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예언자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5장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모세와 사무엘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지금 자신의 앞에 서더라도 유다를 향한 심판을 돌이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백성을 하나님의 앞에서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레미야 15장은 하나님께 버림받을 위기에 놓인 백성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자신마저 무너질 위기에 놓인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서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판결
앞 장에서 백성은 가뭄과 재앙 가운데 여호와야훼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14:11).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선다 해도, 내 마음은 이 백성에게 향하지 않는다. 그들을 내 앞에서 내보내라. 그들이 나가게 해라.」예레미야 15:1 · 본디새김
모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32:11–14에서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을 근거로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민수기 14:13–20에서도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을 때 모세는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고, 여호와야훼는 그의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 역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7:5–9에서는 백성을 위해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무엘상 12:23에서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는 일을 자신이 여호와야훼께 죄짓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죄를 지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섰던 중보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 앞에 물리적으로 위치한다는 뜻을 넘어, 그분을 섬기거나 그분께 간구하는 자리에 선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과거에 그 자리에서 백성을 위해 간구했다면, 지금 예레미야 역시 그 자리에 서서 백성의 처지를 아뢰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제 중보자의 간구로 심판이 유예되는 길을 닫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특권은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백성을 자신의 앞에서 내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네게 『우리는 어디로 나가야 합니까?』라고 말하면,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 넘겨질 자는 죽음으로, 칼에 넘겨질 자는 칼로, 굶주림에 넘겨질 자는 굶주림으로, 포로살이에 넘겨질 자는 포로살이로.』」예레미야 15:2 · 본디새김
백성은 「어디로 나가야 합니까?」라고 묻지만, 대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죽음과 전쟁, 굶주림과 포로살이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각 운명의 이름이 반복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죽음에 속한 자는 죽음으로」와 같은 형식입니다. 이 반복은 사람들에게 남겨진 운명의 냉혹함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 43:11에도 죽음과 포로살이와 칼을 열거하는 비슷한 선언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히 네 가지 사고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말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여러 모습을 보여 주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나는 그들을 칠 네 부류를 정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죽이도록 칼을, 끌고 가도록 개들을, 먹어 치우고 멸망시키도록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을 정하겠다.』」예레미야 15:3 · 본디새김
앞의 네 가지는 사람들이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이번의 네 가지는 심판을 집행하거나 그 결과를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개와 새와 짐승은 전쟁 이후 시신이 제대로 장사되지 못하는 참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시신이 들짐승과 새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잃는 것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존엄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신명기 28:26에서도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 가운데 시신이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은 그러한 언약의 저주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4절에 이르면 심판의 역사적인 이유가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나는 그들을 땅의 모든 왕국이 보고 떨 대상으로 만들겠다. 히스기야의 아들인 유다 왕 므낫세 때문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한 일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예레미야 15:4 · 본디새김
열왕기하 21:1–16에 따르면 그는 다른 신들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여호와야훼의 성전 안에 우상숭배와 관련된 시설을 두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열왕기하 23:26과 24:3–4도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므낫세 시대의 죄악과 연결합니다.
4절은 분명 므낫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을 심판의 중요한 역사적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이 장이 현재 백성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6–7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지금의 예루살렘이 자신을 버렸고, 백성이 여전히 자기들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므낫세의 악행은 단지 한 왕의 개인적인 일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우상숭배와 폭력이 유다 사회의 방향을 심각하게 무너뜨렸으며, 이후에도 백성은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33:12–16은 므낫세 자신이 고난 뒤에 겸손해져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반면 열왕기와 예레미야는 그의 통치가 유다에 남긴 파괴적인 결과를 강조합니다. 두 기록의 초점은 다르지만, 한 개인의 변화가 공동체에 남은 모든 결과를 자동으로 지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장에서 심판은 단 한 번의 실수에 대한 갑작스러운 처벌이 아니라, 역사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악과 계속되는 불순종에 대한 판결로 제시됩니다.
한낮에 해가 져 버린 어머니
5절부터는 심판의 모습이 더욱 가까운 인간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예루살렘아, 누가 너를 불쌍히 여기겠느냐? 누가 너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누가 발길을 돌려 네 안부를 묻겠느냐?』」예레미야 15:5 · 본디새김
마지막 질문은 일상적인 인간관계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겪을 때 발길을 돌려 그 사람에게 다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도시로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물리적인 파괴만이 아니라 관계의 상실까지 보여 줍니다. 도시가 무너지는 것뿐 아니라, 그 도시를 향해 돌아보는 사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버렸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너는 뒤로 물러간다. 그래서 내가 너를 향해 손을 뻗어 너를 멸망시켰다. 나는 마음을 돌이키는 데 지쳤다.』」예레미야 15:6 · 본디새김
여기서 「뒤로 물러간다」는 말은 단순히 무기력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뒤로 물러나며 그분을 떠나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물러나자, 하나님은 자신의 손을 그들을 향해 뻗어 심판하십니다.
