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30–33장 · 회복의 약속

다시 들릴 소리, 다시 세워질 나라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읍을 포위하고, 집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헐리고, 거리에는 죽음의 위협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지만, 하나님은 그 성읍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3장에서 하나님은 회복될 예루살렘을 묘사하시면서 먼저 새로운 성벽이나 궁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곳에서 다시 들릴 소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장의 회복은 이처럼 소박한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의로운 후손을 일으키시고, 제사장들이 자신을 섬기게 하시며, 그 약속을 낮과 밤의 질서만큼 확고하게 지키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일상의 소리가 돌아오는 것과 왕권 및 제사장 직분이 회복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예레미야 33장은 무너진 성읍을 다시 세우겠다는 약속을 넘어, 그 성읍을 무너뜨렸던 삶의 질서까지 바로잡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933장 본문 읽기 →

갇힌 예언자에게 열어 보이시는 미래

예레미야 33:1–3 본문 →

33장은 예레미야가 여전히 경비대 뜰에 갇혀 있다는 사실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경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여호와야훼의 말이 그에게 두 번째로 이렇게 임했다.예레미야 33:1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예레미야가 감금된 상태에서 밭을 사고, 그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서 다시 밭을 사게 될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자유를 얻지 못했고, 예루살렘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전에 들려주신 회복의 약속을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십니다.

그것을 만드는 여호와야훼, 그것을 굳게 세우려고 빚는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야훼다.예레미야 33:2 · 본디새김

여기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여성 단수 목적어가 반복되지만, 바로 앞에 그 대상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회복의 일을 가리킨다고 볼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본문이 하나님을 만드시고, 빚으시고, 굳게 세우시는 분으로 소개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 18:1–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토기장이는 그릇이 손에서 잘못되면 그것을 다시 빚어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장면은 하나님이 민족과 왕국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33장에서도 하나님은 빚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파괴의 경고보다 무엇인가를 굳게 세우시는 행동이 강조됩니다.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대답하겠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다가갈 수 없는 일들을 내가 네게 알려 주겠다.」예레미야 33:3 · 본디새김

예레미야가 갇혀 있는 예루살렘은 인간이 세운 방어 시설로 적군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려 주시려는 미래는 인간의 능력으로 접근하거나 알아낼 수 없는 영역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알려 주실 일은 개인의 운세나 감추어진 사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곧이어 나타나는 예루살렘의 심판과 회복, 다윗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직 볼 수 없는 미래를 말씀으로 열어 보이십니다.

죽음으로 가득한 집들이 다시 치유될 것이다

예레미야 33:4–9 본문 →

4절은 독자를 포위된 예루살렘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사람들은 바벨론 군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집들을 헐고 있습니다. 왕궁의 건물까지 그 대상에 포함됩니다.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남기 위한 전쟁 때문에 집을 무너뜨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5절은 더욱 어두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칼데아인들과 싸우러 온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분노와 격노로 쳐 죽인 사람들의 시체로 그 집들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악 때문에 나는 이 성읍에서 내 얼굴을 감추었다.」예레미야 33:5 · 본디새김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셨다는 것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돌봄과 호의가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이 잠시 관심을 거두셨다는 정도가 아니라, 백성의 악에 대한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이 뜻밖의 말로 시작됩니다.

「보아라, 내가 이 성읍에 회복과 치유를 가져오고, 그들을 고치겠다. 그들에게 풍성한 평화와 신실함을 드러내겠다.」예레미야 33:6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셨습니다. 이제는 평화와 신실함을 드러내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겠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읍을 고치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을 단순한 건축물의 집합이 아니라 상처 입은 공동체로 바라보게 합니다.

