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9장

이 장의 자리 · 46–52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예레미야 49장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그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가?

그런데 장을 읽어 가다 보면 이 질문이 점점 넓어집니다. 에돔은 높은 바위틈에 자리 잡고 자신을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다마스쿠스는 칭송받는 도시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막의 게달과 하솔 사람들은 성문과 빗장 없이도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엘람은 활을 자신의 힘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나라를 향해 말씀하시는 분은 한 분입니다.

예레미야 49장의 하나님은 나라들의 왕권을 무너뜨리시면서도, 그 나라 사람들의 운명을 단지 멸망으로만 끝맺지 않으십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49장 본문 읽기 →

암몬 —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생각했는가?

예레미야 49:1–6 본문 →

“이스라엘에게 아들들이 없느냐?”

암몬에 대한 예언은 영토를 둘러싼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암몬 자손에 관하여,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에게 아들들이 없느냐? 그에게 상속자가 없느냐? 어찌하여 말캄이 갓을 차지하고, 그의 백성이 갓의 도시들에 살았느냐?」예레미야 49:1 · 본디새김

여기서 언급되는 갓은 요단강 동쪽에 땅을 분배받았던 이스라엘 지파입니다. 민수기 32:33–36과 여호수아 13:24–28은 갓 지파의 땅과 성읍들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그 땅의 일부는 암몬 사람들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떠올려야 합니다. 열왕기하 15:29에 따르면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은 길르앗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역대상 5:26도 요단강 동쪽 지파들의 유배를 기록합니다.

그 이후 암몬이 이스라엘의 약해진 지배력을 이용하여 갓의 영토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암몬의 점령이 정확히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이 본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들들이 없느냐?”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지를 알아보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상속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암몬이 그 땅을 차지한 일을 문제 삼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여호와야훼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지파들에게 분배하신 기업이었습니다. 레위기 25:23은 이스라엘에게 땅의 궁극적인 소유자가 여호와야훼이심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갓의 땅을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두 나라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이스라엘의 기업이라는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이 약해진 틈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기업의 권리까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말캄이 어떻게 땅을 차지하는가?

1절의 질문은 암몬 사람들이 아니라 말캄을 먼저 언급합니다.

말캄(⁨מֶלֶךְ⁩)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그들의 왕’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 말캄이 제사장들과 고관들을 거느리고 포로로 끌려간다고 말하는 점을 고려하면, 암몬의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열왕기상 11:5는 암몬의 신 밀곰을 언급합니다. 말캄과 밀곰은 밀접하게 관련된 신명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디새김은 이 구절의 히브리어 형태를 살려 말캄이라고 옮깁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를 차지하면, 그 승리를 자기 신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왕의 군대가 땅을 정복해도, 그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것은 자신들의 신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소유권을 문제 삼으십니다.

말캄이 무슨 권리로 갓의 땅을 차지했는가? 이 질문은 암몬의 군사적 성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공이 정당한 소유권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결과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암몬 자손의 랍바에 전쟁의 함성을 들리게 하겠다. 그곳은 황폐한 폐허 더미가 되고, 그 딸린 마을들은 불에 탈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차지했던 자들을 차지할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예레미야 49:2 · 본디새김

이 반복은 단순한 군사적 복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누가 기업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지에 관한 판결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했던 도시가 흩어진 사람들로 바뀌다

「어찌하여 골짜기들을 자랑하느냐? 네 골짜기가 흘러넘치는구나. 등 돌린 딸아, 제 보물을 믿으며 『누가 내게 오겠는가?』 하는 자야.」예레미야 49:4 · 본디새김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대답은 정반대입니다.

「보아라, 내가 네 주위 사방에서 네게 공포를 가져오겠다. 너희는 저마다 제 앞쪽으로 내쫓길 것이며, 떠도는 자를 모아 줄 이가 없을 것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5 · 본디새김

암몬은 다른 민족의 땅을 차지하고 자기 백성을 그곳에 정착시켰습니다. 이제는 자기 백성이 흩어져 떠도는 처지가 됩니다.

