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비유로 한 가르침
씨앗의 성장과 말씀의 권세
마가복음 4장은 배에서 시작하여 배에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배에 앉아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바로 그 배에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밤에는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루 종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은 마지막에 「그렇다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그에게 복종하는가?」 하고 묻습니다(4:41).
이 질문이 마가복음 4장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어떤 분에게서 나오는지 아직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해야 할 것은 씨앗에 관한 교훈만이 아니었습니다. 씨앗을 뿌리시는 분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권세가 있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이 장에는 잠자는 사람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씨앗을 뿌려 놓고 잠드는 농부이고(4:27), 다른 한 사람은 풍랑 속에서 잠드신 예수님입니다(4:38). 두 사람의 잠을 똑같이 해석할 수는 없지만, 이 반복은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활동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씨 뿌리는 사람 — 실패처럼 보이는 이야기의 놀라운 결말
예수님께서는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아주 큰 무리가 몰려들자 배에 올라앉으시고, 사람들은 뭍에 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 3:9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밀리지 않도록 작은 배를 준비시키라고 하신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예수님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선 3장에는 이미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으신다고 주장했습니다(3:22). 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둘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4–35).
그렇다면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 문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어라.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어떤 씨는 바위밭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사이에, 그리고 다른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처음 세 곳에 떨어진 씨앗은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과정은 서로 다릅니다.
길가의 씨앗은 자랄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바위밭의 씨앗은 오히려 빠르게 자라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여 햇볕에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 사이의 씨앗은 싹이 트고 성장하지만 함께 자라는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씨앗이 살아남았느냐는 질문보다 씨앗이 열매를 맺었느냐는 질문입니다. 특히 바위밭과 가시덤불은 처음부터 아무 반응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씨앗이 싹트기도 하고 자라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초기 성장만으로는 끝까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땅에 이르러 이야기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 올라오고 자라나며 열매를 내었는데,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를 맺었다.」마가복음 4:8 · 본디새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라는 표현은 단순히 좋은 수확을 말하기보다 예상 밖의 풍성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비유를 끝까지 들어야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앞부분만 들으면 농부의 일이 계속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 씨 뿌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곳곳에서 거절당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이미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오지만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적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응을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었다는 증거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비유의 마지막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마가복음 4:9 · 본디새김
이 명령은 단순히 소리를 들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 자신이 비유 속의 땅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 — 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비유가 끝난 뒤 예상 밖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가 따로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열둘과 함께 그 비유들에 대해 물었다.마가복음 4:10 · 본디새김
여기서 질문한 사람들은 열두 제자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열두 사도라는 고정된 집단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너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이루어진다.」마가복음 4:11 · 본디새김
여기서 ‘비밀’이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이 아무리 연구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서 2:19–30에서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꿈에 담긴 비밀을 다니엘에게 알려 주시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그 비밀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시작되고 있다면, 왜 악한 사람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까? 왜 예수님의 사역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를 받습니까? 왜 하나님 나라는 압도적인 정치적 승리나 눈에 보이는 권력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의 모습으로 시작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를 통해 이런 질문에 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예상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실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곧이어 나오는 말씀은 훨씬 어렵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혹시라도 그들이 돌이켜 용서받는 일이 없도록.」마가복음 4:1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9–10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당시, 유다 백성은 오랫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해 왔습니다. 이사야 1–5장은 불의와 우상숭배, 사회적 부패를 고발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의 완악함과 다가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이사야의 사명에는 역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리도록 부름받았지만, 그의 선포는 이미 하나님을 거절해 온 백성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사야 6장의 이야기는 심판 선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13절에는 나무가 베인 뒤에도 그루터기가 남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남는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십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했던 일이, 이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4:12의 그리스어 접속사 히나(ἵνα)는 일반적으로 목적을 나타내지만, 문맥에 따라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목적으로 읽는 견해는 예수님의 비유가 단순한 교육 수단이 아니라,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드러내는 역할도 한다고 봅니다. 이사야 6장의 심판 문맥과 4:11의 안팎 구분이 그 근거입니다.
