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욥기 17장에서 가장 뜻밖의 말은 「의인은 자기 길을 굳게 붙들고, 손이 깨끗한 이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네」(17:9)라는 선언입니다. 욥은 바로 앞에서 자신의 생명이 거의 끝났다고 말하고, 조금 뒤에서는 자신의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서 의로운 사람은 자기 길을 굳게 붙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고난을 견디면 반드시 형편이 좋아진다는 약속으로 읽으면, 이 장의 마지막 질문, 곧 「그렇다면 내 희망은 어디 있는가? 내 희망, 누가 그것을 보겠는가?」(17:15)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욥은 의인의 길을 굳게 붙드는 것과 자신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전망하는 것을 같은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살아서 회복될 미래를 거의 그릴 수 없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빛이 가깝다」(17:12)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위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욥에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현실은 여전히 어두운데, 사람들은 어둠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빛이 가까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욥이 거부하는 것은 희망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외면한 채 희망이라고 불리는 말입니다.
16장에서 욥은 하늘에 자신을 위해 증언할 이가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17장에서는 그 호소가 더욱 구체적인 요청으로 바뀝니다. 자신을 보증해 줄 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보증을 서지 않는 현실에서 욥의 시선은 점점 죽음으로 향합니다.
이 장은 크게 네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욥은 먼저 자신에게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보증을 요청합니다(1–5절). 이어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취급되는지 보여 주면서 의인의 길을 말합니다(6–10절). 그러고는 무너진 미래와 친구들이 말하는 빛을 대조합니다(11–12절). 마지막으로 스올을 집으로, 구더기를 가족으로 부르는 충격적인 가정을 통해 희망의 행방을 묻습니다(13–16절).
무덤은 가까운데 조롱은 떠나지 않는다
「내 숨은 꺾였고, 내 날들은 꺼졌네. 내게는 무덤들이 있네.」욥기 17:1 · 본디새김
17장은 짧은 세 마디로 시작합니다. 숨이 꺾이고, 날들이 꺼지고, 무덤만 남았습니다.
「내 날들은 꺼졌네」라는 표현은 생명의 불빛이 꺼져 가는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표현은 뜻밖에도 복수형입니다. 욥의 미래를 가득 채운 것이 살아갈 장소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라는 인상은 선명합니다.
이 문장은 17장의 마지막 장면을 미리 준비합니다. 처음에는 무덤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던 욥이 마지막에는 스올을 자기 집으로, 어둠을 잠자리로, 구더기를 가족으로 부르게 됩니다. 죽음은 단순히 멀리서 다가오는 사건이 아니라 욥의 남은 세계 전체를 차지하는 현실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마주해야 하는 것은 죽음만이 아닙니다.
「정녕 내 곁에는 조롱이 있고, 내 눈은 그들의 도발에 밤새 머무네.」욥기 17:2 · 본디새김
자신의 생명이 거의 끝났다고 느끼는 사람 곁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순간을 함께 지켜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를 조롱하고 자극하는 사람들입니다.
밤이 되었는데도 욥은 그들의 도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대화가 끝나면 사라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욥의 눈앞에 밤새 남아 있는 괴로움입니다.
이 장에서 「눈」은 계속 등장합니다. 5절에서는 자식들의 눈이 쇠잔해지고, 7절에서는 욥 자신의 눈이 흐려지며, 마지막 15절에서는 자신의 희망을 누가 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욥이 겪는 고통은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볼 수 없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친구들은 그의 몸을 보지만 그의 결백을 보지 못합니다. 욥은 그들의 비난을 마주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욥은 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편에 서서 책임을 져 줄 사람을 찾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내 숨」으로 옮긴 루히는 숨이나 생명의 기운,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뒤의 「내 날들은 꺼졌네」라는 표현과 함께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 다해 간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첫 문장에 사용된 동사는 부서지고 손상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무덤들」은 욥이 여러 개의 무덤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어 본문이 사용하는 복수형을 그대로 살린 표현이며, 그 정확한 뉘앙스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절의 「밤새 머무네」에는 머물다, 밤을 지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가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자신의 보증을 요청하다
「부디 담보를 내놓으시고, 당신 앞에서 저를 보증해 주십시오. 누가 저와 손을 맞잡아 보증해 주겠습니까?」욥기 17:3 · 본디새김
이 절을 이해하려면 고대의 보증 관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이나 의무에 대해 보증을 선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하는 일입니다. 욥은 바로 이러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손을 맞잡아」라는 표현은 그 보증의 약속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욥은 자기 말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건을 위해 책임을 함께 져 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 요청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욥이 보증을 요청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그는 「당신 앞에서 저를 보증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욥을 위한 보증이 필요한데, 그 보증을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법적 관계에서는 보증을 요구하는 사람과 보증을 서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그런데 욥의 상황에서는 그 구별이 무너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으므로,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위한 보증을 마련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일에 하나님이 깊이 관여하신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그 하나님께 문제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4절은 왜 그런 보증이 필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당신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 깨닫지 못하게 하셨으니, 그들을 높이지 않으실 것입니다.」욥기 17:4 · 본디새김