심판은 끝이 아니다

그런데 암몬에 대한 예언은 여섯 절 만에 전환됩니다.

「그러나 그 뒤에 내가 암몬 자손의 형편을 회복시키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6 · 본디새김

하나님은 부당한 소유를 바로잡으시면서도, 그 잘못을 범한 민족의 미래를 다시 여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암몬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러나 다음에 등장하는 에돔은 땅을 차지하는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지혜롭고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의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조금 더 깊이

골짜기가 흘러넘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물이나 풍요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골짜기를 자랑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본문은 무엇이 흐르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에돔 — 지혜로운 사람이 왜 자신을 속이는가?

예레미야 49:7–13 본문 →

에돔에 관하여,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데만에 더는 지혜가 없느냐? 분별 있는 자들에게서 계책이 사라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예레미야 49:7 · 본디새김

에돔은 사해 남쪽의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입니다. 성경은 에돔을 에서의 후손과 연결합니다(창세기 36:1, 8).

데만은 에돔과 관련된 지역 또는 집단의 이름입니다. 욥기 2:11에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등장합니다. 엘리바스의 말 전체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혜를 말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데만이라는 이름과 지혜 전통의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에돔에게 먼저 군사력이 남아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지혜가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위기 앞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를 거두는 자와 도둑도 남기는 것이 있다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네게 온다면 주워 모을 포도송이를 남겨 두지 않겠느냐? 도둑들이 밤에 온다면 자기들에게 충분한 만큼만 망가뜨릴 것이다.」예레미야 49:9 · 본디새김

포도 수확을 하는 사람은 모든 열매를 빠짐없이 가져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일부를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해 남겨 두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레위기 19:10; 신명기 24:21).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나는 에서를 벌거벗기고 그의 은신처들을 드러냈으니, 그는 숨을 수 없다. 그의 자손과 형제들과 이웃들이 유린당했고, 그도 없어졌다.」예레미야 49:10 · 본디새김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심판의 규모가 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에돔이 안전하다고 여겼던 은밀한 장소가 더 이상 은밀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위험에 대비합니다. 재물을 숨기고 피난처를 마련하며, 적이 발견하기 어려운 곳을 찾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든 은신처가 드러납니다.

에돔의 지혜가 무용해지는 순간은 지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분 앞에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돔의 심판 속에 남겨진 한 문장

그런데 11절이 뜻밖에 등장합니다.

「네 고아들을 남겨 두어라. 내가 그들을 살려 두겠다. 네 과부들은 나를 믿어도 좋다.」예레미야 49:11 · 본디새김

나라가 무너진다고 해서 그 나라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에돔은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남을 길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신뢰의 대상으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이 구절은 에돔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회복을 약속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후 에돔이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이 한 민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아무런 구별 없이 대하시는 것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심판의 잔을 피할 수 있는가?

12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보아라, 그 잔을 마실 처지가 아닌 자들도 반드시 마실 것이다. 그런데 바로 네가 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너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 반드시 마실 것이다.」예레미야 49:12 · 본디새김

잔은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예레미야 25:15–29에서 하나님은 여러 민족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25:29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읍에서 재앙이 시작되는데,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벌을 면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49:12 역시 그와 같은 논리를 따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심판에서 면제되지 않았다면, 에돔도 자신의 지혜나 지리적 안전 때문에 면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는 어느 민족도 스스로 예외가 될 권리를 선언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서 전체에서 유다의 가장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과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안전의 보증으로 여긴 것이었습니다(예레미야 7:4–15). 이방 민족이 자기 힘을 절대화하는 것과, 이스라엘이 성전이라는 종교적 특권을 절대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비슷한 문제를 드러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오바댜 1:5–8에도 포도를 거두는 사람과 도둑의 비유, 에돔의 감추어진 보물과 지혜에 관한 말이 나타납니다. 두 예언은 여러 표현을 공유합니다.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직접 사용했는지, 혹은 공통된 예언 전승을 사용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11절의 한 가지 가능성은 혹독한 심판을 말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반어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고아와 과부만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처럼 이 문장을 긍정적인 약속으로 읽을 충분한 이유도 있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내가 그들을 살려 두겠다”고 말하며, 과부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부정어를 덧붙여 이 약속을 뒤집을 명백한 근거는 없습니다.

