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끊어진 삶에서 다시 알려지는 하나님의 이름
예레미야 16장은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아내를 맞아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초상집에도 가지 말고, 잔칫집에도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일도, 함께 기뻐하는 일도 그에게 금지됩니다.
예레미야의 삶에서 사라진 것들이 장차 유다 공동체 전체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예레미야 16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에게서 평안을 거두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되는가요?
태어나지 않을 아이들 — 무너질 미래를 몸으로 보여 주다
첫 명령은 간결합니다.
「너는 아내를 맞아들이지 마라. 이곳에서 아들딸을 두지 마라.」예레미야 16:2 · 본디새김
2절에서 예레미야에게 금지된 것은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는 일입니다. 3절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이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들과 이 땅에서 그들을 낳는 부모들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대상은 추상적인 인간의 삶이 아니라, 지금 유다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바로 그 땅입니다.
아이는 공동체의 미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존재입니다. 부모는 자신보다 오래 살아갈 자녀를 통해 다음 세대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그 미래를 자신의 가정 안에서 시작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예언자의 결혼하지 않은 삶 자체가 앞으로 닥칠 일을 알리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질병으로 죽을 것이다. 애도도 받지 못하고 묻히지도 못한 채 땅바닥의 거름이 될 것이다. 칼과 굶주림으로 스러지고,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예레미야 16:4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장은 죽은 사람을 존중하고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죽은 이를 장사 지내지 못하고 시신을 야생동물에게 방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의 규모가 크다는 뜻을 넘어, 죽은 사람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조차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 7:33에서도 백성의 시체가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반복되는 이미지는 전쟁과 재난이 얼마나 철저하게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릴 것인지 보여 줍니다.
4절에 등장하는 질병, 칼, 굶주림은 예레미야서에서 거듭 나타나는 심판의 재앙들입니다(예레미야 14:12; 21:7). 전쟁은 전투 현장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질병이 퍼지며, 살아남은 사람조차 죽은 사람을 묻기 어려워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누릴 수 있었던 미래의 한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위로의 빵과 잔치의 소리 — 공동체의 일상이 멈추다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에 이어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까지 제한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초상집에 들어가지 마라. 애도하러 가지도 말고,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도 마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내 평안과 인애와 자비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16:5 · 본디새김
「평안」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에 「인애」와 「자비」가 함께 놓입니다. 여호와야훼와 백성 사이의 관계를 지탱해 온 은혜로운 돌봄이 이제 심판 아래 놓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나님이 본래 지니고 계신 자비를 잃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선언의 대상은 명확하게 「이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오신 평안과 돌봄을 거두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이를 두고 위로하려고 상중인 이들에게 빵을 떼어 주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이들에게 위로의 잔을 마시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16:7 · 본디새김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고 마실 것을 건네는 행위에는 일상의 작은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상실로 인해 무너진 삶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떠받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이 익숙한 장면까지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에서는 높은 자와 낮은 자가 모두 죽고 묻히지 못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죽음을 막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초상집과 정반대에 있는 잔칫집이 등장합니다.
장례식에서는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잔칫집에서는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보아라, 너희 눈앞에서, 너희가 사는 날에 내가 이곳에서 환희의 소리와 기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그치게 하겠다.」예레미야 16:9 · 본디새김
여기서 심판은 소리로 묘사됩니다.
도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쉽게 알려 주는 것은 사람들의 목소리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축하하는 소리가 들리고,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향한 기쁨의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애도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특히 「너희 눈앞에서, 너희가 사는 날에」라는 표현은 이 재앙을 막연한 먼 미래로 미루지 못하게 합니다. 심판을 듣는 세대가 그 현실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잃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안 아래에서 누리던 평범한 일상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상을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죄는 무엇인가요?
조금 더 깊이
먼저 5절의 「초상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트 마르제아흐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애곡의 장소보다 넓은 의미의 모임이나 연회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애도와 슬픔에 관한 명령이 이어지므로, 이 자리에서는 죽음을 애도하는 모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6절에서는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등의 애도 행위도 언급되는데, 이는 고대 사회에서 죽음을 슬퍼하는 여러 방식과 관련됩니다. 다만 이런 관습 가운데 일부는 이스라엘 율법에서 금지되기도 했습니다(레위기 19:28; 신명기 14:1). 본문은 그것들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애도의 표현마저 사라질 정도로 상황이 무너질 것을 말합니다.
조상들의 죄와 지금 세대의 고집 — 왜 이런 재앙이 오는가
10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이 예레미야에게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알려 주십니다.
