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기적과 논쟁

목자 없는 양들 앞에 서신 참된 목자

마가복음 6장의 이야기들을 꿰뚫는 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가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는 듯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그가 한 일을 기억하고, 그가 행한 기적을 목격한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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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배척받으시는 예수님 — 익숙함이 이해를 가로막을 때

마가복음 6:1–6 본문 →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이 받은 지혜는 대체 어떤 지혜일까? 어떻게 이 사람의 손을 통해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걸까?」마가복음 6:2 · 두루새김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놀라운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던진 질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입니다.

「이 사람은 그 목수 아니야?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 아니야?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아?」 사람들은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마가복음 6:3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을 낯설어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원문에서는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졌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자신들이 목격한 능력 사이의 간격이 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출처를 물었으면서도,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가능성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었다는 놀라운 기록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예언자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십니다.

그곳에서 병자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치셨습니다. 그 밖에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마가복음 6:5 · 두루새김

마가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하지 않고,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능력이 실제로 힘을 잃는다는 일반 법칙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절에서 예수님께서 병자 몇 사람을 실제로 고치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믿지 않는 데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마가복음 6:6 · 두루새김

이전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놀라는 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이 뒤집힙니다.

서로 놀라지만 놀라는 이유는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거부 때문에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고향에서 닫힌 길이 다른 마을들로 향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 혼자 마을들을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까지 보내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6:3의 「목수」(τέκτων)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나무를 다루는 일에만 한정되지 않는 제작 기술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이 예수님을 마을의 평범한 노동자로 여기는 데 쓰인다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모욕이었는지, 요셉이 없는 상황을 반영하는지, 또는 다른 사회적 관습이 작용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6:5의 긴장을 두고는 믿음이 기적의 필수 조건이라는 설명도 있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부하는 공동체에 능력을 강제로 행사하지 않으신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후자는 예수님의 일이 믿음과 응답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마가복음의 흐름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본문은 그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를 보내시다 — 예수님의 권위가 약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다

마가복음 6:7–13 본문 →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십니다. 제자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또는 뛰어난 종교적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권한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빵도 여행 가방도 가져가지 말고, 허리띠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마라.」마가복음 6:8 · 두루새김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내리신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그 지침은 그들이 누구를 의지하며 일해야 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장비를 바탕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고, 길에서 다른 이들이 맞아 주고 돌봐 주는 데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지역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라는 명령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을 때에는 발에 묻은 먼지를 털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과 그 말씀에 응답하는 책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에게 강제하거나 보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라고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칩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장에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을 곧바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라고 전하면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 말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삶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요한의 이야기가 보여 줍니다.

헤롯의 잔치 — 왕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마가복음 6:14–29 본문 →

요한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헤롯은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이,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이실 수도 있고, 엘리야이실 수도 있으며, 옛 예언자들과 같은 인물이실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 가운데 헤롯의 반응은 유독 단호합니다.

헤롯은 이런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내가 목을 베게 한 요한, 그 사람이 살아났구나.」마가복음 6:16 · 두루새김

헤롯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자세히 조사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립니다. 마가는 여기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합니다.

요한의 말이 건드린 것은 왕의 권력보다 왕의 삶이었습니다

요한이 헤롯에게 「형제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6:18 · 두루새김

여기서 「안 됩니다」는 허용되다·법에 맞다는 뜻을 부정한 표현입니다. 요한의 책망은 개인적 취향이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율법의 관점에서 내려진 판단입니다. 레위기 18:16과 20:21은 형제의 아내와 관계를 맺는 일을 금합니다. 요한은 왕이라고 해서 그 기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헤롯의 반응은 예상보다 복잡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올바르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들으면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즐겨 들었습니다.마가복음 6:20 · 두루새김

그러나 요한을 존중하는 것과 요한의 말에 따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요한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가두어 둡니다.

마가는 진실을 알아보는 것과 진실에 자신을 맡기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을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왕은 가장 중요한 것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헤롯의 생일이 되자 잔치가 열립니다.

