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7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말씀을 묻고 진실을 가두는 나라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가 물러났습니다. 성읍을 에워싸던 적군이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안도했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힙니다.
도시를 위협하던 군대는 물러났는데, 도시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는 자유를 잃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구원받을 가능성에 기대를 걸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이 믿고 싶어 하는 희망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시드기야 왕의 행동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예언자가 감옥에 갇힌 뒤에는 은밀히 불러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만, 그 말씀이 자신의 선택을 바꾸게 하지는 못합니다.
왕이지만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
37장은 새로운 왕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이 시드기야를 유다 땅의 왕으로 세웠다.예레미야 37:1 · 본디새김
고니야는 여호야긴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여호야김의 아들이며, 시드기야는 여호야김의 형제이므로 고니야의 숙부입니다.
열왕기하 24:10~17에 따르면 여호야긴은 바벨론에 항복하여 포로로 끌려갔고, 느부갓레살은 그의 숙부 맛다냐를 왕으로 세우면서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었습니다. 기원전 597년의 일입니다.
시드기야는 다윗 왕가의 후손이지만, 그를 왕위에 앉힌 사람은 바벨론 왕입니다. 유다는 여전히 왕과 궁전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적인 왕국으로서의 주권은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의 왕권은 시작부터 모순된 상황에 놓입니다. 그는 유다의 왕으로서 나라를 지켜야 하지만, 자신의 왕위를 보장해 준 강대국은 바로 유다를 위협하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복종해야 합니까?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회복해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길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외교 전략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야훼께서 이미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7:5~12).
시드기야에게 정치적 계산과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충돌하는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설명하기도 전에 먼저 평가를 내립니다.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그 땅의 백성은 여호와야훼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한 말을 듣지 않았다.예레미야 37:2 · 본디새김
앞으로 왕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은밀하게 말씀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그가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인 제사장 스바냐를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말했다. 「부디 우리를 위해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기도해 주시오.」예레미야 37:3 · 본디새김
시드기야가 기도를 요청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요청이 진실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를 요청하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판단을 바꾸어 줄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줄 하나님의 도움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건은 바로 그러한 태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께 자신의 길을 결정하시도록 맡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포위망이 풀린 순간, 가장 위험한 착각이 시작된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군대가 출동합니다.
칼데아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납니다. 여기서 칼데아 사람들은 바벨론 군대를 가리킵니다.
성문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외부에서 식량을 들여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포위망이 풀렸다는 소식은 생존 가능성이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집트는 바벨론과 맞설 수 있는 주요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집트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사실은 유다가 바벨론을 견제할 외교적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물으려고 너희를 보낸 유다 왕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아라, 너희를 도우러 나온 파라오의 군대는 본국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예레미야 37:7 · 본디새김
「『칼데아 사람들은 돌아와 이 성읍을 공격하고, 이 성읍을 점령하여 불로 태울 것이다.』」예레미야 37:8 · 본디새김
눈앞의 군사적 상황과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신 미래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집트의 출병은 실제 사건이고, 바벨론의 철수도 실제 사건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건에서 사람들이 끌어내는 결론을 부정합니다.
상황이 좋아졌다는 사실과 위기가 끝났다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칼데아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떠날 것이다』 하고 말하며 너희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들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7:9 · 본디새김
누군가가 거짓 정보를 전달해서 백성이 속는 상황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결론을 믿으면서 스스로 잘못된 확신을 굳히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집트 군대가 출동했다는 사실만으로 유다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군사적 판단으로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군사 분석가로서 최선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확신은 바벨론이 이집트보다 강하다는 일반적 판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너희가 너희와 싸우는 칼데아 군대를 모두 쳐서 그들 가운데 몸이 찔린 사람들만 남는다 해도, 그들이 저마다 자기 천막에서 일어나 이 성읍을 불로 태울 것이다.」예레미야 37:10 · 본디새김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표현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데 성공하여 부상자들만 남는다고 해도,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인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부상자들만 남은 군대가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을 제시하여 여호와야훼의 심판이 인간의 군사적 계산으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 21:8~10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두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생명의 길은 바벨론 군대에 나가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맞서 성읍 안에 남는 길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다의 구체적인 심판 상황에 주어진 예언입니다. 모든 시대에 강대국에 항복해야 한다는 보편적 정치 원칙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유다에 요구된 것은 더 강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거부해 온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서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포위망이 풀린 것을 보고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레미야는 그들이 믿고 싶은 것과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선언 때문에 그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입니다.
