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1–15장 · 정결과 부정
돌아오는 사람을 맞으러 나가는 제사장
레위기 14장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으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제사장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병변이 생기면 제사장에게 데려가고, 제사장은 그 상태를 살펴 정결한지 부정한지 판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사장이 직접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그곳에는 차라아트 병변이 나은 사람이 있습니다. 몸의 상태가 회복되는 일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회복하는 일은 같은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레위기 14장의 중심에는 병변이 사라지는 순간보다, 그 뒤에 사람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진영 밖으로 나가다
「차라아트가 있는 사람이 정결해지는 날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려가야 한다.」레위기 14:2 · 본디새김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제사장이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레위기 13:46에 따르면 부정한 차라아트 병변이 있는 사람은 진영 밖에 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직 정결 판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마음대로 진영 안으로 들어와 제사장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제사장이 직접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진영의 정결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일은 진영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을 막는 것만이 아닙니다. 정결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직접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룩함을 지키는 책임과 정결해진 사람의 귀환을 돕는 책임이 같은 직무 안에 있습니다.
치유와 정결은 서로 다른 사건이다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제사장이 살펴보아 차라아트가 있던 사람의 차라아트 병변이 나았으면,」레위기 14:3 · 본디새김
병변이 나았다는 것은 몸에 나타난 상태의 변화입니다. 정결하다고 판정하는 것은 그 상태를 확인한 뒤, 여호와야훼가 정하신 의식에 따라 의례적 지위를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 장은 제사장이 어떻게 차라아트를 치료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병변이 어떤 방법으로 나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고치셨을 수도 있고, 병변이 다른 방식으로 호전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개별 환자의 치유 원인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차라아트가 있던 사람은 병변 자체뿐 아니라 공동체의 거룩한 질서와 관련된 제한 아래 있었습니다. 병변이 나았다고 해서 그 제한이 아무 절차 없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전체와의 연결 — 돌아오는 사람을 위한 길
미리암에게 차라아트가 생겼을 때 그는 이레 동안 진영 밖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떠나지 않았고, 미리암이 다시 돌아온 뒤에 행진을 계속했습니다(민수기 12:14–15). 이 사건의 구체적인 사정은 레위기 14장의 일반적인 정결 규정과 다르지만, 차라아트가 있는 사람이 진영 밖에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오는 문제를 실제 이야기로 보여 줍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는 나아만이 차라아트에서 깨끗해지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는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회복됩니다(열왕기하 5:10–14). 그러나 나아만은 이스라엘 진영의 구성원이 아니므로 레위기 14장의 정화 절차가 그대로 서술되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차라아트에서 깨끗해지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지만, 레위기 14장의 제사장 의식을 직접 재현하는 본문은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1:40–45가 중요한 연결을 제공합니다. 차라아트가 있는 사람이 예수께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는 그를 깨끗하게 하신 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1:44).
이 말씀은 레위기 13–14장의 규정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습니다. 예수의 치유로 몸의 병변이 사라지는 일과 제사장에게 가서 정해진 절차를 행하는 일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레위기 14장 자체가 예수의 치유를 직접 예언하는 본문은 아닙니다. 신약은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을 배경으로 예수의 치유와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보여 줍니다.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들판으로 날아간다
병변이 나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제사장은 독특한 의식을 명령합니다.
준비물은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 진홍색 실, 에조브입니다. 한 마리는 샘물이 담긴 질그릇 위에서 잡습니다. 다른 한 마리는 살아 있는 채로 첫 번째 새의 피와 관련된 정화 의식에 사용됩니다.
제사장은 백향목과 진홍색 실과 에조브, 살아 있는 새를 피에 담갔다가 정결하게 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여기에는 성막의 제단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직 진영 밖에서 이루어지는 정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물’이 담긴 질그릇
고대 히브리어에서 ‘살아 있는 물’이라는 표현은 흐르는 물이나 샘에서 나오는 신선한 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고여 있는 물과 구별되는 생동하는 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4절은 새 두 마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5절에서는 살아 있는 물이 등장합니다. 6절에서는 다시 살아 있는 새가 강조됩니다.
병변에서 회복된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에 죽음과 생명의 이미지가 함께 놓여 있는 것입니다.