「네가 이 백성에게 이 모든 말을 전하면, 그들이 네게 물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무슨 까닭으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언했습니까? 우리의 죄악이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예레미야 16:10 · 본디새김
그들은 재앙이 선언되었다는 사실보다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조상들의 행동입니다.
「그러면 너는 그들에게 말해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뒤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엎드렸다. 나를 버리고 내 가르침을 지키지 않았다.』」예레미야 16:11 · 본디새김
여기서 우상숭배는 단순히 종교의식을 잘못 선택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는 행위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이 생수의 근원인 자신을 버리고 물을 담아 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16장의 우상숭배도 참된 생명의 근원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안전과 풍요를 찾는 행동입니다.
둘째는 지금 세대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 조상들보다 더 악하게 행동했다. 보아라, 너희는 저마다 자기 악한 마음의 고집을 따라 걸으며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예레미야 16:12 · 본디새김
심판의 이유가 조상들의 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버렸지만, 지금 세대도 그 길을 계속 걷고 있습니다. 더구나 각 사람이 자기 마음의 고집을 따라 행동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귀로 받아들이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13절의 심판은 그들이 선택한 삶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내던져, 너희도 너희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땅으로 보내겠다. 너희는 거기서 밤낮으로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다. 그곳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16:13 · 본디새김
이 말씀에는 씁쓸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제 그 땅에서 쫓겨나 낯선 땅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다」라는 선언을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명령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낯선 땅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처하게 될 현실을 묘사하는 심판의 언어입니다.
땅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거주지를 옮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 약속의 땅 밖으로 내던져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 정작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 추방이 약속의 끝인가요?
출애굽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억 — 심판 한가운데 나타난 회복
13절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어떤 희망의 근거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14절은 뜻밖에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다시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여호와야훼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라고 말하지 않고,」예레미야 16:14 · 본디새김
「그 대신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땅에서 이끌어 올린 여호와야훼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 곧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예레미야 16:15 · 본디새김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은 단순한 역사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께서는 백성이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을 바꾸실 만큼 새로운 구원의 일을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출애굽의 기억이 완전히 폐기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기존의 구원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귀환이 그만큼 결정적인 하나님의 행동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에서는 이집트가 떠나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북쪽 땅과 여러 나라가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북쪽은 유다를 향해 오는 재앙의 방향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예레미야 1:14–15; 6:1). 바벨론과 관련된 침략과 포로생활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북쪽에서의 귀환은 포로생활로부터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북쪽에만 머물지 않고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땅」까지 언급합니다. 약속의 범위가 한 지역을 넘어 확장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백성을 그 땅에서 내던지신 분도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이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선언하시는 분도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야훼는 백성이 약속을 배반한 일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배반이 조상들에게 주신 자신의 약속을 영원히 무효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13절에서는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땅으로 내던져진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합니다.
같은 조상들의 이야기가 한쪽에서는 추방의 참혹함을, 다른 한쪽에서는 회복의 근거를 보여 줍니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23:7–8에서도 거의 같은 표현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30:3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16장은 여기서 곧바로 평화로운 귀환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뜻밖에도 사람들을 붙잡는 어부와 사냥꾼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새로운 언약을 맺겠다는 약속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시고, 그들이 자신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6장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3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자신의 가르침을 새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예레미야서에서 회복은 단순히 잃어버린 땅으로 돌아오는 일보다 깊은 문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관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부와 사냥꾼 — 아무도 하나님의 시선에서 숨지 못한다
16절의 이미지는 생생합니다.
「보아라, 내가 많은 어부들을 불러들이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 어부들이 그들을 낚을 것이다. 그 뒤에는 많은 사냥꾼들을 불러들이겠다. 그 사냥꾼들이 모든 산과 모든 언덕에서, 바위틈에서 그들을 사냥할 것이다.」예레미야 16:16 · 본디새김
두 이미지는 서로 다른 공간을 가리키면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가집니다. 붙잡히는 대상이 쉽게 달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눈이 그들의 모든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 길들은 내 앞에서 숨겨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죄악도 내 눈앞에서 감추어져 있지 않다.」예레미야 16:17 · 본디새김
여기서 「모든 길」은 단지 사람들이 실제로 이동하는 경로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행위를 가리킵니다. 뒤이어 죄악이 숨겨지지 않았다는 설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16:10),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의 모든 길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든, 하나님 앞에서는 그 행동의 실상이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먼저 그들의 죄악과 죄를 두 배로 되갚겠다. 그들이 자기들의 혐오스러운 것들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고, 자기들의 역겨운 것들로 내 소유지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6:18 · 본디새김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죄가 가볍게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그 땅에서 살고 있었고,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1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땅을 자신의 땅이라고 부르십니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상속지가 되었다고 해서 여호와야훼의 소유가 아니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는 백성이었습니다.