고위 관리들과 군대 지휘관들과 갈릴리의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이 잔치에서 한 소녀가 춤을 추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헤롯은 거창한 약속을 합니다.

왕은 소녀에게 맹세까지 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달라고 하든 주겠다.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마가복음 6:23 · 두루새김

이 말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 자신의 위엄을 뽐내는 왕실의 과장된 약속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요청은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하던 헤롯의 무력함을 드러냅니다.

소녀는 곧 서둘러 왕에게 들어가 요구했습니다. 「지금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제게 주십시오.」마가복음 6:25 · 두루새김

여기에는 서두름이 겹쳐 있습니다.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요청인데도 깊이 생각할 틈이 사라집니다.

왕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함께 식사하던 손님들과 자기가 한 맹세 때문에 소녀의 요구를 거절하려 하지 않았습니다.마가복음 6:26 · 두루새김

요한을 지켜 주던 헤롯이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의식하여 결국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장면의 비극입니다.

사람을 죽일 권력은 있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을 자유는 없습니다.

헤롯은 왕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맹세에 붙잡혀 있습니다. 반대로 감옥에 갇힌 요한은 왕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더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마가는 이 질문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헤롯이 내린 명령과 요한의 잘린 머리가 독자 앞에 놓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의 시신을 거두어 무덤에 둡니다. 요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권력으로 요한의 목소리를 끝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요한이 전했던 뉘우치고 돌아서라는 부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가는 독자를 헤롯의 잔치에서 예수님의 식탁으로 데려갑니다.

조금 더 깊이

6:18의 「안 됩니다」(ἔξεστιν)는 마가복음 2–3장에서 안식일을 둘러싸고 등장한 질문과 원문에서 같은 어휘입니다(2:24; 3:4). 이제 그 질문이 통치자의 결혼에 적용됩니다. 외부 역사 자료도 헤롯 안티파스가 요한을 처형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유대 역사가는 『유대 고대사』 18.116–119에서 헤롯이 요한의 대중적 영향력을 정치적 위협으로 여겼다고 설명하고, 마가는 헤롯의 개인적 갈등과 궁정 안의 힘 관계를 두드러지게 보여 줍니다. 두 설명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지만, 세부 경위를 완전히 되짚어 낼 수도 없습니다. 「나라의 절반」은 에스테르기 5:3, 5:6, 7:2의 왕실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더 이야기에서는 같은 약속을 통해 한 민족을 구할 길이 열리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비슷한 표현이 한 예언자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직접 인용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헤롯은 엄밀한 의미의 독립된 왕이 아니라 로마 제국 아래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6:22에서 소녀가 누구의 딸인가 하는 문제에는 본문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옮긴 「헤롯의 딸 헤로디아」는 이른 시기의 중요한 사본들이 지지하는 읽기이고, 「헤로디아의 딸」로 읽는 사본들은 6:24에서 소녀가 어머니에게 묻는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두 읽기는 가족 관계를 다르게 표현하지만, 이 대목의 사건 전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푸른 풀 위의 식사 — 목자 없는 양들이 목자를 만나다

마가복음 6:30–44 본문 →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은 휴식의 초대였습니다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끝나자, 마가는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예수께서 보내셨던 사도들이 예수께 돌아와 모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모두 알렸습니다.마가복음 6:30 · 두루새김

