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마음에 새겨진 죄와 물가의 나무
돌에 글자를 새기려면 단단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먹이나 잉크로 쓴 글씨는 지울 수 있지만, 단단한 돌을 파고든 글자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7장은 바로 그 이미지로 시작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해야 했지만, 그 마음에는 오히려 죄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몇 절 뒤에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살아가는 떨기나무와 물가에 뿌리를 뻗은 나무입니다. 두 나무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크기나 가지의 모양이 아니라, 어디에서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죄가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고, 그 마음이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예레미야 자신의 기도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성문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으로 구체화됩니다. 처음에는 마음속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죄를 이야기하던 본문이, 끝에서는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메고 다니는 짐을 이야기합니다.
마음 판에 새겨진 죄 — 지워지지 않는 기록
17장의 첫 장면은 앞 장의 심판 선언과 연결됩니다. 16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유다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7장은 그 죄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유다의 죄는 철필로, 단단한 돌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 판과 너희 제단의 뿔들에 새겨져 있다.」예레미야 17:1 · 본디새김
「철필」은 단단한 표면에 글자를 새기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광물이었는지가 아니라, 새겨진 글자를 쉽게 지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마음 판」입니다.
마음을 판이라고 부르는 표현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언약의 돌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1:18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쓰신 증언의 두 돌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 6:6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마음에 새겨진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죄입니다.
둘째는 「너희 제단의 뿔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단에는 네 모서리에 뿔 모양의 돌출 부분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7:2). 제사 의식에서는 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기도 했습니다(레위기 4:25).
마음이 사람의 내면을 나타낸다면, 제단은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유다의 죄는 내면에만 감추어져 있지도 않고, 일상의 행동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기는 종교적 영역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이어지는 2절에는 푸른 나무와 높은 언덕에 세워진 제단과 아세라 상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아세라는 가나안 지역의 여신 아세라와 관련된 숭배 대상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문맥에 따라 구별해야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유다의 우상숭배를 보여 주는 대상입니다.
2절의 히브리어 문장 구조는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제단들을 기억한다는 말이 앞절의 새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의 번역을 따르면 중요한 대조가 드러납니다.
자녀들은 제단들과 아세라 상들을 익숙하게 기억합니다.
신명기 6:7은 부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묘사하는 유다에서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장소가 자녀들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는 한 세대의 행동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보고 기억하는 종교적 환경을 통해 다음 세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본문이 모든 자녀의 개인적인 죄책을 동일하게 판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조점은 유다의 우상숭배가 개인의 은밀한 선택을 넘어 공동체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3–4절에서는 이 죄가 가져올 결과가 선언됩니다.
「너는 네 탓으로 내가 네게 준 상속지에서 손을 떼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들을 섬기게 하겠다. 너희가 내 분노에 불을 붙였으니, 그 불이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예레미야 17:4 · 본디새김
땅은 유다가 스스로 창조하거나 영원히 확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상속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깊이 새겨진 죄 때문에 이제 그 땅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유다가 잃게 되는 것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선물 안에서 살아갈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들판에 있는 내 산」은 예루살렘이나 시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지시 대상과 문장 연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어지는 말씀이 유다의 재산과 보물, 산당과 영토를 모두 심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 31:3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가르침을 백성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은 17장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은 동일한 마음의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새겨지는 내용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수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방향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가의 나무 —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가
5절은 저주를 선언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믿고 육체를 제 팔로 삼으며 마음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떠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다.」예레미야 17:5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사람을 신뢰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금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과 이웃 사이의 신뢰는 공동체의 삶에 필요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무엇을 자신의 궁극적인 의지처로 삼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서 「팔」은 힘과 능력을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51:9에서 여호와야훼의 팔은 구원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17:5에서는 사람이 연약한 육체를 자신의 힘으로 삼습니다.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관계가 많거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막 평원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것이 와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들, 사람이 살지 않는 소금 땅에 살 것이다.」예레미야 17:6 · 본디새김
본문은 좋은 것이 세상에 전혀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와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처한 메마른 환경과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 것입니다.
