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기적과 논쟁
사람을 더럽히는 것과 새롭게 하는 것
마가복음 7장은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제자들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중심 질문은 단순히 무엇을 먹어도 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빵 —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전통인가
문제는 위생이 아니라 거룩함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옛 어른들의 전통을 따라 걷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마가복음 7:5 · 본디새김
이 질문을 오늘날의 위생 관념으로 이해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당시 논쟁의 대상은 단순히 손에 묻은 흙이나 세균이 아니었습니다. 손을 의례적으로 씻어 부정함을 제거하는 정결 관습이었습니다. 여기서 ‘부정한 손’은 신체적으로 더러운 손과 반드시 같은 뜻이 아닙니다. 의례적 정결 상태를 갖추지 못한 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물로 손과 발을 씻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30:17–21). 또한 레위기 11–15장은 음식, 출산, 피부병, 몸의 유출 등과 관련된 정결 규정을 다룹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본래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질서의 일부였습니다.
의례적 부정함이 언제나 개인의 도덕적 죄를 뜻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나 죽은 사람과의 접촉 등으로도 의례적 부정 상태가 될 수 있었고, 율법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정결 규정 자체를 무의미한 미신으로 취급하면 구약 본문의 의도를 왜곡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결의 원리를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상적인 식사에서도 손을 씻는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마가는 잔과 단지와 놋그릇, 침상까지 씻는 관습을 언급합니다. 성전의 거룩함과 관련된 정결의 관심이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질문은 왜 그렇게 심각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제자들의 행동이 단순한 예절 위반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이어받은 거룩한 생활의 질서를 소홀히 여기는 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손 씻는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를 놓고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 전통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물으십니다.
입술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29:13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사야가 위선자인 너희를 두고 잘 예언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마가복음 7:6 · 본디새김
이사야 29장은 예루살렘과 그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가 사라지고 형식적인 가르침과 관습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기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비판은 예배 형식이나 전통이라는 것 자체를 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오랜 세대 동안 가르침과 관습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율법을 읽고, 절기를 지키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 역시 전통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역할에서 벗어나,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자리에 올라선 상황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붙든다.」마가복음 7:8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두 동사의 대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버리고, 붙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충실하다고 생각하며 전통을 붙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자기모순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철저히 지키기 위해 마련한 규칙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 중요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판을 추상적인 수준에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십니다.
고르반 —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로 부모를 외면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먼저 모세의 계명을 인용하십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마가복음 7:10 · 본디새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입니다(출애굽기 20:12, 신명기 5:16).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에는 존중하는 태도뿐 아니라 부모를 실제로 돌보아야 할 책임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한 관습을 문제 삼으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도움받으실 것은 고르반입니다』 — 고르반은 예물이라는 뜻이다 — 하고 말하면」마가복음 7:11 · 본디새김
여기서 쟁점은 부모에게 돌아가야 할 재산이나 도움을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선언하여, 부모가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선언이 실제로 어떤 법적 효력을 가졌는지, 모든 경우에 재산이 즉시 성전으로 넘어갔는지 등은 세부적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본문은 모든 종류의 고르반 서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상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종교적인 표현이 부모를 돕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물려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을 많이 한다.」마가복음 7:13 · 본디새김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단순한 위선보다 깊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행위 자체는 경건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사랑과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가 된다면, 종교적 경건은 본래의 목적과 반대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규칙의 가치를 그 규칙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얼마나 엄격한가만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문제 삼으십니다.