독수리의 둥지와 독수리의 공격 — 높이 올라간 자가 내려오는 방식

예레미야 49:14–22 본문 →

에돔 예언의 중심에는 두 마리의 독수리가 등장하는 듯한 인상적인 대조가 있습니다.

바위틈에 깃든 나라

「바위틈에 깃들고 언덕 높은 곳을 차지한 자야, 네가 주는 공포와 네 마음의 오만이 너를 속였다. 네가 독수리처럼 둥지를 높이 올려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16 · 본디새김

에돔의 산악 지형은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바위와 계곡, 높은 지대는 외부 군대가 접근하고 이동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높은 곳에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높이를 절대적인 안전으로 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에돔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강하다는 인상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나라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속은 것은 에돔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지리적 우위와 강한 위세를 보고, 어떤 존재도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다고 믿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 위험을 알리는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게 하는 정보는 무시하기 쉽습니다.

에돔에는 지혜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는 교만 앞에서 그 지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둥지를 높이 올려도”

독수리는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곳에 둥지를 틉니다. 에돔도 그런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높이를 무력화하십니다.

이제 22절로 가면 이미지가 뒤집힙니다.

보아라, 그가 독수리처럼 올라와 날아가며 보스라 위로 날개를 펼칠 것이다. 그날 에돔 용사들의 마음은 진통을 겪는 여자의 마음처럼 될 것이다.예레미야 49:22 · 본디새김

에돔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덮쳐 오는 공격을 맞이합니다.

에돔이 자기 안전의 근거로 삼았던 높이가, 오히려 자기 멸망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바뀝니다.

“누가 나와 같으며?”

그사이에 19절에서는 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그가 요단의 무성한 숲에서 사자처럼 올라와 늘 푸른 목초지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순식간에 그를 그곳에서 달아나게 하겠다. 선택된 이가 누구든 내가 그를 그 위에 세우겠다. 누가 나와 같으며, 누가 나를 심판 자리로 불러낼 수 있느냐? 내 앞에 맞서 설 목자가 누구냐?」예레미야 49:19 · 본디새김

어느 누구도 여호와야훼를 자기 재판정으로 불러내어 그의 행동을 심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목자는 통치자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왕이 백성을 돌보는 목자로 묘사되기도 합니다(사무엘하 5:2; 예레미야 23:1–4). 에돔을 다스리는 목자라 해도 여호와야훼 앞에 맞설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매우 비슷한 사자와 목자, 심판에 관한 표현이 뒤의 예레미야 50:44–46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에돔이 아니라 바벨론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49장의 말씀을 바벨론이 영원한 승리자라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서의 국제 정세는 강한 나라가 언제나 옳다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강한 나라까지도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 앞부분의 사자 비유와 뒤이은 통치자 선택에 관한 표현은 문법적으로 다소 복잡합니다. 사자처럼 등장하는 인물과 쫓겨나는 인물이 동일한지, 침략자와 쫓겨나는 통치자를 구분해야 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마스쿠스 — 칭송받는 도시는 왜 버려지지 않았는가?

예레미야 49:23–27 본문 →

다마스쿠스 예언은 앞의 에돔 예언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에돔에서는 바위와 높은 산, 독수리와 사자가 등장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소식이 먼저 도착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관하여. 하맛과 아르밧이 수치를 당했다. 나쁜 소식을 듣고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바다가 불안하여 잠잠할 수 없다.예레미야 49:23 · 본디새김

하맛과 아르밧은 시리아 북부와 관련된 도시들입니다. 다마스쿠스는 그보다 남쪽의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전쟁은 군대가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잠잠할 수 없는 바다

본디새김은 바다 자체가 불안한 것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나쁜 소식이 전해지자 자연 전체가 동요하는 듯한 인상이 생깁니다.

