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다 차지하지 못한 땅
하나님이 넘겨주신 땅에 누가 사는가
사사기는 뜻밖에도 희망적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야훼께 묻습니다. 누가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유다를 지명하시고, 이미 그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장의 끝에 이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며, 마침내 단 지파는 오히려 아모리 사람들에게 쫓겨 산지에 갇힙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선언하신 땅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점점 주도권을 잃어 갑니까?
사사기 1장은 이 질문을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승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다가, 그 안에 작은 균열을 드러내고, 마침내 실패의 기록이 장 전체를 뒤덮도록 구성합니다.
여호수아가 없는 자리에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여호수아의 죽음은 단순히 지도자 한 사람의 부재가 아닙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이어져 온 이스라엘의 공동 지도 체제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제 각 지파는 자기에게 배정된 땅을 실제로 차지하고 그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야훼에게 물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먼저 가나안 사람들에게 올라가 그들과 싸워야 합니까?」사사기 1:1 · 본디새김
질문에서 중요한 표현은 「먼저」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지파를 한꺼번에 이끌 새로운 최고 지휘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지파별로 상속지가 분배된 상황에서 누가 전투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유다가 올라가야 한다. 보아라. 내가 그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사사기 1:2 · 본디새김
앞부분은 유다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뒷부분은 그 행동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아직 유다가 전투를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땅을 이미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유다는 이 명령에 응답하면서 시므온에게 함께 싸우자고 제안합니다. 유다의 상속지에서 먼저 싸우고, 나중에는 시므온의 상속지에서도 함께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9:1–9에 따르면 시므온의 상속지는 유다의 상속지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두 지파가 함께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군사적 효율성보다 형제 관계입니다. 유다는 시므온을 「자기 형제」라고 부릅니다. 한 지파의 승리가 다른 지파의 승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유다가 올라가자 여호와야훼가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들은 베젝에서 그들 가운데 만 명을 쳐 죽였다.사사기 1:4 · 본디새김
1:2에서 하나님이 선언하신 일이 1:4에서 실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 안에서 서술됩니다.
그런데 이 승리의 한가운데 불편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도니베젝은 붙잡힌 뒤 엄지손가락들과 엄지발가락들이 잘립니다.
아도니베젝이 말했다. 「왕 일흔 명이 엄지손가락들과 엄지발가락들이 잘린 채 내 식탁 밑에서 주워 모으곤 했다. 내가 한 그대로 하나님이 내게 갚았다.」 그들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갔고, 그는 거기서 죽었다.사사기 1:7 · 본디새김
아도니베젝이 행한 일은 군사적 무력화만이 아니라 철저한 굴욕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응보로 이해했다고 기록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투의 승리를 주셨다는 서술과, 승리한 이스라엘이 적에게 행한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는 판단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사기 1:1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러 올라갈 것인지 여호와야훼께 묻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20:18에도 매우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누가 먼저 전투에 나서야 하는지를 묻고, 유다가 먼저 나서라는 응답을 듣습니다. 1장에서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질문하지만,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형제 지파인 베냐민과 싸우기 위해 질문합니다. 처음에는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협력했던 지파들이, 나중에는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 점에서 1:3의 유다와 시므온의 협력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책의 첫머리에서 이스라엘은 아직 형제의 땅을 위해 함께 싸울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성읍을 차지하는 것과 땅에서 살아가는 것
이어서 유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헤브론과 드비르로 진격합니다. 지명들이 빠르게 이어지지만, 이 가운데 특히 길게 서술되는 사건은 전투가 아니라 갈렙의 딸 악사가 물을 요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정복 전쟁의 한가운데에 이런 가정사가 들어 있습니까?
갈렙의 집안에서 이어지는 정복
헤브론에서 유다는 셰샤이와 아히만과 탈마이를 칩니다. 여호수아 15:14는 이들을 아낙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 아낙 사람들은 민수기 13:28, 33에서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두려워했던 집단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두렵게 했던 존재들이 이제 정복의 대상이 됩니다.