제자들이 왜 손을 씻지 않았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한 논쟁은, 무엇이 사람을 참으로 부정하게 만드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가 7:3–4에서 유대 사람들의 관습을 독자에게 설명한다는 점은 그 독자들 가운데 이러한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모든 유대 사람」이라는 설명을 당시 유대인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같은 방식을 따랐다는 정확한 통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실제 실천 방식과 보급 범위는 집단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가는 논쟁을 이해시키기 위해 대표적인 관습을 일반화하여 소개합니다. 7:3의 「주먹으로 손을 씻지 않고는」이라는 표현은 더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어 퓌그메는 문자적으로 ‘주먹으로’라는 뜻이지만, 이 문맥에서 정확히 어떤 씻는 동작을 가리키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주먹으로 다른 손을 문지르는 동작인지, 일정한 분량의 물을 사용하는 방식인지, 다른 관습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특정한 세척 절차에 대한 정확한 역사 기록처럼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7:4의 ‘씻다’에 사용된 동사는 세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밥티조입니다. 이 낱말은 물에 담그거나 씻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으며, 여기에서는 장터에서 돌아온 후의 정결 행위에 사용됩니다. 따라서 신약의 ‘세례’라는 말이 처음부터 기독교만의 고유한 종교 용어였던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님께서는 질문의 방향을 뒤집으십니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그는 무리를 다시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가복음 7:14 · 본디새김
단순히 들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귀먹은 사람의 치유 장면을 미리 비추는 듯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 말의 의미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가운데 그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없다.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마가복음 7:15 · 본디새김
앞서 사람들의 관심은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있었습니다. 부정한 손이 음식에 닿고, 그 음식을 사람이 먹으면, 부정함이 몸 안으로 들어와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십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의 전환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단순히 바깥의 것들과 얼마나 접촉했는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정결 규정은 모두 무의미하며 외적인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십니다.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은 모두 실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외적인 행동을 무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음식은 뱃속으로 들어가지만, 악은 마음에서 나온다
제자들은 집에 들어간 뒤 예수님께 말씀의 뜻을 묻습니다. 그들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 이렇게 예수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한 것이다.마가복음 7:19 · 본디새김
예수님의 설명은 뜻밖에 구체적입니다. 도덕적 악은 사람이 무엇을 먹었는가가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이 발생하는 장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원하며 결단하는 인간 존재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문제를 바로 그 자리에서 찾으십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인용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조차 그 마음의 방향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한 것이다」 — 율법은 어떻게 되는가
마가는 예수님의 설명 뒤에 서술자의 말을 덧붙입니다. 전통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해석은 이것을 마가의 서술자 설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7:19의 그리스어 문법을 다르게 분석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마지막 분사구를 마가의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언에 속한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할 것은 예수님의 발언 자체와, 그 발언이 음식 규정 전체에 갖는 함의를 설명하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의 전통적인 읽기는 여기서 음식의 정결 여부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발견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문제의 가장 깊은 뿌리는 먹는 음식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죄는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을 열거하십니다.
「안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속임수, 방탕, 시기하는 눈, 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기 때문이다.」마가복음 7:21–22 · 본디새김
개인의 내적 욕망과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들이 함께 나열됩니다. 탐욕은 마음의 욕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속임수와 모독은 말로 나타나지만 그 출발점은 마음에 있습니다. 교만과 악의는 내면의 태도지만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목록의 ‘시기하는 눈’은 문자적으로 ‘악한 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으로 좋지 않은 것을 본다는 뜻보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거나 시기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마음속의 욕망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추상적인 부정함이 아닙니다.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고, 해치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악입니다. 앞서 종교 지도자들은 손의 부정함을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해치는 행동이 시작되는 마음의 부정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 다음에 뜻밖의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유대인 남성이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 찾아온 한 여자입니다.