24절에서는 그 불안이 다마스쿠스에게 직접 나타납니다.

다마스쿠스가 기운을 잃고 달아나려고 돌아섰다. 떨림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이를 낳는 여자처럼 고통과 진통이 그를 붙잡았다.예레미야 49:24 · 본디새김

도시가 한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서 다마스쿠스의 위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칭송받는 도시가 버려지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칭송받는 도시가, 나의 기쁨인 성읍이 버려지지 않았는가?예레미야 49:25 · 본디새김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도시, 기쁨을 느끼던 도시가 이제 위험에 놓입니다.

그런데 그 명성은 도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27절에서는 벤하닷의 궁전들이 불에 삼켜집니다. 왕의 궁전은 도시의 권력과 역사를 상징합니다.

이 짧은 예언은 다마스쿠스의 구체적인 죄목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도시의 몰락을 특정한 도덕적 잘못 하나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집중하는 것은 유명한 도시조차 재앙 앞에서 무력해지는 현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마스쿠스는 해안 도시가 아닙니다. 23절의 히브리어는 ‘바다에 불안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며, 바다 자체가 동요하는 장면으로도, 바다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요동하는 비유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법상 잠잠할 수 없는 주체가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25절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어찌하여 버려졌는가?”라는 탄식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분명히 부정어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마스쿠스가 아직 비워지지 않았거나 사람들이 미처 떠나지 못한 상황을 두고 탄식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도시가 공격받기 전에 탈출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반어적인 질문으로 이해하여, 그렇게 칭송받던 도시조차 결국 버림받았다는 뜻을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또한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마스쿠스 주민의 탄식일 수도 있고, 도시를 바라보는 예언적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벤하닷은 구약에서 여러 아람 왕과 관련해 등장하는 왕명입니다(열왕기상 15:18; 열왕기하 8:7; 13:3). 이 표현은 다마스쿠스의 왕조적 권력과 궁전의 위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게달과 하솔 — 성벽 없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

예레미야 49:28–33 본문 →

이제 예언의 시선은 성벽을 가진 도시들에서 사막의 거주민들에게 옮겨 갑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며(창세기 25:13), 구약에서 목축과 천막 생활에 관련된 집단으로 언급됩니다(이사야 21:16–17; 42:11).

하솔은 여기서 게달과 함께 등장하는 사막 지역의 왕국 또는 집단과 관련된 명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11장에 등장하는 갈릴리 북쪽의 하솔과 같은 도시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역의 정확한 정치적 범위와 위치를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빼앗기는 것은 재물이면서 삶의 터전이다

「그들의 천막과 양 떼를 빼앗아 가고, 그들의 천막 휘장과 모든 기물과 낙타를 자기들에게 가져갈 것이다. 그들을 향해 외칠 것이다. 『사방에 공포가 있다.』」예레미야 49:29 · 본디새김

천막은 집입니다.

천막 휘장과 기물은 생활을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양 떼와 낙타는 생계 수단이자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재산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가진 돈을 빼앗기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반까지 빼앗기는 것입니다.

정착한 도시에서 집과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사막의 유목민들에게는 천막과 가축을 빼앗기는 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서로 다른 생활방식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본문은 각기 다른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그에게는 문도 빗장도 없고”

「일어나 올라가라. 평온하고 안전하게 사는 민족을 치러 가라. 그에게는 문도 빗장도 없고, 그들은 홀로 떨어져 산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31 · 본디새김

이들은 고립된 생활환경 속에서 상대적인 안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본문은 그들의 생활방식이 성벽에 의존하는 도시 국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거대한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은 그들을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30절은 그 계획을 두 번 강조합니다.

