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50장

이 장의 자리 · 46–52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바벨론이 무너지고 길 잃은 양들이 돌아오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론은 오랫동안 피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유다의 왕들은 바벨론에 저항하려 했고, 예레미야는 그 저항이 오히려 나라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까지 불렸습니다(예레미야 25:9; 27:6).

유다를 무너뜨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던 제국이 이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선언 직후, 예언은 뜻밖에도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한쪽에서는 제국이 무너지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울면서 길을 걷습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벨론이 무너지는 이유를 알려면, 바벨론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이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장에서 바벨론은 단지 강력한 적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 압제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되찾기 위해 직접 나서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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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신들이 먼저 무너진다

예레미야 50:1–3 본문 →

「민족들 가운데 알려라, 들려주어라. 깃발을 들어라. 들려주어라, 숨기지 마라. 이렇게 말하여라. 『바벨론이 함락되었다. 벨은 수치를 당했고, 므로닥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 우상들은 수치를 당했고, 그 신상들은 산산이 부서졌다.』」예레미야 50:2 · 본디새김

예언은 공개적인 선포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여러 명령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것은 소식의 중대함을 강조합니다. 한 도시의 전쟁 소식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알아야 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함락을 알리는 첫 선언은 군사 시설이나 왕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 제국의 패배를 알리면서 신들의 몰락을 먼저 말할까요?

벨과 므로닥은 누구인가?

벨은 ‘주인’ 또는 ‘주’라는 뜻의 칭호로, 바벨론의 중심 신인 마르둑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므로닥(⁨מְרֹדָךְ⁩)은 마르둑이라는 신명의 히브리어 형태입니다. 따라서 두 이름을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신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벨론의 대표적인 신이 서로 다른 명칭으로 거듭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왕권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들은 마르둑의 선택과 지지를 통해 자신들의 통치가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무너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던 종교적 질서까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그들의 신전과 왕권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이 다른 나라의 신들보다 강하다는 믿음은 그들을 마지막까지 보호하지 못합니다.

북쪽에서 오는 적

「한 민족이 북쪽에서 그를 치러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민족은 그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 것이고, 그 안에 사는 자가 없을 것이다. 사람부터 짐승까지 달아나 떠나갔다.」예레미야 50:3 · 본디새김

예레미야 1:14–15에서 하나님은 북쪽으로부터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재앙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북쪽에서 오는 재앙의 대상이 바뀝니다.

바벨론이 다른 나라를 위협하던 방향에서 바벨론 자신을 향해 침략자가 옵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의 멸망을 가져오는 제국이었지만, 이제 자신도 멸망을 맞이할 수 있는 나라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심판 선언이 계속되기 전에, 예언은 갑자기 시온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예레미야 50:4–7 본문 →

「그날들에,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올 것이다. 그들은 울면서 걸어가며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찾을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50:4 · 본디새김

왜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오는가?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열왕기상 12장).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고, 남유다는 뒤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두 나라는 같은 조상과 언약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었고 서로 다른 멸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들이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예레미야 30–31장의 회복 약속과 연결됩니다. 특히 예레미야 31:9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울며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눈물은 회복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고향을 잃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가 흩어졌고, 여러 세대에 걸친 삶이 무너졌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귀환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함께 있습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물으며 얼굴을 이쪽으로 향할 것이다. 오너라. 그들은 잊히지 않을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야훼와 결속할 것이다.」예레미야 50:5 · 본디새김

이들은 제국을 정복한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행진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지배하던 중심에서 떠나, 하나님께 예배하던 자리로 돌아갑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지고 죄가 용서됩니다. 예레미야 32:40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50:5의 언약을 이 두 본문과 완전히 동일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속의 방향은 분명하게 이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는 잊히지 않는 방향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양 떼를 길 잃게 했다

「내 백성은 길 잃은 양 떼였다. 그들의 목자들이 그들을 길 잃게 하고 산에서 헤매게 했다. 그들은 산에서 언덕으로 다니며 자기들이 누워 쉬던 곳을 잊었다.」예레미야 50:6 · 본디새김

구약에서 목자는 왕과 지도자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자주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23:1–2에서 하나님은 자기 목장의 양 떼를 흩어지게 한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쉬던 곳’은 안전과 안식을 누리던 자리를 가리킵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을 보호하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오히려 양을 길 잃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흩어진 데에는 그들을 이끌 책임이 있었던 지도자들의 실패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백성의 잘못을 설명한다는 이유로 지도자들의 책임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는 포식자들