백향목과 진홍색 실과 에조브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세 물품은 성경의 다른 정결 의식에서도 등장합니다. 특히 민수기 19:6에서는 붉은 암송아지의 정화 의식에 백향목과 에조브와 진홍색 재료가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12:22에서는 이스라엘이 유월절 밤에 에조브를 사용하여 피를 문설주에 바릅니다. 이러한 연결은 에조브가 피나 물을 사용하는 의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백향목은 크고 단단한 나무로 알려져 있고, 진홍색 실은 선명한 색을 지닌 재료입니다. 그러나 이 의식에서 백향목이 반드시 위엄을, 진홍색 실이 반드시 죄를, 에조브가 반드시 겸손을 상징한다고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세 재료의 정확한 상징적 의미를 각각 확정하기보다는, 그것들이 피와 물을 사용하는 정화 의식에 함께 쓰였다는 사실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새를 놓아 보내는 장면
「그는 차라아트에서 정결하게 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리고, 그가 정결하다고 판정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새를 들판으로 놓아 보내야 한다.」레위기 14:7 · 본디새김
그동안 진영 밖에 있어야 했던 사람이 이제 정결해지는 절차에 들어섰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들판으로 풀려나는 장면이 정결 판정과 함께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을 그 사람이 부정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는 상징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살아 있는 새가 사람의 죄나 부정함을 몸에 싣고 떠난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6:21–22에서 살아 있는 숫염소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지는 의식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곳에서는 죄를 숫염소 위에 놓는 행위와 죄를 짊어지고 떠나는 역할이 명시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새가 부정함을 제거하는 과정을 정확히 어떻게 상징하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에조브의 정확한 식물 종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특정 식물로 단정하는 것보다 본문의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진영에는 들어오지만 아직 자기 천막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정결 판정이 내려졌으니 이제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일까요?
「정결하게 되는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자기의 모든 털을 깎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한다. 그러면 정결해진다. 그 뒤에 진영 안으로 들어가되, 이레 동안 자기 천막 밖에서 머물러야 한다.」레위기 14:8 · 본디새김
레위기 13:46에서 그는 진영 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공동체의 경계를 넘었지만, 회복의 마지막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왜 자기 천막 밖에서 다시 이레를 지내야 하는지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결 과정에 일정한 시간과 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왜 털을 두 번 깎아야 하는가
「그는 일곱째 날에 자기의 모든 털을,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깎아야 한다. 자기의 모든 털을 깎아야 한다. 자기 옷을 빨고 몸을 물로 씻어야 한다. 그러면 정결해진다.」레위기 14:9 · 본디새김
털을 깎는 일이 반복됩니다.
옷을 빠는 일도 반복됩니다.
몸을 씻는 일도 반복됩니다.
이것은 첫 번째 씻김이 효과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8절에서도 정결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시 이레를 지내고 동일한 종류의 의식을 행하게 합니다.
몸의 이전 상태와 결별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정화 과정에서 몸 전체를 철저하게 준비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털을 왜 두 차례 깎아야 하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될 만큼 몸 전체에 걸친 의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 등장하는 정결의 선언
7절에서 이미 정결하다고 판정했습니다. 8절에서도 씻은 뒤 정결해진다고 말합니다. 9절에서도 다시 정결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20절에 가서야 마지막으로 정결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선언이라기보다, 회복 과정의 서로 다른 단계들이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은 정결한 상태의 각 단계를 별도의 전문 용어로 체계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허용되는 공간을 다르게 규정함으로써 정결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정결함의 회복은 몸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공동체와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 전체를 포함합니다.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다 — 다시 제사장 위임식의 장면으로
여덟째 날이 되면 정결하게 되는 사람은 만남의 천막 입구에 섭니다.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어린 암양 한 마리, 기름을 섞은 곡식 제물과 기름 한 로그를 가져옵니다. 한 숫양은 속건 제물입니다. 나머지 짐승들은 정화 제물과 번제로 사용됩니다.
「제사장은 속건 제물의 피를 얼마간 취하여 그것을 정결하게 되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발라야 한다.」레위기 14:14 · 본디새김
이 장면을 읽으면 레위기 8장의 제사장 위임식이 떠오릅니다. 그때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불, 오른손 엄지손가락,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발랐습니다(8:23–24).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장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같은 부위의 피 바름이 이루어집니다.
제사장 위임식과 정결 의식은 무엇이 같은가
두 의식은 목적이 다릅니다.
레위기 8장에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무를 맡도록 성별됩니다. 레위기 14장에서는 차라아트에서 회복된 사람이 정결해집니다. 사용하는 제물도 다릅니다. 레위기 8장에서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사용하고, 여기서는 속건 제물의 피를 사용합니다.
