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기적과 논쟁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마가복음 5장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덤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남자, 열두 해 동안 피가 멈추지 않는 여자, 그리고 죽어 가는 열두 살 소녀입니다.

세 사람의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아무도 제압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고, 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써 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으며, 마지막 한 사람은 스스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세 이야기에는 뜻밖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삶의 정상적인 자리를 잃어버릴 위기에 있거나 이미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무덤들 사이의 남자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지만 그곳에서 살지 못합니다. 피를 흘리는 여자는 오랫동안 병에 시달렸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에도 종교적 정결의 문제가 뒤따릅니다. 소녀는 아버지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생명 자체를 잃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단지 고통과 죽음을 물리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사람을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돌려보냅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85장 본문 읽기 →

아무도 묶을 수 없었던 사람

마가복음 5:1–10 본문 →

무덤이 집이 된 사람

이야기는 바다 건너편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가십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바람과 물결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4:35–41). 이제 바다를 건너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혼란과 마주하십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습니다.마가복음 5:2 · 두루새김

마가는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의 거처는 무덤입니다.

유대 성경에서 무덤과 시체는 죽음과 관련된 정결 규정의 대상이었습니다. 민수기 19:11–16은 시체나 무덤과의 접촉으로 생기는 부정에 관해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이 사람이 무덤에서 산다는 사실은 그가 정상적인 주거 생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여러 번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부수었습니다. 마가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같은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 사람은 무덤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마가복음 5:3 · 두루새김
사람들이 여러 번 그의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그가 그때마다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부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마가복음 5:4 · 두루새김

이 반복은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힘은 그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을 수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제압하지 못하지만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을 멈추지도 못합니다.

이 장면은 앞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3:27에서 예수님께서는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살림살이를 털려면 먼저 그 힘센 자를 묶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무도 이 사람을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δέω)라고 할 때에도 원문에서는 3:27의 ‘묶다’와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또한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에는 3:27에서 힘센 자를 가리킨 말과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이러한 말의 연결은 두 사건을 함께 읽을 근거가 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힘을 꺾는 일을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독자는 그 힘 아래 고통받는 한 사람을 직접 봅니다.

사람들은 그를 묶어서 위험을 억제하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억누르는 영들을 내쫓아 그 사람 자신을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저항하는 영

무덤들 사이에서 나온 남자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도움을 구하는 평범한 부탁이 아닙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왜 나에게 간섭하십니까?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해 주십시오.」마가복음 5:7 · 두루새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앞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던 장면(3:11)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높여 부르는 말과 실제로 따르려는 태도는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말하면서도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그 사람을 억누르고 있던 더러운 영입니다.

그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 더러운 영에게는 고통이나 위협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마가는 곧바로 그 이유를 밝힙니다.

이렇게 외친 것은 예수께서 그 영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여 다루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은 그 사람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과 그를 억누르는 영의 관계를 끊는 명령입니다.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을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그 영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영이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9 · 두루새김

대답은 이상합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단수와 복수가 함께 나옵니다.

이 이름은 그 사람을 억누르는 영들이 하나가 아니라 많다는 사실을 군대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한 사람 안에 수많은 존재가 자리 잡은 듯한 모습입니다.

아무도 그 남자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붙들고 있던 많은 영은 예수님께 거듭 간청합니다. 오히려 그 지역 밖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 힘이 예수님 앞에서는 허락을 구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왜 나에게 간섭하십니까?」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셈어적 배경을 가진 관용구로, 상대가 자신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거부하거나 거리를 두려는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군대」로 옮긴 그리스어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로마 군대의 대규모 부대인 군단을 가리키며, 제국 시대의 군단은 일반적으로 수천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의 지명에는 오래된 문제가 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이라는 읽기는 중요한 그리스어 사본들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거라사라는 도시는 갈릴리 바다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돼지 떼가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 곧바로 바다에 빠지는 본문과 지리적으로 어색합니다. 그래서 사본들에는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이나 게르게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읽히는 형태도 나타납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바다와 더 가까운 데가볼리의 도시였고, 게르게사는 동쪽 호숫가의 한 장소와 연결되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정확한 위치를 어느 한 곳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곳이 돼지 떼가 등장하는 지역이며, 나중에 그 사람이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의 일을 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만의 생활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배경이 섞인 지역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또 「군대」라는 이름 때문에 이 이야기를 로마의 군사적 지배에 대한 상징적 비판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특히 로마 제10군단과 돼지의 상징을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특정 로마 부대를 가리킨다는 것은 본문에서 확정되지 않습니다. 군사적·정치적 의미가 떠오를 수 있더라도 사건 전체를 로마군에 대한 암호화된 이야기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돼지 떼와 두려워하는 사람들

