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42장

이 장의 자리 · 42장 · 욥의 대답과 회복

욥의 편에 서신 하나님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가장 뜻밖의 반전은 욥이 다시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에게 내리신 판결입니다.

「내 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올랐다. 너희가 내 종 욥처럼 내게 옳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2:7)라는 선언은 앞선 대화를 기억하는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줄곧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시므로 의인에게 부당한 고난을 주실 리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권했습니다.

반면 욥은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권리를 빼앗으셨다고까지 말했습니다(27:2). 하나님은 그런 욥의 말에 직접 나타나셔서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38:2).

그런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분노하시고 욥을 옳게 말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을 변호하던 사람들은 책망받고, 하나님께 항의하던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욥의 말은 모두 옳고 친구들의 말은 모두 틀렸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욥에게 던지신 긴 질문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욥기 42장을 이해하려면 이 긴장을 서둘러 없애지 않아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판정하지 않으십니다. 욥은 자신의 말을 되돌아보지만, 친구들의 설명이 옳았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욥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친구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욥을 참여시키십니다.

욥이 재산을 회복하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그의 말을 인정하시고, 친구들에게 그를 찾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욥기의 마지막은 물질적인 회복보다 관계와 판결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942장 본문 읽기 →

욥은 무엇을 깨달았고, 무엇을 철회했는가?

욥기 42:1–6 본문 →

욥은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어떤 계획도 당신께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욥기 42:2 · 본디새김

욥의 마지막 대답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교리를 새롭게 배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기 9:4–10에서 그는 하나님이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크시며, 산들을 옮기시고 하늘을 펼치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9:10에서는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과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는 욥의 태도에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왜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나도록 두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세계 전체를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는지에 관한 정보를 새롭게 얻지 못했습니다. 책의 처음에 등장했던 하늘의 대화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대답합니다.

「『지식 없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그러므로 저는 깨닫지도 못한 것을 말했습니다, 제게 너무도 놀라운 것들, 제가 알지도 못한 것들을.」욥기 42:3 · 본디새김

앞부분은 38:2에서 하나님이 하셨던 질문을 되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지식 없이 자신의 계획을 어둡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제 욥은 그 질문을 자신의 말로 받아들입니다.

「제게 너무도 놀라운 것들」(⁨פָּלָא⁩)에서 ‘놀랍다’는 뜻의 히브리어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이로운 일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말했던 대상이 단순히 조금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지식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고통이 착각이었다거나 결백에 관한 주장이 거짓이었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욥이 깨닫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고난의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 전체를 판단하려 했습니다.

욥이 철회해야 할 것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최종적으로 판단하려 했던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이 욥 자신의 입에서 다시 나온다

「『자,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네게 물을 테니, 내게 알려라.』」욥기 42:4 · 본디새김

이 구절도 앞선 하나님의 말씀을 되받습니다. 하나님은 38:3과 40:7에서 욥에게 질문하겠으니 대답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한편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라는 표현은 욥이 앞에서 하나님께 대답을 요청하던 말(13:22)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42:4를 하나님의 질문만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볼지, 욥 자신의 앞선 요청까지 겹쳐 울리는 말로 볼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에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묻는 말에 답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질문하셨다는 사실을 되새깁니다.

대화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자기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하는 상대처럼만 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물으실 수 있으며, 자신도 그 질문 앞에서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다

「저는 당신을 귀로 전해 들었으나,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욥기 42:5 · 본디새김

