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기적과 논쟁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마가복음 5장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는 남자, 열두 해 동안 피가 멈추지 않는 여자, 그리고 죽어 가는 열두 살 소녀입니다.
세 사람의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아무도 제압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고, 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써 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으며, 마지막 한 사람은 스스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세 이야기에는 뜻밖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삶의 정상적인 자리를 잃어버릴 위기에 있거나 이미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무덤 사이의 남자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지만 그곳에서 살지 못합니다. 피를 흘리는 여자는 오랫동안 병에 시달렸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에도 종교적 정결의 문제가 뒤따릅니다. 소녀는 아버지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생명 자체를 잃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단지 고통과 죽음을 물리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사람을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돌려보냅니다.
아무도 묶을 수 없었던 사람
무덤이 집이 된 사람
이야기는 바다 건너편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가십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바람과 물결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4:35–41). 이제 바다를 건너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혼란과 마주하십니다.
그가 배에서 나오자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를 맞닥뜨렸다.마가복음 5:2 · 본디새김
마가는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의 거처는 무덤입니다.
유대 성경에서 무덤과 시체는 죽음과 관련된 정결 규정의 대상이었습니다. 민수기 19:11–16은 시체나 무덤과의 접촉으로 발생하는 부정에 관해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이 사람이 무덤에서 산다는 사실은 그가 정상적인 주거 생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신의 몸을 쳐서 상처를 냅니다. 사람들은 그를 여러 번 쇠사슬과 차꼬로 묶었습니다. 마가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같은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는 무덤에 거처를 가지고 있었고, 이제는 쇠사슬로도 아무도 그를 묶을 수 없었다.마가복음 5:3 · 본디새김
그가 여러 번 차꼬와 쇠사슬로 묶였지만 쇠사슬은 그가 끊었고 차꼬는 부서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제압할 힘이 없었다.마가복음 5:4 · 본디새김
이 반복은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힘은 그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을 수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제압하지 못하지만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을 멈추지도 못합니다.
이 장면은 앞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3:27에서 예수님께서는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털려면 먼저 그 힘센 자를 묶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무도 이 사람을 「묶을 수 없었다」(δέω)고 할 때에도 3:27과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또한 그 사람을 「제압할 힘」(ἰσχύω)이 없었다는 표현에는 3:27에서 힘센 자를 가리킨 말과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는 일을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독자는 그 권세 아래 고통받는 한 사람을 직접 봅니다.
사람들은 쇠사슬로 그를 통제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쇠사슬이 아니라 자신의 명령으로 그를 해방하십니다.
이곳은 돼지 떼가 등장하는 지역이며, 나중에 그 사람이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의 일을 전하게 됩니다. 유대인들만의 생활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배경이 섞인 지역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갈릴리의 회당과 마을을 넘어 이 지역에까지 이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저항하는 영
무덤에서 나온 남자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도움을 구하는 평범한 청원이 아닙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예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하나님을 두고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지 마십시오.」마가복음 5:7 · 본디새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앞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던 장면(3:11)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높여 부르는 말과 실제로 따르려는 태도는 다릅니다.
독자는 이미 그 남자가 밤낮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고통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그 사람을 억누르고 있던 더러운 영입니다. 그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 더러운 영에게는 고통이나 위협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마가는 곧바로 그 이유를 밝힙니다.
예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가복음 5: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여 다루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명령은 그 사람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과 그를 억누르는 영의 관계를 끊는 명령입니다.
「내 이름은 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을 물으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것이 그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군단입니다. 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9 · 본디새김
한 사람의 입에서 단수와 복수가 함께 나옵니다.
이 이름은 그 사람을 억누르는 영들이 하나가 아니라 많다는 사실을 군대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아무도 그 남자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붙들고 있던 많은 영은 예수님께 거듭 간청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님을 몰아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지역에서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 힘이 예수님 앞에서는 허락을 구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건의 지명에는 오래된 문제가 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이라는 읽기는 중요한 그리스어 사본들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거라사라는 도시는 갈릴리 바다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돼지 떼가 벼랑을 내려가 곧바로 바다에 빠지므로 지리적으로 어색합니다. 그래서 사본들에는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이나 게르게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읽히는 형태도 나타납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바다와 더 가까운 데가볼리의 도시였고, 게르게사는 동쪽 호숫가의 한 장소와 연결되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정확한 위치를 어느 한 곳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라는 표현은 셈어적 배경을 가진 관용구로, 상대가 자신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거리를 두려는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한편 ‘군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레기온은 라틴어 legio에서 온 말입니다. 로마 군대의 대규모 부대를 가리키며, 제국 시대의 군단은 일반적으로 수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군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이야기를 로마의 군사적 지배에 대한 상징적 비판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특히 로마 제10군단과 돼지의 상징을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단이라는 말이 곧 특정 로마 부대의 실체를 가리킨다는 것은 본문에서 확정되지 않습니다. 군사적·정치적 연상이 가능하더라도 사건 전체를 로마군에 대한 암호화된 이야기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돼지 떼와 두려워하는 사람들
왜 돼지들이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더러운 영들은 근처에 있던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영들이 남자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 떼가 벼랑을 내려달려 바다로 뛰어듭니다. 약 이천 마리의 돼지가 물속에서 죽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을까요? 돼지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돼지가 유대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레위기 11:7–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돼지 이천 마리의 죽음이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었다거나, 예수님께서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혀도 상관없다고 판단하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돼지들의 죽음은 실제 손실을 의미합니다. 그 규모도 작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분명한 점은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갔고, 그들이 지닌 파괴적인 힘이 돼지 떼의 죽음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영들이 사람에게서 나오자, 그 사람이 겪던 폭력과 혼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마가가 독자의 시선을 이끄는 곳은 그다음 장면입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도망가 사건을 알리자, 지역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군단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마가복음 5:15 · 본디새김
처음 그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습니다. 밤낮으로 소리를 질렀고,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습니다.
