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기적과 논쟁

목자 없는 양들 앞에 서신 참된 목자

마가복음 6장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기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가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는 듯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그의 행적을 기억하고, 그가 행한 기적을 목격한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76장 본문 읽기 →

고향에서 배척받으시는 예수님 — 익숙함이 이해를 가로막을 때

마가복음 6:1–6 본문 →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안식일이 되자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듣고 몹시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어디서 났느냐? 이 사람에게 주어진 이 지혜는 무엇이며, 그의 손으로 일어나는 이런 기적들은 무엇이냐?」마가복음 6:2 · 본디새김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놀라운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제기한 질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일을 보고도, 곧바로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던 예수님의 이력으로 돌아갑니다.

「이 사람은 목수요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의 누이들도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냐?」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걸려 넘어졌다.마가복음 6:3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회적 세계 안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지금 자신들이 듣고 있는 지혜와 능력의 근원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익숙함에서 생겨난 거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낯설어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마가는 이 반응을 「그들은 그에게 걸려 넘어졌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자신들이 목격한 능력 사이의 간격이 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출처를 물었으면서도,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가능성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었다는 놀라운 기록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예언자가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십니다.

그는 거기서 아무 기적도 행할 수 없었다.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쳤다.마가복음 6: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고 하지 않고, 행할 수 없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을 인간의 불신앙이 예수님의 능력을 물리적으로 무력화했다는 일반 법칙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님께서 몇몇 병자를 실제로 고치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두 사실을 나란히 둡니다. 고향 전체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병자들은 여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긴장을 해소하려는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믿음이 기적의 필수 조건이라는 설명도 있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척하는 공동체에 능력을 강제로 행사하지 않으신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후자는 예수님의 사역이 믿음과 응답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마가복음의 흐름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본문은 그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지 않음에 놀랐다. 그는 주변의 마을들을 다니며 가르쳤다.마가복음 6:6 · 본디새김

이전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놀라는 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이 뒤집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놀랐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거부 때문에 자신의 사역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변 마을들을 다니며 계속 가르치십니다. 고향에서 닫힌 길이 다른 마을들로 향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 혼자 마을들을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까지 보내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6:3의 ‘목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나무를 다루는 일에만 한정되지 않는 제작 기술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를 다루었는가보다 그 직업이 예수님을 마을의 평범한 노동자로 규정하는 데 쓰인다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호칭도 눈에 띕니다. 아버지의 이름 대신 어머니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모욕이었는지, 요셉의 부재를 반영하는지, 또는 다른 사회적 관습이 작용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족 관계로 규정한다는 이야기의 기능은 분명합니다.

열두 제자를 보내시다 — 예수님의 권위가 약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다

마가복음 6:7–13 본문 →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불러 둘씩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십니다.

여기서 권위의 출처가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또는 뛰어난 종교적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권한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길 떠날 때 지팡이 하나 말고는 빵도 자루도 띠에 넣을 돈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그들에게 일렀다.마가복음 6: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충분한 재정과 식량을 확보한 다음 출발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지팡이와 샌들은 허용하시지만 여분의 옷과 식량, 돈을 갖추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명령의 의미를 모든 시대의 선교자가 따라야 할 고정된 소유 규칙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열둘을 파송하시면서 내리신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그 지침은 그들이 누구를 의지하며 일해야 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장비를 바탕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권위를 받고, 길에서 다른 이들의 환대를 받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곳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라는 명령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숙소나 유력한 후원자를 찾아 옮겨 다니는 태도보다는, 자신들을 받아들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게 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을 때에는 발아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행동은 거부당한 일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책임과 그 메시지에 응답하는 책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에게 강제하거나 보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를 선포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칩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장에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성공적인 선교 보고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을 곧바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 배치는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세상으로 보냄받았는지를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회개를 선포하면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 메시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삶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요한의 이야기가 보여 줍니다.

헤롯의 잔치 — 왕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마가복음 6:14–29 본문 →

요한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헤롯은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회개를 선포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이,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집니다. 그 소문은 갈릴리의 통치자 헤롯에게도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이실 수도 있고, 엘리야이실 수도 있으며, 옛 예언자들과 같은 인물이실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 가운데 헤롯의 반응은 유독 단호합니다.