흔히 이 구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그런 해석에는 본문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단순히 간접 지식에서 직접 경험으로 넘어간 일반적인 영적 성장 이야기로만 이해하면 욥의 상황이 흐려집니다.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정보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 자신의 사건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욥기 23:3에서 그는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만 안다면 그분의 처소까지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3:4에서는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 앞에 펼쳐 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욥의 소원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사건을 설명하고 판결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시기보다, 욥이 알지 못했던 창조세계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욥을 만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숨으셨다고 느꼈습니다(23:8–9).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욥이 모든 해답을 얻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그토록 찾던 하나님이 더 이상 침묵하고 계시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두어들이고, 먼지와 재 위에서 뉘우칩니다」 — 욥의 마지막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러므로 저는 거두어들이고, 먼지와 재 위에서 뉘우칩니다.」욥기 42: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욥기 전체에서 해석이 특히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히브리어는 짧지만, 중요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고 동사의 의미와 전치사의 관계를 여러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욥이 무엇을 거부하거나 거두어들이는지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욥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멸시한다고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칠십인역은 ‘나 자신을 하찮게 여겼다’는 의미가 되도록 목적어를 보충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 자신을’이라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욥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해 지나치게 확신하며 말했던 태도를 거두어들이고 뉘우쳤다는 해석입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말했다고 인정했으므로 문맥에 잘 들어맞습니다.

다른 하나는 욥이 자신을 먼지와 재처럼 여기며 절망하던 태도를 바꾸고,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 위로를 얻었다는 해석입니다. 이 역시 욥의 앞선 탄식과 42:5의 만남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법만으로 이 둘 중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칠십인역은 히브리어보다 자기 비하의 의미를 분명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이 히브리어의 모든 모호함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조심해야 할 해석이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모든 결백 주장을 취소했다거나, 친구들이 지적한 숨겨진 죄를 인정했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곧이어 하나님이 친구들을 책망하시고 욥을 옳게 말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선언과 충돌합니다.

욥의 마지막 고백은 그가 고난받을 만한 죄인이었다는 인정이 아닙니다. 그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자신의 말과 판단을 새롭게 돌아보는 응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백 다음에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시던 대화를 마치시고,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제 눈이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표현을 반드시 하나님의 신체적 형상을 눈으로 보았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기 38:1과 40:6은 하나님이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고 전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가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사건을 ‘본다’는 언어로 표현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42:6의 첫 번째 동사 에므아스(⁨מָאַס⁩)는 ‘거절하다’, ‘싫어하다’, ‘물리치다’라는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동사 니함티(⁨נָחַם⁩)는 문맥에 따라 뉘우치다, 마음을 바꾸다, 위로받다 등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먼지와 재는 애통과 낮아짐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욥은 이미 2:8에서 재 가운데 앉아 있었고, 30:19에서는 자신이 먼지와 재처럼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따라서 욥이 먼지와 재 가운데서 자신의 말과 태도를 뉘우친다고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전치사 알은 ‘위에서’뿐 아니라 ‘관하여’, ‘때문에’라는 뜻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먼지와 재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관해 마음을 바꾸거나 위로를 얻었다는 방향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종 판결은 친구들에게 내려진다

욥기 42:7 본문 →

여호와야훼가 욥에게 이 말들을 한 뒤, 여호와야훼가 테만 사람 엘리파즈에게 말했다. 「내 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올랐다. 너희가 내 종 욥처럼 내게 옳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기 42:7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제 욥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욥과의 대화가 끝나고, 그동안 욥에게 충고하고 경고했던 친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로 부름받는 사람은 엘리파즈입니다. 그는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욥에게 말했던 사람입니다(4:1). 엘리파즈는 욥에게 죄 없는 사람이 멸망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4:7), 나중에는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22:6–9).

그러나 그 비난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욥기의 논쟁을 마무리하는 최종 판결입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잘못 말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에 관해,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옳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게 옳게」는 친구들이 하나님에 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말의 태도까지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가능성을 엄격하게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내게」라는 방향을 보존하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하나님에 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어떻게 들으시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의 결과는 의로운 사람을 거짓으로 정죄하는 일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왜 틀렸는가?

친구들이 했던 말이 모두 그 자체로 거짓이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며 악을 미워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주장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됩니다.

