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갈릴리에서 시작
사람을 일으키는 권위
마가복음 2장에는 두 사람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네 사람에게 들려 온 중풍병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금 징수소에 앉아 있던 레위입니다. 첫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요를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 모두 일어납니다. 한 사람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집 안에는 서기관들이 앉아 있고, 레위가 일어나는 세금 징수소를 지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서기관들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물론 이 대조만으로 서기관들의 내면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들려주는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전과 다른 삶을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권한이 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지붕을 열고 내려온 사람 — 죄를 용서할 권위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누구의 집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 축출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졌으므로(1:28, 1:45),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설명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부터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래서 문 앞에도 더는 들어설 틈이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마가복음 2: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는 능력으로 알려지셨지만, 자신의 활동을 말씀 선포에서 시작하십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1:14–15), 여러 마을에서도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밝히셨습니다(1:38–39). 지금 이 집에서도 예수님의 중심 활동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도리어 한 병자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고 왔지만 문 앞에도 틈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예수님께서 계시는 자리 위를 벗겨 내고 구멍을 파서 병자가 누운 요를 달아 내립니다.
마가는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병자의 상태를 호소하거나 예수님께 치료를 요청했다는 대화도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믿었는지는 그들의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이제 모든 시선이 바닥에 내려놓인 병자에게 향합니다. 독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일으키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마디는 뜻밖입니다.
예수가 그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말했다. 「얘야, 네 죄가 용서되었다.」마가복음 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고 하지 않고,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네 사람만을 가리키는지 중풍병자까지 포함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믿음이 한 사람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얘야」는 그 사람이 어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의 신체적 상태에 주목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를 한 인격으로 맞이하십니다.
병자는 걷게 해 달라는 말을 한 적도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회개의 고백을 요구하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을 병자의 마비가 어떤 죄 때문에 생겼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가는 그의 질병과 죄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의 몸을 고치시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속한 문제를 먼저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을까?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따집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 하나님 한 분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마가복음 2:7 · 본디새김
그들의 질문은 단순한 악의나 질투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죄를 궁극적으로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시편 103:3은 여호와야훼를 죄악을 용서하고 질병을 고치는 분으로 찬양합니다. 이사야 43:25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죄를 지워 버린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서기관들이 묻는 질문에는 충분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선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네 죄가 용서되었다」의 동사 아피엔타이(ἀφίημι)는 ‘용서되다’라는 뜻의 현재 수동형이며, 누가 용서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선언으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자신이 죄 용서의 권위를 지니셨다는 주장과 연결하십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쟁점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용서를 전달하시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 속한 권위를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원칙, 곧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들고 걸어라』 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우냐?」마가복음 2:9 · 본디새김
이 물음은 두 가지 다른 차원의 ‘쉬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말하기만 한다면 「네 죄가 용서되었다」가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죄가 용서되었는지는 사람들이 즉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어나 네 요를 들고 걸어라」는 말은 그 결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병자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 말의 효력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죄를 용서하는 일은 단지 말을 하기 쉬운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한 권위를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치유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용서에 관해 자신이 하신 선언의 권위를 드러내려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있도록—」 그가 중풍병자에게 말했다.마가복음 2:10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특히 눈에 띄는 말은 「땅에서」입니다. 이야기의 놀라움은,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여겨진 죄 용서의 권위가 지금 사람들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통해 행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문장을 끝맺지 않으시고 중풍병자에게 시선을 돌리십니다.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요를 들고 네 집으로 가라.」마가복음 2:1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자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행동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병자는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요를 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갑니다. 이야기 처음에는 네 사람이 요에 누운 그를 들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요가 그 사람을 옮겼지만,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요를 옮깁니다.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 속한 권위를 주장하시지만, 그 권위를 드러내시는 첫 장면에서 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용서하고 일으키십니다.
조금 더 깊이
「얘야」(τέκνον)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자녀’를 뜻하며, 이 자리에서는 상대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셈어 표현의 배경에서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 같은 이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는 환상이 나타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그에게 권위를 주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권위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주장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자신을 통해 드러난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의 연결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적인지는 논의가 있지만, 두 본문을 잇는 ‘사람의 아들’과 ‘권위’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또한 그리스어 문장에서는 「땅에서」가 권위를 지닌다는 말에 걸리는지, 죄를 용서한다는 말에 걸리는지가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어도 이야기의 놀라움은 같습니다.
