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8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진흙에서 건져진 예언자, 진창에 빠진 왕

예레미야가 물 저장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물은 없고 바닥에는 진흙만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 진흙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나서서 그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야기 후반부에 진흙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가 아니라 시드기야 왕입니다. 예레미야는 왕이 듣게 될 조롱의 노래를 전합니다. 「네 발이 진창에 빠지자 그들은 뒤로 물러났구나.」

두 사람 모두 진흙에 빠집니다. 한 사람은 실제 구덩이에 빠지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운명 속에서 발이 묶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진흙에서 빠져나옵니다. 반면 시드기야는 빠져나올 길을 분명히 안내받고도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이 장에서 더 깊이 빠진 사람은 진흙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결단하지 못하는 시드기야 왕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히 믿음이 강한 예언자와 믿음이 약한 왕을 대비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음에 내버려 두는지, 여호와야훼께서 열어 주신 생명의 길을 사람들이 왜 거부하는지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38장 본문 읽기 →

살 수 있는 길을 말했는데 죽여야 할 사람이 되다

예레미야 38:1–4 본문 →

앞 장에서 예레미야는 투항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왕의 명령으로 경비대 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38장은 그곳에 있던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이 성읍에 머무는 사람은 칼과 굶주림과 역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갈대아 사람들에게 나가는 사람은 살 것이다. 자기 목숨을 전리품으로 얻어 살 것이다.』」예레미야 38: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일반적인 전쟁의 상식을 뒤집습니다.

고대의 포위전에서 성벽은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어 수단이었습니다. 적군이 성벽을 돌파하기 전까지 주민들은 그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적군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말은 당시 유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성읍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로 들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군사 전략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예레미야 21:8~10에서 선포된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다시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결정하신 상황에서, 유다가 살아남는 길은 성벽을 끝까지 지키는 데 있지 않고 바벨론에 대한 저항을 멈추는 데 있었습니다.

전리품은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얻는 것입니다. 보통은 재물이나 포로, 가축처럼 전쟁의 결과로 차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얻는 전리품이 자기 목숨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고 적군을 물리쳐 승리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제 그러한 승리를 기대할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닥친 때에 목숨을 건지는 것은 비참한 패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바로 그 길을 생명의 길로 제시하십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의 권고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여호와야훼의 구체적인 말씀에 근거합니다.

고관들이 왕에게 말했다. 「부디 이 사람을 죽여 주십시오. 그가 이런 말을 하여 이 성읍에 남은 군인들의 사기와 온 백성의 사기를 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구하고 있습니다.」예레미야 38:4 · 본디새김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군사적 영향만 평가합니다. 그 말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왔는지는 판단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고관들은 자신들이 백성의 평안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이 고집하는 저항이 오히려 더 많은 죽음과 파괴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예언자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이려는 사람은 나라가 멸망을 피할 마지막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생명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됩니다.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레미야 38:5–6 본문 →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죽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말했다. 「보시오, 그는 그대들의 손에 있소. 왕은 그대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소.」예레미야 38:5 · 본디새김

이것이 실제 권력의 한계에 대한 고백인지, 책임을 피하려는 변명인지는 이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전쟁 중 왕이 군사 지도자들과 정치적으로 충돌하기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시드기야가 완전히 무력한 왕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0절에서 사람 서른 명을 동원하여 예레미야를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14절에서는 예레미야를 자신에게 데려오게 합니다. 24절에서는 그와 나눈 대화를 비밀에 부치도록 요구합니다.

시드기야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관들이 원하는 일을 저지하는 데에는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물 저장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내려보냈다.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만 있어서, 예레미야는 진흙 속으로 가라앉았다.예레미야 38:6 · 본디새김

스스로 올라올 수 있는 사다리나 출구가 있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칼로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생명을 보호한 것도 아닙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 넣어 놓고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게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한 사람을 죽음의 구덩이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죄를 입증하는 재판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왕의 허락을 얻은 고관들이 예언자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께서 알려 주신 생명의 길을 전했지만, 자신은 죽음에 가까운 장소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유다에서는 비가 내릴 때 물을 모아 두기 위해 땅을 파거나 바위를 깎아 물 저장 구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지 사람을 가두기 위해 설계된 감옥은 아니었습니다.