결과로 읽는 견해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라기보다, 이미 마음을 닫은 사람들이 비유를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묘사한다고 봅니다. 뒤의 4:22에서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4:33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만큼 가르치셨다는 사실이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목적 해석 역시 접속사의 통상적인 용법과 이사야서의 심판 문맥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논의가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느 쪽을 택하든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해한 구경거리를 접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한편 이 비밀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지능이 뛰어나거나 종교적 통찰력이 깊어서 하나님 나라를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설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비유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고 있지 못하느냐? 그러면 모든 비유를 어떻게 알겠느냐?」마가복음 4:13 · 본디새김
예수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이 차이는 장 마지막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은 바로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두고 다시 질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어떻게 열매를 잃는가?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린다.」마가복음 4:14 · 본디새김
여기서 씨앗에 해당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설명에서는 씨앗이 떨어진 자리와 그곳에 뿌려진 사람들이 서로 겹쳐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엄격한 도식에 따라 씨앗, 땅, 사람을 각각 별개의 상징으로 고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말씀이 사람에게 전해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길가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사탄이 곧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4:15). 앞서 새들이 씨앗을 먹어 치운 장면의 의미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도착했지만 그 안에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단순히 어떤 사람이 집중력이 부족했다는 문제로 축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활동까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3:27에서 예수님께서는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빼앗으려면 먼저 그 강한 자를 묶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맥에서 예수님의 귀신 축출은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하나님 나라의 활동과 연결됩니다. 4:15에서는 같은 대립이 말씀을 듣는 사람 안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단지 새로운 사상이나 윤리 교육의 보급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악의 세력과 충돌하는 사건입니다.
바위밭에 뿌려진 씨앗에서는 다른 문제가 드러납니다.
「바위밭에 뿌려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그것을 받는다.」마가복음 4:16 · 본디새김
첫 반응은 오히려 좋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안에 뿌리를 지니지 않아 잠시뿐이다. 그러다가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면 곧 걸려 넘어진다.」마가복음 4:1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모든 어려움을 막연하게 신앙의 시험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말씀 때문에’, 곧 말씀을 받아들인 결과로 생겨나는 반대와 박해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처음의 기쁨이 잘못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기쁨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기쁨이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붙잡을 수 있는 뿌리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곧’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바위밭의 씨앗은 빨리 싹트고(4:5), 사람은 말씀을 빨리 받아들이지만(4:16), 어려움이 오자 빨리 넘어지기도 합니다(4:17).
빠른 출발과 깊은 뿌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 사이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여기서는 박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훨씬 일상적인 것들이 등장합니다.
「이 시대의 걱정과 재물의 홀림과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욕망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고, 그래서 그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마가복음 4:19 · 본디새김
바위밭에서는 외부의 압력이 문제였다면, 가시덤불에서는 삶속에 계속 자라나는 경쟁적인 욕망이 문제입니다. 걱정과 재물과 욕망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는가라는 문제에서 만납니다.
