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갈릴리에서 시작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첫 번째는 회당에서입니다. 손이 마른 사람을 가운데 세워 놓으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악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물으십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여움과 아픔 속에서 그들을 둘러보십니다(3:5).
두 번째는 집 안에서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자기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리고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3:34).
그리스어 원문은 두 장면에서 ‘둘러보다’라는 같은 동사를 사용합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을 향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과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대답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 마른 손이 회복되다
사람을 가운데 세우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거기에 손이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손이 언제부터 말랐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먼저 예수님께 치료를 요청했다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대신 마가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먼저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칠 것인지 곁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마가복음 3:2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안식일에 이삭을 뜯는 문제가 논쟁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실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 때문에 회당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팽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피해 가지 않으십니다.
그가 마른 손을 지닌 사람에게 말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가복음 3:3 · 본디새김
이 짧은 명령이 장면을 바꿉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의 위반 여부에 집중되어 있던 자리에서, 이제 병자가 모두의 눈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둘러싼 논의를 사람의 실제적인 필요와 분리하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가운데 세웠다고 해서 모두가 그 사람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인간을 보고,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기회를 봅니다.
왜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묻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해도 되느냐, 아니면 악을 행해도 되느냐? 목숨을 구해도 되느냐, 아니면 죽여도 되느냐?」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마가복음 3:4 · 본디새김
질문이 예상보다 훨씬 큽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의 문제로 확대하십니다. 손이 마른 사람의 상태가 당장 생명을 위협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을 단순히 응급 상황에서는 안식일 규정에 예외가 허용되는지를 묻는 것으로 좁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근본적인 판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한 날에, 사람을 회복시키는 행동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반대로 고통받는 사람의 회복을 가로막으면서 규정 준수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합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악을 행하지 않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에도 도전하십니다. 질문은 ‘악을 행해도 되느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반대편에 ‘선을 행하는 것’을 놓습니다. 마른 손을 지닌 사람이 바로 앞에 서 있는 상황에서,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문제 삼는 태도를 되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 침묵은 그들이 답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침묵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선과 악의 질문에 누구도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 앞에서 예수님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노여움에는 아픔이 있었다
그는 노여워하며 그들을 둘러보았고, 그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두고 몹시 아파하면서 그 사람에게 말했다. 「손을 내밀어라.」 그가 내밀었고,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마가복음 3: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노여워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고집이 세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의 노여움과 아픔을 서로 반대되는 감정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두 감정은 같은 상황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마음을 닫아 버린 이들을 보시고 노여워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의 굳은 마음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마가는 치유의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시거나 어떤 치료 행위를 하셨다고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할 것인지 악을 행할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이제 그 질문에 자신의 행동으로 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치유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사람과 죽이려는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그에게 맞서 모의했다. 그를 없애려는 것이었다.마가복음 3: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사람들에게 「목숨을 구해도 되느냐, 아니면 죽여도 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회당을 나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합니다.
마가는 이 대조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행동을 나란히 놓을 뿐입니다.
이렇게 읽고 나면 앞의 질문이 단순한 윤리적 논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누가 생명을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누가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질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아직 이야기의 초반부에 있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움직임이 이미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해를 끼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른 손을 회복시키신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마음이 굳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바로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바로는 반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만, 이스라엘을 놓아주라는 요구를 거부합니다(출애굽기 7–11장). 물론 마가복음 3장의 사람들이 바로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는 의미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수 있는 사건 앞에서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헤롯당 사람들의 정확한 조직적 성격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헤롯 왕조와 연결된 정치적 이해관계의 사람들로 이해되지만, 본문은 그들이 어떤 공식 조직에 속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과 협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들
많은 사람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물러가십니다. 곧이어 마가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길게 열거합니다. 갈릴리뿐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매, 요단 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옵니다.
이 지명들은 단순히 여행 거리를 알려 주기 위한 정보가 아닙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넘어 남쪽의 이두매, 동쪽의 요단 강 건너편, 북서쪽 해안의 두로와 시돈 일대까지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소문이 한 지역의 경계를 넘어 퍼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가는 그들이 「그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듣고 왔다고 말합니다(3:8). 그들의 관심이 예수님의 행동, 특히 치유의 능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뒤이어 나타나는 장면은 이러한 인기를 예상 밖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작은 배 한 척이 그의 곁에서 대기하게 하라고 말했다. 무리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마가복음 3: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고, 병고를 지닌 사람마다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밀려듭니다. 여기서 ‘병고’로 옮긴 말은 본래 ‘채찍들’을 뜻하는 말로, 사람을 괴롭히는 심한 고통이나 질병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이 표현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몰려드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모여든 구경꾼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고통과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을 무조건 잘못된 믿음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망이 너무 강해서 도리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눌리지 않으시도록 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하는 열망이 반드시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이 구별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안다
더러운 영들은 그를 볼 때마다 그 앞에 엎드려 소리를 지르곤 했다. 「당신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가복음 3:11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들의 말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정확한 인식과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응답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 순종하는 제자의 믿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입을 막으십니다.