「그들을 만나는 자마다 그들을 삼켰다. 그들의 적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 그들이 의로움의 거처인 여호와야훼에게, 자기 조상들의 희망인 여호와야훼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50: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죄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을 삼킨 자들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주장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나라의 행동을 자신의 심판에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나라가 자신의 탐욕과 폭력을 마음껏 행사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을 해치는 자의 무죄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러나 4절은 그 눈물의 정확한 이유를 하나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회개, 기쁨이 어떤 비율로 섞여 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돌아갈 곳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고향에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길을 찾는 모습일 수도 있고, 목적지를 향해 서로 묻고 나아가는 순례의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명령 — 길 잃은 양이 길잡이가 되다

예레미야 50:8–10 본문 →

「바벨론 한가운데서 달아나라. 칼데아 사람들의 땅에서 나와라. 양 떼 앞에 서는 숫염소들처럼 되어라.」예레미야 50:8 · 본디새김

8절은 앞에서 등장했던 양 떼의 이미지를 다시 사용합니다.

가축 무리에서 숫염소가 앞서 움직이며 다른 동물들이 뒤따르는 모습이 비유의 바탕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백성은 잘못된 목자들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양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앞서 나아가는 존재가 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수동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닙니다. 실제 포로 생활과 정치적 억압의 중심지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을 오늘날의 어떤 문화나 사회에서 무조건 물리적으로 도망치라는 일반적인 지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역사 속에서 바벨론의 지배 아래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해방의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9–10절은 그들이 왜 나올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북쪽에서 큰 민족들의 무리를 일으켜 바벨론을 공격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권력이 약해지고, 그들을 붙잡아 두던 질서가 무너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요한계시록 17–18장). 그러나 그 바벨론을 예레미야 시대의 제국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거스르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과 부의 체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교만한 제국의 몰락, 억압적인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 제국에서 나오라는 명령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50장은 먼저 고대 바벨론에 관해 선포된 예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를 약탈하면서 즐거워했다

예레미야 50:11–16 본문 →

「너희가 기뻐하기 때문에, 너희가 환호하기 때문에, 내 소유를 약탈하는 자들아, 너희가 타작하는 암송아지처럼 뛰놀고 힘센 말들처럼 울기 때문에,」예레미야 50:11 · 본디새김

바벨론의 죄는 약탈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나라의 파멸은 자신의 부를 늘리는 기회였습니다. “내 소유.”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언약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일과, 바벨론이 그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환호하는 일은 같은 사건 안에 있었지만 동일한 도덕적 의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사방에서 그를 향해 함성을 질러라. 그가 손을 내밀어 항복했다. 그 버팀벽들이 쓰러지고, 그 성벽들이 무너졌다. 이것은 여호와야훼의 복수이니, 그에게 복수하여라.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라.」예레미야 50:15 · 본디새김

이것은 예언서에서 반복되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예레미야 25:12–14에서도 하나님은 바벨론이 다른 나라를 부렸던 일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 피해를 입은 사람이 동일한 폭력으로 개인적인 복수를 실행해도 좋다는 명령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50장은 바벨론에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입니다. 그 심판의 정당성을 근거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무제한적인 보복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항복했다”

한때 여러 나라의 왕들에게 항복을 요구했던 바벨론이 이제 자신의 손을 내밀어 항복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사람들이 바벨론을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바벨론은 여러 민족의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모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무너지자 사람들이 흩어져 고향을 향합니다.

바벨론이 다른 민족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던 시대가 끝나 간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타작하는 소는 곡식을 밟으며 일합니다. 신명기 25:4는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타작하는 소는 곡식을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상황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손을 내민다는 표현은 복종이나 항복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1–9의 바벨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흩어짐을 피하기 위해 거대한 도시와 탑을 세우려 합니다. 예레미야 50장의 바벨론은 그 이야기와 직접적인 문학적 인용 관계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기 힘을 절대화하는 거대한 인간 공동체라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바벨에서는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으려고 도시를 세웠습니다. 예레미야 50장에서는 바벨론이 여러 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무너뜨리시고 사람들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두 마리 사자에게 쫓겼던 양 —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읽다

예레미야 50:17–20 본문 →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다. 사자들이 그를 몰아냈다. 처음에는 아시리아 왕이 그를 삼켰고, 마지막에는 이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이 그 뼈를 부쉈다.예레미야 50:17 · 본디새김

예언은 다시 양의 이미지로 돌아옵니다.