마가는 그의 몸에서 영들이 나갔다는 사실만을 치유의 결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평온하고 온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묶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를 묶을 필요가 없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의 이유는 한 가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돼지 떼의 막대한 손실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을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정은 분명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그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마가복음 5:17 · 본디새김
그 남자를 억누르던 영들도 예수님께 간청했고, 그 지역 사람들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영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지역에 머물지 않으시기를 바랐습니다. 각각의 이유는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가져오는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단 한 사람만은 정반대의 부탁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는 이 사건의 경제적 결과를 별도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모든 다른 생명이나 재산보다 한 사람의 가치가 크다는 식의 단순한 계산으로 정리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또한 돼지들의 죽음이 더러운 영들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사실까지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것들이 돼지에게 들어간 뒤 돼지 떼가 죽었다고 기록할 뿐, 영들의 최종 상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고 싶었던 사람
가장 뜻밖의 거절
예수가 배에 오를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자기가 그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마가복음 5:18 · 본디새김
이 부탁은 앞서 열둘을 세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3:14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면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핵심 표현,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이 사용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요청입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에게 말했다. 「네 집으로, 네 식구에게 가서 주님께서 너에게 하신 모든 일과 너를 불쌍히 여기신 일을 그들에게 알려라.」마가복음 5:19 · 본디새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언제나 예수님과 같은 장소로 이동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열둘은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록 보내집니다. 그의 새로운 사명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의 의미를 긍휼과 연결하십니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을 괴롭히던 영들이 더 큰 능력 앞에 굴복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은 바로 그 일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
19절과 20절을 이어 읽으면 작은 변화가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너에게 하신 모든 일」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전한 내용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는 떠나가서 예수가 자기에게 한 모든 일을 데가볼리에서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했다.마가복음 5:20 · 본디새김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행하신 일과 긍휼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서술자는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전했다고 적습니다.
이 두 문장이 서로 다른 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동일한 일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후자의 이해가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행하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시는 사람일 뿐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특별한 통로이시며, 그 구원 행위와 분리할 수 없는 분이십니까? 마가는 독자가 이 질문을 품은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3:12). 그런데 여기서는 회복된 사람에게 직접 가서 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차이를 곧바로 지역에 따른 고정된 선교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누구의 입을 막고 누구에게 말하도록 하는지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일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아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어떻게 증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을 전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받은 긍휼을 알리는 증언이 됩니다.
딸을 살려 달라는 아버지
회당장의 간청
예수님께서 다시 바다를 건너오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회당장 가운데 한 사람이 왔다. 이름은 야이로였다. 그는 예수를 보고 그 발치에 엎드렸다.마가복음 5:22 · 본디새김
앞의 이야기에서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이름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알려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의 운영과 예배에 관련된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지위와 신뢰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립니다.
거듭 간청하며 말했다. 「내 어린 딸이 죽을 지경입니다. 그 아이가 낫고 살도록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마가복음 5:23 · 본디새김
회당장이라는 지위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위치도 지금은 딸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당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치유에서 손을 얹는 행동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딸에게 손을 얹으시면 그 아이가 낫고 살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의 부탁에는 두 가지 말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낫고」 그리고 「살도록」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병에서 회복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지 않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에 응하십니다. 많은 무리가 「사방에서 그를 밀어댔」지만, 아버지가 도움을 청하고,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딸에게로 가십니다. 독자는 이제 예수님께서 얼마나 빨리 그 집에 도착하실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로 그 순간 다른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야이로의 이야기 가운데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집어넣음으로써, 두 사건이 서로를 해석하게 합니다.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린 여자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사람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시는 동안 많은 무리가 사방에서 예수님을 밀어댑니다. 그 무리 속에 한 여자가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피가 계속 흘러 온 여자가 있었는데,마가복음 5:25 · 본디새김
마가는 그 여자의 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의 무게는 단순히 병의 기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 의사 손에 숱한 고생을 하고 가진 것을 다 써 버렸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더 나빠졌으며,마가복음 5:26 · 본디새김
이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병을 방치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가는 치료를 받으려는 그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차례로 쌓아 놓습니다. 고통, 경제적 소진, 증상의 악화. 그에게는 건강뿐 아니라 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마저 점점 사라졌습니다.