문제는 그 일반적인 진리를 욥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고난에 상응하는 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에 맞추어 욥의 삶을 판단했습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으리라고 주장했고,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어 죽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8:4), 초파르는 하나님이 욥의 죄보다 가벼운 벌을 내리셨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11:6).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서두에서 독자는 이미 욥이 어떤 사람인지 들었습니다.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1:1). 하나님도 그를 그렇게 평가하셨습니다(1:8; 2:3).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해 옳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신학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설명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욥은 자신의 고난에 관해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는 때로 지나친 판단을 내렸고, 하나님이 직접 그 점을 바로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욥이 자신에게 죄가 없는데도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죄를 있다고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변호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의 현실을 거짓으로 설명하게 된다면, 그 믿음의 표현 자체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등장하는 「내 종 욥」

「내 종 욥」은 책의 처음에 하나님이 욥을 부르셨던 이름입니다(1:8; 2:3). 욥이 모든 재산을 잃기 전에도, 자녀들을 잃기 전에도, 친구들과 논쟁하기 전에도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이제 긴 고난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를 다시 「내 종 욥」이라고 부르십니다. 더구나 이 호칭은 42:7–8에서 네 번 반복됩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항의하던 시간에도,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거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판단과 달리 욥을 자신의 종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욥의 명예는 부유해졌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에 회복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내게 옳게」에 해당하는 표현은 엘라이(⁨אֵל⁩) 느코나(⁨כּוּן⁩)입니다. 엘라이는 문자적으로 ‘나에게’라는 방향을 나타내고, 느코나는 바르고 확실하게 세워진 것을 뜻하는 말과 연결됩니다. 또한 요한복음 9:1–3에서는 제자들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습니다. 예수는 그 사람의 상태를 곧바로 당사자나 부모의 죄로 설명하는 생각을 거부하십니다. 이것은 욥기를 직접 인용한 장면은 아니지만, 고난을 특정한 죄의 결과로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신약의 연결은 욥기 42장의 본래 의미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욥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욥의 기도를 필요로 하게 된다

욥기 42:8–9 본문 →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니 이제 너희를 위해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데리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해 번제를 바쳐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내가 오직 그를 받아들여 너희에게 수치를 안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종 욥처럼 내게 옳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기 42:8 · 본디새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물의 숫자보다, 친구들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친구들은 지금까지 욥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충고를 듣고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으십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는 사람들은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정죄했던 욥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 반전은 단순히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는 장면이 아닙니다.

일곱 마리씩 바치는 제물의 규모는 이 일이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제물 전체를 바치는 제사로, 여기서는 친구들이 자신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으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제물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받아들이셔서 친구들을 향한 분노를 거두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욥은 왜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이것은 욥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을 의심했고, 그가 숨겨진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19:21에서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쳤으니 제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비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친구들이 욥의 기도를 필요로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친구들의 말이 결국 옳았다고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친구들의 잘못은 분명하게 지적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욥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이것은 잘못을 덮어 두는 화해가 아닙니다.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진 뒤, 그들을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도록 돕는 일이 맡겨집니다.

욥은 책의 처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었습니다. 1:5에서 욥은 자녀들이 혹시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는 가족의 삶을 염려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두 장면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녀들을 위한 제사였고, 마지막에는 친구들이 제물을 드리며 욥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욥이 다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려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했던 사람들의 운명을 자기 손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이 욥이 하나님의 종으로 다시 등장하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슈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파르가 가서,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말한 대로 했다. 여호와야훼는 욥을 받아들였다.욥기 42:9 · 본디새김

앞서 세 친구는 각각 자기 주장을 펼치며 욥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욥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욥의 중보를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만 친구들이 욥에게 직접 사과했는지, 욥이 그들과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그들의 관계가 이전과 똑같이 회복되었는지는 서술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더 이상 욥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요구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욥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 장면에서 친구들의 논쟁은 끝나고, 욥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그를 받아들여」(⁨נָשָׂא⁩)에 해당하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 올리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상대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뒤의 「수치를 안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에는 어리석고 부당한 행위와 관련된 느발라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친구들의 어리석음에 상응하는 처분을 내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어, 그 정확한 표현에는 번역의 여지가 있습니다.