전쟁은 성벽과 건물만 파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와 삶의 기반까지 무너뜨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회복에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지고,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깨끗하게 씻기며 용서받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백성의 죄와 무관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왕과 백성의 불순종, 우상숭배와 불의가 그 심판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읍이 다시 세워진다고 해도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을 다시 지으시며 공동체를 무너뜨린 죄도 다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읍은 땅의 모든 민족 앞에서 내게 기쁨의 이름이 되고 찬양과 영광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푸는 모든 좋은 일을 듣고, 내가 이 성읍에 베푸는 모든 좋은 일과 모든 평화 때문에 두려워하며 떨 것이다.」예레미야 33:9 · 본디새김

보통 두려워하며 떠는 이유는 전쟁이나 재앙,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좋은 일과 평화 때문에 민족들이 떨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유도 달라집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회복을 베푸시는지가 그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실함」에 해당하는 에메트(⁨אֶמֶת⁩)는 진실이나 확고함이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복이 믿을 만하고 확실하다는 의미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애셨던 소리를 다시 들려주신다

예레미야 33:10–11 본문 →

10절은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한 가지 특징으로 묘사합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건물이 파괴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던 생명과 일상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1절에서는 다양한 소리가 돌아옵니다.

「환희의 소리와 기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여호와야훼는 선하시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감사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들의 소리다. 내가 이 땅을 처음처럼 회복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예레미야 33:11 · 본디새김

예레미야 7:34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기쁨의 소리와 신랑과 신부의 소리를 끊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6:9에서도 같은 종류의 소리가 그 땅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25:10에서도 기쁨과 혼인 잔치의 소리가 끊어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제 33:11에서는 바로 그 소리가 돌아옵니다.

이는 심판의 선언을 의도적으로 뒤집는 표현입니다.

전쟁과 멸망의 위협 아래에서는 미래를 계획하기 어렵습니다. 혼인 잔치는 새로운 가정이 시작되고 앞으로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돌아온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당장의 생존만을 생각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회복은 왕궁에서 발표되는 승전 선언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다시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감사의 노래가 돌아오다

11절에는 혼인 잔치의 소리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나옵니다.

「여호와야훼는 선하시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라는 고백은 시편 136:1에도 등장합니다. 역대하 5:13에서는 솔로몬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됩니다. 이런 찬양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속적인 사랑을 기억하며 예배하던 중요한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는 바로 그 예배의 중심지인 성전이 멸망의 위협 아래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시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감사 제물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감사 제물은 단순한 마음속 감사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7:11–15는 감사와 관련된 친교 제물의 규정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공동체에서는 일상의 기쁨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함께 살아납니다.

양 떼가 다시 목자의 손 아래로 지나갈 것이다

예레미야 33:12–13 본문 →

이어서 하나님은 도시의 거리를 떠나 들판을 보여주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도 짐승도 없어 황폐해진 이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양 떼를 눕히는 목자들의 거처가 있을 것이다.」예레미야 33:12 · 본디새김

목자가 양 떼를 눕히려면 그곳이 어느 정도 안전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전쟁과 약탈, 이동의 위협 아래에서는 가축을 평온하게 돌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양 떼가 쉬는 장면은 그 땅의 안전과 평온을 보여줍니다.

「산지의 성읍들과 낮은 지대의 성읍들과 네게브의 성읍들에서,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주변과 유다의 성읍들에서, 양 떼가 세는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지나갈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예레미야 33:13 · 본디새김

가축을 세는 것은 목축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관리 행위입니다.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의 수를 알고, 돌아온 양들이 제대로 모였는지 살펴야 합니다.

레위기 27:32에서도 가축이 막대기 아래를 지나며 세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만 예레미야 33:13이 반드시 십일조를 위한 계수 행위를 뜻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양 떼를 세고 돌보는 평범한 목축 생활이 다시 가능해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23:1–4에서 하나님은 양 떼를 흩어지게 하고 돌보지 않은 목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목자들은 실제 양을 돌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흩어진 양들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을 돌볼 목자들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3:12–13의 목자들은 본래 의미에서 실제 가축을 돌보는 사람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앞서 사용된 목자와 양 떼의 언어를 기억하면, 이 장면은 흩어짐에서 모임으로 바뀌는 회복이라는 더 넓은 주제와도 어울립니다.

13절은 유다의 여러 지역을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한 장소만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땅 전체에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14절부터 시야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일상을 다시 살아가는 장면에서, 그 일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왕과 제사장의 문제로 나아가십니다.

의로운 싹과 새로운 이름을 얻는 성읍

예레미야 33:14–16 본문 →

14절은 앞에서 약속하신 회복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선언입니다.

