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10장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보지 못하는 사람들
마가복음 8장에는 이상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처음 손길을 받은 뒤에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의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제야 그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보게 됩니다.
이 기묘한 치유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질문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면, 이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다시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 — 그런데 제자들은 왜 여전히 빵을 걱정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아갈 길까지 생각하십니다
큰 무리가 다시 예수님 곁에 모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흘째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있었고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니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다. 그들이 나와 함께 머문 지 벌써 사흘째이고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마가복음 8:2 · 본디새김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들을 굶은 채로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 가운데 더러는 멀리서 왔다.」마가복음 8:3 · 본디새김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무리의 형편을 먼저 말씀하신다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장 배고프다는 사실만 보지 않으십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이 외딴곳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마가복음 8:4 · 본디새김
이미 한 번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일을 경험한 제자들입니다. 그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자들은 어디서 빵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제자들의 기억력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뒤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남은 광주리의 숫자를 정확히 대답합니다(8:19).
그들이 잊은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닙니다. 사건은 기억하지만, 그 사건이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보여 주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다는 사실이 아직 그들의 판단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빵 일곱 개, 사천 명, 남은 큰 광주리 일곱 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이 몇 개 있는지 물으십니다. 일곱 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빵을 들고 감사하신 뒤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 빵을 놓습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도 같은 방식으로 나누어 줍니다.
그들이 먹고 배불렀다. 그리고 떼고 남은 빵 조각을 거두니 큰 광주리 일곱 개 분량이었다.마가복음 8:8 · 본디새김
사람들은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마가가 앞선 오천 명의 식사와 이번 일을 구별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두 이야기에는 서로 다른 숫자들이 등장합니다.
| | 첫 번째 식사 (6:30–44) | 두 번째 식사 (8:1–10) | |---|---|---| | 빵 | 5개 | 7개 | | 먹은 사람 | 남자 5,000명 | 약 4,000명 | | 남은 광주리 | 12개 | 큰 광주리 7개 | | 광주리의 원어 | 코피노스 | 스퓌리스 |
마가는 두 사건에서 광주리를 가리키는 그리스어까지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특히 8:19–20에서 예수님께서 두 식사를 되돌아보실 때도 그 구별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 차이는 독자가 두 식사를 하나로 혼동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질문은 왜 마가가 두 식사를 나란히 기록했느냐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첫 번째 식사가 주로 이스라엘을 위한 잔치이고, 두 번째 식사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된 하나님의 공급을 보여 준다고 이해합니다. 이 읽기에는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두로와 데가볼리 지역을 다니셨고(7:24–31), 이방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열두 광주리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일곱 광주리는 이방 세계를 포함하는 더 넓은 충만함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마가는 두 번째 식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이방인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에 특정한 상징을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두 식사가 이스라엘에서 민족들로 확장되는 사역을 보여 준다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 확실한 것은 마가가 두 번의 식사를 통해 예수님의 풍성한 공급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음식은 남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두 사건을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빵 때문에 걱정합니다.
마가는 바로 그 모순을 다음 이야기에서 드러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 — 무엇을 보아야 믿겠는가
기적을 본 뒤에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역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 그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를 떠보며 그에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마가복음 8:11 · 본디새김
‘표징’은 어떤 사실을 가리키거나 입증하는 징표를 뜻합니다. 종교적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승인을 드러내는 사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단순히 신기한 기적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확인해 달라는 요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더러운 영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떤 표징을 더 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늘에서 직접 나타나는 압도적인 사건을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일어난 기적들과 다른 차원의 증명을 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기대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을 자신들 쪽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하시는지 살펴보기보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입증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을 향해 열린 질문이라기보다 예수님의 권위를 심사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깊은 탄식 뒤에 나온 거절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자기 영 안에서 깊이 탄식하고 말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구하느냐?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에게 표징이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마가복음 8:12 · 본디새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을 떠보는 사람들의 요구 앞에서 깊이 탄식하십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탄식이 슬픔 때문인지, 답답함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구를 받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단순한 논쟁적 분노가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온 탄식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앞으로 어떠한 기적이나 하나님의 권능도 보이지 않으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들을 먹이셨고, 뒤에서는 눈먼 사람을 고치십니다.