이 유사성은 두 의식 모두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상태로 구별하거나 회복시키는 과정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차라아트에서 정결해진 사람이 제사장으로 임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에는 그에게 제사장 직무를 맡기거나 제사장 옷을 입히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단순히 옆에서 제사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사의 피가 그의 몸에 닿습니다.
그의 정결은 자기와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적용되는 의식입니다.
피를 바른 바로 그 자리에 기름을 바르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를 바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기름 한 로그에서 얼마간을 취하여 자기 왼손바닥에 붓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기름을 여호와야훼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남은 기름을 정결하게 되는 사람에게 바릅니다.
「제사장은 자기 손바닥에 남은 기름에서 얼마간 취하여 정결하게 되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속건 제물의 피 위에 발라야 한다.」레위기 14:17 · 본디새김
마지막으로 남은 기름은 그 사람의 머리에 바릅니다. 피는 제물과 속죄의 의식에 관계됩니다. 기름은 성별과 관련된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두 요소가 함께 사용됨으로써, 차라아트에서 회복된 사람이 거룩한 예배에 다시 참여하기 위해 정해진 의식을 거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왜 속건 제물인가
왜 차라아트에서 회복된 사람에게 속건 제물이 요구될까요?
레위기 5–7장에서 속건 제물은 거룩한 것을 침해한 일이나 특정한 잘못에 관한 속죄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레위기 14장은 이 사람이 어떤 구체적인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속건 제물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람이 도덕적인 죄 때문에 차라아트에 걸렸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속건 제물이 이 사람의 정결과 속죄를 위한 필수 절차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왜 다른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속건 제물이 먼저 요구되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귀와 손과 발을 말씀을 듣고 행하며 걸어가는 삶의 상징으로 읽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각 부위의 상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의식의 의미를 세 가지 도덕적 덕목으로 축소하기보다, 피가 그 사람의 몸에 직접 적용된다는 사실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다만 피와 기름이 각각 사람의 어느 부분에 어떤 영적인 능력을 전달하는지까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제사가 끝나야 정결 의식도 끝난다
피와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 끝난 뒤에도 제사는 계속됩니다.
「제사장은 정화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되는 사람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 뒤에 번제물을 잡아야 한다.」레위기 14:19 · 본디새김
속건 제물의 피와 기름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고, 정화 제물을 통한 속죄가 이루어지며, 번제와 곡식 제물이 여호와야훼께 바쳐집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선언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 바쳐야 한다.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정결해진다.」레위기 14:2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에서 여러 차례 등장했던 정결의 선언을 마무리합니다. 차라아트와 관련된 부정함이 정해진 절차를 통해 해소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집례하는 정화 의식이 그 사람의 의례적 상태를 회복시킵니다.
여덟째 날이라는 시간
이 장에서 마지막 제사가 이루어지는 날은 여덟째 날입니다.
레위기 9:1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의 이레가 끝난 뒤 여덟째 날에 아론이 제사를 집례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위기 12:3에서는 남자아이가 태어난 뒤 여덟째 날에 할례를 받도록 명령했습니다. 여기서는 이레 동안의 정결 절차를 거친 뒤 여덟째 날에 제물을 바칩니다.
이러한 반복을 모두 동일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각 규정에서 여덟째 날의 구체적인 역할은 다릅니다.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정결의 과정 안에 포함된 요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이 나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절차를 앞당길 수 없습니다. 정해진 기간을 거치고 마지막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정결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같은 정결 의식을 다시 설명하십니다.
이번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난하여 그것을 마련할 형편이 못 되면, 자신을 위한 속죄에 쓸 속건 제물로 흔들어 바칠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기름을 섞어 곡식 제물로 바칠 고운 가루 한 에파의 십분의 일과 기름 한 로그를 마련해야 한다.」레위기 14:21 · 본디새김
앞의 규정에서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어린 암양 한 마리, 고운 가루 에파의 십분의 삼, 기름 한 로그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린 숫양 한 마리와 더 적은 분량의 곡식 제물이 요구됩니다. 나머지 두 제물은 산비둘기나 어린 비둘기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속건 제물로 드릴 어린 숫양 한 마리는 그대로 필요합니다. 기름 한 로그도 그대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손가락,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피와 기름을 바르는 의식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모든 비용이 면제된다는 규정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마련해야 할 제물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의 경제적 부담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동일한 규모의 제물을 마련해야 한다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정결의 마지막 절차를 마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차이를 고려하여 다른 제물을 허용하십니다.