욥은 친구들의 무지를 단순한 지적 부족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연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의 이해력을 어떤 방식으로 막으셨는지를 설명하는 객관적인 서술이라기보다, 욥이 그들의 이해 부족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어리석은 판단을 높이시거나 정당화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이 바로 그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5절에서는 비난이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몫을 얻으려고 친구들을 고발하는 자, 그 자식들의 눈은 쇠잔해질 것이네.」욥기 17:5 · 본디새김
이 절은 히브리어의 연결 관계가 어려운 구절입니다. 본디새김처럼 이익을 얻으려고 친구를 고발하거나 넘겨주는 사람에 관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친구를 배신하는 행동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그러나 첫 부분의 「몫」과 친구들을 언급하는 구문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에 관한 풍자나, 친구를 고발하는 사람의 몫에 관한 진술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특정 친구의 자녀에게 닥칠 재앙을 확정적으로 예언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연결이 있습니다. 소발은 11:20에서 악인들의 눈이 쇠잔해지고 그들의 희망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욥은 친구를 잘못 대하는 사람의 자식들이 눈의 쇠잔함을 겪는다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적용하던 심판의 표현이 친구들과 관련된 장면에 되돌아온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친구를 정죄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한다면, 그 말 자체가 다시 판단받아야 할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의인은 왜 자신의 길을 더 굳게 붙드는가
「그는 나를 뭇사람의 조롱거리로 세웠고, 나는 얼굴에 침을 맞는 자가 되었네.」욥기 17:6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욥의 고통은 개인적인 불행을 넘어 사회적인 수치로 드러납니다.
「조롱거리」로 옮긴 표현에(מְשֹׁל)는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비유나 속담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유하고 존경받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그를 보고 어떤 경고나 조롱의 말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얼굴에 침을 맞는 자」라는 표현은 모욕의 정도를 더욱 분명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누군가 침을 뱉은 사건을 서술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극심한 공개적 멸시를 묘사하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욥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몸에도 나타납니다.
「분통 때문에 내 눈이 흐려졌고, 내 몸의 지체들은 모두 그림자 같네.」욥기 17:7 · 본디새김
「분통」에는 분노뿐 아니라 괴로움과 울분도 포함됩니다. 욥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은 단순히 병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만이 아닙니다. 억울함과 슬픔이 그의 시야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한때 단단한 실체를 가지고 있던 몸이 이제는 거의 그림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선이 욥 자신에게서 다른 의인들에게로 옮겨 갑니다.
「곧은 이들은 이 일에 경악하고, 죄 없는 이는 불경한 자에 맞서 일어날 것이네.」욥기 17:8 · 본디새김
「의인은 자기 길을 굳게 붙들고, 손이 깨끗한 이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네.」욥기 17:9 · 본디새김
앞에서는 욥이 조롱거리가 되어 사람들이 그를 멸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곧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며, 의로운 사람이 자기 길을 굳게 붙든다고 말합니다.
무엇에 경악한다는 뜻일까요? 한 가지 읽기는 욥과 같은 사람이 이런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현실에 경악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8–9절은 욥이 기대하는 올바른 반응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고통을 보고 죄를 추정하는 대신, 그 판단 자체를 문제 삼는 의로운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반어적인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욥의 처지를 보고 경악하며, 그를 불경한 자로 여겨 더욱 강경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풍자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8절의 「불경한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욥의 결백을 알아보는 의인들에 관한 선언으로만 확정하거나, 친구들을 조롱하는 말로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9절에는 어느 읽기에서도 놓치기 어려운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길을 붙드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욥기에서 친구들은 의로운 삶과 형통한 결과가 서로 대응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은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의인의 길을 말합니다. 그가 붙들 수 있는 것은 부나 건강이나 사람들의 존경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설명하는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9절을 욥 자신의 태도와 연결해 읽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손이 깨끗한 이」라는 표현은 앞 장의 「내 두 손에는 폭력이 없고」라는 욥의 항변과 맞닿습니다(16:17). 욥에게 의로움은 자신이 고통받지 않을 자격이 있다는 추상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자신의 실제 행위에 대한 판단이 진실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네」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 말을 욥의 건강이 곧 회복된다는 예고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17장은 그가 여전히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히려 의인이 자신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는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욥기 17장은 의인의 힘을 고난이 사라졌다는 증거에서 찾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찾을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10절은 이 선언을 다시 친구들과의 논쟁으로 돌려놓습니다.
