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돌아올 때를 놓친 백성과 아물지 않는 상처
하늘을 나는 새들은 돌아올 때를 압니다. 계절이 바뀌면 떠나야 할 곳을 떠나고, 돌아갈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옵니다. 누가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거나 예언자를 보내 경고하지 않아도 자기 때를 지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백성은 돌아올 때를 모릅니다.
예레미야 8장은 이 뜻밖의 비교를 통해 예루살렘의 비극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고, 지혜롭다고 자부했으며, 예언자들의 경고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잘못된 길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그 길에서 돌아오지 못합니까?
예레미야 7장이 성전을 의지하면서도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를 거부한 백성을 고발했다면, 8장은 그 거부가 얼마나 깊어졌으며 결국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은 심판의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백성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던 장면은, 그 백성이 입은 상처 때문에 밤낮으로 울고 싶다는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죽은 뒤에도 자신들이 섬기던 것들 앞에 놓이다
예레미야 8장은 무덤이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고관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예언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들의 뼈를 무덤에서 꺼낼 것이다.」예레미야 8:1 · 본디새김
앞 장은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기쁨과 혼인 잔치의 소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은 사람들의 무덤조차 평온하게 남아 있지 못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조상의 무덤은 단순히 시신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가문의 기억이 이어지는 곳이었고, 죽은 사람이 조상들과 함께 묻힌다는 것은 존중받는 죽음의 중요한 표현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마련하는 이야기(창세기 23장)나 야곱이 조상들의 묘지에 묻히기를 바라는 장면(창세기 49:29–33)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8장에서는 왕들의 뼈마저 무덤 밖으로 끌려 나옵니다.
왕과 고관, 제사장과 예언자, 그리고 일반 주민까지 등장합니다. 왕권과 종교적 지위, 사회적 신분이 죽은 뒤의 수치를 막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의 핵심은 무덤을 훼손하는 행위 자체보다, 꺼내 놓은 뼈들이 어디에 놓이는가에 있습니다.
「그 뼈의 주인들이 사랑하고 섬기고 뒤따르고 찾고 몸을 굽혀 경배했던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군대 앞에 그 뼈들을 펼쳐 놓을 것이다. 그 뼈들은 거두어지지도 묻히지도 않고 땅 위의 거름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8: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사람들이 천체 숭배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단지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에 마음을 두고 의지하며 삶의 방향을 맞추었습니다.
생전에 자신들이 경배했던 것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의 뼈를 다시 거두어 주거나 존엄을 회복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들이 평생 의지하던 하늘의 것들이 이제는 그들의 수치를 지켜보는 침묵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21:3–5에는 므낫세가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경배하고 여호와야훼의 성전 안에까지 그들을 위한 제단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23:5, 12는 요시야가 이러한 숭배를 제거하는 개혁을 벌였다고 전합니다. 예레미야의 고발은 이러한 유다의 종교적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 하늘의 영광을 의지했지만, 죽은 뒤에는 땅 위에 버려집니다. 그토록 높이 바라보던 하늘과, 거름처럼 흩어진 뼈들이 놓인 땅 사이의 거리가 이 심판의 비극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3절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시선이 옮겨 갑니다.
「이 악한 족속 가운데 살아남은 모든 이들, 내가 그들을 몰아낸 모든 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삶보다 죽음을 택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8: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를 권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조차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참혹한 상황이 닥친다는 예언적 묘사입니다.
죽은 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도 삶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그리는 심판의 깊이입니다.
넘어지면 일어나는데, 왜 이 백성은 돌아오지 않는가
4절은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넘어지면 일어나지 않느냐? 사람이 돌아서면 돌아오지 않느냐?』」예레미야 8:4 · 본디새김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가던 길이 잘못되었다면 방향을 돌려 돌아오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당연한 행동을 여호와야훼의 백성은 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 예루살렘은 끝없이 돌아서기만 하느냐? 그들은 속임수를 붙잡고 돌아오기를 거부했다.」예레미야 8:5 · 본디새김
그들은 올바른 길에서는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길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방향을 돌리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방향으로는 계속 돌아서면서, 정작 되돌아와야 할 때에는 거부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끝없이 돌아서기만’ 하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단단히 붙잡고 있습니다. 아무런 신념이나 확신 없이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믿는 것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속임수입니다.
