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위로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두려움

욥기 15장에서 엘리파즈는 친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자네에게는 하찮은가? 자네에게 부드럽게 건네는 말도 그러한가?」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이 곧이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전혀 부드럽지 않습니다.

악인은 평안한 순간에도 약탈자의 습격을 두려워하고,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칼의 표적이 됩니다. 재산은 사라지고, 어린 가지는 불에 마르며, 아직 익지 않은 열매까지 떨어집니다. 엘리파즈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위로를 전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상대에게 두려움과 정죄를 전할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가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던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발언에서 그는 욥에게 고난을 하나님의 훈계로 받아들이라고 권하면서, 하나님이 상처를 주셔도 다시 싸매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5:17–18).

그러나 이번 연설에서는 그 가능성이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께 직접 말하겠다고 하자, 엘리파즈는 욥의 태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욥은 더 이상 잘못을 깨닫도록 도와야 할 친구가 아니라, 말로써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연설의 앞부분(2–16절)에서는 욥이 말하는 방식을 공격하고, 뒷부분(17–35절)에서는 악인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지는지를 묘사합니다. 엘리파즈는 뒷부분에서 욥을 직접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욥의 말이 죄악에서 나왔다고 규정한 뒤, 하나님께 맞서는 악인의 운명을 길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일반 교훈이 아니라 욥을 향한 강력한 경고로 들립니다.

이 장을 읽을 때는 엘리파즈가 말하는 내용 자체와, 그 내용을 욥에게 적용하는 방식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이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과, 지금 고통받는 욥이 바로 그런 악인이라는 말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15장 본문 읽기 →

지혜로운 사람의 배를 채운 동풍

욥기 15:1–6 본문 →

엘리파즈는 욥의 말이 지혜로운 사람의 말답지 않다고 공격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바람 같은 지식으로 대답하고, 제 배를 동풍으로 채우며,」 「쓸모없는 말로 논박하고,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말로 따지겠는가?」욥기 15:2–3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종류의 바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바람 같은 지식’입니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고 실체가 없습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말이 겉으로는 지식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내용 없는 말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바람이라고 하지 않고 ‘동풍’이라고 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환경에서 동풍은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배를 동풍으로 채운다는 표현은 아무 내용 없는 말로 가득하다는 조롱에 더해, 생명을 북돋우기보다 메마르게 하는 말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배’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엘리파즈는 말이 사람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이미지로 욥을 공격합니다. 그의 속에는 지혜가 아니라 바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비판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게다가 자네는 경외심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는 묵상을 줄이고 있네.」욥기 15:4 · 본디새김

이제 욥의 말은 쓸모없는 말을 넘어 신앙을 해치는 말로 규정됩니다. 경외심은 욥기의 서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으로 소개되며(1:1), 하나님도 그 사실을 인정하십니다(1:8). 그러나 엘리파즈는 이제 욥이 바로 그 경외심을 무너뜨린다고 말합니다.

그의 판단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항의하는 모습이 엘리파즈에게는 경건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경건한 숙고를 약화시킨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뜻밖의 상황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일을 그분께 직접 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바로 그 행동이 경외심을 훼손한다고 판단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관한 의견 차이입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판단에 항의하지 않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정을 정직하게 밝히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5–6절에서는 엘리파즈의 말이 더욱 단호해집니다.

「자네 죄악이 자네 입을 가르치고, 자네는 교활한 자들의 혀를 택하고 있으니 말일세.」욥기 15:5 · 본디새김
「자네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것은 자네 입이지 내가 아니네. 자네 입술이 자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네.」욥기 15:6 · 본디새김

보통 사람은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에 따라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욥의 입을 가르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죄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어 6절에서는 법정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엘리파즈는 자신이 욥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욥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말이 하나님을 향한 거친 항의라는 사실과, 그 말이 욥의 고난을 초래한 숨겨진 죄를 증명한다는 주장은 서로 다릅니다. 엘리파즈는 그 사이에 필요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의 말투와 태도를 통해 욥의 내면에 죄악이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되면 욥에게는 자신의 결백을 설명할 방법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가 침묵하면 친구들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을 열어 항의하면 그 항의 자체가 유죄의 증거로 사용됩니다.