「그러나 자네들 모두 돌아오게. 자, 와 보게. 나는 자네들 가운데 지혜로운 이를 찾지 못하겠네.」욥기 17:10 · 본디새김
이것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완전히 포기했다기보다, 그들이 가진 지혜의 한계를 정면으로 지적하는 말입니다. 욥이 요구하는 지혜는 고난의 일반적인 원칙을 잘 설명하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눈앞의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판단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친구들에게는 많은 말이 있지만, 욥이 경험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지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밤을 낮이라고 부르면 밤이 사라지는가
「내 날들은 지나갔고, 내 계획들은 끊어졌네. 내 마음이 간직한 것들 말일세.」욥기 17:11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그가 재산과 가족과 건강과 존경을 잃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욥은 자신의 계획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현재 가진 것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언젠가 이루고 싶은 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시간도 그의 삶을 이룹니다. 욥에게서 사라진 것은 지금의 행복만이 아닙니다. 그가 기대했던 미래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내 마음이 간직한 것들」이라는 표현이 그 상실을 깊게 만듭니다. 본문은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의 내면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전합니다.
욥이 잃어버린 미래는 다른 사람이 대신 계산하거나 보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에게 다른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밤을 낮으로 바꾸고, 어둠 앞에서도 『빛이 가깝다』고 하네.」욥기 17:12 · 본디새김
10절에서 친구들을 직접 부른 흐름을 고려하면 「그들」은 친구들의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어둠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낮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밤인데, 그들은 빛이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소발은 11:17에서 욥이 올바르게 돌이키면 그의 삶이 대낮보다 밝아지고 어둠도 아침처럼 될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욥이 자신의 죄를 바로잡으면 그의 삶이 회복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그런 재앙을 당할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판단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조건을 전제로 제시되는 밝은 미래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어둠이 아침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욥은 그들이 밤을 낮이라고 바꾸어 부른다고 말합니다.
어둠이 실제로 물러나고 빛이 오는 것은 회복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그대로 있는데 그것을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을 잘못 설명하는 일입니다.
빛이 가까이 있다는 말은 빛이 실제로 오고 있다는 근거가 있을 때 위로가 됩니다. 어둠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반복하면, 그 말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더욱 외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욥은 단순히 비관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거짓으로 바꾸어 놓는 설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그에게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동안, 욥 자신이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다음 장소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생각이나 계획과 연결하여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무덤을 집이라 부르고 구더기를 가족이라 부르다
「만일 내가 스올이 내 집이기를 바라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 놓고,」욥기 17:13 · 본디새김
욥은 자신의 마지막 거처를 상상합니다.
그런데 그가 사용하는 말은 의외로 일상적입니다. 집과 잠자리입니다. 집은 사람이 돌아가 쉴 수 있는 장소입니다. 잠자리는 하루의 피로를 풀고 몸을 눕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욥이 집이라고 부르는 곳은 스올이고, 잠자리를 펴는 곳은 어둠입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욥은 스올에서 어떤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살아 있는 동안 품었던 가능성이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 곳으로 그려집니다.
14절은 이 이미지를 한층 충격적으로 발전시킵니다.
「구덩이에게 『너는 내 아버지다』 하고, 구더기에게 『내 어머니요 내 누이다』 하고 불렀다면,」욥기 17:14 · 본디새김
이 비유가 특별히 아픈 이유는 욥이 이미 가족을 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에서 그는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 뒤 자신의 형편을 함께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친구들마저 자신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가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고 상상하는 대상은 구덩이와 구더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는 모두 생명과 돌봄, 친밀한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죽음과 부패의 대상에게 주어집니다. 이는 죽음을 사랑하는 새로운 가족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죽음만이 가까이 남은 그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표현을 곧장 욥이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3–14절은 15절의 물음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가정입니다. 욥은 스올을 집으로 삼고 구더기를 가족으로 부르는 상황을 상정하면서, 그런 상태에서 희망이 어디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희망을 기다리는 것과 죽음을 기다리는 것
13절의 「바라며」(קָוָה)와 15절의 「희망」(תִּקְוָה)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어근과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무엇을 기다리거나 바라는 행동을 말하고, 뒤에서는 그 기다림의 대상인 희망을 묻습니다.