「하솔 주민들아, 달아나라, 멀리 떠나라, 깊숙이 들어가 살아라.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이 너희를 칠 계책을 세우고, 너희를 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30 · 본디새김

사막에 떨어져 사는 것이 안전을 보증해 주지 못합니다. 침략자가 그들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흩어진다는 것의 의미

「그들의 낙타는 노획물이 되고, 그 많은 가축은 약탈물이 될 것이다. 내가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잘라 낸 자들을 모든 바람을 향해 흩어 버리겠다. 그 사방에서 그들에게 재앙을 가져오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32 · 본디새김

홀로 떨어져 살면서 안전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 흩어져 떠돌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것과, 폭력에 의해 자기 공동체에서 흩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스스로 선택한 생활방식일 수 있습니다. 후자는 공동체의 붕괴입니다.

그들을 지켜 준다고 여겼던 거리와 고립이, 이제는 서로를 찾고 모으기 어렵게 만드는 흩어짐으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관자놀이 부근의 머리카락을 잘라 낸 모습은 이 집단을 구별하는 외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9:26과 25:23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그들이 정확히 어떤 민족 집단이었는지, 머리를 자르는 관습이 어떤 종교적 의미를 가졌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엘람 — 하나님이 자신의 왕좌를 세우시는 곳

예레미야 49:34–38 본문 →

이제 예레미야 49장은 마지막 민족인 엘람으로 이동합니다.

엘람은 메소포타미아 동쪽, 오늘날 이란 남서부 일대와 관련된 고대 지역입니다. 창세기 14:1에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등장하고, 이사야 22:6에는 활을 든 엘람이 언급됩니다.

마지막으로 엘람이 등장하면서 예언의 지리적 시야는 더욱 멀리 확대됩니다.

시드기야 통치 초기라는 시간 표시

유다 왕 시드기야의 통치 초기에, 엘람에 관하여 여호와야훼의 말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예레미야 49:34 · 본디새김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 시기에 해당합니다(열왕기하 24:17–25:7). 다만 이 구절은 시드기야 통치의 정확한 연도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엘람 예언이 특정한 전쟁 직후에 주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안전하고 강대한 국가의 수도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자신도 바벨론의 압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레미야에게 엘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유다가 약해졌다고 해서 여호와야훼의 통치가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엘람의 활이 꺾인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엘람의 활을, 그들 힘의 으뜸을 꺾겠다.」예레미야 49:35 · 본디새김

활은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성벽이나 높은 지형에 접근하기 전에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중요한 군사적 수단이었습니다.

엘람의 핵심적인 군사 능력을 꺾으신다는 뜻입니다.

네 바람이 엘람을 흩어 버린다

36절에서는 이미지가 활에서 바람으로 바뀝니다.

「내가 하늘 네 끝에서 네 바람을 엘람으로 불러오고, 이 모든 바람을 향해 그들을 흩어 버리겠다. 엘람에서 내쫓긴 자들이 이르지 않을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예레미야 49:36 · 본디새김

사방에서 모여든 힘이 한 민족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는 것입니다.

37절은 그 흩어짐이 평화로운 이주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엘람은 원수들 앞에서 공포에 떨며, 칼에 쫓깁니다. 전쟁과 유배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엘람에 내 왕좌를 두고”

「내가 엘람에 내 왕좌를 두고, 그곳에서 왕과 고관들을 멸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38 · 본디새김

왕좌는 왕의 통치권과 판결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만 계신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예레미야 23:23–24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가까운 곳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먼 곳의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의 왕권은 예루살렘을 넘어, 다른 왕들이 통치한다고 여기는 땅에도 미칩니다.

창세기 10장은 여러 민족이 서로 다른 지역과 언어와 집단으로 나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민족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각기 다른 신들이 세상의 일정 부분을 절대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창조주이자 역사의 주권자로 나타나십니다.