엘리파즈는 자신이 공정한 재판관처럼 말하지만, 이미 욥의 말을 불리한 증거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동풍’으로 옮긴 히브리어 카딤(⁨קָדִים⁩)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41장 6절과 23절에서도 동풍에 마른 이삭이 등장합니다. ‘경외심(⁨יִרְאָה⁩)’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두려움과 경외를 나타내는 말이고, ‘묵상(⁨שִׂיחָה⁩)’으로 옮긴 말은 숙고하거나 말하고 탄식하는 행위와 관련되며, 문맥에 따라 기도나 경건한 대화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가

욥기 15:7–13 본문 →

엘리파즈는 이번에는 욥의 지식과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자네가 맨 처음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언덕들보다 먼저 태어났는가?」욥기 15:7 · 본디새김

욥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욥은 처음부터 세상을 지켜본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더욱 인상적인 질문이 이어집니다.

「자네가 하나님의 회의에서 귀를 기울였는가? 지혜를 자네 혼자 차지하고 있는가?」욥기 15:8 · 본디새김

‘회의’는 친밀한 모임이나 비밀스러운 의논, 내밀하게 공유되는 계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논의하시는 회의의 자리에 참석했느냐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욥기 독자에게 특별하게 들립니다.

욥기 1–2장에서 독자는 하나님 앞에 천상 존재들이 모인 장면을 이미 보았습니다. 욥의 고난과 관련된 일도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욥은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는 적어도 욥의 재난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죄의 보응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욥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엘리파즈 자신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이 왜 욥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직접 들은 적이 없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욥을 꾸짖지만, 자신이 내린 판단에도 똑같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9–10절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연륜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무엇을 자네는 아는가? 우리에게 없는 무엇을 자네는 깨닫고 있는가?」욥기 15:9 · 본디새김
「우리 가운데는 머리가 센 이도, 늙은 이도 있는데, 자네 아버지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이들이네.」욥기 15:10 · 본디새김

그들이 전하는 지식은 갑자기 만들어 낸 주장이 아닙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쌓인 경험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지혜 전통에서 나이와 경험은 중요한 권위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경험이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많은 일을 경험하면서 지혜로워질 수 있지만, 자기 경험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욥의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엘리파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전통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설명이 자신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항의합니다.

11절에서 엘리파즈는 그 항의를 자신이 전한 위로에 대한 거절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자네에게는 하찮은가? 자네에게 부드럽게 건네는 말도 그러한가?」욥기 15:11 · 본디새김

여기서 엘리파즈는 자신과 친구들이 전한 말을 ‘하나님의 위로’라고 부릅니다. 그가 전하는 말은 이제 단순히 자신의 의견이나 조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욥이 그 말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하찮게 여기는 행동처럼 해석됩니다.

그러나 욥이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위로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아닙니다. 친구들이 자신의 고난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으면, 인간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일로 바뀝니다.

이어지는 12–13절에서도 엘리파즈는 욥의 마음과 눈과 영과 입을 거론합니다.

「어째서 자네 마음이 자네를 휩쓸어 가는가? 어째서 자네 눈이 번뜩이는가?」 「그래서 자네 영을 하나님께 맞서 돌리고, 자네 입에서 말들을 내뱉는가?」욥기 15:12–13 · 본디새김

엘리파즈의 눈에는 욥이 감정에 휩쓸려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욥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입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분노를 보지만, 그 분노가 나온 자리까지 충분히 살피지는 않습니다. 자녀들을 잃고 몸이 무너진 사람이 하나님께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에게는 그 호소가 하나님께 맞서는 태도로 보이고, 그는 욥의 격앙된 말을 신앙의 결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해석합니다.