반면 7절에서는 복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를 믿는 사람, 여호와야훼가 그의 의지가 되는 사람은 복받은 자다.」예레미야 17:7 · 본디새김
5절과 정확히 대응하는 선언입니다. 사람을 믿고 육체를 자신의 팔로 삼는 사람과, 여호와야훼를 믿고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의지로 삼는 사람이 대조됩니다.
「그는 물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물줄기를 향해 뿌리를 뻗을 것이다. 더위가 와도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 잎은 푸를 것이다. 가뭄이 든 해에도 걱정하지 않고 열매 맺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17:8 · 본디새김
눈에 보이는 잎과 열매는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무는 물줄기를 향해 뿌리를 뻗고 있기 때문에 메마른 환경에서도 생명을 유지합니다.
6절의 떨기나무는 좋은 것이 와도 보지 못합니다. 8절의 나무는 더위가 와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물가의 나무라고 해서 더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뭄이 든 해에도」라는 표현은 그 나무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열매를 맺는다는 선언입니다. 본문에서 복은 가뭄이 없는 삶이 아니라, 가뭄 속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삶으로 묘사됩니다.
이 이미지는 시편 1:3의 물가에 심긴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묵상하는 사람이 그 나무에 비유됩니다. 예레미야는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그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것을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속고 있다면, 본인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의 전승에는 이 부분에 읽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8절에서 자음으로 기록된 형태인 케티브는 「두려워하다」로 읽을 수 있고, 전통적으로 읽도록 전해진 형태인 케레는 「보다」를 뜻합니다. 본디새김은 후자를 따라 「알아차리지 못하며」로 번역했습니다. 케티브를 따르면 더위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무가 되고, 케레를 따르면 더위가 와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나무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물가에 뿌리를 둔 나무가 더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유지됩니다.
누가 마음을 알겠느냐 — 자신도 속일 수 있는 내면
「마음은 무엇보다 기만적이고 고칠 수 없이 병들었다.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예레미야 17:9 · 본디새김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이 일어나는 곳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의도마저 스스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산, 인간관계를 신뢰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 자체가 언제나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궁극적인 의지처로 삼고 있는지를 충분히 드러내 주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9절은 사람의 내면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을 무너뜨립니다.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라는 질문은 인간이 자기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절대적인 선언이라기보다, 인간의 자기 이해에 심각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대답이 주어집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마음을 살피고 콩팥을 시험하여 각 사람에게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행실의 열매에 따라 갚아 준다.」예레미야 17:10 · 본디새김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는 여호와야훼다」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함께 등장하는 「콩팥」(כִּלְיָה)은 고대 히브리어의 신체적 표현입니다. 사람의 깊은 내면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마음과 함께 놓여 인간 내면 전체를 하나님의 시선 앞에 드러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도 보십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행동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시지만, 내면에 어떤 생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제 행동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지도 않으십니다.
11절은 이 원리를 재물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자기가 낳지 않은 새끼를 모아 품는 자고새처럼, 정당하지 않게 재물을 모으는 자도 그러하다. 그의 생애 한가운데서 그 재물이 그를 떠나고, 마침내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예레미야 17:11 · 본디새김
여기서 자고새의 행동이 정확히 어떤 생태적 현상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모아 자기 것처럼 품고 있다는 모습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손에 쥔 재물이 자기 삶을 지탱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사람은 재산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리석은 자로 드러납니다.
마음의 기만은 재물을 모으는 방식과 그것을 신뢰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요?
본문은 그 대답을 먼저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 보여 줍니다.
하늘 높이 있는 보좌와 땅에 기록될 이름 — 참된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12절에서는 화자의 목소리와 분위기가 바뀝니다.
처음부터 드높은 영광의 보좌는 우리 성소가 있는 자리다.예레미야 17:12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유다의 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성소에 관한 고백이 나타납니다.