투항하지 않았는데 투항하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다
바벨론 군대가 물러난 틈을 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으로 가려고 예루살렘을 나섰다. 그곳에서 백성 가운데 자기 몫을 받으려는 것이었다.예레미야 37:12 · 본디새김
그런데 베냐민 문에 이르자 경비 책임자 이리야가 그를 붙잡습니다.
그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하나냐의 손자이며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는 경비 책임자가 있었다. 이리야가 예언자 예레미야를 붙잡고 말했다. 「당신은 칼데아 사람들에게 투항하는 것이오.」예레미야 37:13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승리를 오랫동안 예언해 왔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도 전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의심받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의심을 품을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과 실제로 투항하려 했다는 것은 다릅니다.
예레미야가 말했다. 「거짓말이오. 나는 칼데아 사람들에게 투항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이리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리야는 예레미야를 붙잡아 고관들에게 데려갔다.예레미야 37:14 · 본디새김
그는 유다의 정치적 독립을 무너뜨리려는 바벨론의 협력자로서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유다에 주신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서는 시드기야와 신하들과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경비 책임자 이리야도 예레미야의 해명을 듣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해 온 사회에서는 예레미야가 전하는 메시지가 반역으로 의심받습니다. 그의 행동은 이미 형성된 정치적 의심 속에서 해석되고, 그의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고관들에게 끌려가고, 고관들은 그에게 화를 내며 때립니다. 이후 서기관 여호나단의 집에 마련된 감옥에 가둡니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구덩이 감옥과 감방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예레미야 37:16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라를 배신하는 사람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둔 사람들은 오히려 여호와야훼께서 유다를 향해 선포하신 경고를 거부함으로써 나라의 위험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반역자로 몰리고, 듣기 좋은 희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자기 몫을 받으려는 것」에 사용된 히브리어 라할리크(חָלַק)는 몫을 나누거나 분배에 참여하는 일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도 드물고, 무엇을 나누거나 받으려 했는지 목적어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습니다. 재산이나 토지에 관한 몫을 받으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레미야가 베냐민 지역 아나돗 출신이라는 사실(1:1)도 그런 이해와 어울립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상속받을 토지를 확인하려 했는지, 다른 종류의 재산 분배에 참여하려 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분리하려 했다는 식으로 읽는 전통도 있어, 정확한 목적에는 불확실성이 남습니다. 16절의 「구덩이 감옥과 감방들」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구덩이형 감옥과 그 내부의 방들을 가리키는지, 서로 다른 구금 시설을 나란히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일반적인 가택 연금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가혹한 구금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감옥에 가둔 사람에게 다시 말씀을 묻는 왕
예레미야가 여러 날을 감옥에서 지낸 뒤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게 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다. 왕은 자기 집에서 그에게 은밀히 물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말이 있소?」 예레미야가 말했다. 「있습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임금님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예레미야 37:17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국가의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처럼 취급받아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국가의 최고 권력자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메시지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를 감옥에 가둔 권력자가 직접 자신의 의견을 묻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는 왕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만일 왕에게 유리한 전망을 제시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전에 전했던 내용과 충돌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앞서 7~10절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물러나고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시드기야 자신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왕이 이제 그 판단의 결과를 직접 감당할 사람으로 지목됩니다.
그의 왕위는 바벨론 왕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이 왕은 왕국의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미래조차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예언을 전한 뒤 대화를 끝내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왕에게 질문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말했다. 「제가 임금님과 임금님의 신하들과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여러분은 저를 감옥에 가두셨습니까?」예레미야 37:18 · 본디새김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면서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을 감옥에 가둔 권력자들에게 잘못된 예언을 믿었던 책임을 묻습니다.
