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 사람들
예레미야 23장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평안을 약속합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보내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은 처음에 백성을 흩어 버린 목자들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양 떼를 다시 모으시고, 올바르게 다스릴 왕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9절부터는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양 떼를 직접 몰고 다니는 목자는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말에 따라 백성은 돌아설 수도 있고, 잘못된 길을 계속 걸을 수도 있습니다.
왕은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예언자는 말로 백성의 길을 이끕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과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흩어 버렸다
「아, 내가 먹이는 양 떼를 길을 잃게 하고 흩어 버리는 목자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1 · 본디새김
목자는 양을 보호하고 먹이는 사람입니다. 양이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고, 흩어지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목자들은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본문은 양들이 제멋대로 도망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길 잃게 하고 흩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목자는 유다의 왕과 통치자들을 우선적으로 가리키는 비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 다윗 왕조의 몰락을 다룬 뒤 이 고발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왕실을 넘어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내 백성을 먹이는 목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쫓아냈으며,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너희에게 따져 묻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2 · 본디새김
「돌보지 않았다」와 「따져 묻겠다」에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 파카드(פָּקַד)가 사용됩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살피다, 돌보다, 책임을 묻다, 벌하다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 양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목자들을 살피시며 책임을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거듭 「내 양 떼」,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이 양을 흩어 버린 것은 단순히 통치에 실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해친 일입니다.
목자들은 양의 주인이 아닙니다. 양들을 맡았을 뿐입니다.
앞에서는 목자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반복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들을,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모든 땅에서 모아 그들의 풀밭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은 새끼를 낳고 수가 많아질 것이다.」예레미야 23:3 · 본디새김
2절에서는 목자들이 양들을 쫓아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쫓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두 가지 설명을 함께 둡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백성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동시에 예언자는 그 흩어짐과 포로살이를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인간 지도자의 책임이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지도자들의 잘못과 무관하게 내려진 것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3절의 중심은 흩어짐 자체가 아닙니다.
흩어졌던 양들을 다시 모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포로들이 귀국한다는 정치적 회복을 넘어, 공동체가 다시 살아가고 번성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창세기 1:28과 9:1의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입니다.
「내가 그들 위에 목자들을 세우겠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먹일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겁에 질리지 않고, 하나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4 · 본디새김
좋은 통치의 성과가 지도자의 영광이 아니라 백성의 안전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돌봄의 실패에서 시작하여, 그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을 거쳐, 아무도 빠지지 않는 미래로 나아갑니다. 하나의 히브리어 어근이 세 장면을 이어 줍니다.
그러나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뒤 누가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자들의 회복을 약속하신 뒤, 특별한 한 왕의 등장을 말씀하십니다.
잘린 왕조에서 돋아나는 의로운 싹
「보아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다윗을 위해 의로운 싹을 일으키겠다. 그가 왕으로 다스리며 지혜롭게 행하고, 이 땅에서 정의와 의로움을 행할 것이다.」예레미야 23:5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다윗 왕조의 미래는 막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니야의 자손 가운데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없으리라는 선언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윗을 위해 새로운 왕을 일으키시겠다고 하십니다.
앞 장에서는 백향목이 등장했습니다. 왕들은 웅장한 백향목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냈지만, 하나님은 그 나무들이 베어져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세우실 왕은 백향목이 아니라 싹으로 표현됩니다.
이미 충분히 자라서 위용을 뽐내는 나무가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왕의 특징은 그가 무엇을 소유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정의와 의로움」이라는 표현은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를 다시 보여 줍니다. 앞 장에서 여호야김에게 요구되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실패한 왕을 꾸짖는 명령이 아니라 앞으로 세워질 왕에 대한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인간 지도자들이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통치의 미래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의 날들에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살 것이다. 그를 부를 이름은 이것이다. 여호와야훼는 우리의 의로움.」예레미야 23:6 · 본디새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갈라졌고, 북왕국은 이미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에서는 두 이름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히 남왕국의 정치적 안정을 넘어, 갈라지고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안전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왕은 정의를 행하지만, 그 왕국의 의로움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의 이름 자체가 말해 줍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정확한 역사적 성취 시점이나 특정 인물을 23:5–6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우선 앞으로 나타날 의로운 다윗 계열의 왕과 그가 가져올 안전을 약속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비유는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하나님이 새로운 시작을 이루실 수 있다는 기대를 담습니다. 다만 본문이 실제로 잘린 그루터기를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미지는 이사야 11:1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두 본문은 다윗 계열에서 새롭게 등장할 통치자라는 주제로 연결되지만, 각각의 비유는 구별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롭게도 예레미야 시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이름에도 여호와야훼와 의로움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의로운 왕에게 주어질 이름은 시드기야의 이름과도 의미상 가까우며, 실제 왕의 통치와 장차 약속된 왕의 통치를 대조하도록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시드기야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거나 명시적인 말장난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연관성은 언어적·문맥적 관찰로 남겨 두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한 「여호와야훼는 우리의 의로움」이라는 이름을 곧바로 그 왕과 여호와야훼가 동일한 존재라는 선언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이나 장소에 붙여진 이름이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을 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7:15에서는 모세가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야훼 닛시」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33:15–16에서는 의로운 싹에 대한 약속이 다시 등장하고, 「여호와야훼는 우리의 의로움」이라는 이름이 예루살렘에 적용됩니다. 이는 이 이름이 왕 한 사람의 정체를 넘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이루실 의로운 통치와 구원을 나타내는 이름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22장은 당시의 왕들과 고니야의 후손에게 내려진 심판을 선포합니다. 23장은 그 심판을 지나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새롭게 일으키실 왕을 바라봅니다. 구약 안에서는 이사야 11:1–5, 스가랴 3:8과 6:12–13 등이 비슷한 기대를 발전시킵니다. 신약은 이 다윗 왕조의 희망을 예수와 연결하여 읽지만(누가복음 1:32–33), 그것은 후대의 정경적 해석입니다.