마가복음 5:11–17 본문 →

왜 돼지들이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더러운 영들은 근처에 있던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영들이 남자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 떼가 가파른 비탈을 내달려 바다로 뛰어듭니다. 약 이천 마리의 돼지가 물에 빠져 죽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을까요? 돼지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돼지가 유대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레위기 11:7–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돼지 이천 마리의 죽음이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었다거나, 예수님께서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혀도 상관없다고 판단하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돼지들의 죽음은 실제 손실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분명한 점은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갔고, 그들이 지닌 파괴적인 힘이 돼지 떼의 죽음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영들이 사람에게서 나오자, 그 사람이 겪던 폭력과 혼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달아나 사건을 알리자, 지역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 와서, 전에 군대라는 귀신들이 들렸던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마가복음 5:15 · 두루새김

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묶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를 묶을 필요가 없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마가는 그의 몸에서 영들이 나갔다는 사실만을 치유의 결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평온하고 온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의 이유는 한 가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돼지 떼의 막대한 손실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을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정은 분명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께 자기들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마가복음 5:17 · 두루새김

그 남자를 억누르던 영들도 예수님께 간청했고, 그 지역 사람들도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각각의 이유는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가져오는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단 한 사람만은 정반대의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고 싶었던 사람

마가복음 5:18–20 본문 →

가장 뜻밖의 거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가복음 5:18 · 두루새김

이 부탁은 앞서 열둘을 세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3:14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면서 자신과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원문에서는 여기서도 같은 핵심 표현,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이 사용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떠나고 싶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너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님이 네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또 너를 불쌍히 여겨 주셨는지 전하여라.」마가복음 5:19 · 두루새김

열둘은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록 보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언제나 예수님과 같은 장소로 이동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가 새롭게 맡은 일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자신이 얼마나 큰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으셨는지 알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의 의미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과 연결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

19절과 20절을 이어 읽으면 작은 변화가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9절에서 「주님이 네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전한 내용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 사람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데가볼리에서 널리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마가복음 5:20 · 두루새김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신 일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전하는 마가는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전했다고 적습니다.

이 두 문장이 서로 다른 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같은 일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뒤의 이해가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마가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절을 나란히 놓아 하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떻게 겹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시는 사람일 뿐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특별한 통로이시며, 그 구원의 일과 분리할 수 없는 분이십니까? 마가는 독자가 이 질문을 품은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3:12). 그런데 여기서는 회복된 사람에게 직접 가서 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말했지만 침묵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전하도록 보냄받습니다.

얼마 전까지 무덤들 사이에서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을 전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알리는 증언이 됩니다.

딸을 살려 달라는 아버지

마가복음 5:21–24 본문 →

회당 책임자의 간청

예수님께서 다시 바다를 건너오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회당 책임자들 가운데 야이로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마가복음 5:22 · 두루새김

앞의 이야기에서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이름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알려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야이로는 회당 책임자입니다. 회당의 운영과 예배에 관련된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지위와 신뢰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어 갑니다. 와서 아이에게 손을 얹어, 아이가 낫고 살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5:23 · 두루새김

회당 책임자라는 지위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위치도 지금은 딸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당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치유에서 손을 얹는 행동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탁에는 두 가지 말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낫고」 그리고 「살게」입니다. 이 두 표현은 지금 딸이 처한 위급함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병에서 회복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지 않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에 응하십니다. 독자는 이제 예수님께서 얼마나 빨리 그 집에 도착하실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로 그 순간 다른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린 여자

마가복음 5:25–34 본문 →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사람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시는 동안 많은 무리가 사방에서 예수님을 밀어 댑니다. 그 무리 속에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피가 흐르는 병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습니다.마가복음 5:25 · 두루새김

마가는 그 여자의 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의 무게는 단순히 병의 기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치료를 받느라 많은 고통을 겪었고, 가진 것을 모두 썼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병은 더 심해졌습니다.마가복음 5:26 · 두루새김

이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병을 내버려 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건강뿐 아니라 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돈과 재산마저 점점 사라졌습니다.

정결 규정은 이 여자의 삶에 무엇을 의미했을까?