조금 더 깊이

‘언덕들보다 먼저 태어났는가’라는 표현은 잠언 8장 22–25절에서 지혜가 땅과 산들이 형성되기 전부터 있었다고 묘사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은 창조 이전의 시간과 지혜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여기서 직접 인용을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잠언 16장 31절에서도 흰머리는 의로운 길에서 얻어지는 영광의 면류관으로 묘사됩니다. ‘눈이 번뜩인다’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정확한 뉘앙스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눈을 깜박이는 행동이나 적대적인 눈짓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에서 엘리파즈가 욥의 격앙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두고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다

욥기 15:14–16 본문 →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할 수 있겠는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무엇이기에 의로울 수 있겠는가?」욥기 15:14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방금 전 욥이 했던 말과 거의 같은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욥은 14장 1절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날수가 짧고 괴로움으로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14장 4절에서는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내놓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 사실에서 끌어내는 결론은 다릅니다.

욥은 인간이 연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잠시 쉴 시간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14:5–6). 반면 엘리파즈는 인간이 깨끗하지 못하므로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같은 인간의 연약함이 한쪽에서는 긍휼을 구하는 근거가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죄를 강화하는 근거가 됩니다.

15절에서는 그 주장이 하늘에까지 확대됩니다.

「보게,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이들도 믿지 않으시며, 하늘도 그분 눈에는 깨끗하지 않네.」욥기 15:15 · 본디새김

‘거룩한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상 하늘에 속한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의 정확한 신분이나 범위를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토록 높아서, 인간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하늘조차 그분 앞에서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 그는 인간을 더욱 낮은 자리에 놓습니다.

「하물며 가증하고 부패한 자, 불의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이야 어떻겠는가?」욥기 15:16 · 본디새김

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늘 마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결심이 없어도 목이 마르면 마십니다. 엘리파즈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 그처럼 자연스럽게 불의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앞의 14–15절은 인간 전체의 한계를 말합니다. 반면 16절의 ‘불의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은 악행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엘리파즈는 이러한 표현을 연속해서 사용함으로써 욥의 결백 주장에 압박을 가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다는 사실로부터, 욥의 현재 고난이 특정한 악행에 대한 형벌이라는 결론이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엘리파즈는 이 구별을 충분히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악인이 어떤 운명을 맞는지에 관한 긴 설명으로 넘어갑니다.

오래된 지혜는 언제나 옳은가

욥기 15:17–19 본문 →

엘리파즈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자기 말의 출처를 밝힙니다.

「내가 자네에게 알려 주겠으니 내 말을 듣게. 내가 본 것,」 「곧 지혜로운 이들이 전하고, 조상들에게서 받아 감추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겠네.」욥기 15:17–18 · 본디새김

직접 경험한 것은 현실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고, 조상들의 가르침은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지혜를 전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전승이 서로 일치하며, 따라서 그 내용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19절에서는 조상들이 살던 시대의 특징을 덧붙입니다.

「그 조상들에게만 땅이 주어졌고, 낯선 자가 그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네.」욥기 15:19 · 본디새김

이 말은 조상들의 땅이 외부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엘리파즈는 조상들의 지혜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한편 외부인의 침입 없이 땅을 안정적으로 소유했던 시대를 말한다는 이해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파즈는 조상들의 경험과 가르침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합니다.

엘리파즈는 자신이 이제 말하려는 내용을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검증된 전통으로 제시합니다. 그는 오래되고 순수하게 전해진 지혜라면 현재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통이 오래되었다는 사실과 그 전통의 특정한 적용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별개입니다.

조상들이 악인의 몰락을 경험하고 그것을 교훈으로 전했다면, 그 경험은 귀중한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모든 고난이 악인의 몰락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악인이 때때로 어떤 일을 겪는다는 관찰이 아니라, 악인은 반드시 이런 삶을 살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만으로 특정한 민족이나 역사적 시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평안한 순간에도 약탈자의 소리를 듣는 사람

욥기 15:20–24 본문 →

「악인은 사는 내내 고통에 몸부림치네. 그 포악한 자에게는 햇수가 정해져 있네.」욥기 15:20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인간의 경험에 관한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이 모습을 모든 악인의 삶을 설명하는 원리처럼 제시합니다.