문제는 표징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를 거절하고 다시 배에 올라 떠나십니다. 이 짧은 장면은 바로 다음 이야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지만, 정작 제자들은 이미 경험한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달마누다는 마가복음 8:10에만 등장하는 지명이며,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5:39은 병행 장면의 지명을 마가단으로 기록합니다. 서로 다른 지명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8:12의 그리스어 문장은 문자적으로 ‘만일 이 세대에게 표징이 주어진다면’에 해당하는 조건절에서 끝납니다. 뒷말이 명시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문법 해석은 이것을 셈어식 맹세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맹세에 따르는 저주나 결과를 생략함으로써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이러한 해석에 따른 번역입니다. 다만 이것이 반드시 히브리어의 맹세 관용구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이를 강한 부정의 맹세가 아니라, 말을 끝맺지 않고 멈추는 수사법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원문이 완결되지 않은 조건문 형태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생략이 갖는 기능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배 안의 빵 한 개 —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시는가
하나의 배 안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배에 오른 제자들은 빵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빵을 챙기는 것을 잊었다. 배 안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빵 한 개뿐이었다.마가복음 8:14 · 본디새김
독자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방금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로 약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눈앞에서 경험한 제자들은 빵 한 개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삼가라,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가복음 8:15 · 본디새김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자신들에게 빵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영향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식량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합니다.
이 장면의 문제는 제자들이 빵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당면한 걱정 안에서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이 빵의 부족함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에게 공통으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누룩은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 전체를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량이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성질 때문에 성경에서는 어떤 영향력이 점차 퍼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그 영향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3:33에서는 누룩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8:15에서는 분명 경계해야 할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마가는 그 뜻을 직접 풀이하지 않습니다.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16:12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누룩을 그들의 가르침으로 설명하고, 누가복음 12:1은 바리새파의 누룩을 위선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헤롯’까지 함께 등장합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자체의 이야기 안에서 두 집단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면서도 결국 죽게 만들었습니다(6:20–29).
두 집단이 가진 권력과 관심은 서로 다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적 권위와 전통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고, 헤롯은 정치적 권력과 자신의 지위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들의 판단과 이해관계를 흔들 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누룩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완고한 태도와 영향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 확신이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하나님의 일을 분별하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마가가 누룩의 의미를 하나의 명사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므로, ‘잘못된 가르침’이나 ‘위선’ 어느 하나로만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신 것은 그들 역시 같은 위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장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헤롯처럼 박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도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기적을 행하시는 대신 기억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빵 때문에 서로 따지는 것을 아시고 연달아 질문하십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가진 빵이 없다고 따지느냐?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굳어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느냐?」마가복음 8:17 · 본디새김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느냐?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18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예레미야 5:21과 에스겔 12:2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은 눈과 귀가 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책망합니다. 마가는 이 구절들을 명시적인 인용문으로 소개하지 않지만, 표현의 유사성은 뚜렷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굳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여러 차례 경험했고, 많은 사람을 먹이신 사건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적을 보여 주시는 대신, 이미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남은 광주리가 몇 개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열둘이었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셨을 때 남은 큰 광주리는 몇 개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일곱이었습니다.
기억하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자들이 배운 사실 속에서 다시 발견하도록 질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셨는지를 단일한 답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해석은 예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른 해석은 두 번의 식사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미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은 질문을 남기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21 · 본디새김
마가는 제자들의 대답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질문은 열린 채로 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만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의 상징적 의미를 풀이하지는 않으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의 손길 — 보이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보게 되는가
처음 손길 뒤에 남은 흐릿한 시야
벳새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앞 장에서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무리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던 장면과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한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이번 치유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는 눈먼 사람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은 뒤 물었다. 「무엇이라도 보이느냐?」마가복음 8:23 · 본디새김
그리고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고 말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나무처럼 보입니다.」마가복음 8:24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의 치유가 왜 두 단계로 진행되는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가 다시 그의 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고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또렷하게 바라보았다.마가복음 8:25 · 본디새김
마가는 단순히 눈을 떴다고 기록하지 않고, 똑똑히 보게 되었고, 시력이 회복되었으며, 모든 것을 또렷하게 바라보았다고 겹쳐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무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 두 상태의 차이가 바로 다음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베드로의 눈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치유 장면 뒤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베드로가 바로 이 눈먼 사람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알아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고난받고 죽임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에는 반대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이 첫 손길 뒤에 사람을 보면서도 나무처럼 보았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면서도 예수님께서 가실 길은 분명하게 보지 못합니다.