6절에서는 양들을 길 잃게 한 목자들의 책임을 말합니다. 17절에서는 양들을 공격한 사자들의 책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두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예언은 이 두 사건을 한 마리의 양을 차례로 공격한 두 사자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18절에서 하나님은 아시리아와 바벨론을 같은 기준 아래 두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아시리아 왕을 벌했듯이 바벨론 왕과 그의 땅을 벌하겠다.」예레미야 50:18 · 본디새김

바벨론은 아시리아 이후 서아시아의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두 제국은 모두 사자처럼 행동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들도 심판받을 수 있는 피조물이었습니다.

사자가 사라진 자리에 목초지가 돌아온다

19절에서는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그의 목초지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는 갈멜과 바산에서 풀을 뜯고, 에브라임 산지와 길르앗에서 배부를 것이다.」예레미야 50:19 · 본디새김

갈멜과 에브라임 산지는 요단강 서쪽에 있고, 바산과 길르앗은 동쪽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여러 지역을 함께 부르면서 이스라엘이 다시 풍요로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오랫동안 쫓기고 삼켜졌던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군사력이 아니라 안전하게 먹고 쉴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바로 그것을 약속하십니다.

찾을 수 없는 죄

「그날들에, 그때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아도 없고, 유다의 죄들을 찾아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남겨 둘 이들을 용서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50:20 · 본디새김

이 절의 앞부분만 읽으면 이스라엘과 유다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죄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예레미야 31:34의 새 언약 약속과 중요한 연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으로 돌아가는 것과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양을 사자의 입에서 구해 내실 뿐 아니라, 그 양이 다시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죄의 문제까지 해결하십니다.

제국의 힘이 무너져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예레미야가 약속하는 회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뼈를 부쉈다’는 표현에는 읽기의 여지가 있지만, 앞의 ‘삼켰다’와 함께 파괴적인 공격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합니다.

온 땅의 망치가 부서지고, 덫을 놓던 자가 붙잡히다

예레미야 50:21–28 본문 →

21절에서 바벨론은 므라다임과 브곳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므라다임과 브곳에 숨은 말의 울림

므라다임(메라타임)은 반역과 관련된 히브리어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거듭되는 반역’ 또는 ‘이중의 반역’을 암시하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브곳(페코드)은 ‘찾아보다’, ‘돌보다’, 문맥에 따라 ‘벌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파카드와 연결되어 들립니다.

다만 두 이름은 바빌로니아 남부 지역이나 집단의 실제 명칭과 연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브곳은 에스겔 23:23에도 바벨론과 관련된 집단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완전히 새로운 상징적 지명을 만들어 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실제 지명처럼 들리면서 동시에 심판의 의미를 환기하는 이름들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온 땅의 망치”가 부서지다

어찌하여 온 땅의 망치가 잘려 나가 부서졌는가? 어찌하여 바벨론이 민족들 가운데 경악의 대상이 되었는가?예레미야 50:23 · 본디새김

망치는 다른 것을 부수는 도구입니다. 바벨론은 수많은 나라를 공격하고 도시들을 파괴했습니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군사력은 모든 것을 부수는 거대한 망치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망치 자체가 부서집니다.

「내가 네게 덫을 놓았더니, 바벨론아, 너는 붙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너는 알지 못했다. 너는 발견되었고 또 사로잡혔다. 네가 여호와야훼에게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50:24 · 본디새김

제국은 자신이 다른 나라를 통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심판받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면서도 결국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자기 폭력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들을 약탈하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권력을 하나님 앞에서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신 일과 바벨론이 자신의 힘을 절대화한 일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복수

바벨론 땅에서 달아나 빠져나온 자들의 소리다. 그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복수를, 그의 성전을 위한 복수를 시온에 알리려 한다.예레미야 50:28 · 본디새김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했습니다(열왕기하 25:8–10). 그런데 성전의 파괴는 예레미야가 경고했던 유다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 행위 역시 하나님의 판단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유다의 죄가 바벨론의 죄를 지워 주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죄가 유다의 죄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두 나라 모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판단하시는 분은 바벨론 왕도, 유다 왕도 아닌 여호와야훼입니다.