그들의 완고함은 믿음이 약한 데서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확신을 너무 강하게 붙잡고 있는 데서도 생깁니다.
「나는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들은 바르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하며 자기 악을 뉘우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모두 제 달리던 길로 돌아간다. 전쟁터로 내달리는 말처럼.」예레미야 8:6 · 본디새김
이는 단순히 죄를 저지른 뒤 후회하는 감정이 부족하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그것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판단하려는 태도 자체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말은 엄청난 힘과 속도로 달립니다. 그러나 그 힘과 속도가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그리는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립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문제는 활동의 부족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향을 확인하지 않는 활동의 열심입니다.
「하늘의 황새도 제 정해진 때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자기들이 돌아올 때를 지킨다. 그러나 내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법도를 알지 못한다.」예레미야 8:7 · 본디새김
말은 거침없이 앞으로 달리지만, 새들은 돌아올 때를 압니다.
힘차게 움직이는 것과 올바른 때에 돌아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자연의 새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7절의 요점은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갖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방향과 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 등장하는 일부 새의 정확한 종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철새들의 계절적 이동과 귀환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회개와 돌아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복해서 요구되는 주제입니다. 신명기 30:1–10에서는 이스라엘이 흩어진 곳에서 마음을 돌이켜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는 일이 다뤄집니다. 호세아 14:1–2 역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신약에서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아들 이야기를 읽을 때도 이 주제적 연결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8장이 직접 그 이야기를 예언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 자체가 말하는 것은 돌아오기를 거부한 백성과, 그 결과로 찾아온 파멸과 슬픔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지혜를 잃어버렸는가
새들도 때를 아는데 여호와야훼의 백성은 법도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누군가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너희는 『우리는 지혜롭고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느냐? 보아라, 실상 서기관들의 거짓 붓이 그것을 거짓으로 만들었다.」예레미야 8:8 · 본디새김
이 장에서 중요한 말은 ‘우리에게 있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혜의 근거로 삼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신명기 4:6은 이스라엘이 그 규례들을 지켜 행하는 모습이 여러 민족 앞에서 지혜와 슬기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는 그 관계가 뒤집혔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것이 지혜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주장합니다.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그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서기관들의 거짓 붓이 그것을 거짓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뜻합니까? 서기관들은 문서를 기록하고 보존하며, 율법과 관련된 지식을 다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붓’이 거짓을 만들어 냈다고 고발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그것을’이라는 목적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 나온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목적어로 받아, 서기관들이 그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방향으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서기관들의 붓이 헛되이 일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했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백성에게 그 수고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을 근거로 당시의 모든 율법 문서가 실제로 변조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서기관들의 행위가 어떻게 거짓과 연결되었는지 고발하지만, 어떤 문서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수치를 당했고, 겁에 질려 붙잡혔다. 보아라,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말을 거부했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겠느냐?」예레미야 8:9 · 본디새김
지식은 어떤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혜는 자주 그 지식에 따라 올바르게 판단하고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잠언 1:7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잠언 9:10은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의해 자신의 판단이 바로잡히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10–12절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지혜의 결과가 사회 전체에 나타납니다.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부당한 이익을 얻고, 예언자와 제사장은 거짓을 행합니다. 백성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서 평안하다고 말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예레미야 6:12–15의 고발과 거의 그대로 겹칩니다. 8절에서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10–12절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탐욕과 거짓, 잘못된 진단입니다.
그들이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자신들의 행위와 부딪혀 무너집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라는 선언을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상황을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판단할 때 의지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문제는 개인적 부정직에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현실을 알아보는 능력을 잃게 만듭니다.
열매 없는 나무와 요새로 도망치는 사람들
13절에는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과수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내가 그들을 모조리 거두어 없애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가 없으며, 잎은 시들었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들이 그들을 떠나갈 것이다.」예레미야 8:13 · 본디새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땅의 풍요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나무들입니다. 열왕기상 4:25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평온한 삶이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수확이 부족한 한 해를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여호와야훼의 백성이 누리던 생명과 풍요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조리 거두어 없애겠다’라는 선언은 심판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이제 그분이 주신 것들이 그들을 떠나갑니다.
이어서 장면은 갑자기 백성의 목소리로 바뀝니다.