조금 더 깊이
7:19의 그리스어의 마지막 표현은 카타리존 판타 타 브로마타, 곧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면서’라는 분사구입니다. 서술자 설명으로 읽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음식의 정결 여부에 관한 기준이 새롭게 정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유대교의 음식 규정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신학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셈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부정한 손으로 먹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동물을 음식으로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레위기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반면 지금 마가복음에서 처음 제기된 문제는 허용된 음식이라도 씻지 않은 손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대목에서 레위기의 모든 음식 규정을 직접 폐지한다고 선언하셨는지, 아니면 음식과 의례적 부정함의 관계를 재해석하셨는지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분사구를 예수님의 발언으로 읽는 쪽에서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개념과 소화에 관한 이해를 배경으로, 사람이 음식을 소화하는 과정이 음식의 의례적 부정함을 정화한다는 논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기존의 널리 알려진 해석에 도전하는 견해이며, 학계의 논의가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 채택한 서술자 해석은 그리스어 분사의 형태와 전통적인 문장 연결에 근거한 충분히 가능한 읽기입니다. 그러나 분사의 문법적 형태만으로 다른 해석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는 음식 문제가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됩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 환상과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때 음식과 정결 규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그러나 그 후대의 논의를 모두 마가복음 7장에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7:21–22의 목록은 배열을 지나치게 세분하여 각각의 죄가 발생하는 고정된 순서를 찾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시기하는 눈’의 그리스어는 옵탈모스 포네로스이며, 마태복음 20:15에서도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후함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에게 같은 계열의 ‘악한 눈’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음이 인간의 참된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는 일은 어디까지 나아가야 합니까? 예레미야 31:31–34는 하나님이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실 새 언약을 예고합니다. 에스겔 36:25–27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깨끗한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전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예언적 문맥에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변화가 단순한 외적 준수에 그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마가복음 7장은 이 약속들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문제를 마음 깊은 곳에서 찾으신다는 점에서, 예언서가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와 만나고 있습니다.
상 아래의 부스러기 — 이방 여인이 발견한 길
경계 바깥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역으로 가십니다.
두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생활권과는 다른 문화적·민족적 환경에 속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 자신이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기를 바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남의 눈을 피하실 수 없었습니다.
「어린 딸이 더러운 영을 지니고 있던 여자」가 곧 소식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수로보니게 태생이었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그에게 청했다.마가복음 7:26 · 본디새김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리스 본토에서 태어난 민족적 그리스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그리스어와 헬레니즘 문화권에 속한 이방인이라는 성격을 드러내며, ‘수로보니게’는 시리아 지역에 속한 페니키아 출신임을 특정합니다. 마가는 이 여자가 이스라엘의 내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정결 규정을 둘러싼 논쟁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거룩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공동체의 민족적·문화적 경계 바깥에 계십니다.
앞에서는 부정한 손이 문제였고, 여기서는 더러운 영이 문제입니다. 물론 손의 의례적 부정함과 귀신의 존재는 서로 동일한 종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순서는 독자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의 근원을 새롭게 말씀하셨다면, 이방 지역에서 찾아온 사람에게는 어떻게 응답하실 것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자녀와 강아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먼저 자녀들이 배부르게 되도록 두어라.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강아지들에게 던지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마가복음 7:2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단순히 모욕하셨다고 확정해서도 안 되고, 처음부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다정한 표현이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에서 자녀와 강아지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여자의 청원은 그 구별이 갖는 의미를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은 낱말이 있습니다.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배부르게 되도록 먼저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반드시 이방인의 차례가 나중에 온다는 명시적인 약속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표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자는 바로 그 틈에서 자신의 말을 이어 갑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대답을 찾습니다
그 여자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주님, 강아지들도 상 아래에서 아이들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마가복음 7:28 · 본디새김
그녀는 자신이 자녀라는 사실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라는 전제를 정면으로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집 안의 식탁이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식탁에 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여자의 말은, 자녀들이 먹는다고 해서 다른 존재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녀의 식사가 먼저라는 순서를 강조합니다. 여자는 그 순서를 인정하면서도, 자녀가 먹는 시간과 강아지가 부스러기를 먹는 시간이 반드시 분리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 여자가 구하는 것은 자녀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아니라, 그 식탁의 풍성함이 자기 딸에게까지 미칠 가능성입니다.
마가복음은 바로 앞 장에서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빵이 남았다고 기록했습니다(6:42–43). 여기서는 한 여자가 부스러기라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두 장면을 직접적인 비유 관계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마가가 반복하는 빵의 이미지를 따라 읽으면 독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모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보았습니다.