바벨론의 이름이 ‘오만’으로 바뀌다

예레미야 50:29–32 본문 →

29절은 바벨론의 죄를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바벨론을 치러 궁수들을, 활을 당기는 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그를 에워싸고 진을 쳐라.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자가 없게 하여라.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아 주어라. 그가 한 모든 일대로 그에게 행하여라. 그가 여호와야훼에게,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교만하게 굴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50:29 · 본디새김

이어서 3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부르시는 방식이 바뀝니다.

「보아라, 내가 너를 대적한다, 오만아. 네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50:31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이 추상적인 성질을 하나의 인물처럼 부릅니다. 오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자신의 힘을 절대화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오만이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고, 그를 일으켜 줄 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의 도시들에 불을 붙이겠다. 그 불이 그의 주변을 모두 삼킬 것이다.」예레미야 50:32 · 본디새김

오만은 본래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국의 통치방식과 결합하면 수많은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현실적인 힘이 됩니다. 다른 민족을 약탈하고, 포로를 붙잡아 두며, 그들의 고통을 조롱하는 행동은 단순한 개인적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오만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다룰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데서 드러났습니다.

“그들을 되찾아 줄 이는 강하다” — 하나님이 직접 송사를 맡으신다

예레미야 50:33–34 본문 →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억눌리고 있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은 모두 그들을 붙잡고, 보내 주기를 거부했다.」예레미야 50:33 · 본디새김

‘붙잡고 있다’는 말과 ‘보내 주기를 거부했다’는 말은 압제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파라오와 바벨론 사이의 닮은 모습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여러 차례 거부했습니다(출애굽기 5:1–2; 7:14; 9:7). 이제 바벨론도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출애굽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역했고, 예레미야 50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제국의 포로와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강력한 통치자가 자신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놓아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바벨론 심판의 핵심은 단지 제국의 권력을 다른 제국에게 넘겨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권력 아래 붙잡힌 사람들을 해방하는 데 있습니다.

‘되찾아 줄 이’라는 표현

「그들을 되찾아 줄 이는 강하다.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다. 땅을 평온하게 하고 바벨론 주민들을 떨게 하려고, 그는 반드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싸울 것이다.」예레미야 50:34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의 상실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자유와 삶을 되찾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법정에 서신다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의 권리를 직접 주장하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이 그들을 붙잡아 둘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권리를 문제 삼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상대가 되십니다.

‘평온하게 하다’와 ‘떨게 하다’가 서로 대조됩니다. 바벨론의 지배 아래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송사를 맡으시면, 억압받던 땅에는 평온이 찾아오고 압제자의 중심지에는 두려움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자가 누리던 안정을 흔들고, 억눌린 자에게 다시 안식할 자리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해져서 땅을 판 사람이 있을 때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살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룻기 4장에서는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는 친족으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자신의 이야기에서도 기업을 되사는 일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32:7–12에서 그는 친족의 밭을 삽니다. 히브리어에는 같은 어근을 반복하는 강조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들의 송사를 반드시 다투신다는 뜻입니다. 평온의 범위를 바벨론을 제외한 온 세계의 완전한 평화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땅’은 특정 지역을 가리킬 수도 있고, 더 넓은 세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칼이 닥치고, 물이 마른다 — 제국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다

예레미야 50:35–40 본문 →

35–38절에서는 짧은 선언이 반복됩니다.

「칼이 칼데아 사람들에게 닥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바벨론 주민들에게, 그 고관들에게, 그 지혜로운 자들에게 닥칠 것이다.」예레미야 50:35 · 본디새김

그다음에는 대상만 바뀝니다. 바벨론 주민들, 고관들, 지혜로운 자들, 허튼소리하는 자들, 용사들, 말들과 병거들, 뒤섞인 무리, 보물 창고들.

정치 권력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군사력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지식도 제국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축적된 재물도 빼앗깁니다.