출애굽을 잊게 할 만큼 놀라운 새로운 구원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기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사람들이 더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린 여호와야훼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하고 말하지 않고,」예레미야 23:7 · 본디새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이끌어 내신 사건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한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인지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집안의 자손을 북쪽 땅과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모든 땅에서 이끌어 올리고 데려온 여호와야훼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땅에서 살 것이다.」예레미야 23:8 · 본디새김
여기서 새로운 구원이 출애굽보다 더 크다는 식으로 두 사건의 규모를 단순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앞으로 이루어질 회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만큼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의 기억을 없애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과거의 구원만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모두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 16:14–15에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포로로 흩어진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는 일을 새로운 구원의 사건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9절에서 분위기는 갑자기 달라집니다.
예언자의 마음이 부서지고 뼈가 풀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부분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지도자를 세우실 것인지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지금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마음이 부서진 이유
예언자들에 관하여. 내 속에서 내 마음이 부서졌고, 내 모든 뼈가 풀렸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포도주에 압도된 사내처럼 되었다. 여호와야훼 때문에, 그의 거룩한 말들 때문에.예레미야 23:9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일인칭으로 말하는 사람은 문맥상 예레미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반응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충격까지 포함합니다.
이 땅에 간음하는 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저주 때문에 땅이 애도하고, 광야의 풀밭들이 말라 버렸다. 그들이 달려가는 길은 악하고, 그들의 힘은 올바르지 않다.예레미야 23:10 · 본디새김
사람들의 악한 행실과 땅의 황폐함이 함께 묘사됩니다.
예레미야 12:4에서도 사람들의 악 때문에 땅이 애도하고 풀들이 마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언어는 인간의 불의가 그들이 살아가는 땅의 질서와도 관계되어 있다는 예언자적 인식을 드러냅니다.
「예언자도 제사장도 타락했기 때문이다. 내 집에서도 나는 그들의 악을 발견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11 · 본디새김
예언자와 제사장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행동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을 발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했거나 종교적 권위 때문에 문제 삼지 못했던 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그들의 운명이 어둠 속의 미끄러운 길에 비유됩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자신이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알 수 없는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것입니다.
백성에게 길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간음이라는 표현은 실제 성적 불의와 연결될 수도 있고,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는 언약에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저버린 삶과 사회 전체의 타락이라는 더 넓은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 하나로만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당시의 가뭄이나 환경적 재난이 어떤 특정 범죄 때문에 직접 발생했다고 역사적 인과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언약적 심판의 관점에서 땅의 황폐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
「사마리아의 예언자들에게서 나는 부끄러운 짓을 보았다. 그들은 바알을 힘입어 예언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예레미야 23:13 · 본디새김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북왕국의 역사에는 바알 숭배가 깊이 들어와 있었고, 열왕기상 18장은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을 기록합니다.
사마리아의 예언자들이 바알을 힘입어 예언했다는 말은, 그들이 여호와야훼가 아닌 다른 신의 권위를 의지하여 백성을 이끌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끔찍한 일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나는 끔찍한 일을 보았다. 그들은 간음하고 거짓 속에서 걸으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 아무도 자기 악에서 돌이키지 않게 했다. 그들 모두가 내게는 소돔처럼 되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고모라처럼 되었다.」예레미야 23:14 · 본디새김
거짓 예언의 위험은 반드시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손을 강하게 하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잘못을 행하는 사람들을 약화시키거나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손에 힘을 더해 준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꾸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악한 길에서 돌이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18–19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성읍들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거룩한 전통을 자랑하더라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소돔이라는 이름을 특정한 한 가지 죄의 상징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 직접 고발되는 것은 거짓, 간음,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지지, 회개의 차단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그 예언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겠다.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 타락이 나와 온 땅으로 퍼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3:15 · 본디새김
쓴 음식과 독이 든 물은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건넨 말은 듣기 좋았을지 모르지만, 그 말이 퍼뜨린 것은 타락이었습니다.