욥의 회복은 친구들을 위한 기도와 함께 시작된다

욥기 42:10 본문 →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여호와야훼가 욥의 형편을 회복시켰다. 여호와야훼는 욥이 가진 모든 것을 두 배로 늘렸다.욥기 42:10 · 본디새김

「형편을 회복시켰다」는 말은 그의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서술자는 욥의 기도와 회복을 연결합니다. 욥의 관심이 자신을 정죄했던 친구들에게 향해 있는 동안, 하나님은 욥의 무너진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욥은 오랫동안 자기 자신의 고난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자신이 왜 죄인이 아닌지를 변론했고, 하나님께 자신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은 자기 자신의 사건을 변론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욥의 삶에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남을 용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재산을 두 배로 돌려주신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때에 하나님이 회복을 이루셨다고 말하지만, 모든 의로운 사람에게 같은 순서와 같은 보상이 주어진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욥기 전체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고 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긴다는 단순한 보응 원리를 문제 삼아 왔습니다. 그런 책의 결론을 다시 기계적인 보상 원리로 바꾸어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욥이 자기 형편을 회복시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회복시키셨습니다.

욥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친구들을 위한 기도 역시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며, 그 기도를 받아들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종으로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형편을 회복시켰다」(⁨שׁוּב⁩)는 표현은 ‘사로잡힌 상태를 돌이키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과 연결됩니다. 이 표현은 실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사건에도 사용되지만, 개인이나 공동체의 형편을 회복시키는 일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29:14와 신명기 30:3에서도 관련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이 실제로 포로로 끌려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과 이웃이 돌아와 함께 음식을 먹는다

욥기 42:11 본문 →

그의 모든 형제와 모든 자매와 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그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닥치게 한 모든 재앙을 두고 그를 위해 슬퍼하며 그를 위로했다.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크시타 하나씩과 금고리 하나씩을 주었다.욥기 42:11 · 본디새김

욥의 회복을 묘사하는 첫 장면은 거대한 가축 떼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먹는 모습입니다.

욥은 재산과 자녀만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도 버림받았습니다.

19:13에서는 형제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졌다고 탄식했고, 19:14에서는 친척들이 자신을 떠나고 친한 사람들이 자신을 잊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종들에게도 낯선 사람이 되었고,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호소했습니다(19:15–19).

그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음식을 나눕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부자가 된 욥을 찾아와 축하하는 장면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슬퍼하며」라는 말은 상대의 고통에 함께 마음을 기울이는 행위를 나타내고, 「위로했다」는 말은 실제로 슬픔을 겪는 사람에게 위안을 전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 장면은 책의 처음과 연결됩니다. 2:11에서 엘리파즈와 빌닷과 초파르는 욥에게 닥친 재앙을 듣고 그를 위로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처음 의도는 위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에서 사람들이 다시 욥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욥의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욥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신의 고난을 모두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을 실제로 겪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닥치게 하신 모든 재앙

욥기의 서두에서는 고발자가 욥을 시험하려 하고, 하나님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그것을 허락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1:12; 2:6). 그런데 결론부의 서술자는 욥에게 닥친 재앙을 여호와야훼와 직접 연결합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닥치게 한 모든 재앙」이라는 표현을 약화해서 하나님은 그 일과 아무 관계가 없으셨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는 욥이 겪은 재앙을 하나님의 통치와 무관한 우연한 사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욥을 악하게 미워하셨기 때문에 그 재앙을 내리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책의 처음에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도 하나님은 욥을 자신의 종이라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42:11은 고난의 책임에 관한 모든 질문을 해결해 주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욥기 전체가 끝까지 유지하는 긴장을 다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욥의 재앙과 무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욥의 재앙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은 정당한 처벌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 두 사실을 함께 남겨 둡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재앙을 두고 욥을 위로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욥의 고통을 작게 여기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일어난 일임을 말하면서도, 그 고통을 함께 슬퍼합니다.

크시타와 금고리

크시타와 금고리라는 선물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문맥상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욥을 위로하는 말만 전하지 않고, 실제로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눕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집에 찾아오고, 함께 음식을 먹고, 그의 고통을 슬퍼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 줍니다. 회복은 개인의 재산이 늘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일로 묘사됩니다.