레위기 25:23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레미야 2:7에서도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땅에 들어와 그 땅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18절의 우상숭배는 단지 종교적인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거스르는 방식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의 「내 소유지」라는 말은 다음 절과 뜻밖의 연결을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번째 읽기는 심판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유다 백성에게 추방이 선언되었고, 17절에서는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는 죄악과 죄를 두 배로 되갚겠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이 흐름에서는 어부와 사냥꾼이 침략자나 심판의 집행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힙니다. 예레미야 4:29에서도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수풀과 바위로 도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피난처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연결됩니다. 두 번째 읽기는 회복을 위한 모으심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14–1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흩어진 백성을 모든 땅에서 다시 이끌어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부와 사냥꾼도 그 흩어진 사람들을 찾아내어 모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본문 안에 근거가 있습니다. 앞 단락과의 연결은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바로 뒤의 17–18절은 심판의 의미를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본문은 어부와 사냥꾼의 역사적 정체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어느 특정 집단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배로」라는 표현은 심판의 무게를 강조합니다. 이를 엄밀한 산술적 형벌의 비율로 보아야 하는지, 충분하고 무거운 응보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스러운 것들의 시체」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우상숭배와 관련된 혐오스러운 것들이 죽은 것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사람들이 신으로 섬긴 것들이 생명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민족들이 물려받은 거짓 — 땅끝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고백
19절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를 향해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여, 저의 힘이시며 저의 요새이시며 고난의 날에 저의 피난처이신 당신께 민족들이 땅끝에서 와서 말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거짓만 물려받았다. 한낱 입김뿐이니, 그 가운데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예레미야 16:19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서 평안을 거두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바로 그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힘과 요새와 피난처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의지할 분이 누구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상속지를 더럽혔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자신들의 조상에게서 거짓을 물려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한쪽에서는 물려받은 땅을 잘못 사용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물려받은 믿음의 내용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만 조상들의 잘못된 길을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도 자신들이 당연하게 여겨 온 전통을 통해 거짓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상들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진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 신들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신들이 아닙니다.」예레미야 16:20 · 본디새김
사람이 신을 만든다는 생각에는 근본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신이라면 사람을 비롯한 세계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재료를 가져다가 신을 만든다면, 그 신은 이미 사람의 손과 능력에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0:3–5에서도 나무를 베어 장인이 우상을 만들고, 은과 금으로 꾸민 뒤 못으로 고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섬깁니다.
마지막 21절에서는 다시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그들에게 알게 하겠다. 이번에는 내 손과 내 힘을 그들에게 알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 이름이 여호와야훼임을 알 것이다.」예레미야 16:21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이름의 발음을 배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지니신 분이 누구인지, 그분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과도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6:6–7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뒤 그들이 자신을 여호와야훼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만든 신들의 정체는 드러나고,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20절의 질문을 누가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19절의 민족들의 고백이 계속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레미야가 그들의 고백을 듣고 여호와야훼께 던지는 질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사람이 만들어 낸 신들이 참된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만 21절의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문맥에는 여호와야훼께 나아오는 민족들이 있고, 그 앞에는 심판받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습니다. 민족들이 우상의 헛됨을 깨닫고 여호와야훼를 알게 된다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심판과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이 장 전체의 흐름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12:14–16에서도 주변 민족들이 여호와야훼의 길을 배우는 미래가 언급됩니다. 두 본문은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인식이 확장되는 모습을 공유합니다.
이 장이 드러내는 하나님 — 평안을 거두시지만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
14–15절에서 회복을 선언하신 이유를 백성의 새로운 공로나 자격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땅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분명히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저버린 관계를 다시 회복할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이 장의 명령을 오늘의 독자에게 그대로 옮겨, 결혼하지 않거나 장례와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더 경건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명령은 특정한 역사적 심판을 알리기 위한 예언자의 삶의 표지였습니다.
땅끝의 민족들이 여호와야훼께로 와서 자신들이 물려받은 거짓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신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신이 아니었음을 인정합니다.
처음에는 예언자가 들어가지 못하는 집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멀리 있던 민족들이 여호와야훼께로 다가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던 소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이 장은, 마침내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