왕을 섬기는 사람이 왕보다 바르게 행동하다

예레미야 38:7–13 본문 →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었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일하는 내시였습니다. 구스는 이집트 남쪽,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 지역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따라서 에벳멜렉은 유다 왕가의 일원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의 궁정 관리로 소개됩니다.

왕을 섬기는 이 사람이 이제 왕에게 맞서 부당한 일을 고발합니다.

「저의 주인이신 임금님, 이 사람들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은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성읍에는 더 이상 빵이 없으니, 그는 그곳에서 굶주려 죽게 될 것입니다.」예레미야 38:9 · 본디새김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해야 하는지를 논쟁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옳은 예언자인지 입증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지금 벌어진 일 자체의 부당함입니다.

유다의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백성에게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구스 사람 에벳멜렉은 바로 그 고관들이 행한 일을 악하다고 고발합니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가 옳다는 것을 모두 증명한 뒤에야 그를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부당하게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행동합니다.

시드기야는 에벳멜렉에게 사람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조금 전까지 고관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왕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명령을 내립니다.

본문은 그가 왜 처음에는 예레미야를 내주고 나중에는 구출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일관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반면 에벳멜렉은 말을 한 뒤 실제로 움직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의 창고 아래로 들어가 해진 헝겊들과 천 조각들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밧줄로 예레미야에게 내려보냅니다.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부디 이 해진 헝겊들과 천 조각들을 겨드랑이와 밧줄 사이에 받쳐 넣으십시오.」 예레미야는 그대로 했다.예레미야 38:12 · 본디새김

진흙에 빠져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을 밧줄로 당겨 올릴 때, 겨드랑이와 몸에 밧줄이 직접 닿으면 큰 압박과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에벳멜렉은 천을 받쳐 그 부담을 줄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구한다는 명분만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행동했습니다.

고관들은 나라 전체의 평안을 이야기하면서 한 사람을 죽음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에벳멜렉은 나라의 미래에 관한 거창한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바로 눈앞의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구덩이에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에벳멜렉이 내려보낸 천을 밧줄 사이에 받쳐 넣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끌어올리도록 맡겨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에벳멜렉에게 직접 명령하셨다는 설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되는 과정에는 한 궁정 관리의 용기와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진 뒤 다시 경비대 뜰에 머뭅니다. 그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만 죽을 위험에 처했던 구덩이에서는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내시」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리스(⁨סָרִיס⁩)는 궁정 관리나 고위 관원을 가리킬 수도 있으므로, 그가 신체적으로 거세된 사람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에베드 멜레크는 문자적으로 ‘왕의 종’을 뜻합니다. 이것이 본래 이름이었는지 궁정에서 사용된 호칭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야기 속 그의 역할과 잘 어울립니다. 특히 에벳멜렉의 행동은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는 공의의 요구와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22:3에서 여호와야훼는 왕궁을 향해 공정과 정의를 행하고, 압제받는 사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8장에서 왕궁 안의 고관들은 사람을 억압합니다. 반면 구스 사람 에벳멜렉은 억압받는 사람을 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행동이 반드시 가장 높은 지위나 유다 공동체 안의 출신 배경을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열려 있는 길

예레미야 38:14–18 본문 →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 예언자 예레미야를 자기가 있는 곳, 곧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는 세 번째 입구로 데려오게 했다. 왕이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묻겠소.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마시오.」예레미야 38:14 · 본디새김

그런데 예레미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말했다. 「제가 임금님께 말씀드리면, 임금님은 반드시 저를 죽이실 것 아닙니까? 또 제가 조언해 드려도 제 말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예레미야 38:15 · 본디새김

그는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가 고발당하고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위협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정말 문제 삼는 것은 그 위험만이 아닙니다.