백성의 길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타락이 퍼져 나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평안을 약속하고 있는가?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희를 헛된 기대로 채운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며,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온 것을 말하지 않는다.」예레미야 23:16 · 본디새김
문제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거듭 말한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것이다.』 또 자기 마음의 고집을 따라 걷는 모든 이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23:17 · 본디새김
문제는 그들이 평안이라는 좋은 말을 사용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평안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중요한 선물입니다.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도 평안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변화 없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평안의 약속이 아니라 잘못된 확신입니다.
사람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돌이켜야 할 이유를 없애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예레미야 6:14와 8:11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며 평안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평안이 없다고 책망받습니다.
상처가 깊은데도 상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사람을 치료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두려움 없이 살아갈 양 떼의 미래를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 역시 평안에 관한 말씀입니다.
차이는 평안을 말하는가, 심판을 말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그 말이 사람들을 어느 방향으로 이끄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의에 선 사람은 무엇을 전하는가?
누가 여호와야훼의 회의에 서서 그의 말을 보고 들었는가?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었는가?예레미야 23:18 · 본디새김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달받는 하늘의 회의라는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열왕기상 22:19–23에서도 예언자 미가야는 여호와야훼가 왕좌에 앉아 계시고 하늘의 군대가 그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장면은 예언자가 단순히 미래를 잘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보아라, 여호와야훼의 폭풍, 곧 분노가 터져 나왔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악인들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칠 것이다.예레미야 23:19 · 본디새김
거짓 예언자들은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한쪽은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문제 삼지 않고 평안을 약속합니다. 다른 쪽은 그들의 악한 행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내가 그 예언자들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달려갔다.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예언했다.」예레미야 23:21 · 본디새김
그들의 열심이 그들의 권한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많이 말한다는 사실도, 자신 있게 말한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들이 내 회의에 섰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들을 들려주고, 그들을 그들의 악한 길에서, 그들의 악한 행실에서 돌이켰을 것이다.」예레미야 23:22 · 본디새김
거짓 예언자들은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14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 아무도 악에서 돌이키지 않게 했습니다.
예언자의 실패는 단순히 미래를 잘못 예측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돌이켜야 할 때 돌이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기준을 모든 경우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예언자의 말을 듣고도 사람들이 돌이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계속 거절당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실제로 회개했는가 하는 결과만으로 참된 예언자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어떤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는 삶을 계속 살도록 안심시키는 예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날들의 마지막에 너희는 그것을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라는 표현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세계 역사의 최후를 가리키는 종말론적 선언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진 뒤에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들으십니다
「나는 가까이에서만 하나님이고 멀리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23 · 본디새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그분의 존재와 권위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 제한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나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 안에 갇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누가 은밀한 곳에 숨으면 내가 그를 보지 못하겠느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느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24 · 본디새김
문제는 사람이 무엇을 감출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듣고 계십니다.
꿈을 꾸었다는 말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그들은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하고 말한다.」예레미야 23:25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꿈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한 방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요셉의 꿈이 등장하고, 민수기 12:6에서는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환상과 꿈으로 자신을 알리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23장은 모든 꿈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권위로 포장하는 데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라고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앞세우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꿈이 자신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 때문에 내 이름을 잊었듯이,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는 자기들의 꿈으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게 하려고 꾀한다.」예레미야 23:2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알 숭배는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대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의 꿈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분의 실제 말씀을 밀어냅니다.
「꿈을 가진 예언자는 꿈을 이야기하게 하고, 내 말을 가진 자는 내 말을 진실하게 전하게 해라. 짚이 곡식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28 · 본디새김
짚과 곡식은 한때 같은 줄기와 이삭에 속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두어 사용하는 목적은 다릅니다. 곡식은 사람을 먹입니다. 짚은 곡식과 같은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꿈이 인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하는 것은 말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그 근원과 진실성입니다.
「내 말은 이처럼 불과 같지 않으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바위를 산산이 부수는 망치와 같지 않으냐?」예레미야 23:29 · 본디새김
앞의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안심시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망치에 비유됩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거칠거나 파괴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장의 앞부분에서 회복과 평안도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이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생각과 확신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이러한 말씀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예레미야 20:9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속에 갇힌 불처럼 되어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자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자 자신을 붙잡고, 그의 생각과 의지를 넘어서는 권위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훔치는 사람들
30–32절에서는 비슷한 선언이 세 번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서로에게서 내 말들을 훔치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30 · 본디새김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을 가져다가 마치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말씀인 것처럼 내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말을 전달합니다.