민수기 13–14장에서 다른 정탐꾼들이 가나안 주민들의 위세를 보고 두려워했을 때, 갈렙은 여호와야훼의 약속을 신뢰하는 편에 섰습니다. 여호수아 14:6–15에서 그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헤브론 산지를 요청했습니다. 따라서 헤브론 정복은 단지 한 성읍을 얻은 사건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약속이 여러 세대를 거쳐 구체적인 땅으로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드비르 정복에서는 옷니엘이 등장합니다. 갈렙은 그 성을 점령하는 사람에게 자기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본문은 당시의 혼인과 가족 관계가 남성 중심의 권한 아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관습을 별도로 평가하거나 악사의 의사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장면에서 악사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악사가 요구한 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악사는 옷니엘에게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달라고 청하도록 권합니다. 이어 자신이 직접 갈렙에게 말합니다.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제게 선물을 주십시오. 제게 네게브 땅을 주셨으니 물웅덩이들도 주십시오.」 갈렙은 그녀에게 위쪽 물웅덩이들과 아래쪽 물웅덩이들을 주었다.사사기 1:15 · 본디새김
네게브는 유다 남부의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땅을 소유하는 것과 그 땅을 안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농경과 가축 사육, 지속적인 거주가 어려워집니다.
악사는 바로 그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악사는 정복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속지의 현실적인 필요를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직접 말합니다.
약속의 땅은 점령해야 할 군사적 목표인 동시에,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야 할 생활의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헤브론과 드비르 정복, 옷니엘과 악사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15:13–19에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사사기 1장의 모든 사건을 반드시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에 새로 발생한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미 알려진 정복 이야기들을 가져와 각 지파가 땅을 차지한 과정과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을 수 있습니다. 1:14의 히브리어 문면을 따르는 본디새김에서는 악사가 옷니엘을 부추기는 것으로 읽습니다. 다만 칠십인역에는 옷니엘이 악사에게 청하도록 권하는 다른 읽기가 있습니다. 누가 먼저 청하도록 권했는지는 전승에 차이가 있지만, 1:15에서 악사 자신이 필요한 물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유다와 함께 있었다」 — 그런데 왜 몰아내지 못했는가
유다의 이야기는 다시 전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문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1:16에는 모세의 장인과 연결되는 겐 사람의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유다 자손들과 함께 유다 광야로 올라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속하지 않는 집단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동행하여 함께 거주합니다.
사사기 1장은 이스라엘 밖의 모든 사람을 아무 구별 없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적으로 싸우는 주민들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함께 살아가는 집단도 있습니다. 신명기 7:1–6과 20:16–18은 가나안 정복 명령을 이스라엘의 언약적 구별, 특히 다른 신들을 섬기는 관습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다만 이 사실이 본문의 전쟁과 진멸에 담긴 폭력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사기 1장은 실제로 성읍의 파괴와 주민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은 역사적·윤리적으로 무거운 서술입니다. 이 특정한 정복 이야기를 시대와 대상을 초월한 폭력의 정당화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1:17에서 유다와 시므온은 츠팟을 진멸하고 그곳을 호르마라고 부릅니다. 이어 1:18은 유다가 가자와 아슈켈론과 에크론을 점령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야훼가 유다와 함께 있었고, 유다는 산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골짜기 주민들은 몰아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철 병거가 있었기 때문이다.사사기 1:19 · 본디새김
독자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는데 왜 철 병거를 이기지 못했습니까?
철 병거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강했는가
산지와 골짜기는 전쟁의 조건이 달랐습니다.