예수는 그것들을 거듭 꾸짖어 그가 누구인지 알리지 못하게 했다.마가복음 3:1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못하게 하셨는지는 이 절만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관한 모든 정확한 발언을 그대로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말하는 내용이 옳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증인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예수님을 보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문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능력을 지니셨는가가 아닙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산에서 열둘을 세우다 —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
많은 사람 가운데 열둘을 부른 이유
장면이 바뀝니다.
바닷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가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로 갔다.마가복음 3:13 · 본디새김
여기서는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마가는 그들을 선택한 이유를 그들의 능력이나 자격에서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열둘을 세우십니다.
왜 열둘일까요?
이스라엘에게 열둘이라는 수는 특별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전통이 이어지며(창세기 35:22–26; 49:28), 출애굽기 24:4에서는 모세가 열두 지파를 따라 열두 기둥을 세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열두 사람을 세우셨다는 것은 단지 관리하기 편리한 크기의 소그룹을 만드셨다는 뜻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회복하려는 소망과 연결되는 상징적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9:5–6 역시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말합니다. 다만 마가복음 3장은 열둘이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고 직접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 상징적 의미는 이스라엘 성경의 배경에서 읽어 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가 직접 밝히는 임명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보내기 전에 먼저 함께 있게 하다
그리고 열둘을 세웠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이었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 선포하게 하고 귀신을 내쫓을 권위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마가복음 3:14–15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두 방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에게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이 나오고, 그다음에 「그들을 내보내어 선포하게」 한다는 목적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지도자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단순히 선교 활동 전에 거치는 훈련 기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제자라는 관계 자체를 규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대신 수행할 사람들인 동시에, 그 일을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맡게 될 일도 특별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귀신을 내쫓는 것입니다. 이 두 활동은 예수님께서 이미 해 오신 일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더러운 영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제 그 활동이 열두 사람에게도 맡겨질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위의 출처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귀신을 내쫓을 권위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 권위를 가지게 하려 하십니다. 그들의 사명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열둘 가운데 유다가 있다
마가는 열두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적습니다.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이시고,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곧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붙이십니다. 가나나이오스라 하는 시몬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명단의 마지막은 다른 이름들과 다르게 끝납니다.
유다 이스가리옷이다. 이 사람이 그를 넘겼다.마가복음 3:19 · 본디새김
마가는 아직 유다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소개하는 순간 이미 그가 예수님을 넘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 짧은 설명 때문에 열둘의 명단에는 처음부터 긴장이 생깁니다.
이것은 열둘의 임명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판단을 요구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독자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어떤 긴장 속에서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부름에 끝까지 합당하게 응답한다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장 마지막의 새로운 가족 선언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혈연이나 공동체 안에서 차지한 지위를 기준으로 가족을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를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보아너게라는 이름이 두 사람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하는지는 여기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가나나이오스라는 이름은 아람어 계통의 ‘열심 있는 사람’이라는 뜻과 연결되며, 그를 후대에 알려진 특정한 무장 정치 조직의 일원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신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
가족은 왜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을까?
산에서 열둘을 세우신 예수님께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갔다.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은 빵조차 먹을 수 없었다.마가복음 3:2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얼마나 바쁘게 일하고 계셨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들 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3:21 · 본디새김
「그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족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다른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할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이 직접 그렇게 판단한 것으로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그렇게 말하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가족이라면 예수님께서 식사도 하지 못하실 만큼 사람들에게 시달리신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과 갈등을 겪고 계신다는 사실이 불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동기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계속하시려는 일과 예수님의 가까운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마가는 이야기를 잠시 멈춥니다.
가족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사건의 결말을 바로 들려주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고발을 그 사이에 집어넣습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흔히 ‘마가의 샌드위치 구조’라고 불립니다. 한 사건을 시작한 뒤 다른 사건을 끼워 넣고, 다시 처음 사건으로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마가복음 3:20–35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구성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건이 서로를 비추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귀신에게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두 집단의 동기와 태도를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의 행동에는 염려가 담겨 있었을 수 있고, 서기관들의 행동에는 명백한 적대적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예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가 드러납니다.