헤롯은 듣고 말했다. 「내가 목을 벤 요한,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났다.」마가복음 6:16 · 본디새김

헤롯은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립니다.

마가는 여기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합니다. 제자들의 사역을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넣고, 그 이야기가 끝난 뒤 다시 제자들의 귀환으로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배열은 요한의 죽음을 단순한 과거 회상 이상의 사건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동안, 그 이름을 듣는 권력자의 마음에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 떠오릅니다.

요한의 말이 건드린 것은 왕의 권력보다 왕의 삶이었습니다

요한이 헤롯에게 한 말은 짧습니다.

요한이 헤롯에게 「당신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 까닭이다.마가복음 6:18 · 본디새김

여기서 ‘옳지 않다(ἔξεστιν)’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허용되다·적법하다를 부정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2–3장에서 안식일을 둘러싸고 등장한 질문과 같은 어휘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는지를 따졌고(2:24),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허용되는지 물으셨습니다(3:4).

이제 그 질문이 통치자의 혼인에 적용됩니다.

요한의 책망은 개인적 취향이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율법의 관점에서 내려진 판단입니다. 레위기 18:16과 20:21은 형제의 아내와 관계를 맺는 일을 금합니다. 요한은 왕이라고 해서 그 기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헤롯의 반응은 예상보다 복잡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해서였다.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줄 알고 그를 지켜 주었고, 그의 말을 들을 때면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마가복음 6:20 · 본디새김

헤롯은 요한을 단순한 적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을 존중하는 것과 요한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헤롯은 요한의 가르침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자신의 삶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과도 미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요한이 의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가두어 둡니다.

마가는 진실을 알아보는 것과 진실에 자신을 맡기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을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왕은 가장 중요한 것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헤롯의 생일이 되자 잔치가 열립니다.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유력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헤롯의 권력이 의존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군사적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잔치에서 한 소녀가 춤을 추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헤롯은 거창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맹세했다. 「무엇이든 나에게 구하면 너에게 주겠다.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마가복음 6:2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에스테르기 5:3, 5:6, 7:2의 왕실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헤롯의 약속을 실제로 영토의 절반을 양도할 의사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는 왕실의 과장된 약속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요청은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하던 헤롯의 무력함을 드러냅니다.

그 아이는 곧 서둘러 왕에게 들어가 이렇게 구했다.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마가복음 6:25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서두름이 겹쳐 있습니다.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요청인데도 깊이 생각할 틈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헤롯은 이미 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이제 요청을 거절하면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왕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와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사람들 때문에 그 아이의 청을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마가복음 6:26 · 본디새김

그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서 처음부터 잔치를 계획했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을 지켜 주던 헤롯이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의식하여 결국 그를 죽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장면의 비극입니다.

사람을 죽일 권력은 있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을 자유는 없습니다.

헤롯은 왕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맹세에 붙잡혀 있습니다. 반대로 옥에 갇힌 요한은 왕에게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더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마가는 이 질문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헤롯이 내린 명령과 요한의 잘린 머리가 독자 앞에 놓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둡니다.

이제 마가는 독자를 헤롯의 잔치에서 예수님의 식탁으로 데려갑니다.

조금 더 깊이

외부 역사 자료도 헤롯 안티파스가 요한을 처형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유대 역사가는 『유대 고대사』 18.116–119에서 헤롯이 요한의 대중적 영향력을 정치적 위협으로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마가복음은 헤로디아와의 혼인, 요한의 책망, 잔치에서의 맹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두 기록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유대 역사가는 정치적 위험을, 마가는 헤롯의 개인적 갈등과 궁정의 역학을 부각합니다. 이것만으로 두 설명이 서로 배타적이라고 판단할 필요는 없지만, 세부 경위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6:23의 약속에서 페르시아 왕은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말합니다. 에스더 이야기에서는 그 약속을 통해 한 민족을 구할 길이 열리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비슷한 표현이 한 예언자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에스테르기와의 연결은 직접 인용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두 장면의 언어와 결과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반전이 있습니다. 헤롯은 마가가 부르는 것처럼 엄밀한 의미의 독립된 왕이 아니라 로마 제국 아래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6:22에서 소녀가 누구의 딸인가 하는 문제에는 본문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헤롯의 딸 헤로디아」는 이른 시기의 중요한 사본들이 지지하는 읽기입니다. 반면 「헤로디아의 딸」로 읽는 사본들도 있으며, 이는 6:24에서 소녀가 어머니에게 묻는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두 읽기는 가족 관계를 다르게 표현하지만, 이 대목의 사건 전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푸른 풀 위의 식사 — 목자 없는 양들이 목자를 만나다