「우리는 어째서 앉아만 있는가? 모여라. 요새 성읍들로 들어가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우리를 멸망하게 했고, 우리에게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호와야훼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8:14 · 본디새김
그들은 여호와야훼께로 돌아오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새 성읍으로 들어가자고 말합니다. 적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견고한 성벽을 가진 도시로 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이미 깊은 체념이 깔려 있습니다.
요새는 일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죽을 것을 예상합니다. 피난처로 들어가자는 외침이 곧 멸망을 받아들이자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위험을 알게 되었지만, 살아날 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죄를 인정하는 내용이 있지만, 여호와야훼께 돌아가겠다는 결단이나 삶을 바로잡겠다는 요청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그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는 절망 속에서 말합니다.
죄를 깨닫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들에게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생명을 해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생명을 주어야 할 물이 오히려 죽음을 가져오는 것처럼, 그들이 기대하던 삶의 기반 자체가 파괴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평안을 기다렸으나 좋은 것은 없고, 치유의 때를 기다렸으나, 보아라, 공포뿐이다.」예레미야 8:15 · 본디새김
앞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평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듣기 좋은 말을 믿었지만, 그 말은 현실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16절에서는 기다리던 평안 대신 다가오는 군대의 소리가 들립니다.
단에서 그의 말들이 콧김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힘센 말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흔들렸다. 그들이 와서 땅과 거기에 가득한 것들을, 성읍과 그곳 주민들을 집어삼켰다.예레미야 8:16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말들의 콧김과 울음소리를 들려줍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땅이 무너질 듯합니다.
17절에서는 군대의 이미지가 다시 바뀝니다.
「참으로, 보아라, 내가 너희 가운데 뱀들, 주술이 통하지 않는 독사들을 보낸다. 그것들이 너희를 물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8:17 · 본디새김
군대에는 성벽을 쌓아 맞설 수 있습니다. 공격을 막거나 협상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술이 통하지 않는 독사라면 사람의 기술로도 제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삶을 지탱하던 것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땅은 열매를 주지 못하고, 성벽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며, 인간의 기술은 재앙을 막지 못합니다. 그동안 백성은 자신들이 가진 가르침과 지혜, 성읍과 종교적 확신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믿던 것들은 하나씩 무력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 본문 끝의 ‘내가 그들에게 준 것들이 그들을 떠나갈 것이다’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선물이나 복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특정한 물건이나 제도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은 이스라엘 북쪽의 지명입니다. 이곳에서 말들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위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서 전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바벨론의 침공과 연결되는 예언으로 읽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군의 압도적인 위력을 묘사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어지는 ‘그들이 와서 ... 집어삼켰다’라는 표현은 침략이 이미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예언의 장면에서는 다가올 사건이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이 구절이 실제 침략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58:4–5에도 뱀을 부리는 사람과 그 소리에 귀를 막는 독사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의 비유에서도 핵심은 제어할 수 없는 위협입니다.
먼 땅에서 들려오는 세 목소리
18절부터 예레미야 8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여호와야훼는 백성을 고발하고 재앙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깊은 슬픔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슬픔 속의 나의 위로, 내 마음은 내 안에서 병들었다.예레미야 8:18 · 본디새김
슬픔이 몸을 병들게 할 만큼 깊습니다.
19절에 이르면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잇따라 들립니다.
보아라, 머나먼 땅에서 들려오는 딸인 내 백성의 살려 달라는 외침을. 「여호와야훼가 시온에 없느냐? 시온의 왕이 그 안에 없느냐?」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깎아 만든 우상들로,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화나게 했느냐?」예레미야 8:19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가 시온의 하나님이시고 왕이시라면, 왜 자신들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가 시온에 계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백성은 여호와야훼가 시온에 계신데 왜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으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왜 다른 신들을 따라갔느냐고 되물으십니다.
두 질문은 서로 엇갈립니다.
백성의 질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질문은 백성의 신실함에 대한 것입니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관심을 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과 맺은 관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20절에서 백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추수 때가 지났고 여름이 끝났는데, 우리는 구출되지 못했다.」예레미야 8:20 · 본디새김
새들은 자기 때를 알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신들이 돌아와야 할 때를 놓쳤고, 이제 시간이 지나 버렸다고 탄식합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구원이 오지 않았다고 울부짖습니다.