여자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레위기 15:25–30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여자가 보통의 월경 기간이 아닌 때에도 오랫동안 피를 흘리면 그 기간에 부정한 상태로 여겨졌습니다. 그가 눕거나 앉은 자리와 거기에 닿은 사람에게도 정결 규정이 적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여자가 무리 속으로 들어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의 병에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종교적 정결과 접촉의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 공동체에서 완전히 쫓겨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배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그를 버렸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정이 적용된다는 사실과, 그 여자가 실제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배척당했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종교 의식에서 부정한 상태라는 것은 곧 죄를 지었다는 도덕적 판단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래 지속된 출혈이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어렵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다가갑니다. 그리고 옷에 손을 댑니다.

옷에 손만 대어도

그 여자가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는 나을 거야.」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거나 자신의 병을 알고 계시지 않아도,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곧 흐르던 피가 멎었습니다. 여자는 자신을 괴롭히던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마가복음 5:29 · 두루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무언가를 알아차리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곧 알아차리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보며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가복음 5:30 · 두루새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지 않았지만, 한 번의 접촉으로 일어난 일을 각각 알아차립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는지, 아니면 누가 자신에게 손을 댔는지를 실제로 확인하려 하셨는지는 본문이 완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밀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무리가 이렇게 밀어 대는 것을 보시면서도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마가복음 5:31 · 두루새김

제자들의 반응은 상식적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제자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몸을 맞대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한 여자는 자신이 낫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십니다.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떨면서 예수께 와서 그분 앞에 엎드리고, 모든 사실을 말했습니다.마가복음 5:33 · 두루새김

처음 여자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몰래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합니다. 그는 이미 병에서 나았지만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변화와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는 서로 구별되는 문제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평안히 가라. 너를 괴롭히던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지내라.」마가복음 5:3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여자를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마가는 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 그 여자를 부르는 이름 같은 말이 나옵니다.

이 호칭은 곧 시작될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이름 없는 여자 한 사람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치유의 사건이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말로 확인되고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 장면을 기쁘게 바라보면서도 한 가지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여전히 죽어 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자의 생각이 당시 사람들이 치유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지는 논의할 수 있지만, 마가는 그의 행동을 어리석은 미신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그의 믿음을 긍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손을 댔는지 물으신 장면에서, 마가가 직접 기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접촉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낫게 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소조(σῴζω)라는 동사의 완료형으로, ‘구원하다’, ‘살리다’, ‘낫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같은 동사가 야이로의 요청에도 나타납니다. 그는 딸이 「낫고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여자가 옷에 손을 대면 「나을 거야」라고 생각할 때에도 원문에서는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마가는 원문에서 이 하나의 동사로 두 사람의 바람을 연결합니다. 여기서 원문에 ‘구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여자가 이 순간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적 결론만을 강조하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좁힐 수 있습니다. 또 「평안히 가라」로 옮긴 그리스어 표현에(εἰρήνη)는 평화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 건강과 안전, 온전함과 관계의 회복을 포함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딸아」라는 호칭도 나이 차에서 나온 말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여자가 몇 살인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말하고 있을 때 — 죽음의 소식

마가복음 5:35–36 본문 →

왜 이야기를 중단했을까?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회당 책임자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말했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마가복음 5:35 · 두루새김

두 이야기가 시간적으로 겹쳐지는 순간입니다.

마가는 야이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여자의 이야기로 넘어갔고, 이제 다시 야이로에게 돌아옵니다. 흔히 ‘샌드위치 구조’라고 불리는 이 서술 방식은 두 사건이 서로를 비추게 합니다. 특히 열두 해 동안 앓은 여자와 열두 살 소녀, 그리고 두 사람에게 사용되는 「딸」이라는 표현은 독자가 두 이야기를 분리해서 읽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구조의 가장 큰 힘은 시간의 흐름에서 나타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딸에게 빨리 와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시다가 길에서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합니다.

본문은 여자를 고치시느라 늦어지셨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자를 위해 시간을 쓰시는 바람에 소녀가 죽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시간이 늦어지는 일과 죽음의 소식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사실은 긴장을 만듭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닙니까? 집에서 온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선생님이시지만, 죽음이 이미 일어난 상황에서는 더 이상 부탁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야이로는 처음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믿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께서는 그 말을 곁에서 듣고 회당 책임자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가복음 5:36 · 두루새김

이 말은 야이로에게 딸이 죽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듣고 있는 죽음의 소식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두려움이 마지막 판단이 되지 않도록 그를 부르십니다.