「네가 이 말을 했으니」
그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네가 이 말을 했으니 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가복음 7:29 · 본디새김
마가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여자가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그녀의 믿음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녀가 말을 잘했기 때문에 단순한 논리 게임에서 이겼다는 설명도 덧붙이지 않으십니다. 다만 바로 그 말 때문에 요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하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우선순위를 밝히시되 처음부터 이방인을 배제하지 않으셨다는 읽기와, 여자의 응답이 실제로 도전하여 예수님께서 사역의 범위를 넓히셨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확실한 것은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했고, 예수님께서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딸을 고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한 이방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야기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녀의 말은 누군가를 속이거나 해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딸이 살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가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있는 집으로 가지 않으십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지도 않으십니다. 그 아이에게 직접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여인에게 귀신이 나갔다고 알려 주십니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었고, 귀신은 이미 떠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이방 지역의 한 가정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밀려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민족에게 전달되는 것이 반드시 이스라엘의 몫을 빼앗는 일은 아니라는 가능성입니다.
조금 더 깊이
7:27의 비유에서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강아지들은 이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진다는 구속사적 순서가 그 배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대응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비유의 세부 사항을 지나치게 확정적으로 읽지는 말아야 합니다. ‘강아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퀴나리온은 작은 개를 가리키는 형태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거리에서 떠도는 개가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작은 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낮추는 뉘앙스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단어에는 작은 개라는 의미가 실제로 살아 있으며, 이를 곧바로 모욕적인 호칭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비유의 핵심을 민족적 열등함보다 식사의 순서에서 찾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배제적이거나 불편한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7:29를 두고 갈리는 두 해석 모두 본문에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먼저’라는 말과 식탁의 비유에, 둘째는 여자의 대답 이후 예수님께서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서사의 전환에 무게를 둡니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여자를 시험하려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내면에서 계획이나 생각이 바뀌었다고 직접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이 가능성은 구약의 이스라엘 선택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2:1–3에서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 사람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이지만, 궁극적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다는 전망을 포함합니다. 또 이사야 49: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종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넘어 민족들의 빛이 되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이 본문들이 마가복음 7장에서 직접 인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에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이스라엘을 통해 민족들에게 복이 미친다는 성경의 오래된 전망과 어울립니다.
「에파타」 — 귀가 열리고 혀의 묶임이 풀리다
멀리 돌아간 길에서 만난 사람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역을 지나 갈릴리 바다로 가십니다.
마가는 왜 예수님께서 이처럼 먼 길을 돌아가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유대 지역 바깥의 환경을 지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데가볼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강한 도시들이 모인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그에게 데려와 그 사람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했다.마가복음 7:32 · 본디새김
이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데려옵니다. 본문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했는지, 나중에 청력을 잃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말이 어눌한(μογιλάλο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드문 낱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구약의 이사야 35:6에도 같은 낱말이 등장합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구원의 날
이사야 35장은 황폐한 땅이 회복되고, 약한 사람들이 힘을 얻으며, 구원받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 가운데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그때 눈먼 사람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 저는 사람은 사슴처럼 뛰고, 말이 어눌한 사람의 혀가 기뻐 외칠 것입니다. (이사야 35:5–6의 내용)
이사야 35장에서 귀가 열리고 혀가 기뻐 외치는 일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약속의 일부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시대가 가까웠다는 소식만 전하지 않으십니다. 그 구원에서 기대되던 회복을 실제 한 사람의 몸에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한 놀라운 능력의 시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 사람을 무리에게서 따로 데려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무리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으신 뒤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귀와 혀는 바로 그가 고침받아야 할 신체 부위입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상태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필요한 회복이 무엇인지를 몸의 접촉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군중 앞에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처럼 취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그에게 말했다. 「에파타.」 뜻은 「열려라」이다.마가복음 7:34 · 본디새김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하고, 말씀하신 이 세 동작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탄식입니다. 마가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고치실 수 있는 권위를 지니신 분입니다. 동시에 그 사람 앞에서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귀가 열렸고 혀를 묶고 있던 것이 풀려 그는 말을 제대로 했다.마가복음 7:35 · 본디새김
마가는 단순히 병이 나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닫힌 것이 열리고, 묶인 것이 풀리는 모습으로 회복을 그립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조차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열어 주십니다.