세금 징수소에서 잔칫상으로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사람
예수님께서는 왜 레위를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다시 바닷가로 나가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다가 세금 징수소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십니다.
그는 지나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금 징수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 그를 따랐다.마가복음 2:14 · 본디새김
이 짧은 장면은 앞의 치유 이야기와 묘하게 호응합니다. 중풍병자는 누워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레위는 앉아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놓여 있던 상황은 다릅니다.
중풍병자는 자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레위가 앉아 있는 세금 징수소는 그의 직업과 생계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마가는 레위가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징수했으며 개인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세금 징수 업무는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고, 복음서에서도 세리들은 흔히 사회적·종교적 비난의 대상인 ‘죄인들’과 함께 언급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일은 단순히 새로운 제자 한 명을 얻으시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받아들이시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함께 먹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계십니다.
예수가 그의 집에서 상 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많은 세리와 죄인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누워 있었다. 그들이 많았고 그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2:15 · 본디새김
여기서 「누워 있었다」는 말은 병들어 누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식사 자리에서 몸을 비스듬히 기대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앞의 중풍병자가 요에 누워 있다는 말과 여기서 예수님께서 상에 기대어 계시다는 말은 같은 그리스어 동사와 연결됩니다. 한 장면에서는 병상에 누운 사람을, 다른 장면에서는 식탁에 누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같은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두 장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앞에서는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가려 했고,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한 식탁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식사가 문제가 됩니다.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마가복음 2:16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설교하시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따지는 것은 함께 먹는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 그 사람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서로 다른 행동입니다. 함께 먹는 일은 상대와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적·사회적 경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불편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왜 병든 사람에게 가는가?
예수가 그것을 듣고 그들에게 말했다. 「의사가 필요한 이는 튼튼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복음 2:17 · 본디새김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왔을 때, 병이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셔야 할 이유였습니다. 병이 심하다고 그를 밀어내거나, 먼저 건강해져서 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원리를 죄인들과의 관계에 적용하십니다.
의사에게 병든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비난한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의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까닭을 그들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자 레위는 일어나 따랐습니다. 따라서 죄인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히 죄인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거나 그들의 식탁에 머무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대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에는 두 읽기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자기 인식을 겨냥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의사에게 환자가 우선적인 대상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는 자신의 사명을 강조하신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문장이 세상에는 용서가 전혀 필요 없는 완전한 의인들이 존재한다고 가르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대답은 앞의 죄 용서 선언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께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는 것은 죄인에게 가까이 가실 수 있는 권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에게는 문제였지만, 레위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신랑이 있는데 왜 금식하는가 — 이미 시작된 기쁨
문제는 금식 자체가 아니라 때를 아는 것입니다
레위의 식탁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금식에 관한 질문이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마가복음 2:18 · 본디새김
금식은 유대 신앙에서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16:29–31은 속죄일에 자신을 낮추는 일을 명령하며, 후대 유대 전통에서 이는 금식과 긴밀히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금식은 회개와 슬픔,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찾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의아하게 여겼다고 해서 그 질문을 무조건 편협한 율법주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경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이 잘못된 관습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요소를 끌어들이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들이 금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을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마가복음 2:19 · 본디새김
혼인 잔치는 기쁨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신랑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잔치의 기쁨을 뒤로하고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행동이 경건한지는 그 행동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실까?
혼인 잔치는 단지 즐거운 모임의 비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는 때때로 혼인 관계로 묘사됩니다.
호세아 2:19–20에서 여호와야훼는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다시 자신에게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약속은 정의와 공의, 사랑과 긍휼과 신실함으로 맺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이사야 62:4–5에서는 황폐하고 버림받았던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소식을 혼인의 기쁨으로 그립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두 예언서의 원래 문맥에서 중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하신다는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단순히 자신들의 공동체에 다른 규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혼인 잔치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호세아나 이사야의 문장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회복의 이미지와 중요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더욱이 이 말은 마가복음 1:15의 선포와도 통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의 도래가 자신의 존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신랑이 빼앗깁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여기서 뜻밖의 방향으로 꺾입니다.