이제 마가는 그 가운데 더 심각한 고발을 먼저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그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분명하게 한 집단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그에게 속한 사람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의 끝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하므로 앞의 사람들이 가족이었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표현 자체가 특정 인물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들 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도 모호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정신이상자로 확신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의 집을 털다 —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이유
서기관들은 기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베엘제불을 지니고 있다.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는다.」마가복음 3:22 · 본디새김
마가는 그들이 어떤 공식 기관의 대표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논쟁이 갈릴리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전문가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드러납니다.
베엘제불은 여기서 악한 영들의 권세와 연결되는 이름입니다. 이름의 기원과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이 장면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지배를 받으시거나 귀신의 권세를 빌려 일하신다고 서기관들이 판단했다는 데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내쫓으신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 능력의 출처입니다. 눈앞에 나타난 사건을 부정하기 어려우니, 그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악한 권세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악한 권세가 예수님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이 도리어 악한 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는가?
그는 그들을 곁으로 불러 비유를 들어 말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마가복음 3:23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상대방의 주장에 담긴 모순을 드러냅니다. 서기관들의 설명이 옳다면 사탄은 자기 권세 아래에 있는 귀신들을 스스로 몰아내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집안의 비유를 차례로 드십니다.
「나라가 제 안에서 갈라지면 그 나라는 설 수 없다.」마가복음 3:24 · 본디새김
「집안이 제 안에서 갈라지면 그 집안은 설 수 없을 것이다.」마가복음 3:25 · 본디새김
나라와 집안은 서로 다른 규모의 공동체지만, 두 비유의 원리는 같습니다. 어떤 권세가 자기 자신과 싸우며 자신의 기반을 무너뜨린다면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 논리를 사탄에게 직접 적용하십니다.
「사탄이 자기에게 맞서 일어나 갈라졌다면 그는 설 수 없다. 도리어 끝이 난 것이다.」마가복음 3: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권세가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상황에서 귀신들이 쫓겨나는 일을 사탄 자신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있는가?
힘센 자를 묶는 더 강한 자
「그러나 먼저 그 힘센 자를 묶지 않고서는 아무도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세간을 털 수 없다. 묶은 다음에야 그의 집을 털 것이다.」마가복음 3:27 · 본디새김
처음 들으면 다소 뜻밖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터는 행동을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앞의 사탄 논쟁이 비유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힘센 자는 사탄을 가리키고, 그의 집을 터는 행동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것들을 빼앗아 오는 행동에 해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힘센 자를 먼저 묶어야 한다는 순서입니다. 힘센 자가 자기 집과 세간을 지킬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 집에 들어가 세간을 빼앗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힘센 자를 제압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앞의 귀신 축출 사건에 연결하면 예수님의 주장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과 손잡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는 더 강한 권위가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사탄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탄이 붙들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악한 권세의 활동을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각성이 바로 다음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비유는 이사야 49:24–26의 구원 약속과도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여호와야훼는 강한 자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본래 문맥은 포로 상태에 있는 시온과 그 자녀들의 회복입니다. 인간적으로는 강한 자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어려워 보이지만, 여호와야훼가 직접 싸워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한 자가 붙들고 있는 것을 되찾는다는 이미지에는 중요한 주제적 호응이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여호와야훼가 약속한 해방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예수님의 귀신 축출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되지만 — 거룩한 영을 거스르는 모독
무서운 경고 앞에 놓인 놀라운 선언
이 단락은 흔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한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읽으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경고가 아닙니다. 놀라울 만큼 넓은 용서의 선언입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지은 죄도, 어떤 모독을 했든 그 모독도 모두 용서될 것이다.」마가복음 3:2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죄의 한정된 종류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은 죄도」, 「어떤 모독을 했든 그 모독도」, 그리고 「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언에는 죄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가 얼마나 다양하고 심각할 수 있는지를 전제하면서도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넓게 열려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강한 예외가 나옵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 도리어 영원한 죄의 책임을 진 자다.」마가복음 3:29 · 본디새김
여기에는 독자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죄와 모독이 용서될 것이라고 말한 직후에, 어떤 모독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거룩한 영을 거스르는 모독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마가는 경고의 이유를 직접 밝힌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30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3:30 · 본디새김
이 짧은 설명은 마가가 독자에게 주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맥락 없이 특정한 죄의 목록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악한 영의 활동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 경고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 표현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하나는 「거룩한 영」이고, 다른 하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거룩한’과 ‘더러운’이라는 말은 단순히 두 종류의 영을 구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놓고 완전히 반대되는 판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악한 영의 활동으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잘못 알고 있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자신들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원 행위를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아까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구별하도록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고, 이후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악한 권세에서 사람을 구해 내시는 행동을 보고 그것이 악한 권세의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이 두 장면을 연결해 설명하지 않지만, 독자는 공통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넘어, 그 선한 일을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문제입니다.