이것은 욥이 관찰한 세상과 충돌합니다.

욥은 12장 6절에서 약탈자들의 천막이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여기서 악인이 평안한 순간에도 약탈자의 습격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욥에게 약탈자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엘리파즈에게 악인은 약탈자의 습격을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해치는 사람이 두려움 속에 살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겉으로는 형통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한 모습만으로 모든 악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21절은 불안의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두려운 소리들이 그의 귀에 울리고, 평안할 때에도 약탈자가 그에게 들이닥치네.」욥기 15:21 · 본디새김

실제로 위험이 찾아오기 전부터 귀에 두려운 소리가 울립니다. 그가 듣는 소리가 실제 공격의 징후인지, 위험을 예상하는 마음속의 공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세계에서는 안전한 장소와 안전한 시간이 사라집니다.

22절에서는 어둠과 칼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둠에서 돌아오리라 믿지 못하고, 칼의 표적으로 노려지고 있네.」욥기 15:22 · 본디새김

어둠은 위험과 고통, 죽음의 가능성을 담은 이미지입니다. 악인은 그 어둠에서 다시 벗어날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23절에서는 불안이 생존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는 빵을 찾아 헤매며 『어디 있나?』 하고 묻고, 어둠의 날이 자기 곁에 준비되어 있음을 알고 있네.」욥기 15:23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악인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제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궁핍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디 있나?’라는 짧은 질문은 그 절박함을 생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욥에게 매우 특별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욥은 실제로 재산을 잃었고 생존의 기반이 무너졌습니다. 엘리파즈는 지금 악인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묘사하는 궁핍은 욥이 겪는 재난과 겹쳐 보입니다.

24절에서는 악인의 두려움이 절정에 이릅니다.

「곤경과 압박이 그를 두렵게 하고, 공격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제압하네.」욥기 15:24 · 본디새김

곤경과 압박이 강력한 적처럼 악인을 덮칩니다.

악인은 약탈을 당할 수도 있고, 약탈을 당할까 봐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어둠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악인의 삶 전체를 끝없는 불안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파즈가 제시하는 악인의 초상이지, 욥기 서술자가 욥의 삶에 대해 내린 판정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공격을 준비한 왕’이라는 표현의 세부 의미는 불확실합니다. 해당 히브리어 키도르(⁨כִּידוֹר⁩)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공격·전투와 둘러싸임·무리로 풀이가 갈립니다. 악인의 평안을 두고 성경 안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시편 73편에서는 악인들이 오히려 평안하고 재산을 늘리는 현실이 나타나고(73:3–12), 시인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이것은 악인의 길이 궁극적으로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형편만으로 한 사람의 도덕적 상태와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을 모두 알아낼 수 없다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이후 욥기 21장에서 욥은 악인들이 오래 살고 권세를 얻으며, 자녀들과 함께 평안하게 지내는 현실을 제시합니다(21:7–13).

두꺼운 방패를 앞세워 하나님께 달려드는 사람

욥기 15:25–30 본문 →

엘리파즈는 이제 악인이 왜 그런 파멸을 겪는지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맞서 손을 뻗고, 전능자께 맞서 힘을 뽐내기 때문이네.」욥기 15:25 · 본디새김

26절에서는 그 반역이 전쟁의 장면으로 표현됩니다.

「그는 목을 곧추세운 채 그분께 달려드네, 자기 방패들의 두꺼운 돌출부를 앞세우고.」욥기 15:26 · 본디새김

방패의 두꺼운 돌출부는 방패의 중앙이나 표면에서 튀어나온 방어 구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견고한 방패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묘사하는 악인은 그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돌진합니다. 인간의 무기와 방어구가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전능자를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27절에서는 전사의 모습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그가 제 기름기로 얼굴을 덮고, 허리에 비곗덩이를 붙였기 때문이네.」욥기 15:27 · 본디새김

이 구절을 단순히 몸이 뚱뚱한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고대의 시적 표현에서 풍성한 기름기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의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앞의 교만과 결합하여, 풍요를 누리면서도 자기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사람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악인이 먹을 빵을 찾아 헤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얼굴과 허리에 기름이 가득한 사람으로 그립니다. 이는 반드시 논리적 모순은 아닙니다. 풍요를 누리던 악인이 몰락하여 궁핍해지는 과정을 여러 장면으로 묘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악인이 부유하면 그 풍요는 교만의 증거가 됩니다. 궁핍하면 그것은 형벌의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악인의 삶에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엘리파즈의 설명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28절에서는 황폐해진 성읍이 등장합니다.