이제 야이로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믿음을 요청받습니다. 여자의 믿음은 자신의 몸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 이후에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 이야기 사이에 놓인 여자의 치유는 야이로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 됩니다.

여자는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야이로는 죽음의 소식을 들은 뒤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믿기만 하여라」(πιστεύω)의 그리스어 명령형은 현재형으로, 이 문맥에서는 이미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야이로가 그 믿음을 계속 붙들도록 권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달리다 쿰」 — 죽은 소녀의 손을 잡다

마가복음 5:37–43 본문 →

집 안에 가득한 울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집에는 이미 소란이 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울며 크게 통곡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그 집이 딸의 죽음을 실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안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소란을 피우며 우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가복음 5:39 · 두루새김

이 말씀에는 중요한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아이가 실제로 죽지 않았다는 읽기와, 죽음을 잠에 빗대어 아이를 다시 일으키실 것을 암시하신다는 읽기입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든, 이어지는 행동은 독자에게 그 의미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을 따라온 세 제자를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마가는 이 일을 공개적인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 쿰.」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마가복음 5:41 · 두루새김

마가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용하신 아람어 표현을 남기고, 독자를 위해 뜻을 풀어 줍니다. 이 표현의 특별함은 낯선 언어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병든 사람을 고치는 데에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도 생명을 일으키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열두 해와 열두 살

열두 살인 그 소녀는 곧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곧 크게 놀라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마가복음 5:42 · 두루새김

앞에서 여자는 열두 해 동안 피가 흐르는 병을 앓았습니다. 지금 살아난 소녀는 열두 살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열둘이라는 수가 반복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열둘이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에서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 사람의 시간이 서로를 비추는 효과입니다.

한 사람에게 열두 해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열두 해는 이제 막 펼쳐지기 시작한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오래된 고통을 끝내시고, 소녀의 끊어진 삶을 다시 이어 주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회복시키는 장면에는 또 하나의 대조가 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소녀에게는 예수님께서 먼저 손을 대십니다.

소녀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다가와 손을 잡으셨습니다. 이 점은 믿음을 하나의 정해진 행동 방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는 사실은 정결 규정의 배경에서도 서로 연결됩니다. 레위기 15장은 계속 피가 흐르는 병과 관련된 부정을 규정합니다. 민수기 19장은 죽은 사람과의 접촉으로 생기는 부정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부정하게 되셨는지를 논쟁의 중심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접촉하신 결과를 보여 줍니다. 여자는 병에서 나았습니다. 소녀는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접촉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의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이것을 정결 규정이 모두 폐지되었다는 선언으로 바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제도에 관한 논쟁을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

소녀가 일어나자 사람들은 크게 놀랍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 5:43 · 두루새김

이것은 앞의 거라사 사건과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거라사에서는 회복된 사람에게 가서 주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셨다는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소녀를 일으키신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다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시는 방식과 시기를 조절하고 계신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만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게 하려 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침묵 명령을 내리신 정확한 이유는 마가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난 사람에게 필요한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움 속에서 한 가지 현실적인 필요를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소녀는 여전히 먹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부모의 돌봄이 필요하고, 평범한 삶을 이어 가기 위한 음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자고 있다」는 말씀에 대해, 한 가지 읽기는 아이가 실제로 죽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그 상태를 잘못 판단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사람들이 아이의 상태를 어떤 방식으로 확인했는지, 예수님께서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 의학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읽기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잠에 빗대어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다시 일으키실 것을 암시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사람들이 딸이 죽었다고 전한 사실을 기록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말합니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두 번째 읽기가 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 부분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17:17–24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열왕기하 4:18–37에서 엘리사는 죽은 소년을 위해 기도하고 몸을 맞대며 생명이 돌아오게 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예언자들은 그분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은 그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죽은 아이, 부모의 절박함,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회복이라는 요소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동시에 마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누군가에게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직접 명령하십니다. 또 시편 30:3은 하나님이 자신을 스올에서 끌어올리셨다고 고백합니다. 본래 문맥에서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위기에서 구원받은 경험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사야 25:8은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으실 것이라는 소망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5장은 이 구절들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죽음과 고통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5:1–43 본문 →

마가복음 5장은 거대한 능력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은 작은 식사의 준비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이 행하신 기적의 증거로만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갈 삶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얼마 전까지 그 집에는 울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소녀는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부모와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나도 충분히 놀라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한 문장을 더 남깁니다.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소녀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