정결 규정은 이 여자의 삶에 무엇을 의미했을까?
레위기 15:25–30에 따르면 여자가 통상적인 월경 기간이 아닌 때에도 오랫동안 피를 흘리면 그 기간에 부정한 상태로 여겨졌습니다. 그가 눕거나 앉은 자리와 그것을 접촉한 사람에게도 정결 규정이 적용되었습니다. 그의 병에는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종교적 정결과 접촉의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흔히 지나치게 단정하는 부분은 피해야 합니다. 마가는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배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그를 버렸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정이 적용된다는 사실과, 그 여자가 실제로 어떤 사회적 배제를 얼마나 경험했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의식적인 부정은 곧 죄를 지었다는 도덕적 판단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래 지속된 출혈이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어렵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다가갑니다. 그리고 옷에 손을 댑니다.
옷에만 손을 대도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옷에라도 손을 대면 나는 나을 것이다.」마가복음 5:28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께 자기 병을 직접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거나 자신의 병을 알고 계시지 않아도,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생각이 당시의 치유 관념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지는 논의할 수 있지만, 마가는 그의 행동을 어리석은 미신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곧 그 여자의 피의 근원이 말랐고, 그 여자는 자기가 그 병에서 나은 것을 몸으로 알았다.마가복음 5:29 · 본디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예수님도 무언가를 알아차리십니다.
곧 예수는 자기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속으로 알아채고, 무리 속에서 돌아서서 말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마가복음 5:30 · 본디새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지 않았지만, 한 번의 접촉으로 일어난 일을 각각 알아차립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는지, 아니면 누가 자신에게 손을 댔는지를 실제로 확인하려 하셨는지는 본문이 완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가가 직접 기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접촉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밀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무리가 선생님을 밀어대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댔느냐』 하십니까?」마가복음 5:31 · 본디새김
제자들의 반응은 상식적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제자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신체적으로 접촉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한 여자는 자신이 낫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본문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조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여자의 행동과 그 결과를 특별히 드러냅니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고 두려워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했다.마가복음 5:33 · 본디새김
그는 이미 병에서 나았지만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변화와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는 서로 구별되는 문제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그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평화 가운데 가라. 그리고 네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지내라.」마가복음 5: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친근한 관계의 언어로 부르십니다. 마가는 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 그 여자를 부르는 이름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이름 없는 여자 한 사람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두 이야기가 서로 깊이 얽히기 시작합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마가는 「낫게 했다」(σῴζω)라는 하나의 동사로 두 사람의 바람을 연결합니다. 야이로는 죽어 가는 딸이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여자는 오래된 병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은 두 사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 장면을 기쁘게 바라보면서도 한 가지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여전히 죽어 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낫게 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세소켄입니다. 소조라는 동사의 완료형으로, ‘구원하다’, ‘살리다’, ‘낫게 하다’라는 의미 범위를 가집니다. 같은 동사가 야이로의 요청에도 나타납니다. 그는 딸이 「낫고 살도록」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여자가 옷에 손을 대면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에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여기서 ‘구원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여자가 이 순간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적 결론만을 강조하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좁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화 가운데 가도록 말씀하십니다. 「평화 가운데 가라」는 표현에는 에이레네, 곧 평화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 건강과 안전, 온전함과 관계의 회복을 포함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 여자가 받은 평화를 어느 하나의 영역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말하고 있을 때 — 죽음의 소식
왜 이야기를 중단했을까?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선생님을 수고롭게 하십니까?」마가복음 5:3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평화를 선언하시는 말씀을 마치시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딸의 죽음을 알립니다. 두 이야기가 시간적으로 겹쳐지는 순간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딸에게 빨리 와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시다가 길에서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합니다.
본문은 여자를 고치시느라 지체하셨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자를 위해 시간을 쓰시는 바람에 소녀가 죽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지체와 죽음의 소식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사실은 긴장을 만듭니다.
이제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닙니까?