특히 재물은 단지 소유하고 있는 물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홀리고, 삶을 지배할 수 있는 힘으로 등장합니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것에 사로잡혀 말씀의 결실을 잃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가복음 10:17–22의 부자 이야기를 미리 떠올리게 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관해 진지하게 질문하지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근심하며 떠납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은 어떤 곳입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들은 이렇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어떤 사람은 예순 배를, 어떤 사람은 백 배를 맺는다.」마가복음 4:2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을 설명하시면서 특별한 종교적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절에서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를 개인의 성공이나 업적을 측정하는 숫자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씨앗의 비유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등불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감추어진 등불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영원히 숨겨지지 않는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등잔이 됫박 아래나 침상 아래 놓이려고 오겠느냐? 등잔대 위에 놓이려고 오는 것이 아니냐?」마가복음 4:21 · 본디새김
「감추어진 것은 모두 드러나기 위한 것이고, 숨겨진 것은 환히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4:22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이 있다는 사실만 강조하면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은밀한 지식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등불의 비유는 감추어짐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지금 보기에 작고 평범합니다. 배에 앉아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여러 마을을 다니십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등불을 예수님 자신과 연결하여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과 정체가 처음에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다가 점차 드러나는 마가복음 전체의 전개가 이 비유와 잘 어울립니다. 다만 이 구절이 등불을 예수님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는 않으므로, 이는 문맥에 기초한 신학적 읽기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를 가지고 있거든 들어라.」마가복음 4:23 · 본디새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마치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등불 이야기가 단순히 미래에 비밀이 밝혀진다는 약속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그 드러남에 참여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소 낯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무엇을 듣는지 주의하여라. 너희가 재는 그 되로 너희에게 재어질 것이고, 더 보태질 것이다.」마가복음 4:2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서 비슷한 형태로 사용되는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지만, 마가복음 4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듣는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되로 재는 행위를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관대하게 행동하느냐는 문제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듣는지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후의 이해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가진 사람에게는 주어질 것이고,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4:25 · 본디새김
가진 자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이 구절만으로 완전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바로 앞의 문맥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 깊이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계속 거부하는 사람은 이미 들었던 말씀조차 자기 삶에서 아무런 결실을 이루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책임을 강조하시지만, 이것을 인간의 노력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차지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바꾸지는 않으십니다. 그 비밀은 먼저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4:11).
그렇다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십니다.
농부가 잠자는 동안 — 인간이 설명할 수 없어도 자라는 나라
그가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낮으로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트고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한다.」마가복음 4:26–27 · 본디새김
앞의 비유에서는 씨앗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번 비유에서는 정반대의 사실이 강조됩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먼저 줄기를 내고, 그다음에 이삭을 내고, 그다음에 이삭 속의 여문 알곡을 낸다.」마가복음 4:28 · 본디새김
‘저절로’는 사람이 매 순간 성장 과정을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땅이 열매를 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자연법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과정을 인간이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씨앗이 자라는 능력의 근원은 농부의 지식이나 통제력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일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1:15). 하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적 권력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병과 악과 불의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면 왜 세상이 한순간에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농부가 잠자는 동안 자라는 씨앗으로 답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더디다는 사실은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단순히 기다림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보낸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4:29 · 본디새김
‘낫을 보낸다’는 독특한 표현은 요엘 3:13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추수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추수를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완성되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으며, 구약의 추수 이미지에 비추어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까지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자체는 추수 때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초점은 씨앗이 반드시 성장의 끝에 이르며, 그때가 오면 추수가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눈에 띄지 않는 성장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저절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아우토마테입니다. 현대의 ‘자동’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낱말이기도 합니다. 또 요엘서에도 낫을 보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마가복음과 요엘서의 그리스어 표현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낫을 보낸다는 말과 추수 때가 되었다는 표현이 가까워 문학적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겨자씨 한 알 — 하나님 나라가 커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견줄까? 어떤 비유에 그것을 담을까?」 하고 다시 질문하십니다(4:30). 그리고 겨자씨 한 알을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뿌려질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데—」 「뿌려지고 나면 돋아나 모든 푸성귀보다 커지고 큰 가지들을 낸다. 그래서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 아래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가복음 4:31–32 · 본디새김
겨자씨가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는 식물학적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에도 겨자씨는 매우 작은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씨앗과 그것이 자라난 뒤의 크기를 극명하게 대조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단순히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자란다는 이야기보다 조금 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새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새들은 씨앗을 먹어 치웠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말씀을 빼앗아 가는 사탄의 활동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들이 겨자나무처럼 자란 식물의 그늘 아래 깃들입니다.
여기서 새가 언제나 사탄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의 상징을 다른 비유에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으십니다.
겨자씨의 성장은 단순히 자기 몸집만 커지는 성장이 아닙니다. 다른 생명들이 깃들 자리를 마련하는 성장입니다.
이 장면에는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에스겔 17:22–24에서 하나님은 높은 백향목에서 연한 가지를 가져다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나무는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으며, 여러 종류의 새들이 그 가지 그늘 아래 깃들게 됩니다.