이 두 단계의 치유를 제자들의 부분적인 이해와 점진적인 깨달음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해석이 많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제자들의 무지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만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먼저 실제로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시력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 사람의 치유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 위에서 마가는 이야기의 배열을 통해 제자들의 이해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첫 번째 손길 뒤에 아직 완전히 보지 못하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상태로 떠나보내지 않으십니다. 다시 손을 얹으십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의 상태를 비추면서도 한 가지 가능성을 남깁니다. 지금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아보는 제자들에게도 더 깊은 이해가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렇지만 이 치유 이야기를 읽은 뒤 곧바로 베드로가 완전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는 오히려 그 반대를 보여 줍니다. 눈먼 사람은 두 번째 손길을 통해 분명하게 보게 되었지만, 베드로의 이해는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번째 손길이 완전한 치유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읽기도 가능하지만, 마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권위를 고려하면 그것을 예수님의 능력 부족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려고 의도적으로 두 단계의 치유를 계획하셨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사건은 실제 한 사람의 시력이 회복되는 이야기이며, 그 과정이 주변 문맥과 특별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신중한 읽기입니다. 두 단계의 차이를 단순한 시력의 정도 차이만이 아니라 시각적 기능과 인지적 인식의 차이로 설명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 빛과 형상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은 두 번째 단계에서 회복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가능한 설명이지, 본문이 명시한 생리학적 진단은 아닙니다.
「당신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 옳은 고백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소문을 물으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마을들로 가십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마을들로 갔다. 길에서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가복음 8:27 · 본디새김
질문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마가복음 8:28 · 본디새김
이 대답은 이미 6:14–15에서 나왔던 소문을 되풀이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특별한 예언자적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했던 사람이었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강력한 예언자로 기억되는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말라기 4:5–6에는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엘리야나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평범한 교사 이상으로 평가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들은 예수님을 이미 알려진 예언자의 범주 안에 놓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신 뒤 예수님께서는 질문의 대상을 바꾸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마가복음 8:29 · 본디새김
여기서 ‘너희는’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소문을 전하는 자리 뒤에 숨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에 담긴 기대
‘그리스도’는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아’에 대응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과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통해 특별한 직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예언자도 기름부음과 관련된 표현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열왕기상 19:16). 특히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왕권의 약속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을 세우고 그 왕국을 견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편 2편 역시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기름부음받은 왕의 권위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모두 똑같은 메시아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왕을 기대했고, 어떤 전통에서는 제사장적 인물이나 예언자적 인물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다양한 종말론적 기대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메시아의 사명과 활동을 정확히 어떻게 상상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베드로의 반응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길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난과 죽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옳은 고백을 막으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는 자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을 꾸짖었다.마가복음 8:30 · 본디새김
이 명령을 이해하려면 다음 절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리스도가 어떤 길을 가셔야 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승리의 이야기부터 꺼내지 않으십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 두 장면을 연결하면, 베드로의 고백을 그대로 널리 퍼뜨리는 일이 왜 문제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 칭호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명을 잘못 이해한다면, 옳은 이름으로 잘못된 기대를 퍼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칭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새롭게 가르치십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질문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길을 가시는 분인가 하는 질문으로 옮겨갑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침받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제자들 자신도 예수님께 권위를 받아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 한가운데에 고난과 죽음이 놓여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아직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여 물으신 ‘너희는’에 베드로가 ‘당신은’으로 응답합니다. 질문과 대답이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 이름에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와 이 지역을 다스린 헤롯 가문의 빌립이라는 이름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권력과 지역 통치자의 권위가 지명에 새겨져 있는 셈입니다. 다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황제 숭배의 장소 앞에 서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마을들로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배경을 지나치게 극적인 대결 장면으로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 메시아의 길을 새롭게 배우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을 거리낌 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었다.마가복음 8:31 · 본디새김
마가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낱말이 있습니다.
