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4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자유를 거두어들인 사람들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성읍을 포위했고, 유다의 요새 성읍들도 하나씩 적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시드기야 왕이 백성과 언약을 맺고, 히브리인 남녀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기로 한 것입니다. 고관들과 백성은 그 약속에 동의했고 실제로 노예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결정을 뒤집었습니다. 자유롭게 풀어 주었던 사람들을 도로 데려와 다시 노예로 삼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라가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에 노예 해방의 문제를 이토록 중요하게 다루실까요? 성읍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몇몇 사람의 노예 신분이 달라지는 일이 국가의 운명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장을 읽으면 질문이 거꾸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노예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백성이 자기 형제들을 다시 노예로 붙잡는다면,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834장 본문 읽기 →

시드기야에게 주어진 두 가지 말씀

예레미야 34:1–7 본문 →

34장은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1절은 느부갓레살의 군대뿐 아니라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왕국과 민족들까지 언급합니다. 유다가 상대하는 것은 단일 도시의 군대가 아니라 여러 지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의 군사력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두 가지를 선포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넘어가 불타게 됩니다. 둘째, 시드기야 자신도 붙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서게 됩니다.

「『너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붙잡혀 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너는 바벨론 왕과 눈을 마주 보고, 그는 너와 직접 말을 나눌 것이다. 너는 바벨론으로 가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34:3 · 본디새김

왕은 성읍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도 적국 왕을 직접 마주해야 합니다. 자기 나라의 패배를 대표하는 자리에서 승리한 왕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은 예상 밖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야,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여호와야훼가 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너는 칼에 죽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4:4 · 본디새김

5절에서는 그가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들이 옛 왕들을 위해 했던 것처럼 그를 애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왕국의 멸망과 왕 개인의 운명을 구별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 곧 라기스와 아세가를 공격하고 있었다.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 요새 성읍으로 남은 곳은 이 성읍들이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4:7 · 본디새김

라기스와 아세가는 유다의 서남쪽 지역을 방어하던 중요한 요새 성읍이었습니다. 이제 그곳들이 예루살렘과 함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방어 거점으로 언급됩니다. 유다의 국토 대부분이 바벨론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왕은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자기 백성 가운데 노예로 살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약속을 시드기야가 행복하게 여생을 보낼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하 25:6–7과 예레미야 39:6–7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붙잡힌 뒤 아들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았고, 두 눈을 잃은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 52:11은 그가 죽는 날까지 갇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34:5의 「평안히 죽을 것」은 고난 없는 삶 전체보다는 전쟁터에서 칼에 맞아 죽지 않는 죽음의 방식과 관련지어 읽을 수 있습니다. 역대하 16:14에는 아사 왕의 장례에서 향료와 관련된 큰 태움이 있었던 일이 기록됩니다. 반면 역대하 21:19–20은 여호람 왕을 위해 그러한 태움이 행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용례를 고려하면 왕을 기리는 장례 의식과 연결할 수 있지만, 예레미야 34:5 자체는 무엇을 태우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시드기야가 실제로 어떤 장례를 치렀는지는 후대의 역사 서술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모든 세부 사항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유가 선포되다

예레미야 34:8–10 본문 →

8절에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습니다.

히브리인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풀어 주고, 더는 자기 형제인 유다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시드기야의 명령은 새로운 윤리적 발명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언약의 요구를 다시 실행하려는 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1:2는 히브리인 종이 여섯 해 동안 섬긴 뒤 일곱째 해에 자유롭게 나가도록 규정합니다. 신명기 15:12–18은 히브리인 남녀가 종으로 팔려 왔을 때 여섯 해를 섬긴 뒤 풀어 주도록 명령합니다.

신명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유롭게 내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양 떼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넉넉하게 주라고 명령합니다(신명기 15:13–14). 신명기 15:15가 이유를 밝힙니다. 이스라엘 자신도 이집트에서 종이었고,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규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인 동족의 종살이에 관한 구체적인 제한이며, 성별과 종의 법적 지위에 관한 다른 규정들과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노예의 집에서 구원하신 백성은 자기 형제를 끝없이 노예로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권리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한 책임을 포함했습니다.