「보아라, 자기 혀를 써서 신탁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31 · 본디새김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의 말에 신탁의 권위를 부여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그 말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선언합니다.
「보아라, 거짓 꿈들을 예언하는 자들을 내가 대적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은 그 꿈들을 이야기하고, 자기들의 거짓과 경솔함으로 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32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백성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무익할 뿐 아니라 실제로 해로운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예언자들의 활동은 많았습니다. 꿈 이야기도 많았고, 신탁을 선포하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말이 하나님의 백성을 바른길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의 내용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르는 방식까지 문제 삼으십니다.
「여호와야훼의 신탁」이라는 말이 금지된 이유
「이 백성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네게 『여호와야훼의 신탁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너는 그들에게 말해라. 『무슨 신탁이냐? 내가 너희를 버리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33 · 본디새김
「신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사(מַשָּׂא)입니다. 이 단어는 예언의 말씀, 특히 엄중한 예언의 선언을 가리킬 수 있지만, 짊어지는 ‘짐’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듣고 따르는 대신, 그 말씀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선포하고 왜곡했습니다. 이제 신탁이라는 종교적 표현도 그런 언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던 사람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이웃에게, 저마다 자기 형제에게 이렇게 말해라. 「여호와야훼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여호와야훼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예레미야 23:35 · 본디새김
질문의 중심이 달라져야 합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특별한 신탁이 무엇인가를 찾는 대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듣는 일보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권위로 뒷받침하는 일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신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마라. 각 사람에게는 자기 말이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아 있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야훼, 우리 하나님의 말들을 뒤바꾸었다.예레미야 23:36 · 본디새김
여기서도 짐과 신탁이라는 두 의미가 겹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빌려 자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들이 한 말이 그들 자신에게 짐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말의 책임에 관한 선언입니다.
누군가가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권위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신 말을 전했다면, 그 책임은 매우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인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죽은 문헌의 이름처럼 취급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그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해라. 「여호와야훼가 네게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여호와야훼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예레미야 23:37 · 본디새김
본문은 같은 표현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신탁이라는 명칭에서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3:1과 나훔 1:1에서도 예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문제는 단어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그 말씀을 무거운 짐처럼 여기거나 조롱하는 태도를 이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조롱의 의도가 질문자 모두에게 있었다고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33절의 대답에도 번역상 중요한 갈림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무슨 신탁이냐? 내가 너희를 버리겠다」라고 옮겼습니다. 히브리어의 자음 배열을 다르게 나누어 읽으면 「너희가 바로 그 짐이다」라는 뜻의 대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이 부분은 읽기와 해석이 쉽지 않은 곳입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묻는 신탁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실 것이라는 선언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신탁을 짐처럼 다루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 짐이 된 것은 그들 자신이라는 역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바꾼 사람들이 듣게 된 마지막 말씀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너희를 아주 잊어버리고,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성읍과 너희를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예레미야 23:39 · 본디새김
처음에 하나님은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과 그 성읍을 자신의 앞에서 내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치욕과 영원한 수치를 안기겠다. 그것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23:40 · 본디새김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앞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치욕과 수치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잊어버림과 잊히지 않음이 나란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그 수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마지막 선언을 읽을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영원히 버리시겠다고 하시는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처음에는 남은 양 떼를 다시 모으시겠다는 약속이 분명히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거짓 확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성읍을 향한 엄중한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말하는 영원한 수치를 반드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진술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에게 내려질 치욕과 수치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심판의 영속성이 강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아주 잊어버리고」라는 표현에는 원어상 읽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이 동사형은 ‘잊다’와 관련된 형태로 읽을 수도 있고, ‘들어 올려 내던지다’라는 움직임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라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잊어버리시겠다고 옮겼습니다. 다른 읽기를 따르면 그들을 들어 올려 내던지는 이미지가 두드러집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앞에서 버리신다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맺음말 — 짚과 곡식 사이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짚과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지도자들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양들을 모으시는 분이면서, 그 양들을 흩는 목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백성에게 안전한 삶을 약속하시는 분이면서, 그들이 거짓된 평안에 만족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말이 위로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불편하고 두려운 말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23장이 요청하는 태도는 무조건적인 의심도 아니고, 종교적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기대와 판단을 다시 살펴보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많았고, 신탁이라는 이름도 흔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말 가운데 무엇이 곡식이고 무엇이 짚인지를 가르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자신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그 말씀이 진실하게 전달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차이를 지워 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히지 않을 수치를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끝내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들의 입에 그토록 자주 올렸던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