왕이 아무리 질문해도 그 대답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예언자는 계속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왕은 계속 그것을 거부하는 일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은밀히 맹세했다. 「우리에게 이 목숨을 지어 주신 여호와야훼가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오. 나는 그대를 죽이지도 않고, 그대의 목숨을 노리는 이 사람들의 손에 그대를 넘기지도 않겠소.」예레미야 38:16 · 본디새김

왕은 자신과 예레미야의 목숨을 지어 주신 분이 여호와야훼임을 인정합니다. 생명이 궁극적으로 왕의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야훼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말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왕은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죽음의 구덩이에 내버려 두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로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는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다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말했다.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참으로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나가면, 너는 목숨을 건지고 이 성읍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너와 네 집안이 살 것이다.』」예레미야 38:17 · 본디새김

반대로 나가지 않으면 성읍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불타게 되며, 왕 역시 붙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에 주어지는 빈 위로가 아닙니다. 왕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시드기야에게는 아직 응답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고관들에게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항복하는 것입니다. 왕은 자신이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왕국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시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서 왕이 살아남는다는 약속을 왕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독립을 회복한다는 약속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결과를 말하지 않습니다.

왕은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승리할 수는 없지만, 자신과 백성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받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왕에게 더 이상 가능한 선택이 없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왕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선택을 통해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시드기야는 무엇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합니까?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37:8에서는 바벨론 군대가 돌아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불태울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38:17에서는 시드기야가 나가면 성읍이 불에 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선언 사이에는 해석해야 할 긴장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이해는 37장의 선언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불순종의 길이 가져올 결과를 확정적으로 선포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8장은 왕이 그 길에서 돌이킨다면 다른 결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또 다른 이해는 예언의 경고 자체가 회개의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예레미야 18:7~10의 원칙을 중심으로 두 선언을 읽는 것입니다. 심판을 선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돌이키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정말 두려워한 사람들

예레미야 38:19–20 본문 →

시드기야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나는 갈대아 사람들에게 투항한 유다 사람들이 두렵소. 갈대아 사람들이 나를 그 유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 그들이 나를 잔혹하게 다룰까 두렵소.」예레미야 38:19 · 본디새김

본문은 그들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시드기야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투항한 사람들 가운데 시드기야에게 원망이나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왕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넘겨져 학대당할 가능성을 걱정합니다. 따라서 그의 두려움을 단순히 비겁함이나 자존심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가 말했다. 「그들이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제가 임금님께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임금님께 잘될 것이며, 임금님의 목숨은 보전될 것입니다.」예레미야 38:20 · 본디새김

여기서 「귀를 기울이십시오」라는 표현은 단순히 소리를 들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왕은 이미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따라 행동할 것인가입니다.

예레미야가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별도의 특별한 구원의 길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다른 유다 사람들처럼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시드기야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명령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그는 고관들의 반응, 이미 투항한 유다 사람들의 행동, 바벨론의 처분을 걱정합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서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느끼지 말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두려움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시드기야가 해야 할 선택은 자기 생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결정에 예루살렘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나라 전체의 생명과 파괴가 걸린 문제 앞에서 자신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넘겨질 가능성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두려움이 국가적 결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왕이 그 길을 거부할 경우 일어날 일을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왕의 발이 진창에 빠진다

예레미야 38:21–23 본문 →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항복하기를 거부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합니다.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왕의 군대나 고관들이 아닙니다. 왕궁에 남아 있던 여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고관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유다 왕의 집에 남아 있던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끌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너를 꾀어 너를 이겼구나. 네 발이 진창에 빠지자 그들은 뒤로 물러났구나.』」예레미야 38:22 · 본디새김

4절에서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에게 친근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왕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6절에서 예레미야는 진흙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22절에서는 왕의 발이 진창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진흙에서 끌어올려 준 사람이 있었지만, 시드기야에게는 진창에 빠뜨려 놓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창은 정치적 실패와 무력한 처지를 드러내는 비유로 읽힙니다. 왕은 자신이 사람들의 관계를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고관들에게 맞서지 않고, 예언자와의 대화는 비밀에 부치며, 자신의 판단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보여 주는 장면에서는 바로 그 관계들이 왕을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임금님의 모든 아내와 아들들을 갈대아 사람들에게 끌고 나갈 것입니다. 임금님도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잡히실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이 성읍을 불로 태우실 것입니다.」예레미야 38:23 · 본디새김

왕이 두려워하는 일이 자신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호해야 할 가족에게도 닥칩니다.