험준하고 좁은 산지에서는 보병의 활동이 중요하지만, 비교적 넓은 평지에서는 병거가 전술적 이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철 병거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철을 사용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지만, 본문이 이를 강력한 군사적 장애물로 제시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사기 4:3에는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진 시스라가 등장합니다. 그 전투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사사기 4:14–16). 사사기 자체가 철 병거를 하나님께서 극복하실 수 없는 무기로 묘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1:19의 패배를 곧바로 유다의 불신앙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 절은 철 병거를 실패의 이유로 언급하지만, 유다가 어떤 판단을 잘못했는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이나 실패를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진술 사이의 긴장이 사사기 전체에 걸쳐 발전할 문제를 처음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서는 그 약속의 온전한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점령된 예루살렘에 여전히 주민들이 남아 있다
1:20은 갈렙이 헤브론에서 아낙의 세 아들을 몰아냈다고 기록합니다. 갈렙의 이야기는 성공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베냐민 자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은 이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자손들과 함께 살았다.사사기 1:21 · 본디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앞에서 유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불태웠다는 1:8의 기록이 떠오릅니다. 유다의 점령이 일시적이었을 수도 있고, 성읍의 일부를 공격했지만 모든 요새와 거주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기록이 서로 다른 시기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만으로 정확한 사건 순서와 점령 범위를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투의 승리와 지속적인 지배가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은 유다가 가자와 아슈켈론과 에크론을 점령했다고 하지만, 칠십인역의 해당 본문에는 유다가 이 성읍들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여기에 아스돗도 포함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기록대로 유다가 한때 이 성읍들을 점령했지만 지배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칠십인역의 전승처럼 처음부터 점령하지 못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최초의 서술인지는 여기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사사기 3:3에서도 블레셋의 통치자들이 여전히 그 땅에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록은 여호수아 15:63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유다 자손들이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사사기 1:21에서는 베냐민이 그 주체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이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는 점(여호수아 15:8; 18:16, 28)은 이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두 진술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완전히 밝혀 주지는 않습니다. 훗날 다윗이 예루살렘의 여부스 요새를 점령하는 이야기가 사무엘하 5:6–9에 나온다는 사실도 이 성읍의 지배가 오랫동안 완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벧엘의 옛 이름을 가지고 떠난 사람
이제 이야기의 중심이 유다에서 요셉 집안으로 옮겨갑니다.
요셉 집안도 벧엘로 올라갔다. 여호와야훼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사사기 1:2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1:19의 「여호와야훼가 유다와 함께 있었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유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 집안은 벧엘을 정찰하다가 성읍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 주면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남자는 길을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은 성읍을 공격하지만, 그와 그의 집안은 살려 줍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외부인이 이스라엘의 성읍 점령을 돕고, 그 대가로 자기 가족의 생명을 보존합니다. 라합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음을 안다고 고백합니다(여호수아 2:9–11). 반면 벧엘의 남자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살아남은 뒤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새 성읍을 세웁니다.
그 남자는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성을 세우고 그 이름을 루즈라고 불렀다. 이날까지도 그것이 그 성의 이름이다.사사기 1:26 · 본디새김
루즈는 벧엘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본문은 이 일을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이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정복자는 성읍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의 옛 이름을 기억하고 이어 가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몰아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누가 누구의 땅에서 살고 있는가
사사기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서술 방식이 크게 바뀝니다.
앞부분에는 전투와 행동을 묘사하는 동사들이 잇달아 등장했습니다. 올라갔다, 쳤다, 점령했다, 몰아냈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몰아내지 않았다.」
이 반복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닙니다. 지파 하나의 실패를 기록하고, 다시 다른 지파의 실패를 기록하면서, 문제가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므낫세 — 강해졌지만 몰아내지는 않았다 (1:27–28)
므낫세는 벳 스안과 그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 타아나크와 그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 도르와 그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 이블르암과 그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 므깃도와 그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땅에 계속 살기로 작정했다.사사기 1:27 · 본디새김
이 가운데 여러 성읍은 산지와 평야를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에 자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읍들이 다른 주민들의 지배 아래 남아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땅이 지리적으로도 완전히 연결되고 통제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밀려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해지자 가나안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몰아내지는 않았다.사사기 1:2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단순한 군사적 무능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본문만으로 이스라엘이 모든 주민을 몰아낼 충분한 능력을 실제로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말은 적어도 상당한 통제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강제 노역을 선택한 이유가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는지는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주민들을 내보내는 대신 자기들의 노동 체제 안에 편입시켰습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경험한 강제 노동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1:11–14). 두 사건의 역사적 상황과 규모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강제 노동에서 벗어난 백성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하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은 정경 전체에서 생각해 볼 만한 대조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단지 승리하는 법만 배워서는 안 되었습니다. 어떤 사회를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도 함께 마주해야 했습니다.