죽음의 세계가 자신이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집이라면, 그것을 과연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욥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내 희망은 어디 있는가? 내 희망, 누가 그것을 보겠는가?」욥기 17:15 · 본디새김
첫 질문은 희망의 위치를 묻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희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는 단지 자신이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탄식보다 깊습니다. 자신의 상황에서 희망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회복의 미래를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과 친구들의 전망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욥은 밤새 조롱을 바라보았고, 분통 때문에 눈이 흐려졌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누가 볼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의 문제는 눈앞의 고통이 너무 커서 기분이 어두워졌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희망이 자리할 곳을 찾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희망도 나와 함께 내려가는가
마지막 절은 이 질문을 스올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것들이 스올의 빗장들로 내려가겠는가? 함께 먼지 위에 쉬게 된다면 말일세.」욥기 17:16 · 본디새김
이 절은 욥기에서도 번역과 문장 연결이 까다로운 구절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본문이 만들어 내는 장면은 비교적 일관됩니다.
욥은 자신의 희망이 어디로 가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과 함께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서 희망은 더 이상 밝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힘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과 함께 무덤에 묻힐지도 모르는 무엇처럼 등장합니다.
욥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음 이후의 어떤 회복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미래의 모든 가능성이 실제로 사라졌다고 객관적으로 선언하는 구절도 아닙니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대의 교리적 답을 미리 가져와 욥의 질문을 해결하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이 아직 답하지 않은 질문을 그대로 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바데 셰올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스올의 빗장들」로 옮겼습니다. 스올을 문과 빗장으로 닫힌 영역으로 이해하는 읽기입니다. 이와 달리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첫 부분을 욥과 함께 스올로 내려가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빗장이라는 사물보다 함께 내려가는 관계를 중심으로 읽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내려가겠는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여성 복수형인데, 앞의 「희망」은 단수형으로 두 차례 나타납니다. 반복된 희망을 포괄하여 복수형으로 받았거나, 희망과 관련된 여러 기대를 함께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함께 먼지 위에 쉬게 된다면」도 원문의 표현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질문이나 조건적 진술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구약의 다른 탄식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욥기 14:7–12에서 욥은 나무가 베어져도 물을 만나면 다시 싹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으면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17장의 스올과 먼지의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시편 88편의 시인도 자신의 삶이 스올에 가까워졌다고 말하며(88:3), 죽음과 어둠의 땅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의로움이 알려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88:10–12). 두 본문 모두 죽음을 단순한 휴식이나 해방으로 묘사하지 않고, 질문을 쉽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시편 16:10–11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신뢰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욥기 17장에 그대로 옮겨 와 욥도 이미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 17장의 고유한 목소리는 희망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 희망의 행방을 끝까지 묻는 데 있습니다.
어둠 속에 펼쳐 놓은 잠자리
욥기 17장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두 진술이 놓여 있습니다. 9절은 의인이 어떤 길을 택하고 붙들 것인지를 말합니다. 15절은 그가 앞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가 의인의 길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자신의 회복을 확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희망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 자신의 길을 포기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욥이 하나님의 보증을 요청한다고 해서 그 보증이 이미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의인의 길을 말한다고 해서 당장 의로움에 대한 보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장의 신학적 깊이는 바로 이 미해결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어려움이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낙관주의와 다릅니다. 아직 좋은 결과를 볼 수 없는 사람이 공정한 판단을 요구하며 자신의 길을 붙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둠을 낮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실제로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책임 있게 함께 서 줄 사람입니다. 욥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보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의 말은 더욱 깊은 어둠으로 내려갑니다.
13절부터 그의 언어에는 이상할 만큼 익숙한 말들이 등장합니다.
집, 잠자리, 아버지, 어머니, 누이.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안전과 친밀함을 느끼게 해 주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욥의 입에서 그 말들은 모두 죽음의 이미지와 결합합니다. 그의 집은 스올이고, 잠자리는 어둠이며, 가족이라고 부를 대상은 구덩이와 구더기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장면에서 단순히 죽음을 선언하고 말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내 희망은 어디 있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희망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마지막 말에 특별한 긴장을 남깁니다. 그가 희망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스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희망이라는 말을 버리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욥기 17장의 마지막에는 그를 위로할 친구도, 확실한 미래를 보여 줄 표징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욥이 펼쳐 놓은 어둠의 잠자리와 그 곁에 놓인 질문이 남습니다.
희망마저 나와 함께 먼지로 내려간다면, 내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