여기서 ‘칼’은 전쟁의 폭력을 상징하면서, 나라의 다양한 기반이 동시에 공격받는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칼과 가뭄의 소리

38절에서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그의 물에 가뭄이 닥쳐 물이 말라 버릴 것이다. 그곳은 새긴 우상들의 땅이며, 그들은 무서운 것들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50:38 · 본디새김

무기가 사람들과 제국의 힘을 무너뜨렸다면, 가뭄은 그 땅의 생존 기반을 위협합니다. 바빌로니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문명이었습니다. 강과 관개 수로는 농업과 도시 생활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우상들의 땅이 짐승들의 거처가 되다

처음에는 바벨론의 신들이 수치를 당했습니다(50:2). 이제 바벨론은 우상들의 땅으로 다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사막의 짐승들이 자칼들과 함께 살고, 타조들이 그 안에 살 것이다. 그곳에는 영원히 다시 사람이 살지 않고, 대대로 아무도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50:39 · 본디새김

여기에는 창조된 세계의 질서가 뒤집히는 듯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비교 대상으로 등장합니다(창세기 19:24–29).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을 단순한 왕조 교체보다 훨씬 철저한 파괴로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바벨론이 어떻게 함락되었는가?

한쪽에서는 바벨론의 역사적 몰락과 그 이후의 쇠퇴를 포함하는 장기적인 심판의 전망으로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예언자가 제국의 멸망을 표현하기 위해 철저한 황폐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두 관점은 반드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모든 세부 묘사의 역사적 실현 시점을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칼’은 헤레브, ‘가뭄’은 호레브입니다. 두 단어는 같은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모음과 뜻이 다릅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연대기 제3단 14–20행에 따르면,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할 때 바벨론 도시는 큰 시가전 없이 점령되었습니다. 고레스 원통 문서 17–22행도 바벨론에 전투 없이 입성했다는 내용을 전합니다. 후자는 정복자의 왕권을 정당화하는 성격을 지닌 기록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50장의 모든 파괴 묘사가 기원전 539년 바벨론 도성에서 동시에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바벨론이 그 순간부터 영원히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서도 상당 기간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는 연대기와 예언적 시가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사건을 묘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했던 말이 이제 바벨론을 향한다

예레미야 50:41–46 본문 →

보아라, 한 백성이 북쪽에서 온다. 큰 민족과 많은 왕이 땅의 먼 끝에서 일어날 것이다.예레미야 50:41 · 본디새김

예레미야 6:22–24에서 하나님은 북쪽에서 오는 무서운 군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침략의 대상은 유다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50:41–43은 이 장면과 매우 가까운 표현을 다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바벨론 왕입니다.

바벨론 왕은 그들의 소식을 듣고 두 손에 힘이 풀렸다. 아이 낳는 여자의 진통 같은 고통이 그를 움켜잡았다.예레미야 50:43 · 본디새김

같은 예언의 언어가 새로운 대상을 향하도록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벨론이 북쪽에서 오는 공포의 주체였습니다. 이제 바벨론이 그 공포를 경험하는 대상이 됩니다.

다른 나라를 두렵게 만들었던 제국이, 자신이 일으켰던 두려움과 같은 모습으로 무너집니다.

에돔에게 하셨던 말씀도 바벨론에게 돌아온다

44–46절 역시 익숙한 표현입니다. 앞 장의 에돔 예언인 예레미야 49:19–21과 긴밀하게 대응합니다. 사자처럼 올라오는 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자신과 같으며 누가 자신을 심판 자리로 불러낼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벨론은 에돔보다 강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서는 그 차이가 최종적인 안전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에돔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바벨론도 심판하십니다.

바벨론이 사로잡혔다는 소리에 땅이 흔들렸고, 민족들 사이에서 부르짖음이 들렸다.예레미야 50:46 · 본디새김

2절에서는 모든 민족에게 바벨론이 함락되었다고 알리라고 했습니다. 46절에서는 그 함락의 소리가 민족들 사이에 퍼져 나갑니다. 처음에 선포하라고 명령했던 소식이 마지막에는 온 땅을 뒤흔드는 소식이 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바벨론만의 일이 아닙니다. 그 제국의 권력 아래 살아온 여러 민족의 삶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마지막 장면 — 누가 길을 인도하는가?

예레미야 50:1–46 본문 →

제국이 강할 때는 사람들이 그 제국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되찾으실 때, 그들은 시온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묻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적을 무너뜨리실 만큼 강하실 뿐 아니라, 길 잃은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만큼 신실하신 분입니다.

예레미야 50장은 바벨론이 사로잡혔다는 소리에 땅이 흔들리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소리보다 먼저 독자의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걸어갑니다. 누군가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묻습니다. 누군가는 그쪽으로 얼굴을 돌립니다.

그들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되찾아 줄 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되찾아 줄 이는 강하다.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