「그는 파괴된 성읍들에 살았네,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 돌무더기가 되도록 정해진 집들에.」욥기 15:28 · 본디새김

이 표현이 이미 저주받은 장소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그가 사는 곳이 결국 폐허가 될 것임을 나타내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학적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그가 차지한 장소조차 무너질 운명을 안고 있습니다.

29절에서는 재산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그는 부유해지지 못하고 그의 재산도 오래가지 못하며, 그들의 소유는 땅 위로 뻗어 가지 못하네.」욥기 15:29 · 본디새김

‘땅 위로 뻗어 간다’는 표현은 소유나 생산물이 넓게 퍼지고 확장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경제적 의미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재산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거나 불어날 수 없다는 뜻은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그런데 욥은 바로 그와 같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가축과 종들을 잃고 자녀들의 죽음까지 겪었습니다. 엘리파즈는 이 단락에서 악인을 일반적으로 묘사하지만, 그 내용이 욥의 재난과 닮아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30절에서는 그 파멸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꽃이 그의 어린 가지를 말려 버리며, 그분 입의 숨결에 그는 사라지네.」욥기 15:30 · 본디새김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앞의 22절을 되받습니다. 악인은 자신을 덮은 어둠에서 돌아올 수 없다고 느꼈고, 이제 실제로 그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어린 가지’는 생명의 연속성과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립니다.

여기서 ‘그분 입의 숨결’이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악인 자신의 입을 가리키는지는 문법상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하나님의 입으로 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하나님의 숨결이 악인을 사라지게 하는 심판의 이미지가 됩니다. 반면 악인 자신의 입으로 읽으면, 그가 자기 말로 인해 파멸에 이른다는 의미가 강조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생명을 지탱하는 것이 사라지고 악인의 미래가 끊어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욥기 14장의 이미지가 다시 떠오릅니다.

욥은 나무가 잘려도 물 냄새에 다시 싹을 틔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14:7–9). 반면 엘리파즈는 악인의 어린 가지가 불꽃에 말라 버린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에게 나무는 소망을 묻는 대상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파멸을 경고하는 대상이 됩니다.

열매를 맺기 전에 떨어지는 포도와 올리브꽃

욥기 15:31–35 본문 →

엘리파즈는 마지막으로 악인의 헛된 기대를 경고합니다.

「그릇 인도된 자는 헛됨을 믿지 말라. 헛됨이 그가 돌려받을 대가가 될 테니.」욥기 15:31 · 본디새김

‘헛됨’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사람이 헛된 것을 의지하면 결국 그가 얻는 것도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실체가 없거나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가리킵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속임에 빠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지금의 풍요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에 따르면 그런 믿음은 결국 무너집니다.

32–33절에서는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날이 오기 전에 그 대가가 다 채워지고, 그의 가지는 푸르지 못하네.」욥기 15:32 · 본디새김
「그는 포도나무처럼 자기 풋포도를 거칠게 떨구고, 올리브나무처럼 자기 꽃을 내던지네.」욥기 15:33 · 본디새김

열매가 완전히 익은 뒤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는 아직 풋포도입니다. 올리브나무는 열매를 맺기도 전에 꽃을 잃습니다.

성장의 과정이 끝나기 전에 중단됩니다.

씨를 뿌리고 줄기가 자라며 꽃이 피었지만, 수확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이미지는 32절의 ‘그의 날이 오기 전에’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정해진 성숙의 때가 오기 전에 삶과 번영이 끊기는 것입니다.