「나는 마음을 돌이키는 데 지쳤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에너지가 고갈되셨다는 생리적인 진술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사람의 행동과 감정에 관한 표현을 사용해, 하나님이 더는 심판을 유예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강렬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돌이키다」는 앞서 결정된 재앙을 거두거나 실행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8:7–10에서는 하나님이 민족들의 반응에 따라 재앙을 거두시거나 심판을 내리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15:6에서는 백성의 반복적인 불순종 때문에 더는 심판을 거두는 일이 계속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그 땅의 성문들에서 쇠스랑으로 그들을 까불렀다. 내 백성이 자녀를 잃게 했고, 내 백성을 멸망시켰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예레미야 15:7 · 본디새김
곡식을 까부르는 일은 알곡과 쭉정이, 겨 등을 분리하는 작업입니다. 타작한 곡식을 바람에 날려 가벼운 겨를 흩어지게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됩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동작이 백성이 흩어지고 파괴되는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8–9절에서 본문은 추상적인 민족의 멸망을 떠나 한 어머니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내 앞에 그 백성의 과부들이 바다의 모래보다 많아졌다. 나는 그들을 향해, 젊은이의 어머니를 향해, 한낮에 파괴자를 데려왔다. 나는 갑자기 전율과 공포가 그 여자를 덮치게 했다.』」예레미야 15:8 · 본디새김
「바다의 모래」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자손 번성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22:17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많은 자손이 아니라 많은 과부가 등장합니다.
번성의 이미지가 상실의 이미지로 뒤집힙니다.
「『일곱을 낳은 여자가 쇠약해졌다. 그 여자는 숨을 거두었다. 아직 낮인데 그 여자의 해가 졌다. 그 여자는 부끄러워하며 수치를 당했다.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은 내가 그들의 원수들 앞에서 칼에 넘기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15:9 · 본디새김
마땅히 계속되어야 할 생명이 때 이르게 끝난 것입니다.
전쟁은 누군가를 과부로 만들고, 누군가의 자녀를 죽이며, 누군가의 삶을 아직 낮인데 해가 져 버린 것처럼 끝나게 합니다. 앞서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거나 그를 위해 슬퍼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어서 본문은 왜 그 도시의 멸망이 그토록 큰 슬픔인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을 통해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또 다른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멸망당하는 유다의 어머니가 아니라, 예레미야 자신의 어머니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도 일곱 자녀를 낳은 여자는 풍성한 생명과 가정의 충만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자녀 일곱을 둔 어머니의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수가 상징인지 실제인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왜 저를 낳으셨습니까?」 — 예언자가 자신의 삶을 원망하다
10절에서 갑자기 화자가 바뀝니다.
「아, 저는 불행합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저를 온 땅과 다투고 논쟁하는 사람으로 낳으셨으니 말입니다. 저는 빌려준 적도 없고, 사람들도 제게 빌려준 적이 없는데, 모두 저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 15:10 · 본디새김
9절에서는 자녀를 낳은 여자가 생명을 잃는 비극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태어난 아들이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관계에서는 갚아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권리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다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런 이해관계에 얽혀 있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사람도 아니고, 개인적인 이익을 놓고 싸우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의 삶과 선택을 문제 삼기 때문에 그는 다툼의 한가운데 놓입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겪는 독특한 고립입니다.
그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온 땅과 다투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내가 반드시 너를 풀어 주어 잘되게 하겠다. 재앙의 때와 고난의 때에 반드시 원수가 네게 간청하게 하겠다.」예레미야 15:11 · 본디새김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결국 구원을 경험하고, 지금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마저 고난의 때에 그에게 간청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21:1–2이나 37:3에서 왕과 지도자들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갑자기 철에 관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철이 북쪽의 철과 청동을 부술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15:12 · 본디새김
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읽기는 북쪽에서 오는 강대한 세력을 보통의 철로는 부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철과 청동을 예레미야의 강인함이나 하나님이 내리신 판결의 견고함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13–14절에서는 다시 심판의 언어가 분명해집니다.