「『바벨론 왕은 여러분과 이 땅을 치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분에게 예언하던 여러분의 예언자들은 어디 있습니까?」예레미야 37:19 · 본디새김
바벨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현실과 맞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이미 유다를 침공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언을 전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실제로 바벨론의 위협을 경고했던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당시 하나냐는 바벨론의 멍에가 꺾이고 포로들과 성전 기물들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8:1~4). 예레미야는 그처럼 평안을 예언하는 사람이 참으로 여호와야훼의 보냄을 받았는지는 그 말이 이루어질 때 확인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8:9).
왕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과거에 자신이 믿었던 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되묻습니다.
왕이 미래에 관한 답을 구하는 동안, 예레미야는 왕이 이미 경험한 현실부터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왕이 왜 은밀히 물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하들과의 갈등을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고, 위험한 예언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를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9절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정확히 누구이며 각각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모두 죽었다거나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예언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선포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뒤 마지막으로 왕에게 간청합니다.
「이제 저의 주인이신 임금님, 부디 들어 주십시오. 부디 저의 간구가 임금님 앞에 이르게 해 주십시오. 제가 그곳에서 죽지 않도록 저를 서기관 여호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주십시오.」예레미야 37:20 · 본디새김
여호나단의 집에 마련된 감옥은 그에게 실제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낸 예레미야는 다시 돌아가면 죽을 수 있다고 호소합니다.
오히려 바로 앞에서 그는 왕에게 불리한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언을 전한 뒤에 자신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두 행동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거나, 가능한 모든 보호를 거부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자기 목숨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예언자가 고통과 두려움, 분노를 드러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20:7~18에서는 자신의 소명 때문에 겪는 수치와 고통을 토로합니다. 15:15~18에서도 박해 속에서 여호와야훼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그러나 37장에는 조금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풀어 줄 권한을 가진 왕에게 직접 간청합니다. 그는 왕의 책임을 묻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정당한 보호를 요청합니다.
3~7절에서 예레미야는 왕과 백성의 사정을 위해 여호와야훼께 기도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왕에게 자신의 간구를 들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왕은 여호와야훼의 뜻을 묻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예레미야를 어떻게 대할지 결정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가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자유 대신 빵 한 덩이를 허락한 왕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간청을 일부 받아들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자,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경비대 뜰에 가두고, 성읍의 빵이 다 떨어질 때까지 빵 굽는 이들의 거리에서 날마다 빵 한 덩이를 가져다주었다. 예레미야는 경비대 뜰에 머물렀다.예레미야 37:21 · 본디새김
이는 예레미야가 처했던 이전의 구금 상태보다 나은 처우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왕은 예레미야가 그 감옥에서 죽을 위험이 있다는 호소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여전히 죄가 입증되지 않은 채 구금되어 있습니다. 왕에게는 예레미야의 처우를 개선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한을 제한적으로만 사용합니다.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호야김처럼 두루마리를 불태우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레미야를 죽이도록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여 나라의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고, 그를 완전히 석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씩 양보하지만 결정적인 선택은 피합니다.
예레미야가 빵을 한 덩이씩 받는 일은 개인적인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빵은 예루살렘이라는 성읍 전체의 식량 사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매일 빵을 주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읍에 빵이 남아 있어야 그 명령도 효력을 발휘합니다.
왕은 빵을 나누어 주도록 할 수 있지만, 사라진 빵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아직 성읍이 함락되는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성읍의 식량이 끝내 바닥나는 상황까지 시야에 넣습니다. 이후 38:9에서는 성읍에 더 이상 빵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언급됩니다.
마지막 빵 한 덩이
처음에는 왕이 여호와야훼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왕이 예언자에게 빵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어느 장면에서도 왕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길을 돌이켰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자유조차 지킬 권력이 없지만, 왕이 알고 싶어 하는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시드기야는 예언자를 가두거나 다른 곳으로 옮길 권력이 있지만, 그 말씀이 가리키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성읍은 아직 서 있고, 시드기야는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신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37장은 바로 그 자리에 멈춥니다.
예레미야는 왕이 허락한 빵을 먹으며 경비대 뜰에 머뭅니다. 왕은 아직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그 나라에 남은 빵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