형편은 다르지만 정결함은 다르지 않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규정은 짧은 예외 조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4–31절에서는 속건 제물을 바치고, 피와 기름을 바르고, 다른 제물들을 드리는 절차를 다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식도 정해진 절차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형편에 따라 마련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정화 제물로, 다른 하나는 번제로 곡식 제물과 함께 바쳐야 한다. 제사장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사람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레위기 14:31 · 본디새김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제물이 달라질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지는 결과를 재산의 크기에 따라 등급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그 중요한 정화 의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의 몸에도 피가 발라집니다.
그의 몸에도 기름이 발라집니다.
그를 위해서도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33절부터 본문은 전혀 다른 대상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땅의 집에 병변이 생긴다면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소유지로 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내가 너희 소유지에 있는 집에 차라아트 병변을 생기게 하면,」레위기 14:34 · 본디새김
지금 이스라엘은 아직 광야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동하는 진영 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의 집에 관한 규정을 말씀하십니다.
돌로 쌓은 벽과 흙으로 바른 표면이 있는 집입니다. 이스라엘이 장차 땅을 얻고 정착하여 살아갈 때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내가 집에 차라아트 병변을 생기게 하면」
앞부분에서 사람의 차라아트에 관해 설명할 때는 병변이 생겼다는 사실이 제시될 뿐, 그 병변을 누가 일으켰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야훼가 직접 말씀하십니다. 집에 생기는 병변을 자신의 행위와 연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땅의 집에 병변을 생기게 하실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집주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이 우상숭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집에 차라아트가 생겼다는 사실을 곧바로 그 집주인의 죄에 대한 형벌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그 땅의 집에 생기는 차라아트도 그분의 다스림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선언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라고 해서 그 땅의 모든 집이 언제나 손상 없이 유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은 왜 단정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어지는 집주인의 말은 조심스럽습니다.
「그 집주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제가 보기에 집에 병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 알려야 한다.」레위기 14:35 · 본디새김
집주인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고 보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의례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확정하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앞에서 사람의 피부 병변을 판단할 때에도 제사장은 직접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집에 관한 규정에서도 그 원칙이 유지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병변을 생기게 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 병변을 정확하게 판정하는 절차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모든 현상의 의미를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과, 눈앞의 현상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집을 살피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일
집주인의 보고를 받은 제사장은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병변을 보러 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이 그 집을 비우도록 명령해야 한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뒤에 제사장은 그 집을 살펴보러 들어가야 한다.」레위기 14:36 · 본디새김
만약 제사장이 먼저 들어가 그 집을 부정한 상태로 판정한다면, 그 안에 있는 물건들도 부정함의 문제에 연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펴보기 전에 물건들을 옮기도록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반드시 잃어버려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부정함을 판정하는 일에는 예방도 포함된다
정결과 부정을 구별하면서, 정해진 범위를 넘어 불필요하게 부정함이 확대되지 않도록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부정함이 확대된다’는 말은 현대적인 병원체의 전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례적 상태의 적용 범위를 가리킵니다. 본문은 집을 비우는 이유를 위생이나 감염 예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들어간 뒤 집의 벽들에 푸르스름하거나 불그스름한 움푹 팬 자국들이 있고, 그것들이 벽면보다 낮아 보이면 제사장은 집을 이레 동안 닫아 둡니다. 이레가 지난 뒤 다시 살펴보도록 합니다. 사람의 피부 병변을 다루던 앞부분과 비슷한 절차입니다.
병변의 색과 깊이, 확산 여부를 살핍니다. 그러나 이제 그 판단의 대상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집입니다.
돌을 빼내고 벽을 긁어 내다 — 회복할 수 있는 집과 허물어야 하는 집
이레가 지난 뒤 제사장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 병변이 집의 벽에 퍼졌습니다.
집 전체를 곧바로 허물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명령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병변이 있는 돌들을 빼내어 성읍 밖 부정한 곳에 던져 버려야 한다.」레위기 14:40 · 본디새김
이어서 집 안쪽을 사방으로 긁어 내고, 긁어 낸 흙은 성읍 밖 부정한 곳에 버립니다. 그런 다음 다른 돌들을 가져다 빈자리에 넣고 새로운 흙을 발라 집을 보수합니다. 즉, 집 전체를 잃어버리기 전에 손상된 부분을 제거하여 회복시키려는 절차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도 있습니다.
보수한 뒤 병변이 다시 나타나 퍼지면, 제사장은 그것을 파괴적인 차라아트로 판정합니다.