다만 이 선물들을 욥이 겪은 상실에 대한 충분한 배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죽었고, 그가 겪은 고통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크시타와 금고리가 그 시간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욥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크시타는 고대의 가치 단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세기 33:19와 여호수아 24:32에서도 등장하지만, 정확한 재질이나 가치를 현대 화폐로 환산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금고리 역시 정확한 착용 부위를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배가 된 재산, 그러나 두 배가 되지 않은 자녀들

욥기 42:12–13 본문 →

여호와야훼가 욥의 나중 삶에 처음보다 더 복을 주었다. 그에게는 양과 염소 만 사천 마리, 낙타 육천 마리, 소 천 쌍, 암나귀 천 마리가 있었다.욥기 42:12 · 본디새김

이 숫자들을 책의 처음과 비교하면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 가축 | 처음 (1:3) | 마지막 (42:12) | |---|---|---| | 양과 염소 | 7,000마리 | 14,000마리 | | 낙타 | 3,000마리 | 6,000마리 | | 소 | 500쌍 | 1,000쌍 | | 암나귀 | 500마리 | 1,000마리 |

모든 항목에서 정확히 두 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생겼다.욥기 42:13 · 본디새김

욥기 1:2에서도 욥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습니다. 가축들은 두 배가 되었지만, 자녀들의 수는 이전과 같습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읽기에서는 이미 죽은 자녀들도 여전히 욥의 자녀이므로, 새롭게 태어난 열 명을 더하면 모두 스무 명이 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42:13은 욥에게 새롭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생겼다고만 말합니다. 이미 죽은 자녀들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내용을 본문에 보충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축과 자녀들을 같은 방식으로 셀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축의 수는 이전의 두 배로 회복되었다고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숫자가 같아졌다고 해서 이전에 잃은 자녀들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새롭게 태어난 아들과 딸들이 이전의 자녀들과 동일한 사람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욥기의 결말은 이 사실을 설명하지 않은 채 두 숫자를 나란히 놓습니다.

재산은 두 배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다시 열 명이 되었습니다.

이 차이를 그대로 읽을 때 욥기의 마지막은 단순한 보상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지만, 그가 잃은 모든 것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되돌려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회복은 반드시 과거를 완전히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쁨이 주어지더라도 이미 겪은 슬픔은 그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로 남습니다.

욥기 42장은 새로운 복을 진실하게 말하면서도, 이전에 잃은 자녀들의 죽음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존중할 때, 욥기의 결말은 고난받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쉬운 위로를 건네지 않게 됩니다.

이름이 기록된 세 딸과 형제들 사이의 유산

욥기 42:14–15 본문 →

서술자는 아들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딸들의 이름만 기록합니다.

그는 첫째 딸의 이름을 예미마, 둘째의 이름을 크치아, 셋째의 이름을 케렌 하푸크라고 지었다.욥기 42:14 · 본디새김

고대의 가족 이야기와 족보에서는 흔히 아들들의 이름이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에서는 세 딸이 개별적인 이름을 가진 인물로 등장합니다. 세 이름에는 새와 향료와 아름다운 장식에 관한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욥이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긴 고난이 끝난 뒤 새롭게 등장한 딸들의 이름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된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욥의 새로운 삶에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산 목록 뒤에 추가된 숫자가 아닙니다. 각자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자녀들입니다.

딸들에게도 유산을 주다

이어지는 15절은 더 뜻밖입니다.

온 땅에서 욥의 딸들만큼 아름다운 여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형제들 가운데서 유산의 몫을 주었다.욥기 42:15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상속 질서를 보여 주는 민수기 27:8–11에서는 아들이 없는 사람의 재산을 딸에게 넘기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 규정에서 아들이 있을 때 딸도 똑같이 유산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원칙이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욥기 자체가 묘사하는 상황은 분명합니다.

욥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딸들에게도 형제들 사이에서 유산의 몫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 딸을 단순히 아름다운 자녀로 칭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가족의 재산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들임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왜 욥기의 마지막은 이 장면을 기록했을까요? 본문은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욥이 어떤 사회 개혁을 의도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학적으로 이 장면은 분명한 효과를 냅니다. 재산이 얼마나 많아졌는지를 말한 뒤, 그 재산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보여 줍니다. 새롭게 시작된 욥의 집에서는 딸들도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형제들 가운데서 유산을 받습니다.