「네 재산과 보물들을 내가 값도 받지 않고 약탈물로 넘기겠다. 네 모든 죄 때문에, 네 온 영토에서 그렇게 하겠다.」예레미야 15: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개인적인 고난을 호소하던 예레미야보다는 유다 공동체를 향한 심판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재산과 보물이 약탈당한다는 내용은 유다의 멸망에 관한 앞선 말씀과 연결됩니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건너가게 하겠다. 내 분노 속에서 불이 붙었으니, 그 불이 너희를 향해 타오를 것이다.」예레미야 15:14 · 본디새김
11–14절에서 화자의 대상과 심판의 장면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것은 본문의 실제적인 특징입니다. 이를 억지로 하나의 대화 상황으로 정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고통과 유다 전체의 멸망이 나란히 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부터는 다시 예레미야 자신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러나 11절의 히브리어는 문장과 낱말의 의미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히 첫 동사를 어떻게 이해할지,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예레미야 자신에게 주어진 보호와 회복의 약속으로 읽을 수도 있고, 유다 또는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선언으로 이어지는 문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전자의 방향을 택했습니다. 12절의 히브리어에는 철이 두 번 등장하고, 마지막에 청동이 놓입니다. 어느 철이 부수는 쪽이며 어느 철이 부서지는 쪽인지, 그 비유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문법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북쪽은 유다에 재앙을 가져올 세력의 방향으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1:14–15; 4:6; 6:1). 이 문맥에서 북쪽의 철은 유다가 맞설 수 없는 강력한 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특정한 철의 종류나 금속 기술을 근거로 어느 해석이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14절에서 본디새김은 히브리어 에트를 목적어 표시로 읽어 원수들을 건너가게 한다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를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로 읽으면, 듣는 이가 원수들과 함께 낯선 땅으로 건너가는 의미가 됩니다. 17:4에는 비슷한 문맥에서 원수들을 섬기게 된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14절을 유배와 연결하는 해석은 충분한 문맥적 근거가 있지만,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라간다면 원수들이 낯선 땅으로 건너가는 장면을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는데, 왜 그 말씀 때문에 홀로 남게 되었는가?
15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여, 당신은 아십니다. 저를 기억하고 돌보아 주십시오. 저를 뒤쫓는 자들에게 저를 위해 복수해 주십시오. 당신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저를 데려가지는 마십시오. 제가 당신 때문에 모욕을 짊어진 것을 알아주십시오.」예레미야 15:15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자기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다가 사람들과 충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모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과 무관한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 그 책임을 아룁니다.
「당신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저를 데려가지는 마십시오」라는 말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시는 동안, 정작 예레미야 자신이 먼저 죽거나 파괴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악인들에게는 심판이 유예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인들에게 핍박받는 예레미야에게는 고난이 계속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봅니다.
「당신의 말씀들이 발견되었고, 저는 그것들을 먹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제게 즐거움이 되었고, 제 마음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여, 당신의 이름이 제 위에 불려 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5:16 · 본디새김
먹는다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을 자기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그런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말씀을 멀리서 관찰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기쁨과 삶의 일부로 삼았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에스겔 2:8–3:3에서도 등장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주신 두루마리를 먹으며, 그것이 입에서 꿀처럼 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표현에는 특별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의 기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바로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흥겹게 노는 이들의 모임에 앉지도,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의 손 때문에 저는 홀로 앉았습니다. 당신이 저를 격분으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5:17 · 본디새김
여기서 흥겹게 노는 사람들의 모임 자체가 반드시 죄악된 모임이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손 때문에」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의 고립이 단순히 성격적인 문제나 사교적인 취향 때문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사로잡힌 결과,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이전처럼 어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격분이 그를 가득 채웁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사랑했지만, 그 말씀을 맡은 삶은 그가 사랑하던 일상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점에서 16–17절은 신앙을 단순히 기쁨이나 평안의 경험으로만 설명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그 말씀 때문에 고립되고 괴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을 하나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마침내 그의 탄식은 가장 날카로운 질문에 도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격분은 유다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 격분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자의 참여인지, 예레미야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비롯된 분노까지 포함하는지는 문맥상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느껴지는 순간
「왜 제 아픔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고칠 수 없으며 낫기를 거부합니까? 당신은 정말 제게 기대를 저버리는 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시렵니까?」예레미야 15:18 · 본디새김
그는 단지 자신의 고통이 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의지했던 하나님이 기대를 저버리시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반면 백성은 그분을 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도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런데 15:18에서 예레미야는 바로 그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신마저 믿을 수 없는 물이 되시려느냐고 묻습니다.