34절에서는 이 이미지가 공동체와 집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불경한 자들의 무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불이 뇌물로 가득한 천막들을 삼키기 때문이네.」욥기 15:34 · 본디새김

뇌물은 공정해야 할 판단과 관계를 돈이나 이익으로 왜곡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재판에서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출애굽기 23:8; 신명기 16:19). 엘리파즈가 말하는 악인은 단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추상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불의한 이익을 추구하고 공동체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에게 그 경고를 적용하려면 중요한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욥이 실제로 뇌물을 받거나 불의한 이익을 추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이 장에서는 그런 증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욥이 재산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재산이 불의하게 얻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35절은 연설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묶습니다.

「그들은 해악을 잉태하고 악행을 낳으며, 그들의 배는 속임수를 마련하네.」욥기 15:35 · 본디새김

악은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자라고, 마침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이 비유를 다시 ‘배’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처음에는 욥의 말이 바람처럼 무가치하다고 했지만, 마지막에서는 악인의 내면이 속임수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말의 내용이 문제였습니다. 그다음에는 말하는 사람의 경외심이 문제였고, 마침내 그 말이 죄악에서 나온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엘리파즈가 모든 구절에서 욥을 직접 지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설 전체는 욥을 이런 악인의 모습에 점점 가까이 놓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 악인의 모습을 길게 묘사함으로써 욥이 자기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하도록 압박합니다.

조금 더 깊이

33절의 히브리어는 덜 익은 열매를 떨어뜨리는 행위의 주체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악인 자신이 열매를 떨구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고, 열매가 제때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장면에 무게를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핵심 이미지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35절의 잉태 이미지는 시편 7장 14절과 주제적으로 가까우며, 이사야 59장 4절에서도 악을 잉태하고 거짓을 낳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열매를 잃는 나무는 시편 1편이 악인을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고 묘사하고,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제때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는 대조(시편 1:3–4)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의 이미지를 현실의 모든 사건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의 지혜도 인간이 따라야 할 삶의 방향을 알려 주는 것이지, 모든 개별적인 고난의 원인을 즉시 판정하도록 주어진 공식은 아닙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42:7–8). 그 판단을 욥기 15장에 적용할 때에도, 엘리파즈가 말한 모든 지혜의 명제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지혜를 하나님의 확정적인 판단처럼 사용하여 욥을 잘못 해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동풍으로 가득한 배와 떨어지는 열매

욥기 15:1–35 본문 →

엘리파즈의 연설은 배에서 시작하여 배에서 끝납니다.

그 사이에는 두려운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약탈자의 소리를 듣는 사람,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빵을 찾아 헤매는 사람, 두꺼운 방패를 앞세워 하나님께 달려드는 사람, 불꽃에 마르는 어린 가지, 익기도 전에 떨어지는 포도와 올리브꽃.

욥기 15장에서 엘리파즈가 말하는 모든 내용이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엘리파즈가 비난한 뇌물과 불의, 교만과 속임은 실제로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악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특정한 사람이 그 악을 행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릅니다. 욥기 전체는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기 위해 쓰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사건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모두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도 묻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이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파즈는 악인의 내면을 매우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어떤 소리를 듣는지 알고,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에 속고 있는지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욥의 내면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엘리파즈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하지만,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통을 읽는 데에는 실패합니다.

그의 앞에는 자녀들을 잃고 재산을 잃었으며, 몸까지 병든 친구가 앉아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 친구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는 회복의 약속보다 심판의 경고가 더 크게 들립니다.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익기도 전에 떨어지는 열매입니다.

포도는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했고, 올리브나무는 열매를 맺기도 전에 꽃을 잃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것이 악인의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 역시 자신의 삶에서 너무 일찍 끊어진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앞에서 엘리파즈의 말은 끝납니다.

엘리파즈는 열매가 왜 떨어졌는지 안다고 확신하지만, 정작 자기 앞에서 삶의 열매를 잃어버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는 충분히 듣지 못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