마가는 여기서 열두 제자를 「사도들」, 곧 보냄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6:7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셨고, 6:30에서 그들이 돌아왔다는 흐름에 잘 어울립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와서 잠깐 쉬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아 그들은 밥 먹을 틈조차 없었습니다.마가복음 6:3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일을 계속 늘리는 대신, 우선 먹고 쉴 공간을 마련하려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나자 사람들이 알아채고 육로를 따라 달려가 먼저 도착합니다. 제자들이 겨우 휴식할 시간을 얻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많은 사람을 보고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마가복음 6:3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마가복음 6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민수기 27:15–17에서 모세는 자신이 떠난 뒤 이스라엘 공동체가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열왕기상 22:17에서도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은 지도자를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 34장은 이 주제를 더욱 깊게 발전시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 곧 지도자들은 자신들만 먹이고 양들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목자들을 책망하시고, 자신이 친히 양들을 찾으며 먹이고 쉬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자신의 종 다윗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에스겔 34:11–16, 23–24).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단지 배고픈 군중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제대로 돌보지 못한 백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빵을 나누지 않고, 먼저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들을 이끌고, 이어서 음식으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가르침과 먹임은 별개의 기적이 아닙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돌보는 하나의 행동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시간이 늦어지자 제자들은 「사람들이 근처 농가와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사도록 보내 주십시오」라고 현실적인 제안을 합니다. 외딴곳이고, 저녁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저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에게 먹이라는 말입니까?」마가복음 6:37 · 두루새김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이 문제를 감당하도록 부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문제가 얼마나 큰지 압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알아보고 대답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마가복음 6:38 · 두루새김

제자들은 없는 것을 계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음식을 손에 들고 사람들을 먹이기 시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적은 음식 자체가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 아닙니다. 그 음식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처음 보내졌을 때 제자들의 권한이 예수님에게서 왔던 것처럼, 이제 군중을 먹이는 데 필요한 것도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푸른 풀 위에 마련된 식탁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모두 여러 무리로 나누어 푸른 풀밭에 앉히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가복음 6:39 · 두루새김

그들은 백 명씩, 쉰 명씩 질서 있게 자리를 잡습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함께 식사할 공동체의 모습을 갖춥니다.

시편 23:2에서 하나님께서는 목자로서 시인을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십니다. 에스겔 34:14–15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이고 눕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미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고 말한 뒤 푸른 풀밭에 앉는 모습을 그리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목자와 풀밭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헤롯의 식탁에는 고위 관리들과 군대 지휘관들과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여러 도시에서 찾아온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롯의 명령으로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는 떼어진 빵이 제자들에게 계속 건네집니다.

한 식탁에서는 권력이 생명을 빼앗고, 다른 식탁에서는 권위가 생명을 돌봅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마가복음 6:42 · 두루새김

그리고 남은 빵 조각을 열두 바구니 가득 모으고, 남은 물고기도 모읍니다. 빵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신 이야기가 있습니다(출애굽기 16장). 또한 엘리사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 남게 했습니다(열왕기하 4:42–44).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동시에 에스겔이 전한 약속처럼 흩어진 양들을 돌보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는 민수기·열왕기상·에스겔·시편의 구절들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들」이라는 표현이 불러오는 성경적 배경은 분명합니다. 6:37의 그리스어 문장에서 「너희가」(σύ)라는 대명사는 따로 명시되어 강조됩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약 이백 일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한 데나리온을 하루 품삯의 대표적인 금액으로 이해한 계산이며, 그들이 정확한 비용 계산을 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할 수 있어 하나님 백성 전체를 먹이는 장면이라는 상징적 해석이 가능하지만, 마가는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천 명은 본문이 밝힌 남자의 수이며, 전체 참석 인원을 별도로 계산할 정보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4:22의 마지막 식사에서도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축복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 동작이 다시 등장합니다. 두루새김 6:41은 이 자리의 축복을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로 옮겼습니다. 두 장면의 반복은 의미가 있지만,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신 일을 곧바로 마지막 식사와 동일한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 빵의 기적에서 깨닫지 못한 것

마가복음 6:45–52 본문 →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않으셨을까요?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 쪽으로 먼저 가게 하셨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마가복음 6:4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강하게 명령하셨는지는 마가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직접 돌려보내고, 그 뒤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지에 홀로 계십니다.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람은 배가 나아가려는 방향과 반대로 붑니다.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 곁을 지나가려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맞바람 때문에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셨습니다. 새벽 무렵,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곁을 지나가려 하셨습니다.마가복음 6:48 · 두루새김

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는 제자들을 향해 다가오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려 하셨을까요?