이것을 단순히 청각 장애와 영적 무지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비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고침받는 사람의 신체적 고통과 회복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듣고 깨닫는 일,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살피는 일, 예수님의 능력으로 귀와 혀가 회복되는 일이 서로의 의미를 비추어 줍니다.
왜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가 그렇게 이를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선포했다.마가복음 7:36 · 본디새김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듣고도 따르지 않습니다.
이 반응을 순수한 믿음의 표현으로만 찬양하기는 어렵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선포가 예수님의 명령과 어긋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악의적으로 행동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놀라움은 너무 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해 놓았다. 귀먹은 사람들을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들을 말하게 한다.」마가복음 7:37 · 본디새김
‘훌륭하게(καλῶ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이 장의 앞부분에도 등장합니다. 7:6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종교 지도자들을 두고 ‘잘’ 예언했다고 말씀하십니다. 7:9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고 반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7:37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같은 낱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드러낸 예언자가 있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데 능숙한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훌륭하게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반복이 반드시 정교하게 설계된 문학적 장치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 전체의 흐름에서 읽으면 의미 있는 대조가 생깁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정결 규정을 얼마나 제대로 지켰는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사람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단순히 율법과 사랑의 대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모 공경이라는 율법의 계명을 근거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지도에서 보면 이 경로는 가장 짧은 길이 아닙니다. 시돈은 두로보다 북쪽에 있고, 데가볼리는 갈릴리 바다의 동쪽과 남동쪽을 포함하는 여러 도시의 지역입니다. 이 길을 택한 정확한 목적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와 관련된 지역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고,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했습니다(5:20). 그러나 이번에 등장하는 사람을 앞서 치유받은 사람의 활동과 직접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7:32의 ‘말이 어눌한’은 그리스어 모길랄로스입니다. 말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인지, 발음이 어눌했는지도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고대에는 침이 치료와 관련된 관습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예수님의 행동을 당대의 통상적인 의료 행위로 환원하거나, 침 자체에 특별한 신비적 능력이 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러한 치료 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귀를 만지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혀를 만지는 행동이 의사소통의 한 방식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셨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탄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테나조는 신음하거나 깊이 탄식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 사람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겪는 아픔과 장애의 현실 앞에서 깊은 연민을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앞으로 행하실 일과 관련된 간절한 기도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감정을 단정적으로 부여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시는 순간 깊은 탄식을 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에파타」는 아람어에서 온 표현입니다. 마가는 이 말을 음역한 뒤 직접 뜻을 풀이합니다. 그리스어 번역 디아노이크테티는 ‘열리다’라는 동사의 수동 명령형이며, 문법만으로 대상을 완전히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는 결과가 나오므로, 이 명령은 그 사람의 닫힌 청각과 묶인 말의 기능을 향한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7:6, 7:9, 7:37에 되풀이되는 낱말은 칼로스입니다. 창세기 1:31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판단하십니다. 정확한 어휘와 문장 구조가 일치하는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는 표현은 창조의 선함을 연상시키는 주제적 연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좋게 만드셨다면, 이제 마가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깨어지고 묶인 것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추상적인 새 창조 교리의 증명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7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 — 경계를 허무는 것보다 더 깊은 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회복되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은 인간이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머뭅니다.
데가볼리의 어느 곳에서 사람들이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리에게서 따로 데려가셨습니다.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
열리십시오.
귀가 열리고,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말을 제대로 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은 그렇게, 한 사람에게 닫혀 있던 세계가 열리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