언약에 참여한 모든 고관과 모든 백성은 저마다 자기 남자 노예와 자기 여자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 주고 더는 그들을 노예로 부리지 말라는 말을 따랐다. 그들은 그 말을 따르고 노예들을 풀어 주었다.예레미야 34:10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순종이 두 번 강조됩니다. 하나님도 뒤의 15절에서 이 행동을 「내 눈에 올바른 일」이라고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이 해방을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는 위선적 행사였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왕의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쟁 중에 더 많은 사람을 방어에 동원하려 했을 가능성, 부양해야 할 사람의 수를 줄이려 했을 가능성,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뒤늦게 율법을 지키려 했을 가능성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무엇이 실제 동기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관심을 두는 것은 왕의 숨은 계산보다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입니다.

자유를 주었다가 다시 빼앗다

예레미야 34:11 본문 →

그러나 그들은 그 뒤에 돌아서서, 자유롭게 풀어 주었던 남자 노예들과 여자 노예들을 도로 데려와 강제로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로 삼았다.예레미야 34:11 · 본디새김

짧은 한 절이 앞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뒤집습니다.

「강제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해방된 사람들이 자기 의사로 다시 종이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해방된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주인들은 그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한때 옳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그 뒤의 행동까지 올바르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유를 선포하는 데까지는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내려놓은 상태를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자신들이 필요할 때 주고, 필요하지 않을 때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다시 해석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에서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37:5–10에는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바벨론 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34장의 노예 재예속이 이러한 군사적 상황의 변화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기가 심할 때에는 노예들을 풀어 주었다가, 포위가 풀릴 듯하자 이전의 노동력과 소유권을 되찾으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이 설명은 본문의 정황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11절은 그들이 왜 결정을 뒤집었는지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확정적인 동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백성이 형제를 노예로 삼다

예레미야 34:12–16 본문 →

하나님은 노예를 다시 붙잡은 사람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 노예의 집에서 이끌어 낸 날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말했다.」예레미야 34:1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왜 노예들을 풀어 주어야 하는지 설명하시면서 사람들 사이의 일반적인 선의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어떤 백성인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노예의 집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살았습니다. 자기 삶을 결정할 자유가 없었고, 강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한 백성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자유를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자유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기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내야 했습니다.

여섯 해의 종살이와 일곱째 해의 해방

「『일곱 해가 끝나면 너희는 저마다 자기 히브리인 형제를 풀어 주어야 한다. 그가 네게 팔려 와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으면, 너는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어 네 곁을 떠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 조상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예레미야 34:14 · 본디새김

「일곱 해가 끝나면」이라는 표현과 「여섯 해 동안」이라는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이것을 서로 충돌하는 두 기간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섯 해 동안 섬긴 뒤 자유를 얻는 일곱째 해의 규정과 관련됩니다.

신명기 15:1–2에는 일곱 해 주기의 빚 면제에 관한 규정도 있지만, 히브리인 종의 해방은 15:12에서 여섯 해를 섬긴 뒤 일곱째 해에 풀어 주는 규정으로 제시됩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법의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그 사람을 「자기 히브리인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사회적 지위 아래에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속한 백성이라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형제를 영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존재처럼 대했습니다.

「너희는 오늘 돌아서서 저마다 자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여, 내 눈에 올바른 일을 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집에서 내 앞에서 언약도 맺었다.」예레미야 34:15 · 본디새김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혔다. 저마다 자기 남자 노예와 자기 여자 노예를 그들 뜻대로 지내도록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가 도로 데려와, 강제로 너희의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로 삼았다.」예레미야 34:16 · 본디새김

15절과 16절에는 똑같이 「돌아서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15절에서는 옳은 방향으로 돌아섰습니다.

16절에서는 그 방향에서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한 번 돌아섰지만, 그 돌아섬을 다시 되돌렸습니다.

16절에서는 그들이 「그들 뜻대로 지내도록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가」 다시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원래의 해방이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자유를 포함했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왜 노예를 다시 붙잡은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될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 곧 성전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행동을 자기 편의에 따라 취소한 것입니다.