왜 이것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가?
이 경고의 정확한 범위를 둘러싸고는 오래된 해석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악한 영의 활동이라고 모독하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른 읽기는 그 발언의 배후에 있는 더 근본적인 태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시는 구원을 끝까지 거부하고, 그 구원을 알아보게 하는 거룩한 영의 증언 자체를 배척하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대립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본문에 기록된 구체적인 고발에 충실하고, 후자는 그 고발이 왜 이토록 심각한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다만 그러한 거부가 어느 시점에 최종적으로 확정되는지까지 이 짧은 본문이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한 적이 있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진 사람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무심코 잘못된 말을 한 사람이 영원한 정죄를 받는다고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고 계시는 해방의 일을 귀신의 활동으로 고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이 약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의심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과거의 말실수를 후회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경고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본문의 맥락을 벗어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 말씀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 사람을 「영원한 죄의 책임을 진 자」라고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경고하는 수준보다 훨씬 엄중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용서의 선언 바로 뒤에 이처럼 심각한 경고가 따라오는가?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두 문장이 함께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에게 용서를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구원의 일을 악한 것으로 뒤집어 받아들이는 태도는 구원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의 중심에는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용서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 자체를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8절의 「사람들에게는」은 그리스어로 ‘사람의 아들들에게는’이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아니라, 사람 일반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바깥에 선 가족, 안에 앉은 사람들
가족은 문밖에서 예수님을 찾는다
이제 마가는 앞에서 중단했던 가족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바깥에 선 채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렀다.마가복음 3:31 · 본디새김
그런데 집 안에는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앉아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가족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공간적 대조는 우연한 배경 이상으로 읽힙니다. 예수님께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에 서 있고, 혈연으로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깥에 있다는 사실도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선 그것은 이야기 속 실제 위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장면을 통해 가족이라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도록 이끄십니다.
무리가 그를 둘러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서 찾고 있습니다.」마가복음 3:32 · 본디새김
이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가족이 찾아왔으니 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와 형제들은 한 사람이 속한 가장 기본적인 관계망을 이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가시거나 사람을 보내 가족에게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물으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가복음 3:33 · 본디새김
이 질문은 가족이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무엇이 결정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가족의 경계가 달라지다
그리고 자기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마가복음 3:34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혈연관계를 부정하신다기보다 그 관계만이 자신과의 친밀함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제시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3:35 · 본디새김
이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 관계의 기준이 혈연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옮겨 갑니다. 둘째, 그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나와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심지어 ‘내가 직접 선택한 열두 사람’이라는 지위만을 기준으로 내세우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족관계를 하찮게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혈연으로만 결정되던 친밀한 소속의 범위를 더 넓게 여는 말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어머니와 형제들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설명하시면서 형제뿐 아니라 자매도 포함하십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관계를 말할 때 남성 친족만이 아니라 여성 친족을 함께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주위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고 있다고 판정하시는 것일까? 본문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시면서, 이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물으셨습니다. 악한 권세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자신과 함께하며 그 일을 선포할 열둘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악한 것으로 판단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심각한 왜곡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규정을 많이 알고 실천하는 문제로 좁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그 뜻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문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물론 마가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구체적인 행동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선언은 완성된 윤리 규범이라기보다,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인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시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앞의 가족 이야기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가족은 바깥에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이 기존의 관계망에 의해 결정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혈연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혈연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응답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장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놀라운 역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버지」라는 말은 이 명단에 없습니다. 이것이 의도적인 신학적 생략인지, 당시 가족 표현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이 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새로운 관계의 기준을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명시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셨다
마가복음 3장의 처음과 끝에는 예수님의 시선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을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 안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악한 권세에서 빼내시어 단순히 홀로 서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이제 장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바깥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자기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이번에는 그 시선에 관한 감정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끝났을 때, 독자의 눈앞에는 여전히 한 집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바깥에는 예수님을 찾는 가족이 서 있고, 안에는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누구인지는 이제 그들이 어디에서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가족의 한가운데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