18절에서는 갈대아 사람들이 성읍을 불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왕이 성읍을 불태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예루살렘을 불태울 군대가 바벨론 군대임을 분명히 밝힌 만큼, 여기서는 왕이 불길을 직접 일으킨다는 물리적 행동보다 그의 선택이 성읍의 파괴를 초래한다는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단지 바벨론 왕의 잔혹함이나 고관들의 잘못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이 있었고, 그 선택이 성읍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책임을 매우 무겁게 묻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너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안셰 셸로메카로, 문자적으로는 ‘네 평안의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두 구절에서 ‘평안’이라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이 사용됩니다. 이것이 두 장면 사이의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의미상의 대비는 분명합니다. 두 구절에서 진흙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사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둘 다 사람이 빠지거나 발이 묶이는 진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6절에서 예레미야가 진흙에 가라앉았다는 동사와, 22절에서 왕의 발이 진창에 빠졌다는 표현은 모두 히브리어 타바(⁨טָבַע⁩), 가라앉다·빠지다라는 어근을 사용합니다. 다만 22절은 왕의 발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23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왕을 향한 단수 동사와 목적어로 표시된 「이 성읍」을 사용하므로, 제시된 본디새김 번역처럼 왕을 행위의 주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일부 사본과 고대 역본은 성읍이 불태워진다는 수동형을 전합니다. 본디새김은 왕에게 직접 책임을 묻는 읽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진실을 묻던 왕이 진실을 숨기라고 명령하다

예레미야 38:24–28 본문 →

왕과 예레미야의 대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왕은 자신이 들은 말씀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아무도 이 말을 알지 못하게 하시오. 그러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오.」예레미야 38:24 · 본디새김

14절에서 왕은 예레미야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 대화를 알지 못하도록 숨기라고 명령합니다.

처음에 왕은 진실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들은 뒤에는 공개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그는 비밀리에 예언자를 만나고, 비밀리에 맹세하며, 다시 대화의 내용을 비밀에 부치도록 요구합니다. 왕 자신과 그의 가족, 예루살렘 전체의 생존이 걸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왕과 예언자 사이의 은밀한 대화 속에 머물게 됩니다.

시드기야는 고관들이 찾아와 무엇을 물을 것인지까지 예상합니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자신을 여호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다고 대답하도록 지시합니다.

왕이 지시한 대로 예레미야가 대답했고, 고관들이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권력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대화를 숨기는 데 사용되지만,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결단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왕의 동기는 하나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고관들이 왕과 예언자의 대화를 알게 되면 다시 예레미야의 생명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왕 자신이 그 대화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앞서 예레미야 37:20에서 예레미야는 실제로 그런 간구를 했습니다. 따라서 왕이 지시한 말의 내용 자체가 이전에 없었던 일을 꾸며 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만남의 핵심 내용은 그런 간구가 아니었습니다. 왕이 항복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대화의 중심이었습니다. 따라서 26절의 지시는 실제 있었던 일을 말하되 이번 대화의 중요한 내용을 감추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가 거짓말을 했다고 단순히 규정할 것인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정당한 대응으로 볼 것인지는 별도의 윤리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본문 자체는 그 행동을 도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읍이 점령되는 날까지

예레미야 38:1–28 본문 →

시드기야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알게 된 뜻에 따라 자신의 길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성읍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왕 앞에 놓였지만, 그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함락 시점으로 나아갑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점령되던 날까지 경비대 뜰에 머물렀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예레미야 38:28 · 본디새김

예레미야가 경비대 뜰에 머물렀다는 서술 뒤에,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라는 시간절이 시작되지만 그 내용은 이 장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 구분을 넘어 이어지는 문장의 시작입니다.

예레미야는 여전히 경비대 뜰에 있습니다.

구덩이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고관들에게 죽임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가두었던 권력의 통제 아래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드기야 역시 여전히 왕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렸고, 비밀리에 말씀을 들었으며,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가 그 길을 받아들였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은 아직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성읍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졌고, 시드기야는 여전히 진창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벽 너머로, 그가 피하려 했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