이 표현에는 서로 다른 읽기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배 곁을 지나가려 하셨다는 일상적인 이동의 의미로 읽는 것이고, 둘째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지나가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읽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마가복음 6:49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다」 — 익숙한 말속에 담긴 낯선 깊이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가복음 6:50 · 두루새김

여기서 「나다」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성경 전체에서 가지는 울림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표현 자체보다 장면 전체가 중요합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는 행동, 그들 곁을 지나가려 하셨다는 묘사, 두려움 가운데 들려오는 자신임을 밝히시는 말씀, 그리고 이어지는 바람의 그침이 함께 놓입니다.

마가복음 4:35–41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직접 걸어오십니다. 구약에서 바다와 깊은 물은 인간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을 대표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시편 89:9, 107:23–30, 욥기 9:8).

구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묘사하던 일들이 지금 예수님의 행동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빵에 대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칩니다. 제자들은 몹시 놀랍니다.

그들은 빵을 나누어 준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굳어 있었습니다.마가복음 6:52 · 두루새김

이것이 바다 위를 걸으시는 장면의 해석을 여는 열쇠입니다.

빵의 기적을 그저 많은 음식을 만들어 낸 놀라운 사건으로 이해했다면,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일은 또 하나의 기이한 사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빵의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보았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바다 위에서도 같은 분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마가는 앞서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함을 묘사할 때 원문에서 같은 계열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3:5). 하지만 두 집단을 완전히 동일하게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의 굳은 마음은 이미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최종 판결이라기보다, 그들 또한 진실을 보지 못할 위험에 있다는 경고로 작용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알아보고 찾아오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두려움과 무지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계속 길을 갑니다.

조금 더 깊이

6:45에서 두루새김의 「재촉하여」(ἀναγκάζω)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억지로 하게 한다는 강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것이 군중의 정치적 열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6:48의 둘째 읽기는 출애굽기 33:19–22(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모세 앞에 지나가게 하심)과 열왕기상 19:11(엘리야 앞을 지나가심)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둘째로 읽으면, 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이 인간 곁을 지나가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만일 이 장면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을 암시한다면, 그 드러남은 제자들에게 즉시 이해되지 않습니다. 욥기 9:8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높은 곳을 밟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9:11은 하나님께서 곁을 지나가시더라도 인간이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지나가려」라는 동사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암시한다고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표현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때에도 사용됩니다. 「나다」는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바로 그분임을 밝히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 출애굽기 3:14과도 언어적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출애굽기 3:14의 전체 그리스어 표현과 마가복음의 두 낱말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일한 선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굳은 마음」에 관해서는,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으로 대응하는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8:14–21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시 지적하십니다.

게네사렛의 병자들 — 알아보고 달려오는 사람들

마가복음 6:53–56 본문 →

바다를 건넌 예수님 일행은 게네사렛 땅에 도착합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마가복음 6:54 · 두루새김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게네사렛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을 곧 알아보고 병자들을 찾아 들것에 눕혀 데려옵니다.

마을이든 도시든 농촌이든,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장터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이 예수의 겉옷 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습니다.마가복음 6:56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마가복음 5:25–34에서 오랫동안 피가 흐르는 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장면의 중심은 옷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가고 예수님을 통해 병이 낫는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충분히 이해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장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모습

마가복음 6:1–56 본문 →

이 장의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면, 예수님의 능력 자체보다 그 능력이 어떤 권위이며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가 중심에 놓입니다. 헤롯의 권위는 사람을 보호하는 대신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지키는 데 사용됩니다. 두 통치자의 차이는 힘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 힘이 향하는 방향에 있습니다.

마을과 도시와 농촌에서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옵니다. 누군가는 걷지 못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곳에 데려다 놓습니다.

그곳에는 헤롯의 잔치처럼 이름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식탁이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허락을 얻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한 장의 시작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

장 마지막에 이르면 독자는 그 권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자리에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