「그러나 신랑이 그들에게서 빼앗기는 날들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날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마가복음 2:20 · 본디새김
혼인 잔치라면 신랑은 기쁨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빼앗기다’는 단순히 신랑이 여행을 떠나거나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표현보다 강합니다. 누군가에게서 예수님을 떼어 놓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의 이야기에서는 이 말을 예수님께서 겪게 되실 수난을 내다보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날짜를 밝히지 않으십니다. 이 짧은 문장이 중요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기쁨을 아무런 슬픔도 없는 상태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폐지하지 않으십니다. 금식이 필요한 때와 기뻐해야 할 때를 구별하십니다.
그 구별의 기준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것이 앞의 두 사건과 이어지는 또 하나의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권위를 주장하셨고, 죄인을 자신의 제자로 부를 권위를 행사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경건한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현존과 연결하십니다.
새 포도주에는 왜 새 부대가 필요한가?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두 가지 짧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아직 빨아 다듬지 않은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기운 새 조각이 낡은 옷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더 심하게 찢어진다.」마가복음 2:21 · 본디새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져 없어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된다.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마가복음 2:22 · 본디새김
첫 번째 비유에서 문제는 새 천 조각과 낡은 옷의 성질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수축할 수 있는 천을 낡은 옷에 붙이면 오히려 손상이 커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도 비슷합니다. 발효가 진행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면 압력을 견디지 못해 부대가 터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포도주도 부대도 잃습니다.
두 비유에서 눈여겨볼 것은 새것이 언제나 낡은 것보다 좋다는 일반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찾아왔는데도 이전의 형태를 아무 변화 없이 유지하려 한다면, 둘 다 손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기존의 경건 생활 속에 조그만 요소 하나를 추가하는 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는 금식 논쟁 바로 뒤에 놓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제자들도 다른 경건한 무리들과 같은 방식으로 금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전에 익숙했던 방식에 맞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이 비유를 ‘유대교는 낡아서 버려야 하고 기독교는 새로워서 좋다’는 도식으로 옮기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성경에 기록된 다윗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성경과 단절된 것으로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오래된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행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이스라엘의 생활 규범 가운데 하나인 안식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마가는 바로 그 질문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곡식밭에서 벌어진 논쟁 —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자들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밭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삭을 뜯으며 길을 갔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가복음 2:24 · 본디새김
남의 곡식밭에서 이삭을 손으로 뜯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3:25는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갔을 때 손으로 이삭을 뜯는 것을 허용하면서, 낫을 사용해 곡식을 베는 일은 금합니다. 따라서 논쟁은 단순한 절도 문제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 행동이 안식일에 허용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뜯는 행위를 일종의 수확 행위로 본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확히 어떤 작업을 문제 삼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가는 여기서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이삭을 뜯었다는 행동만 기록합니다. 배고픔은 예수님께서 이어서 들려주시는 다윗 이야기에서 명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이 제기한 안식일 규정의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따지시기보다, 성경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꺼내 놓으십니다.