「그날들에,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의로운 싹이 돋게 하겠다. 그가 이 땅에서 공정과 의를 행할 것이다.」예레미야 33:15 · 본디새김

다윗 왕조는 예레미야 시대에 사실상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가 다스리는 유다는 바벨론에 포위되었고, 왕권은 더 이상 나라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새로운 싹이 돋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무가 잘려 나간 것처럼 왕조의 미래가 끊어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23:5–6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의로운 싹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며, 그 왕이 공정과 의를 행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두 본문의 중심은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 다시 왕좌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왕이 될 것인가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22:3에서 하나님은 왕실을 향해 공정과 의를 행하고 억눌린 사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2:15–16에서는 요시야가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던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습니다.

따라서 33:15의 「공정과 의」는 추상적인 도덕성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왕이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며, 사회에 어떤 질서를 세우는지와 관계됩니다.

왕에게 주어졌던 이름이 성읍의 이름이 되다

「그날들에 유다가 구원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 것이다. 사람들은 그 성읍을 이렇게 부를 것이다. 『여호와야훼는 우리의 의다.』」예레미야 33:16 · 본디새김

예레미야 23:6에서는 이 이름이 다윗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왕에게 붙습니다. 그런데 33:16에서는 예루살렘 성읍에 붙습니다.

왕이 이루는 공정과 의가 왕 개인의 명예로 끝나지 않고 그가 다스리는 공동체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왕이 다스리는 성읍은 그 왕의 올바른 통치를 통해 안전을 누립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약속이 성읍 전체의 이름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름은 당시 왕 시드기야의 이름과도 의미상 연결됩니다. 시드기야라는 이름에는 여호와야훼와 의를 나타내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유다는 실제로 공정과 의가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장차 「여호와야훼는 우리의 의다」라는 이름에 걸맞은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미래에는 이름과 실제 삶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약속을 신약과 연결할 때에는 두 단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본문 자체에서는 다윗 왕조의 회복과 공의로운 통치를 약속합니다. 신약의 복음서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제시하며(마태복음 1:1; 누가복음 1:32–33),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왕의 약속을 예수와 연결하여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33:16에서 이름이 직접 붙는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이라는 점을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왕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회복된다

예레미야 33:17–18 본문 →

15–16절이 의로운 왕을 약속했다면, 17–18절에서는 그 왕권과 함께 제사장 직분의 지속을 약속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는 이스라엘 집안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3:17 · 본디새김
「레위 사람 제사장들에게도 내 앞에서 언제나 번제를 올리고 곡식 제물을 태우며 희생 제사를 드릴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3:18 · 본디새김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을, 제사장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직분을 대표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왕권도 제사장 직분도 심각한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공정과 의를 저버렸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백성을 잘못 이끌었습니다. 예레미야 23:11은 예언자와 제사장이 모두 악을 행한다고 비판합니다.

왕은 공정과 의를 행해야 하고,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직분 자체의 권위를 무조건 보장하여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앞선 예레미야의 비판을 고려하면, 왕권과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약속은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는 쉽게 지나갈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이후 다윗 왕조의 왕이 곧바로 예루살렘의 왕좌에 돌아와 계속 통치한 것은 아닙니다. 포로 귀환 이후 제사장들의 예배 활동은 다시 시작되었지만(에스라 3:2–6), 다윗 왕조의 독립적인 왕권이 동시에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실제로 번제와 곡식 제물과 희생 제사가 계속 드려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처음부터 왕권이나 제사가 모두 단순한 상징이었다고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본문의 일차적인 의미는 왕과 제사장을 통해 유지되던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질서가 하나님에 의해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느 시점에, 어느 범위까지 이루어졌는지는 별도의 해석 문제입니다. 포로 귀환 이후의 부분적인 회복, 장차 이루어질 다윗 왕권에 대한 기대, 이상적인 미래의 질서를 묘사한 예언이라는 측면들이 함께 논의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방식으로 본문의 모든 표현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분은 백성이 바르게 다스림받는 삶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이 함께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 예레미야에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33:14–26에 해당하는 단락이 없습니다. 칠십인역은 33:13에 해당하는 내용 뒤에서 이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관한 단락 없이 다음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 차이가 생긴 정확한 과정은 확정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 단락이 더해졌을 가능성과, 그리스어 전승의 바탕이 된 히브리어 본문에 이 단락이 없었을 가능성 등을 검토할 수 있지만, 어느 방향의 변화인지 본문 차이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다윗의 후손에 대한 약속 자체는 예레미야 23:5–6에도 나타납니다. 33:14–26은 그 약속을 레위 제사장과 창조 질서에 대한 언약까지 확장하여 강조하는 특징을 가집니다.