집에서 온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선생이시지만, 죽음이 이미 일어난 상황에서는 더 이상 부탁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야이로는 처음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믿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기만 하여라」
예수는 전해지는 그 말을 곁에서 듣고 회당장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기만 하여라.」마가복음 5:36 · 본디새김
이 말은 야이로에게 딸이 죽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듣고 있는 죽음의 소식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두려움이 마지막 판단이 되지 않도록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독자는 조금 전에 일어난 여자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야이로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믿음을 요청받습니다.
여자의 믿음은 자신의 몸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 이후에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가는 믿음이 언제나 같은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기대한 가능성이 모두 닫힌 것처럼 보일 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마가는 야이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여자의 이야기로 넘어갔고, 이제 다시 야이로에게 돌아옵니다. 흔히 ‘샌드위치 구조’라고 불리는 이 서술 방식은 두 사건이 서로를 비추게 합니다. 특히 열두 해 동안 앓은 여자와 열두 살 소녀, 그리고 두 사람에게 사용되는 ‘딸’이라는 표현은 독자가 두 이야기를 분리해서 읽지 못하게 합니다. 또 「믿기만 하여라」의 그리스어 명령형 피스튜에는 현재형으로, 이 문맥에서는 이미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야이로가 그 믿음을 계속 붙들도록 권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탈리타 쿰」 — 죽은 소녀의 손을 잡다
집 안에 가득한 울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집에는 이미 소란이 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울며 크게 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는 들어가서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우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가복음 5:39 · 본디새김
이 말씀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아이가 실제로 죽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그 상태를 잘못 판단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잠에 빗대어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다시 일으키실 것을 암시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든, 이어지는 행동은 독자에게 그 의미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을 따라온 세 제자를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마가는 이 일을 공개적인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탈리타 쿰.」 번역하면 「소녀야,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이다.마가복음 5:41 · 본디새김
이 표현의 특별함은 낯선 언어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가는 이미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황한 의식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신비한 주문이나 절차를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누군가에게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병든 사람을 고치는 데에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도 생명을 일으키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열두 해와 열두 살
곧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다. 소녀는 열두 살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곧 크게 놀라 넋을 잃었다.마가복음 5:42 · 본디새김
이 숫자는 독자가 이미 들었던 숫자입니다. 앞에서 여자는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렸습니다. 지금 살아난 소녀는 열두 살입니다. 그러나 열둘이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에서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 사람의 시간이 서로를 비추는 효과입니다.
한 사람에게 열두 해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열두 해는 이제 막 펼쳐지기 시작한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오래된 고통을 끝내시고, 소녀의 끊어진 삶을 다시 이어 주십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소녀에게는 예수님께서 먼저 손을 대십니다. 여자는 자신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올 수 없습니다.
소녀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다가와 손을 잡으셨습니다. 이 점은 믿음을 하나의 정해진 행동 양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소녀의 이야기는 그 사람이 직접 믿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생명을 회복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는 사실은 정결 규정의 배경에서도 서로 연결됩니다. 레위기 15장은 지속적인 출혈과 관련된 부정을 규정합니다. 민수기 19장은 죽은 사람과의 접촉으로 발생하는 부정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부정하게 되셨는지를 논쟁의 중심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접촉하신 결과를 보여 줍니다. 여자는 병에서 나았습니다. 소녀는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접촉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의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이것을 정결 규정이 모두 폐지되었다는 선언으로 바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제도적 논쟁을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결 규정이 환기하는 부정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회복과 생명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리고 소녀에게 먹을 것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마가복음 5:43 · 본디새김
거라사에서는 회복된 사람에게 가서 자신이 받은 긍휼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소녀를 일으키신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다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방식과 시기를 통제하고 계신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치유의 능력만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게 하려 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침묵 명령을 내리신 정확한 이유는 마가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동기로 확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일을 알려야 하는가는 단순히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이 드러나는 방식을 주도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5:39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사람들이 딸이 죽었다고 전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이의 상태를 어떤 방식으로 확인했는지, 예수님께서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 의학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두 번째 읽기가 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해명하지 않는 부분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17:17–24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고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습니다. 열왕기하 4:18–37에서 엘리사는 죽은 소년을 위해 기도하고 몸을 맞대며 생명이 돌아오게 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분이 여호와야훼이며, 예언자들은 그분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은 그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아이, 부모의 절박함,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회복이라는 요소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또 시편 30:3은 하나님이 자신을 스올에서 끌어올리셨다고 고백합니다. 본래 문맥에서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위기에서 구원받은 경험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사야 25:8은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으실 것이라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 문맥은 한 개인의 치유를 넘어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과 회복을 바라봅니다. 마가복음 5장은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소녀는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움 속에서 한 가지 현실적인 필요를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실제 삶 속에서 다시 이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이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살아난 뒤에는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십니다. 다시 살아난 소녀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평범한 하루를 돌보십니다.
마가복음 5장은 거대한 능력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은 작은 식사의 준비로 끝납니다.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소녀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