이는 단지 종교적 약속을 어긴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를 무너뜨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약속에 이용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예배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얼마나 엄숙하게 언약을 맺었는가보다, 그 언약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유를 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포된 자유

예레미야 34:17 본문 →

17절은 이 장의 중심에 놓인 역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형제와 자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칼과 역병과 굶주림을 향한 자유다. 내가 너희를 땅의 모든 왕국이 보고 떨 대상으로 만들겠다.」예레미야 34:1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보호하시는 손길에서 물러나시어 그들이 심판의 재앙을 겪게 될 것이라는 반어적 선언입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 자신이 재앙을 향해 놓이게 됩니다.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자기 형제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에서는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이웃을 지배하는 권력은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자유」라는 낱말은 레위기 25:10에서 희년을 선포할 때에도 등장합니다. 「너희는 오십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해야 한다.」 (레위기 25:10) 희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이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토지와 가족의 관계가 회복되고, 경제적 곤경 때문에 무너졌던 삶의 기반을 되찾는 일을 포함합니다. 예레미야 34장은 바로 그 자유라는 말을 심판의 언어로 뒤집습니다. 예레미야 15:2에서도 죽음, 칼, 굶주림과 포로살이가 심판의 운명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제 그 심판의 언어가 자유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더욱 날카롭게 들립니다.

둘로 갈라진 송아지 사이를 지나간 사람들

예레미야 34:18–20 본문 →

18절부터는 노예 해방을 위해 맺었던 언약의 구체적인 의식이 등장합니다.

「내 언약을 어기고, 내 앞에서 맺은 언약의 말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그들이 둘로 가르고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간 송아지처럼 만들겠다.」예레미야 34:18 · 본디새김

고대의 언약 체결에서는 동물을 나누어 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행동이 언약의 엄중함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둘로 갈랐던 송아지를 다시 언급하시며, 언약을 어긴 사람들이 그 송아지와 같은 운명에 놓일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단순히 말로만 동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웠고, 동물을 가르는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이는 종교적 의식의 엄숙함이 인간의 행동을 자동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언약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19절에서는 송아지 조각들 사이로 지나간 사람들이 열거됩니다. 유다의 고관들, 예루살렘의 고관들, 내시들, 제사장들, 그 땅의 모든 백성입니다.

정치적 지도자들뿐 아니라 제사장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언약 의식에 참여했고,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이루어진 언약이었지만, 그 집을 섬기는 사람들도 언약 위반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과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손에 넘기겠다.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예레미야 34:20 · 본디새김

시체가 묻히지 못하고 들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죽음 이상의 치욕을 뜻합니다. 적절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완전한 패배와 수치를 나타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5:9–18에도 동물을 쪼개 놓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동물을 준비하고, 이후 타오르는 횃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창세기의 장면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이지만, 예레미야 34장에서는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 직접 송아지 조각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두 장면의 참여자와 목적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동물을 가르는 행동이 언약의 엄중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8절의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사람들이 송아지처럼 된다는 비교를 어떻게 문법적으로 이해할 것인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어긴 사람들의 운명이 둘로 갈린 송아지의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물러났던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온다

예레미야 34:21–22 본문 →

마지막 두 절에서 이야기는 다시 군사적 현실로 돌아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고관들도 그들의 원수들의 손과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손과 너희에게서 물러나고 있는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겠다.」예레미야 34:21 · 본디새김

예레미야 37:5–10에는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물러났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포위가 풀릴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대를 무너뜨리십니다.

「보아라, 내가 명령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그들을 이 성읍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은 이 성읍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불태울 것이다.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겠다.」예레미야 34:2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34장 전체에 반복된 「돌아서다」라는 표현을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되살립니다.

백성은 옳은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다음에 그 결정을 뒤집고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풀어 주었던 노예들을 도로 데려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물러났던 바벨론 군대를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 군대가 일시적으로 물러났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다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잠시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을지라도, 그들이 맺은 언약을 어긴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결말에는 회복의 약속이 새롭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앞 장들에서 이미 회복에 관한 말씀이 충분히 주어졌지만, 34장은 일부러 그 약속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백성을 회복시키겠다고 하셨다는 사실이, 지금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언약을 깨뜨려도 괜찮다는 허락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를 받았으나 자유를 주지 않은 사람들

예레미야 34:1–22 본문 →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자유를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들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은 자기 형제를 다시 노예로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경험한 조상들의 후손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이집트의 지배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성읍 안에서는 한때 풀려났던 사람들이 다시 붙잡혀 종이 되었고, 성읍 밖에서는 물러갔던 군대가 다시 진격해 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거두어들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기대하던 안전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유를 받은 백성이 자기 형제의 자유를 빼앗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34장은 그 모순을 마지막까지 드러낸 채,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돌아오는 바벨론 군대의 발걸음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