돌아오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기다림의 시간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불행이 개인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다는 일반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8장은 특별히 언약 백성이 거듭된 경고를 거절해 온 역사와 그 결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나의 위로(מַבְלִיגִית)’에 해당하는 표현은 드물게 사용되는 형태이며, 문장에 명시적인 동사도 없습니다. 슬픔 가운데 위로를 찾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위로를 얻으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탄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호함을 그대로 살려 ‘슬픔 속의 나의 위로’라고 옮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를 예레미야 자신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탄식에는 때때로 하나님의 슬픔과 예언자의 슬픔이 겹쳐 들릴 수 있습니다. 문맥상 예언자의 목소리가 중심에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분리된 사적인 감정으로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19절의 외침이 ‘머나먼 땅’에서 들린다는 표현은 포로로 끌려간 백성의 탄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먼 곳에서 다가오는 위협과 관련된 절망의 외침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본문은 정확한 역사적 시점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포로 생활의 어느 순간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백성의 절박한 외침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나를’이라는 표현 때문에 19절의 반문은 여호와야훼의 반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0절에서는 추수철이 지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고, 여름이 끝나기 전에 구원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계절을 특정한 정치적 사건이나 구원 계획과 직접 연결했는지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길르앗에는 향유가 없는가
21절에서는 예언자의 탄식이 더욱 깊어집니다.
딸인 내 백성이 부서졌기에 나도 부서졌다. 나는 어두워졌고, 공포가 나를 움켜잡았다.예레미야 8:21 · 본디새김
여기서 ‘딸인 내 백성’이라는 표현은 공동체 전체를 한 여인으로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말을 듣고도 바깥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백성이 왜 심판받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신실함과 우상 숭배, 거짓된 확신을 고발한 사람도 바로 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포한 심판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의 상처 때문에 함께 무너집니다.
예언자는 단순히 옳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심판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과 그 심판의 결과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기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길르앗에는 향유가 없는가? 거기에는 치료하는 이가 없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딸인 내 백성의 상처에 새살이 돋지 않았는가?예레미야 8:22 · 본디새김
길르앗은 치료에 사용할 만한 약재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입니다. 이 질문의 힘은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데도 실제로는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11절에서 거짓된 지도자들은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그들은 평안이 없는데도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앞에서는 상처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 거짓 치료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상처가 끝내 회복되지 못한 현실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22절을 단순히 ‘하나님이 치료자이신데 왜 사람들은 그분을 찾지 않는가?’라는 식으로만 설명하면 본문의 슬픔을 지나치게 빠르게 해결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부서진 백성을 바라보며, 어째서 그들의 상처가 낫지 않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본문은 즉각적인 치유의 약속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백성이 왜 무너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눈앞의 상처가 저절로 낫지는 않습니다.
거짓된 평안을 거부하는 사람은 실제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끝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눈물이 샘처럼 흘렀으면
예레미야 8장은 마지막 절에서 하나의 소망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과 다른 소망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내 머리가 물이 되고 내 눈이 눈물의 샘이 되었으면. 그러면 딸인 내 백성 가운데 죽임당한 이들을 위해 낮과 밤으로 울겠다.예레미야 8:23 · 본디새김
일반적인 눈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낮과 밤’이라는 표현은 애도가 잠시의 감정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고통임을 보여 줍니다.
첫 부분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무덤에서 끌려 나와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는 들판에 펼쳐졌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을 위해 끝없이 울고 싶어 하는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죽은 자들이 버려진 채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죽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을 전해야 하지만, 그 말씀이 가리키는 심판의 현실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그의 고통은 선포하는 말씀과 백성을 향한 애정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는 거짓된 위로로 백성을 안심시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선포한 심판을 이유로 그들의 상처를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돌아올 길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여호와야훼는 무관심하게 재앙을 허락하시는 분으로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백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 들으셨고,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상태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이 자신을 바로잡도록 허락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정확한 가르침도 회개의 계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 사실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거짓된 위로를 거부하면서도, 실제로 상처 입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돌아올 때를 몰랐던 백성의 비극은, 끝내 그들을 위해 울고자 하는 예언자의 눈물 앞에 놓입니다.
예레미야 8장은 구원의 노래가 아니라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 상처 앞에서 예언자는 더 이상 설명할 말을 찾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머리가 물이 되고 눈이 샘이 되어, 밤낮으로 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