다윗은 왜 제사장의 빵을 먹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사무엘상 21장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다윗이 궁한 처지였고 그와 그의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무엇을 했는지 너희는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가복음 2:25 · 본디새김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놉의 제사장에게 찾아가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일반적인 빵이 없었고, 성소에서 사용하던 거룩한 빵이 있었습니다. 이 빵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1장에서는 제사장이 다윗의 요청에 응하여 거룩한 빵을 내줍니다. 다윗 일행의 정결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도 있었으므로, 이것을 단순히 모든 규정을 무시한 사건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끌어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궁한 처지에 있었고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제사장은 거룩한 빵을 다루는 규정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실제적인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여 행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건을 통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성경의 규정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규정이 어떤 목적을 위해 주어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단순히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아직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고난 속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사무엘상 16:13; 21장).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윗을 예로 드신 것에는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필요와 거룩한 규정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셨다는 읽기와, 다윗이 처한 상황과 자신의 사명을 함께 연결하셨다는 읽기입니다. 두 의미는 반드시 서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의 사례가 곧 모든 사람이 필요에 따라 율법을 자유롭게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 규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논증은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서, 규정의 목적과 인간의 필요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마가복음 2:26은 이 사건을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이던 때」에 일어난 일로 소개하는데, 이 이름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윗 이야기를 인용하신 논점은 분명합니다. 성경 자체가 거룩한 규정과 인간의 절박한 필요가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다시 생각하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이 논쟁의 핵심이 되는 문장을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 · 본디새김
이 말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 안식일 논쟁에는 없는, 마가복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물으십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안식일이 처음 주어졌던 맥락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므로, 이스라엘도 일을 멈추고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같은 명령이 출애굽의 기억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이었지만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종들에게도 쉴 수 있는 날을 주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쉼은 자유로운 사람들만을 위한 특권이 아닙니다. 종과 나그네, 가축까지 노동에서 쉬도록 하는 명령에 포함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기억하는 날이며, 동시에 해방의 은혜를 사회적 삶 속에 드러내는 날이었습니다. 이 배경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의 본래 목적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그 목적을 드러냅니다.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쉼을 누리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필요와 생명을 무시하면서까지 규정 자체를 절대적인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안식일의 거룩함을 약화하는 주장과 다릅니다. 오히려 그 거룩함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선하심을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기도 하다.」마가복음 2:28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 절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2:27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두 번 언급하시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2:28에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리스어에서도 두 절은 ‘사람’이라는 같은 낱말로 연결됩니다.
한 가지 읽기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에 담긴 인간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사람은 안식일의 목적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앞 절의 일반적인 ‘사람’과 다음 절의 ‘사람의 아들’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두드러집니다.
다른 읽기는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10에서 이미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안식일을 해석하고 다스릴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마가복음의 이야기에서는 두 번째 의미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주인이기도 하다」는 표현은 앞서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는 주장에 새로운 영역을 더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의미를 지워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마가는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라는 선언 직후에 사람의 아들의 권위를 놓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지니신 특별한 권위와 그 권위가 인간을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하나의 흐름 안에 결합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언을 앞의 죄 용서 사건과 나란히 놓으면 마가복음 2장의 기독론적 주장이 선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서기관들의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를 지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의 목적을 밝히시면서, 자신이 그 안식일의 주인이기도 하시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시는 선생이신지,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를 통해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신지 독자에게 묻게 합니다. 마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추상적인 정의로 먼저 제시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병자와 부름받는 죄인, 신랑과 함께 기뻐하는 제자들, 곡식밭에서 이삭을 뜯는 사람들을 보여 주면서 독자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가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4:5–9에 따르면 열두 개의 빵을 하나님 앞에 차려 놓고 안식일마다 새것으로 바꾸었으며, 물린 빵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또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에게 빵을 준 사람은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이며, 아비아달은 뒤이어 등장합니다(사무엘상 22:20–23). 이 불일치를 설명하는 방법은 여럿입니다. 인물이나 시기에 관한 착오로 보는 견해가 있고, ‘아비아달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이 그와 관련된 성경 이야기 대목을 가리키는 방식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스어 전치사의 의미 범위와 사본의 차이까지 논의되지만 어느 설명도 완전히 결정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시간 표현을 택했으며, 그 경우 두 본문 사이의 불일치가 남습니다. 한편 「주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퀴리오스(κύριος)입니다. ‘주’, ‘주님’, ‘주인’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말이며, 마가복음 1:3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에 사용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선언하시는 말씀은 단순히 안식일 규정을 잘 이해하는 교사라는 주장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 사람은 요를 들고 나갔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드러나는 권위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권력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할 권위는 병자를 일으키는 데 사용됩니다. 죄인을 부를 권위는 멸시받는 사람들과 한 상에 앉는 데 사용됩니다. 신랑의 현존은 제자들에게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권위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의 크기뿐 아니라, 그 권위가 향하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가는 그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곡식밭 한가운데 세워 놓습니다.
제자들의 손에는 뜯은 이삭이 있고, 바리새파 사람들의 입에는 항의가 남아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기도 하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