앞의 1절에서는 죄가 제단의 뿔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제 12절에서는 영광스러운 보좌와 성소가 등장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종교적 장소 자체가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유다에게는 성소가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7:4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이 성전의 존재를 반복해서 내세우며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를 자동으로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여호와야훼여, 당신을 버리는 자들은 모두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될 것이다. 그들이 생수의 근원인 여호와야훼를 버렸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7:13 · 본디새김
희망은 성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확보되지 않습니다. 성소에서 만나고 예배해야 할 그분, 곧 여호와야훼 자신에게 있습니다.
1절에서는 유다의 죄가 단단한 도구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13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떠나는 자들이 땅에 기록됩니다.
「땅에 기록될 것이다」는 표현은 의미가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땅이나 흙에 쓰인 이름처럼 쉽게 사라질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땅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기록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영광스러운 보좌와 이어지는 생수의 근원이라는 표현을 함께 보면, 그들의 이름이 안정된 생명과 영광의 자리에 놓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생수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2:13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거기에서 백성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습니다.
물가에 뿌리를 뻗은 나무가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을 공급하는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여호와야훼를 생수의 근원으로 밝힙니다.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바로 이어서 자신에게 치유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소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의 자리라는 진술로 읽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4:21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언급됩니다. 다른 하나는 12절을 이어지는 13절과 함께 읽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와 성소를 부르며 드리는 기도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동사를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두 읽기가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성소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저를 고쳐 주십시오」 —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선 예언자
「여호와야훼여,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구원받을 것입니다. 당신은 저의 찬양이시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7:14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고칠 수 없이 병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만은 치유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라는 말에는 다른 근거를 내세우지 않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성실함이나 지혜가 결국 자신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셔야 낫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야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 어디 있느냐? 그 말이 어서 와 보라지.』」예레미야 17:15 · 본디새김
그런데 15절의 조롱은 단순히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명예를 공격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이 정말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것인지 의심합니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대답은 자신이 재앙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뒤따라 목자 노릇 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참혹한 날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십니다. 제 입술에서 나온 것은 당신 앞에 있었습니다.」예레미야 17:16 · 본디새김
본디새김의 번역을 따르면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피하려고 서두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즐기거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재앙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재앙까지 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전한 말씀의 근거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그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공포가 되지 마십시오. 재앙의 날에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예레미야 17:17 · 본디새김
예레미야가 두려워하는 것은 적대자들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자신에게 공포가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의 믿음과 두려움은 같은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저를 뒤쫓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저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공포에 질리고 저는 공포에 질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재앙의 날을 가져오시고, 두 배의 파멸로 그들을 파멸시켜 주십시오.」예레미야 17:18 · 본디새김
이 대목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참혹한 날을 바라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적대자들의 파멸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는 자신이 유다에 닥칠 재앙을 선포하면서도 그 재앙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는 자신을 뒤쫓고 조롱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요청합니다. 대상과 상황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이 기도를 단순히 정당한 분노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어떤 마음을 토로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기도의 모든 표현을 오늘의 독자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그대로 옮기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이 장에서 예언자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그분 앞에 서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물론 14절의 치유를 앞의 9절에 등장하는 마음의 질병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조롱과 적대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구하는 치유는 자신의 고난과 구원받아야 할 처지 전체와 연결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16절의 「목자 노릇」이라는 표현은 해석이 까다롭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서두르다는 동사와 목자로서의 역할을 가리키는 표현, 그리고 「당신을 뒤따라」라는 말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를 하나님을 따라 목자로 일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표현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예언자의 임무에 관한 다른 해석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성문에서 멈추어야 할 짐 — 마음의 문제가 일상의 문제가 되다
19절에서는 장면이 다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다 왕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백성의 문으로 가서 서고, 예루살렘의 모든 문에도 서라.」예레미야 17:19 · 본디새김
성문은 도시의 경계이며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고대 도시에서는 물자와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는 장소였고, 공적인 일들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장소에 예레미야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의 실제 생활 속으로 가져오는 행동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 목숨을 위해 조심해라. 안식일에 짐을 나르거나 예루살렘의 문들로 들여오지 마라.』」예레미야 17:21 · 본디새김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오지 말고, 어떤 일도 하지 마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예레미야 17:22 · 본디새김
본문은 짐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문으로 짐을 들여오고 집에서 짐을 내오는 행동을 금지한다는 점에서, 도시의 일상적인 물자 운반과 노동이 중요한 배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안식일일까요?