땅을 주신 목적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은 창세기 12:1–3에서 시작되는 더 큰 약속의 일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고, 그를 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후 출애굽기 19:4–6에서 여호와야훼는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속한 백성, 제사장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에서도 땅을 얻는 일은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명기 6:10–15는 땅에서 풍요를 누릴 때 여호와야훼를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신명기 8:11–18은 풍요를 자기 능력의 결과로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땅은 이스라엘의 능력을 과시하는 전리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장만으로 강제 노역이 이스라엘의 모든 실패를 일으킨 원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러 지파의 미완성된 정착을 보여줄 뿐, 아직 그 모든 원인을 하나의 설명으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에브라임과 스불론 —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살았다 (1:29–30)
에브라임은 게제르 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이 에브라임 가운데 살게 됩니다. 스불론도 키트론과 나할롤의 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합니다.
이 두 지파의 기록에서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거주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표현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에브라임 가운데 살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스불론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셀과 납달리 —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산다 (1:31–33)
아셀은 악코와 시돈을 비롯한 여러 성읍의 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합니다.
아셀 사람들은 그 땅의 주민인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그들을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사기 1:32 · 본디새김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땅의 주인이고 가나안 사람들이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이 기존의 주민으로 제시되고, 이스라엘이 그들 사이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납달리는 벳 셰메스 주민들과 벳 아낫 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았다. 납달리는 그 땅의 주민인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벳 셰메스 주민들과 벳 아낫 주민들은 납달리를 위해 강제 노역을 하게 되었다.사사기 1:33 · 본디새김
따라서 모든 지역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던 「몰아내지 않았다」는 말이, 이제 땅의 실제 지배 관계와 공동체의 위치를 묻는 표현이 됩니다.
단 — 마침내 이스라엘이 밀려난다 (1:34–36)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단 지파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아모리 사람들은 단 자손들을 산지로 몰아붙였다. 아모리 사람들이 단 자손들을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사사기 1:3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처음에 누가 먼저 올라가 적과 싸울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지파는 적에게 밀려 자기 상속지의 일부에 접근하는 것조차 제한당하고 있습니다.
1:35에서 요셉 집안의 세력이 강해지자 아모리 사람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덧붙습니다. 따라서 단의 이야기도 일방적인 패배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 지파 자신의 영토 확보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장은 뜻밖의 문장으로 끝납니다.
아모리 사람들의 경계는 아크라빔 오르막에서부터, 그 바위에서부터 위쪽으로 이어졌다.사사기 1:3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넘겨주셨다는 선언으로 시작된 장이, 다른 민족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알려 주는 기록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사사기 18장에서 단 자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땅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미완성된 정착 상황과 연결됩니다. 1:36의 문장이 정확히 어떤 지리적 범위를 나타내는지는 지명들의 위치를 확정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불확실성이 남아 있습니다.
약속을 받았다는 것과 그 약속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스라엘은 어떤 곳에서는 적을 이겼고, 어떤 곳에서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군사적 제약에 부딪혔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상대 주민들을 강제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습니다. 이 다양한 상황을 모두 같은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공동체였지만, 그 약속에 걸맞은 삶의 질서를 땅 전체에 세우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사기의 첫 장은 어느 한 사람의 영웅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여호와야훼께서 이미 땅을 넘겨주셨다고 선언하셨음에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아모리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계는 이스라엘의 지도 위에 그어진 미완성의 선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했지만, 이스라엘의 현실은 아직 그 약속이 가리키는 곳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장은 그 간격을 성급하게 메우지 않습니다. 단 지파가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하는 모습과 아모리 사람들의 경계를 마지막까지 그대로 남겨 둡니다. 독자는 그 경계선 앞에서, 하나님께서 넘겨주셨다는 땅이 왜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손에 남아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