「그 집을 헐어야 한다. 그 집의 돌들과 목재들과 집의 모든 흙을 성읍 밖 부정한 곳으로 내다 버려야 한다.」레위기 14:45 · 본디새김
집주인에게는 큰 손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억지로 모든 손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이야기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실제로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판정된 집을 허무는 규정이 있습니다.
관찰과 기다림, 손상된 부분의 제거, 보수, 재검사를 거친 뒤에야 철거 여부를 판단합니다. 이 규정은 부정함을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아직 회복할 수 있는 것을 성급하게 없애지 않도록 절차를 정합니다.
집이 나았다는 말
「그러나 제사장이 들어와 살펴보아, 집에 흙을 바른 뒤에 병변이 집에 퍼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그 집이 정결하다고 판정해야 한다. 병변이 나았기 때문이다.」레위기 14:48 · 본디새김
3절에서는 사람의 차라아트 병변이 나았다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48절에서는 집의 병변이 나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같은 ‘치유되다(רָפָא)’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차라아트가 현대의 한 가지 질병명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병변이 나은 뒤 제사장이 확인합니다. 집의 경우에도 병변이 사라지거나 더 이상 퍼지지 않는 상태를 확인한 뒤 정결하다고 판정합니다. 그리고 둘 다 그 뒤에 정화 의식이 이어집니다.
집 안에서 먹고 자는 사람도 영향을 받는다
46–47절은 집의 부정함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설명합니다. 집을 닫아 둔 기간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그 안에 누워 있거나 음식을 먹는 사람은 옷을 빨아야 합니다.
집이 부정하다고 판정되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의례적 상태에도 영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의 정결은 단순히 건축물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도 관계됩니다.
집도 새 두 마리로 정결하게 한다
집에 생긴 병변이 나았다는 판정이 내려지면 제사장은 정화 의식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 의식은 장의 처음에 보았던 사람의 정화 의식과 거의 같습니다. 샘물이 담긴 질그릇 위에서 새 한 마리를 잡습니다. 살아 있는 새와 백향목, 진홍색 실, 에조브를 피와 물에 담급니다. 그리고 집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는 새의 피와 샘물과 살아 있는 새와 백향목과 에조브와 진홍색 실로 그 집을 정화해야 한다.」레위기 14:52 · 본디새김
본문은 각 물품의 상징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정화 의식이 사람과 집에 적용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집은 사람과 달리 속건 제물이나 번제를 드리지 않습니다. 귀와 손과 발에 피와 기름을 바르는 의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병변에서 회복된 뒤 정결을 선언하고, 새 두 마리를 사용하는 의식으로 정화한다는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집도 정결과 부정의 구별 아래 놓입니다.
집을 위해서도 속죄한다
「그는 살아 있는 새를 성읍 밖 들판으로 놓아 보내야 한다. 그 집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 집이 정결해진다.」레위기 14:53 · 본디새김
집은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하나님께 반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레위기에서 속죄라는 말이 개인의 죄를 용서받는 일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앞서 레위기 8:15에서는 제단을 위해 속죄했습니다. 제단 역시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레위기의 제의적 언어에서 속죄는 부정함을 다루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상태를 회복하는 일과도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집을 위해 속죄한다는 것은 그 집에 생긴 차라아트의 부정함을 정해진 의식으로 처리하여 정결한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질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더 큰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29:45–46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진영과 가나안 땅의 집들은 단지 사람들이 사는 장소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맺음말 — 처음에는 제사장이 밖으로 나갔고, 마지막에는 새가 밖으로 날아갔다
거룩함의 경계를 지키도록 세워진 사람이, 그 경계 밖에 머무는 사람에게 나아갑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경계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그 사람이 경계를 넘어 돌아올 수 있도록 직무를 수행합니다.
레위기 14장을 읽을 때 현대의 질병이나 감염에 관한 지침을 여기서 직접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아트는 현대 의학의 하나의 질병과 동일하지 않으며, 이 장의 정화 의식도 현대적인 치료법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을 오늘날 질병에서 회복한 사람에게 성경적인 격리 기간을 적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회복은 단순히 상처가 사라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이미 나은 사람이 다시 공동체의 삶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결의 절차를 마치는 일입니다. 병변이 나은 집이 다시 정결한 공간으로 인정받는 일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부정한 것을 구별하도록 명령하실 뿐 아니라, 정결해질 수 있는 것이 다시 정결한 상태로 돌아오는 길도 정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은 살아 있는 새를 성읍 밖 들판으로 놓아 보냅니다. 그 집을 위해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정결해진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