처음에 욥은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살아가며,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유산을 나누어 줍니다.

욥의 회복은 재산이 다시 쌓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재산이 다음 세대의 삶으로 이어지는 모습까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예미마는 비둘기와 관련된 이름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낮이나 빛과 연결하여 이해되기도 합니다. 정확한 어원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크치아는 향기로운 계피 계열의 향료인 육계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향료로 등장합니다(시 45:9). 케렌 하푸크는 문자적으로 눈 화장에 사용하는 안료를 담는 뿔 모양의 용기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들의 의미를 각각 평화, 기쁨, 영광이라는 특정한 신학적 상징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욥기의 시대적 배경과 민수기 법규의 관계를 정확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욥의 행동을 특정 시대의 법률을 위반하거나 개혁한 사건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욥은 늙어 삶의 날들을 충분히 누리고 죽었다

욥기 42:16–17 본문 →

욥은 그 뒤 백마흔 해를 살았고, 아들들과 아들들의 아들들을 사 대까지 보았다.욥기 42:16 · 본디새김

욥기의 마지막은 다시 시간의 흐름으로 돌아옵니다.

욥이 고난을 겪는 동안 시간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탄식했습니다(7:6). 삶이 고통스러워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7:16). 사람이 여자에게서 태어나 짧은 날을 살며 괴로움으로 가득하다고 탄식했습니다(14:1).

그런데 이제 140년이라는 긴 시간이 등장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욥은 자녀와 손자들, 여러 세대의 후손들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복의 의미는 단지 생존 기간이 길어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의 뒤를 이어 살아갈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세대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는 후손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책은 이렇게 끝납니다.

욥은 늙어 삶의 날들을 충분히 누리고 죽었다.욥기 42:17 · 본디새김

그러나 욥기의 결말에서는 이 표현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욥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3장에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이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삶은 그에게 더 이상 선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에서는 그가 삶의 날들을 충분히 누리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이 모든 고통을 잊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의 이유를 모두 이해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욥이 이후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지난 고난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욥기의 첫 번째 탄식과 마지막 문장은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욥이 회복된 뒤 140년을 더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를 욥의 전체 수명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42:17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날들로 가득한(⁨שָׂבֵעַ⁩)’, 또는 ‘날들에 만족한’ 상태로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25:8의 아브라함이나 35:29의 이삭의 죽음을 묘사하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들은 오래 살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충분한 날들을 산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5:11은 욥의 인내와 그의 마지막을 직접 언급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말합니다. 이것은 욥의 이야기에 대한 신약의 명시적인 연결입니다. 다만 야고보서가 욥의 모든 고난에 대한 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날들을 살고 죽은 사람

욥기 42:1–17 본문 →

욥기 42장은 욥에게 일어난 재앙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결론은 친구들의 설명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을 거부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그에게 씌운 죄책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과 판단을 바로잡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의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거짓 죄책을 씌우는 일을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욥기의 결말에서는 하나님이 욥을 어떻게 인정하셨는가, 하나님이 친구들의 말을 어떻게 판단하셨는가, 그리고 친구들이 정죄했던 욥이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해결됩니다.

욥기의 처음에서 욥은 자신의 옷을 찢고 머리를 밀며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재산과 자녀를 잃었고, 몸은 병들었으며,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고, 왜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다음 하나님은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욥은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그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고, 그의 고통을 슬퍼하며 그를 위로합니다. 새로운 자녀들이 태어나고, 세 딸은 각각 이름을 얻습니다. 욥은 그 딸들에게도 형제들 가운데서 유산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릅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욥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도,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려는 긴 논쟁도 없습니다.

욥은 늙었습니다.

그는 아들들과 그들의 아들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잃은 자녀들이 돌아온 것은 아니며, 과거의 고통이 없었던 일이 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 고통의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책은 마지막으로 그의 삶에 관해 한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욥은 늙어 삶의 날들을 충분히 누리고 죽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한 날들을 살았다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욥의 고난은 실제였고, 그의 상실도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상실이 그의 삶에 관한 마지막 말은 아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