아모스 9:7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일뿐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들을 기르에서 이끌어 내신 일도 언급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의 역사적 활동이 이스라엘의 이야기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은 뒤에 신약에서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의 확장과 주제적으로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49장을 그 사건들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장은 먼저 자신의 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를 향하여, 그들 모두가 여호와야훼의 통치 아래 있음을 선포합니다.

조금 더 깊이

36절에서 네 바람은 반드시 네 개의 구체적인 군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방의 바람을 통해 심판이 미치는 범위와 흩어짐의 전면성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8절의 표현을 여호와야훼가 엘람에 문자 그대로 왕좌를 설치하셨다는 역사적 사건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면은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과 심판의 집행을 드러내는 예언적 이미지입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바벨론을 비롯한 정복 세력의 지배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38절의 왕좌를 특정 정복자의 왕좌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인칭의 주체가 분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직접 왕좌를 두십니다.

엘람의 왕좌 다음에 오는 약속

예레미야 49:39 본문 →

그런데 엘람 예언은 왕과 고관들을 멸한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훗날 내가 엘람의 형편을 회복시키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9:39 · 본디새김

이 말은 이 장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암몬에 대한 약속과 같은 관용구를 사용합니다. 두 민족의 역사와 상황은 다르지만, 그 마지막에는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놓입니다.

심판하시는 분과 회복시키시는 분이 다르지 않습니다.

엘람의 왕좌를 차지하신 하나님은 그 나라를 무너뜨리실 권위뿐 아니라, 그 나라의 미래를 다시 여실 권위도 가지고 계십니다.

왜 어떤 나라에는 회복이 약속되고, 어떤 나라에는 없는가?

암몬에게는 회복이 약속됩니다(49:6). 엘람에게도 회복이 약속됩니다(49:39). 그런데 에돔과 다마스쿠스, 게달과 하솔에 관한 예언에는 그와 같은 국가적 회복의 선언이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암몬과 엘람은 에돔보다 덜 악했기 때문에 회복된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가 얼마나 죄를 지었는지 비교하여 회복의 기준을 산정할 자료가 이 장에는 없습니다. 반대로 회복의 약속이 나오지 않는 나라들은 어떤 미래도 가질 수 없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은 모든 민족의 최종적인 운명을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려고 작성된 본문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나라들에 주어진 예언이 하나로 모여 있는 장입니다.

조금 더 깊이

39절은 엘람의 독립 왕국이 언제 다시 세워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포로가 귀환한다거나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회복을 경험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회복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역사 속 어느 시점에 실현될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장면 — 엘람에 놓인 왕좌

예레미야 49:1–39 본문 →

인간의 왕들이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고, 각 민족이 서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어도, 어느 나라의 땅도 여호와야훼의 통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드러나는 것은 그 통치가 단지 무너뜨리는 능력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아를 살려 두겠다고 말씀하시는 권위, 흩어진 민족의 형편을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권위도 그분께 있습니다.

예레미야 49장을 오늘의 삶에 연결할 때, 모든 나라를 단순히 개인의 교만에 대한 비유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암몬의 영토 점령에는 실제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게달과 하솔의 약탈에는 집과 생계 수단을 빼앗기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습니다. 엘람의 흩어짐에는 전쟁과 유배가 가져오는 공동체의 파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49장은 사람에게 모든 안전장치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삶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이지, 남의 권리를 빼앗을 자격이 아닙니다. 지혜는 위험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주어진 능력이지, 어떤 충고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안전한 환경은 감사하며 누릴 수 있는 조건이지, 그 환경 밖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마지막 엘람 예언에서 하나님은 왕좌를 세우십니다.

자기 나라의 왕과 고관들이 다스리던 자리,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땅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좌를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왕권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엘람의 미래를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엘람에 세워진 여호와야훼의 왕좌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말은 또 다른 전쟁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훗날 내가 엘람의 형편을 회복시키겠다.」

왕들은 자기 나라의 미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왕권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폐허와 흩어짐 너머의 미래를 여전히 자신의 말씀 안에 두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