마가복음 6:30–44 본문 →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은 휴식의 초대였습니다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끝나자, 마가는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사도들이 예수에게 모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한 것과 가르친 것을 모두 그에게 보고했다.마가복음 6:30 · 본디새김

마가는 여기서 열둘을 ‘사도들’, 곧 보냄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6:7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보내셨고, 6:30에서 그들이 돌아왔다는 흐름에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성과를 듣고 곧바로 다음 임무를 주지 않으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자, 너희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6:3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역을 계속 확대하는 대신, 우선 먹고 쉴 공간을 마련하려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활동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나자 사람들이 알아채고 육로를 따라 달려가 먼저 도착합니다. 제자들이 겨우 휴식할 시간을 얻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나와서 큰 무리를 보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 그들이 목자를 가지지 않은 양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마가복음 6:34 · 본디새김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무엇으로 보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민수기 27:15–17에서 모세는 자신이 떠난 뒤 이스라엘 공동체가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여호와야훼께 요청합니다. 문제는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백성을 이끌고 돌볼 지도자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열왕기상 22:17에서도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은 지도자를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묘사합니다.

에스겔 34장은 이 주제를 더욱 깊게 발전시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 곧 지도자들은 자신들만 먹이고 양들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양들은 흩어지고 약탈당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이런 목자들을 책망하시고, 자신이 친히 양들을 찾으며 먹이고 쉬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자신의 종 다윗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에스겔 34:11–16, 23–24).

마가는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이 불러오는 성경적 배경은 분명합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단지 배고픈 군중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제대로 돌보지 못한 백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빵을 나누지 않고, 먼저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필요는 음식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에게는 양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르침과 먹임은 별개의 기적이 아닙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돌보는 하나의 행동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시간이 늦어지자 제자들이 현실적인 제안을 합니다.

「둘레의 시골과 마을로 가서 자기들이 먹을 것을 사도록 무리를 돌려보내십시오.」마가복음 6:36 · 본디새김

제자들의 판단은 상황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딴곳이고, 저녁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어떻게 군중을 적절히 해산시킬 것인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릅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을 사다가 그들에게 먹여야 합니까?」마가복음 6:37 · 본디새김

그리스어 문장에서 ‘너희가(σύ)’라는 대명사는 따로 명시되어 강조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이 문제를 감당하도록 부르는 것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이 정도의 지출이 필요할 만큼 상황이 엄청나다는 반응입니다.

제자들은 문제가 얼마나 큰지 압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경제적 판단을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빵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 가서 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했다.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마가복음 6:38 · 본디새김

제자들은 없는 것을 계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음식을 손에 들고 사람들을 먹이기 시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적은 자원 자체가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 아닙니다. 그 음식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가진 것은 군중을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빵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처음 파송되었을 때 제자들의 권위가 예수님에게서 왔던 것처럼, 이제 군중을 먹이는 데 필요한 것도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푸른 풀 위에 마련된 식탁

마가는 사람들이 앉는 모습을 의외로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모두 푸른 풀 위에 무리 지어 기대어 앉게 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했다.마가복음 6:39 · 본디새김

그들은 백 명씩, 오십 명씩 질서 있게 자리를 잡습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함께 식사할 공동체의 모습을 갖춥니다.

시편 23:2에서 여호와야훼는 목자로서 시인을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십니다. 에스겔 34:14–15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양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이고 눕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가가 두 본문 중 어느 하나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다고 말한 뒤 푸른 풀 위에 앉는 모습을 묘사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목자와 풀밭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헤롯의 잔치와 비교하면 이 모습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헤롯의 식탁에는 고관들과 군인들과 유력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여러 도시에서 찾아온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며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헤롯의 명령으로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는 떼어진 빵이 제자들에게 계속 건네집니다.