에스겔 17장의 본래 문맥은 유다 왕조의 몰락과 하나님의 회복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높아진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인간의 왕권이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니엘 4:10–12에도 거대한 나무와 그 아래 깃드는 새들이 등장합니다. 다만 그 나무는 느부갓네살의 위대한 왕권을 상징하며, 뒤이어 그 교만에 대한 심판이 이어집니다. 이 두 본문을 함께 놓으면, 커다란 나무 아래 생명들이 깃드는 모습은 단순한 식물의 성장 이상으로 왕권과 통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거대한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씨를 선택하십니다.
고대의 제국은 자기 위대함을 거대한 나무에 비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처음부터 웅장한 왕국의 모습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땅에 떨어지는 작은 씨앗으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서와의 연결을 고려하면, 이 장면을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여러 민족이 보호와 안식을 얻게 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마가복음 4:32는 새들을 특정 민족과 직접 동일시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 하나만으로 이방인 선교의 모든 과정을 예언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비유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시작의 작음과 결말의 풍성함 사이의 대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시작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기대하는 권력과 영광의 형태를 띠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음을 근거로 장차 이루어질 일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는 비유들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만큼」 말씀을 전하셨다고 기록합니다(4:33). 그리고 따로 있을 때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풀어 주셨다고 덧붙입니다(4:34). 이 대목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이해 능력과 무관하게 던져지는 암호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해를 도와주는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는 바로 그날, 제자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바다를 건너는 밤 — 예수님은 정말 아랑곳하지 않으셨는가?
그날 저녁이 되었을 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저편으로 건너가자.」마가복음 4:35 · 본디새김
마가는 ‘그날’이라는 시간을 분명히 밝힙니다. 낮에 씨앗과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던 바로 그날입니다.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배에 있던 그를 그대로 데리고 갔다. 다른 배들도 그와 함께 있었다.마가복음 4:36 · 본디새김
‘배에 있던 그를 그대로’라는 표현은 낮의 가르침과 저녁의 항해가 이어지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음 장의 5:1에 이르면 이 항해의 목적지가 거라사인들의 지방이었음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항해 도중 거센 돌풍이 일어납니다.
거센 돌풍이 일었다. 물결이 배 안으로 자꾸 들이쳤다. 그래서 배에 이미 물이 차고 있었다.마가복음 4:37 · 본디새김
마가는 위험을 실제적인 것으로 묘사합니다. 단순히 바람이 거세어 제자들이 불안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상태에 계십니다.
그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랑곳하지 않으십니까?」마가복음 4:38 · 본디새김
마가복음의 서술은 이 대조를 통해 독자에게도 제자들과 비슷한 질문을 갖게 만듭니다. 위험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이 장면은 요나서 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의 말은 단순한 구조 요청보다 훨씬 날카롭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배가 위험하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잠들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결론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질문은 앞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생겼을 법한 질문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데 왜 반대와 실패가 계속됩니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데 왜 이런 위험이 닥칩니까?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아신다면 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까?
마가는 예수님께서 왜 잠드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잠을 의도적인 시험이라고 단정하거나, 예수님께서 아무 위험도 느끼지 않으셨다는 식으로 예수님의 내면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앞의 씨앗 비유와 나란히 놓으면 의미 있는 반복이 보입니다. 4:27에서 씨를 뿌린 농부가 자는 동안에도 씨앗은 자랐습니다. 그리고 4:38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풍랑 속에 잠들어 계십니다. 두 절에는 잠을 잔다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것이 농부와 예수님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가는 같은 장에서 두 번의 잠을 보여 주면서, 눈앞에 활동이 보이지 않는 순간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자,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요나도 폭풍을 만난 배 안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두려워하며 각자의 신에게 부르짖었고, 선장은 요나를 깨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요구했습니다(욘 1:4–6).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명하신 방향을 거슬러 도망가고 있었고, 그의 불순종이 이야기 속 풍랑의 원인으로 제시됩니다. 반면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또한 요나서에서는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 풍랑이 그치지만(욘 1:15),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바람과 바다에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두 이야기는 닮았지만, 예수님을 또 하나의 요나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독특한 권세를 드러냅니다. 4:27과 4:38에 함께 쓰인 ‘자다’는 동사는 카튜도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라」 — 누구의 말씀에 바다가 복종하는가?