낮과 밤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신다

예레미야 33:19–22 본문 →

19절부터 하나님은 다윗 왕권과 제사장 직분의 지속에 관한 약속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확증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낮에 대한 내 언약과 밤에 대한 내 언약을 깨뜨려, 낮과 밤이 제때에 오지 못하게 한다면,」예레미야 33:20 · 본디새김

21절에 따르면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지는 일이 가능하다면 다윗과 맺은 언약과 레위 제사장들과 맺은 언약도 깨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의 약속이 확고하다는 뜻을 드러내는 조건문입니다.

낮과 밤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자기 뜻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왕이나 제사장도 이 질서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창조 세계의 질서를 근거로, 언약의 미래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왕은 실패했고 제사장들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직분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다는 약속을 인간의 성실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질서와 자신이 하신 말씀을 근거로 약속을 보증하십니다.

「하늘의 군대를 셀 수 없고 바다의 모래를 잴 수 없듯이, 내가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 사람들을 그렇게 많아지게 하겠다.」예레미야 33:22 · 본디새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후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5:5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있느냐고 물으시며 그의 후손이 그렇게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2:17에서는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가 함께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3:22에서는 이 표현이 다윗의 후손과 레위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왕조와 제사장 직분이 끊어질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 직분들을 이어 갈 사람들을 풍성하게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친히 마련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버림받았다고 말할 때

예레미야 33:23–26 본문 →

마지막 단락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너는 이 백성이 『여호와야훼가 자기가 선택한 두 가문을 버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그들은 내 백성을 업신여겨, 자기들 앞에서 더는 한 민족으로 여기지 않는다.」예레미야 33:24 · 본디새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다윗 왕조는 왕좌를 지킬 능력을 잃었고, 성전과 제사장 직분의 미래도 불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24절의 「두 가문」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바로 앞에서 함께 언급된 다윗 가문과 레위 가문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멸망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신의 선택을 철회하셨다고 판단합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러한 판단이 공동체를 바라보는 태도까지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멸망을 경험한 백성은 정치적 독립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까지 의심받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낮과 밤의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낮과 밤에 대한 내 언약이 없다면, 내가 하늘과 땅의 규례를 세우지 않았다면,」예레미야 33:25 · 본디새김

앞에서 왕권과 제사장 직분의 지속을 보증하셨던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약속의 범위가 더욱 넓어집니다.

「나도 야곱의 자손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이들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3:26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벨론의 포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던 오래된 관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멸망도 그 역사를 끝내는 최종 선언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죄가 없었다면 예레미야가 심판을 선포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회복시키겠다는 자신의 뜻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심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두 가문」을 이스라엘과 유다로 읽는 근거는 예레미야가 이 두 나라의 회복을 계속 함께 말씀해 왔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두 가문을 버리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의 미래가 사라졌다는 절망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 가문과 레위 가문으로 읽는 근거는 17–22절에서 두 가문에 관한 약속이 반복된다는 데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26절에서는 야곱의 자손과 다윗의 자손이 함께 등장하므로, 이스라엘 전체의 존속과 다윗 왕권의 미래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무너진 왕좌와 다시 들릴 감사의 노래

예레미야 33:1–26 본문 →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전쟁이 끝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공정해야 하고, 공동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예레미야가 알지 못했던 미래를 말씀하셨고, 그 미래 안에는 무너진 성읍의 치유와 의로운 통치, 다시 드려지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정체성은 스스로의 권위와 안전을 주장하는 근거로만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정과 의, 신실함과 평화를 실제로 드러내는지도 중요합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거리에서 다시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감사 제물을 들고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여호와야훼는 선하시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3장의 회복은 마침내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고, 다시 기뻐하며,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