한 식탁에서는 권력이 생명을 빼앗고, 다른 식탁에서는 권위가 생명을 돌봅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축복의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 앞에 놓습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다.마가복음 6:42 · 본디새김

사람들이 조금씩 맛만 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열두 광주리에 가득 거둡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신 이야기가 있습니다(출애굽기 16장). 또한 엘리사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 남게 했습니다(열왕기하 4:42–44). 마가가 이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이 먹고 남긴다는 장면은 하나님의 공급과 예언자의 사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동시에 에스겔이 전한 약속처럼 흩어진 양들을 돌보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그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에서 ‘사도들’이라는 명사가 사본상 이견 없이 쓰인 곳은 6:30 한 곳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하루 품삯의 대표적인 금액으로 이해하면, 이백 데나리온은 약 이백 일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정확한 회계 계산을 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 전체를 먹이는 장면이라는 상징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마가는 여기서 그 숫자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하나의 상징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빵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다는 숫자는 본문이 명시한 남자의 수이며, 전체 참석 인원을 별도로 계산할 정보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4:22의 마지막 식사에서도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축복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 동작이 다시 등장합니다. 두 장면의 반복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신 일을 곧바로 마지막 식사와 동일한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마가는 먼저 굶주린 사람들이 실제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을 독자의 눈앞에 놓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 빵의 기적에서 깨닫지 못한 것

마가복음 6:45–52 본문 →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않으셨을까요?

식사가 끝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억지로 배에 오르게 하십니다.

그는 곧 제자들을 억지로 배에 오르게 하고, 자기가 무리를 돌려보내는 동안 건너편 벳새다로 먼저 가게 했다.마가복음 6:45 · 본디새김

‘억지로’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떨어져 배를 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강하게 명령하셨는지는 마가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군중의 정치적 열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제자들을 따로 보내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직접 돌려보내고, 그 뒤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뭍에 홀로 계십니다.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 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바람은 배가 나아가려는 방향과 반대로 붑니다. 제자들은 노를 젓느라 고생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생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지나가려 했다」

6:48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표현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노 젓는 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 바람이 그들을 거슬러 불었기 때문이다 — 밤 사경쯤에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갔다. 그리고 그들을 지나가려 했다.마가복음 6:48 · 본디새김

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는 제자들을 향해 다가오면서 그들을 지나가려 하셨을까요? 이 표현은 일상적인 이동의 의미로도, 구약의 하나님 현현 장면을 배경으로도 읽힙니다.

그들은 그가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마가복음 6:49 · 본디새김

만일 이 장면이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을 암시한다면, 그 드러남은 제자들에게 즉시 이해되지 않습니다.

「나다」 — 익숙한 말속에 담긴 낯선 깊이

모두 그를 보고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는 곧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가복음 6:50 · 본디새김

‘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표현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신원을 밝힐 때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자기 확인입니다.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성경 전체에서 가지는 울림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표현 자체보다 장면 전체가 중요합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는 행동, 그들을 지나가려 하셨다는 묘사, 두려움 가운데 들려오는 자기 확인, 그리고 이어지는 바람의 잦아듦이 함께 놓입니다.

마가복음 4:35–41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순종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직접 걸어오십니다. 구약에서 바다와 깊은 물은 인간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을 대표하며, 여호와야훼는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시편 89:9, 107:23–30, 욥기 9:8).

구약이 여호와야훼의 권능으로 묘사하던 일들이 지금 예수님의 행동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적 정체성에 관해 길게 설명하시도록 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에게 그 행동을 보게 합니다.

빵에 대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잦아듭니다. 제자들은 몹시 놀랍니다. 그런데 마가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이유를 덧붙입니다.