그는 깨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 말했다. 「잠잠하여라. 입을 다물고 있어라.」 그러자 바람이 잦아들었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마가복음 4:39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풍랑이 그쳤다는 결과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꾸짖다’와 ‘입을 다물고 있어라’를 마가복음 1:25와 비교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입을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사용된 두 동사가 이번 장면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마가는 귀신을 향해 명령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바람과 바다를 향한 명령에서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낱말의 반복만으로 풍랑 자체가 귀신 때문에 발생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마가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를 복종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더러운 영도 예수님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고,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명령 앞에서 잦아듭니다.
구약에서 바다는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강력한 자연의 영역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때로는 혼돈과 위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다를 궁극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특히 시편 107:23–30은 풍랑을 만난 항해자들이 고통 중에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파도를 가라앉히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마가복음과 시편은 동일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험한 바다, 두려움에 빠진 항해자,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권세라는 공통된 이미지가 분명합니다.
여기서 두 이야기의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시편에서 항해자들은 여호와야훼께 부르짖고, 여호와야훼께서 폭풍을 가라앉히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예수님께서 직접 바람과 바다에 명령하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드러내던 바다에 대한 권세가,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납니다.
단순히 능력 있는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 이상의 정체성이 암시됩니다. 다만 마가는 여기서 긴 신학적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판단을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본 제자들의 질문으로 이끌어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귀신이 폭풍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꾸짖다’는 에피티마오, ‘입을 다물게 하다’는 피모오입니다. 특히 4:39의 페피모소는 완료 명령형으로, 입을 다물고 그 상태로 있으라는 뜻을 표현합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도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그립니다. 시편 89:9는 거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욥기 38:8–11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며 물결이 더 넘어오지 못하도록 제한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풍랑보다 더 큰 두려움 — 제자들이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왜 겁을 내느냐? 너희는 아직도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마가복음 4:40 · 본디새김
이 질문은 풍랑이 그친 다음에 주어집니다.
그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그리고 서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그에게 복종하는가?」마가복음 4:41 · 본디새김
거센 풍랑에서 깊은 고요함으로,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더 큰 경외와 두려움으로 장면이 이동합니다. 제자들이 처음 두려워했던 대상은 바람과 파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진 뒤에는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예수님 앞에서 새로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단지 또 다른 위험에 대한 공포라기보다, 자신들이 아직 충분히 알지 못했던 권세와 마주한 데서 비롯된 두려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제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꾸짖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하신 뒤 그들의 믿음을 물으셨다는 순서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충분했기 때문에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것으로 설명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부족한 믿음이 그대로 드러난 상황에서 행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항의에 말로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랑곳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제자들 앞에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권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의 모든 질문을 한순간에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십니까?
그러므로 4장의 마지막 질문은 무지한 제자들을 조롱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에서 제자들이 마침내 마주한 질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예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기대보다 작은 나라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위험이 아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탄 배에도 풍랑이 닥쳤습니다. 그리고 그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권세는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시점에,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4장은 모든 고난이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씨앗의 비유에는 실제로 열매를 잃는 경우들이 등장하고, 배 안의 위험도 실제적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장은 하나님의 활동을 눈에 보이는 결과와 인간의 통제력만으로 판단하려는 시선을 바꾸어 놓습니다.
마가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완성된 답안을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랑이 잠잠해진 뒤에도 그들은 「그렇다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그에게 복종하는가?」 하고 서로 묻고 있습니다.
배 안의 물결은 잦아들었습니다.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낮에는 씨앗이 자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분이, 이제 그들 곁에 계십니다.
제자들은 그 고요함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이 누구와 함께 배를 타고 있는지 깊이 묻기 시작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