출애굽기 20:8–11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쉼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이었던 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자신들이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백성이므로, 자신뿐 아니라 자녀와 종들까지 쉬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사람의 끊임없는 노동으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만으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종살이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삶이 오직 자신의 노동과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물론 여기서 안식일의 의미를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실제로 짐을 나르지 말고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 공동체의 노동과 시간 사용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다시 마음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듣지 않으려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목을 뻣뻣하게 했다.』」예레미야 17:23 · 본디새김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조상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십니다. 「목을 뻣뻣하게 했다」는 표현은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목을 굽히지 않는 동물의 모습에서 비롯된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어떤 것이 새겨져 있는지는 결국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느헤미야 13:15–22에서는 안식일에 물건을 운반하고 매매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본문은 예레미야가 경고하는 행동이 어떤 사회적 활동과 연결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다만 두 본문이 정확히 같은 역사적 상황을 기록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성문으로 들어오는 두 미래 — 번영과 불길
24절과 27절은 각각 조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안식일에 짐을 메고 들어오는 경우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예루살렘의 성문이 중심에 있습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고 병거와 말을 타는 왕들과 고관들이 이 성의 문들로 들어올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고관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들어올 것이며, 이 성에는 영원히 사람이 살 것이다.』」예레미야 17:25 · 본디새김
병거와 말은 왕의 권위와 통치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요소들입니다. 왕들과 고관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성문을 드나드는 모습은 도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변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게브에서 사람들이 번제물과 희생제물과 곡식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올 것이며, 감사제물을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져올 것이다.』」예레미야 17:26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죄가 제단의 뿔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기는 장소까지 죄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반면 26절에서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예배 행위의 존재 자체가 두 장면을 구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에는 이미 제단들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있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삶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삶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일상과 분리된 채로 온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반대의 미래가 선언됩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과 안식일에 짐을 메고 예루살렘의 문들로 들어오지 말라는 내 말을 너희가 듣지 않는다면, 내가 그 성의 문들에 불을 지르겠다. 그 불은 예루살렘의 궁전들을 삼키고 꺼지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17: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왕들과 고관들이 성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불이 성문에 붙습니다.
앞에서는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궁전들이 불길에 삼켜집니다.
안식일 하나만 지키면 유다의 모든 죄가 해결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레미야서가 앞서 보여 준 죄는 훨씬 넓습니다. 우상숭배와 불의, 하나님을 버린 삶 전체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듣고 순종하는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자리입니다.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익숙한 생활의 방식을 하나님의 명령에 맞추어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두 미래는 단순히 보상과 처벌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언약의 경고입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평지는 유다 서쪽의 낮은 구릉 지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산지는 유다의 중앙 고지대, 네게브는 남쪽의 건조한 지역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지역들을 열거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모이는 사람들의 범위를 넓게 보여 줍니다. 27절의 「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히 타오른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판의 불길을 아무도 막지 못하고, 그것이 심판의 대상을 철저히 삼킬 것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것을 누가 바꿀 수 있는가
본문이 제시하는 방향은 끝없는 자기불신이 아닙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치유를 구하고, 이미 들은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아시고 고치실 수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지금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진실성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과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8절의 나무는 가뭄이 없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뭄 속에서도 물줄기를 향해 뿌리를 뻗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7장은 마지막에 다시 예루살렘 성문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왕들과 백성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짐을 메고 도시로 들어오던 문입니다. 그 문을 통해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예물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문에 불이 붙어 궁전들까지 삼킬 수도 있습니다.
두 장면의 차이는 성문의 크기나 견고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문 앞에 서서 외쳐야 합니다.
「유다 왕들과 온 유다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마음 판에 새겨진 죄로 시작한 예레미야 17장은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가는 성문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길 위에 나타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