앞 장에서는 백성이 물을 찾아갔지만 빈 그릇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자신이 의지한 하나님께서도 마치 물이 말라 버린 시내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14장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마땅히 의지해야 할 여호와야훼를 떠나 다른 신들을 따라갔습니다. 반면 15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 때문에 모욕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 질문을 단순히 믿음이 없는 사람의 불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이미 1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삼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자기 위에 불렸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이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매우 심각한 비난의 경계에 이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느끼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실제로 신실하지 않으시다는 그의 의심을 옳은 판단으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이 긴장을 해결하는 것은 다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건조 지역에는 비가 내리는 계절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는 말라 버리는 시내가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 물이 있을 듯한 골짜기를 찾아갔지만, 막상 도착했을 때 물이 없다면 그 시내는 목마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린 셈입니다. 욥기 6:15–20에서도 친구들의 신뢰할 수 없는 태도가 계절에 따라 말라 버리는 시내에 비유됩니다.
「네가 돌아오면」 — 예언자 자신에게 주어진 회복의 명령
19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회복시키리니, 너는 내 앞에 설 것이다. 네가 하찮은 것에서 귀한 것을 골라내면, 너는 내 입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돌아와야지,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예레미야 15:19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예레미야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상을 섬겼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보면 18절의 고발과 연결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시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실제였지만, 고통 속에서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식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그 흔들림을 바로잡고 다시 자신의 앞에 서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레미야가 괴로워하거나 탄식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다만 정직하게 아뢴 모든 말이 곧바로 올바른 판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탄식을 들으시면서도, 그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바로잡으십니다. 이것은 백성의 심판이 취소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다시 예언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하찮은 것」과 「귀한 것」은 서로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문맥상 가장 자연스러운 대상은 예레미야의 말입니다. 그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다고 고백했고,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아뢰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물에 비유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상처에서 나온 판단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입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4:15–16에서도 모세와 아론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입의 역할이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자신이 실제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판단을 정당화해 주지도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불순종을 분별하도록 부름받았지만, 자기 안에서 나오는 말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네게 돌아와야지,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그가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굽히거나 그들의 불순종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모두에게 저주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그 고통 때문에 자신이 맡은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자신의 최종 기준으로 삼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에게 필요한 회복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미움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회복시키리니」라는 문장에서는 돌아온다는 말과 회복시킨다는 말이 같은 어근으로 연결됩니다. 문자적인 구조를 드러내면,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돌아오게 하겠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이 반복은 예레미야의 회복이 단순히 고통이 사라지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맡았던 자리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청동 성벽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피한다는 뜻인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마지막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이 백성 앞에 튼튼한 청동 성벽으로 세우겠다. 그들이 너와 싸우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15:20 · 본디새김
여기에는 예레미야가 처음 부름받았을 때 들었던 말씀이 다시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1:18–19에서 여호와야훼는 그를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과 청동 성벽으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겠지만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고립되고, 끝없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약속을 주시기보다, 처음부터 그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레미야가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리라는 보장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는 그가 체포되고 감금되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장면들을 기록합니다(20:1–2; 37:15–16; 38:6). 그를 대적하는 세력이 하나님의 뜻과 그가 맡은 예언자적 사명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성벽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 세워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공격을 견디기 위해 세워집니다.
이 약속의 근거는 예레미야의 성격이나 의지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약속의 근거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겪은 모든 고통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미움받아야 했는지도 완전히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 고통 가운데 자신이 어떻게 예레미야와 함께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난폭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되찾아 오겠다.」예레미야 15:21 · 본디새김
「되찾아 오겠다」는 말에는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놓인 존재를 다시 자신의 것으로 구해 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저주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악한 자들의 손아귀에 영원히 맡겨진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삶은 결국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무너진 예언자를 다시 성벽으로 세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처음에 자신의 앞에서 백성을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한 예언자를 다시 자신의 앞에 세우십니다. 그에게 돌아오라고 하시고, 다시 자신의 입이 되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 자신이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 15장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흔들리고 무너질 뻔한 사람을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그가 맞서야 할 백성은 그대로 있고, 그를 향한 싸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혼자 세워 두지 않으십니다.
그를 다시 자신의 앞에 서게 하시고, 그 백성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청동 성벽으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레미야가 다시 서야 할 자리는 분명합니다.
자신을 부르신 여호와야훼 앞이며,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할 백성 앞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