빵에 대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의 마음이 굳어 있었다.마가복음 6:52 · 본디새김

이것이 바다 위를 걸으시는 장면의 해석을 여는 열쇠입니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일은 앞서 있었던 빵의 기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빵의 기적을 그저 많은 음식을 만들어 낸 놀라운 사건으로 이해했다면,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일은 또 하나의 기이한 사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빵의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보았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 주셨고, 목자 없는 양들을 인도하시는 목자로 나타나셨습니다.

바다 위에서도 같은 분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은 빵을 먹인 일을 직접 도왔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는 앞서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함을 묘사할 때 ‘마음이 굳어 있었다’와 같은 계열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3:5). 이제 제자들에게도 그 표현을 적용합니다. 하지만 두 집단을 완전히 동일하게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으로 대응하는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8:14–21에서도 이 문제는 반복되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시 지적하십니다.

제자들의 완고함은 이미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최종 판결이라기보다, 그들 또한 진실을 보지 못할 위험에 있다는 경고로 작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 일하고, 예수님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여전히 배워 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알아보고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부족한 이해가 예수님의 돌보심을 중단시키지 않습니다.

이 점이 처음 고향에서의 불신앙과도 차이를 만듭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졌지만, 제자들은 두려움과 무지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계속 길을 갑니다.

조금 더 깊이

6:48의 ‘지나가려 했다’에 대한 첫째 읽기는 일상적인 이동의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 곁을 지나가려 하셨거나, 제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지나가려 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 표현은 예수님의 실제 행동을 묘사하며, 그 의도까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둘째는 구약의 하나님 현현 장면을 배경으로 읽는 것입니다. 욥기 9:8은 하나님이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높은 곳을 밟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9:11에서는 하나님이 곁을 지나가시더라도 인간이 그를 보거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이미지가 마가복음 6:48에서 결합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이 인간 곁을 지나가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욥이 말한 인간의 인식 한계가 제자들의 모습에서 다시 나타나는 듯합니다. 다만 ‘지나가다’라는 동사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하나님 현현에 대한 암시가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과 구약의 여러 이미지를 함께 고려할 때 가능한 해석입니다. 하나님 현현으로 읽는 해석은 다른 본문도 근거로 듭니다. 출애굽기 33:19–22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영광을 모세 앞에 지나가게 하십니다. 열왕기상 19:11에서도 여호와야훼가 엘리야 앞을 지나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 43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바로 그분임을 밝히시며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다’의 경우 출애굽기 3:14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도 언어적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출애굽기 3:14의 전체 그리스어 표현과 마가복음의 두 낱말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단순히 같은 낱말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선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게네사렛의 병자들 — 알아보고 달려오는 사람들

마가복음 6:53–56 본문 →

바다를 건넌 예수님 일행은 게네사렛 땅에 도착합니다.

이 장면은 앞의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짧고 조용합니다. 긴 대화도 없고, 큰 논쟁도 없습니다.

그들이 배에서 나오자 곧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마가복음 6:5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직전 장면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게네사렛 사람들은 배에서 나오신 예수님을 곧 알아보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병자들을 찾아 요에 눕혀 데려옵니다.

그리고 마을이든 도시든 시골이든 그가 들어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장터에 병자들을 두고, 그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그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댄 사람마다 나았다.마가복음 6:56 · 본디새김

여기서 사람들은 특별한 자격이나 지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병든 사람들이 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치실 수 있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 5:25–34에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 사이로 다가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언급하며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옷자락 자체에 독립적인 치료 능력이 있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장면의 중심은 옷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가고 예수님을 통해 병이 낫는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충분히 이해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길을 막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갈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예수님을 따르지만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출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기적을 기억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생명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알고 나아가는 것입니까?

마가복음 6장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모습

마가복음 6:1–56 본문 →

이 장의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면, 예수님의 능력 자체보다 그 능력이 어떤 권위이며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가 중심에 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인정받는 일보다, 그들에게 필요한 생명을 주는 일에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장면은 다시 게네사렛의 장터에 머뭅니다.

마을과 도시와 시골에서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요에 눕혀 데려옵니다. 누군가는 걷지 못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곳에 데려다 놓고,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곳에는 헤롯의 잔치처럼 이름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식탁이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허락을 얻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한 장의 시작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 장 마지막에 이르면 독자는 그 권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자리에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