지하던 지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만 본문은 왕과 왕의 어머니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 느후스다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정황이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들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조리 유배되어 갔다」라는 표현은 심판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유다 주민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는 정확한 인구 보고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왕기하 25:12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일부 주민들이 땅에 남았다고 전합니다. 21절은 히브리어의 문장 연결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누가 누구를 우두머리로 세우는지, 과거에 가까운 벗으로 길들인 이들과 어떤 관계인지에 관해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이 구절을 유다가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길들였던 이들이 오히려 유다 위의 지배자가 되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다만 본문은 특정한 동맹과 그 상대국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어떤 외교 사건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산의 진통은 갑자기 몸을 사로잡는 강렬한 고통의 이미지로 예언서에 자주 등장합니다(이사야 13:8; 예레미야 6:24).

감추었던 죄악이 드러나는 도시

예레미야 13:22–27 본문 →

22절부터는 예루살렘을 향한 말씀이 더욱 직접적이고 거칠어집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왜 이런 일들이 내게 닥쳤을까?』 하고 말한다면, 네 치맛자락이 들춰지고 네 발뒤꿈치가 유린당한 것은 네 죄악이 크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3:22 · 본디새김

옷자락이 들춰지고 신체가 유린당한다는 표현은 공개적인 수치와 굴욕을 나타냅니다. 전쟁과 정복의 상황에서 사람이 권력을 잃고 모욕당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몸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치욕으로 표현하는 고대 사회의 관념이 예언적 비유에 사용된 것입니다.

본문은 실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책임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특정한 공동체의 언약적 배신과 정치적 굴욕을 여성의 몸에 관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현실에서 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적용하여 그 고통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허리띠는 원래 몸에 밀착해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왕관은 머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을 가리던 옷자락마저 들춰집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자신을 드러내고 지탱해 주리라 여겼던 모든 것이 하나씩 무너집니다.

「쿠시 사람이 자기 피부를 바꿀 수 있겠느냐, 표범이 자기 반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다면야 악행에 길든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예레미야 13:23 · 본디새김

이 비유는 특정한 피부색이 악하거나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부색은 윤리적인 성품과 관계없는 자연적인 특징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뀌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던 특징을 끌어와 오래된 악행의 습관이 얼마나 깊게 자리 잡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악행에 길든」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악한 길을 걸으며 그 행동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악은 반복될수록 습관이 됩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선택했던 행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잘못으로 인식하기 어려워집니다.

교만은 단순한 생각이나 감정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된 행동이 되었고, 이제는 그들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광야의 바람에 날려 가는 지푸라기처럼 흩어 버리겠다.」예레미야 13:24 · 본디새김

처음의 허리띠는 몸에 단단히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은 바람에 흩날리는 지푸라기처럼 묘사됩니다.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던 존재가, 어디에도 붙어 있지 못한 채 흩어집니다.

「이것이 네 몫, 내가 네게 재어 준 몫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네가 나를 잊고 거짓을 믿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3:25 · 본디새김

사람은 무엇인가를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잊었지만 아무것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거짓된 신뢰가 차지했습니다.

다른 신들에게 기대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의지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이 결국 안전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것은 실제로 그들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네 치맛자락을 네 얼굴 위로 걷어 올렸다. 네 치욕이 드러날 것이다.」예레미야 13:26 · 본디새김

22절에서는 옷자락이 들춰지는 일이 심판의 결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 자신이 그 일을 행하시는 주체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감추어 왔던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나는 들판의 언덕 위에서 네 가증한 짓들, 곧 네 간음과 네 말 울음소리와 네 음행의 음란함을 보았다. 불행하여라, 예루살렘아. 너는 언제까지 더 깨끗해지지 않은 채 있겠느냐?」예레미야 13:27 · 본디새김

여기서 간음과 음행은 단순한 성적 일탈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여호와야훼와 맺은 언약을 배반한 행위를 성적 불성실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유다가 사람들 앞에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도 여호와야훼께는 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확정적인 멸망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곧바로 예루살렘의 회개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깨끗해질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질문은 도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더는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문장 자체의 반어는 매우 강합니다. 쿠시 사람이 자기 피부를 바꿀 수 없고 표범이 자기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악에 길든 유다가 스스로 선을 행하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조차 그들을 변화시키실 수 없다는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서의 더 넓은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자신의 가르침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31:33; 32:39–40). 13장 자체는 그 해결책을 펼쳐 보이지 않습니다. 들판의 언덕은 예언서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장소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레미야 2:20에서도 높은 언덕과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행한 음행이 등장합니다. 「말 울음소리」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5:8에서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웃의 아내를 향해 울부짖는 말을 닮았다고 묘사됩니다. 13:27의 표현 역시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불성실을 드러내는 이미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독특합니다.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진술이나 물음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고, 이어지는 「언제까지 더」라는 말의 연결도 매끄럽게 확정되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하나의 질문으로 묶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레미야 13:1–27 본문 →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신에게 달라붙게 하셨습니다. 그 관계의 목적은 단순히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그분의 명성과 찬양과 영광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지위를 자랑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는 그 관계의 목적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그 관계를 저버린 도시입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도시의 감추어진 행위를 모두 보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말씀을 마치면서도 여전히 질문하십니다. 「너는 언제까지 더 깨끗해지지 않은 채 있겠느냐?」 이 질문에 예루살렘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여기서 들려주지 않습니다.

한때 하나님께 밀착해 있던 허리띠는 망가졌고, 도시의 영광은 무너지려 하고 있습니다. 황혼의 산길에는 어둠이 다가옵니다.

그 가운데 예언자는 백성이 듣지 않을 것을 슬퍼하며 은밀한 곳에서 울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3장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도록 부름받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그들이 아직 듣지 않는 말씀과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을 남긴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