‘해야 한다’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이 필요하거나 마땅히 이루어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길을 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필요성은 단순히 정치적 상황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예측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마가복음의 문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하나님의 뜻과 연결하여 이해하십니다.
이것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행한 일을 정당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배척받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당하실 일을 실패나 우연한 비극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일까지 포함하여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죽음이 그 길의 마지막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내용이 고난과 죽음의 예고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죽음의 의미를 바꾸지만, 죽음 자체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겪지 않으셔도 될 일처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겪으실 일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 칭호는 마가복음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2:10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28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배척당하시며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이 전환은 놀랍습니다. 죄를 용서하고 안식일의 주인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바로 그 권위를 지닌 채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지만 고난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길 자체에 고난이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데리고 가서 꾸짖습니다
그는 거리낌 없이 그 말을 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따로 데리고 가서 꾸짖기 시작했다.마가복음 8:32 · 본디새김
마가는 베드로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고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승을 따로 데리고 가서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대신, 예수님의 생각을 수정하려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장면을 더 심각하게 만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어떤 길을 가셔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생길 수 있는 매우 깊은 오해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기대를 따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 번 반복되는 ‘꾸짖다’
8:30–33에는 독특한 낱말의 반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베드로는 고난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이 세 장면에서 꾸짖다(ἐπιτιμάω)·엄하게 명하다라는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반복은 대화의 긴장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가 잘못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의 길을 막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반대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마가는 중요한 동작 하나를 기록합니다.
예수는 돌아서서 자기 제자들을 보고 베드로를 꾸짖으며 말했다.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네가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사람의 일에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마가복음 8:33 · 본디새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데리고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십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오해는 모든 제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 제자가 있어야 할 자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베드로라는 인물의 본질이 사탄이라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그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책망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습니다.
마가복음 1:13에서 사탄은 광야의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길에서 예수님을 돌려세우려 합니다.
베드로의 의도가 예수님을 해치는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임당하시는 일을 막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에 마음을 두는 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에 둔다’는 말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한다는 뜻보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느 방향에 뜻을 두는가에 관한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베드로에게 떠나라고 하시는 명령입니까? 그리스어 오피소 무는 ‘내 뒤에’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17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다시 ‘내 뒤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내 앞에서 물러나라’는 강한 거절로도 읽을 수 있고, 제자가 있어야 할 자리인 예수님의 뒤로 돌아가라는 명령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기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제자의 올바른 자리라는 의미가 특별히 선명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정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뒤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길을 자기 생각대로 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배우며 따라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베드로에게만 주지 않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의 중요한 구약 배경은 다니엘 7장입니다. 다니엘 7:13–14에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하늘 구름과 함께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환상이 나옵니다. 그 환상의 앞부분에서는 짐승들로 묘사된 제국의 권력들이 등장하고, 뒤에서는 거룩한 이들이 고난을 겪는 모습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나라가 이어집니다(다니엘 7:17–27).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거룩한 이들과 연결되는지는 해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에게 하나님이 권세를 주신다는 환상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칭호의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7장은 그 인물이 반드시 죽임당하고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칭호를 사용하시면서 다니엘서의 영광과 권위에 관한 이미지에 고난과 죽음을 결합하십니다. 여기서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 본문은 멸시받고 고난받는 종이 다른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결국 높임받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마가복음 8:31은 이사야 53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절에서 두 구약 본문을 하나의 공식처럼 결합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권위와 영광, 이사야서의 고난과 회복이라는 주제들이 예수님의 사명 안에서 함께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의 무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예고하신 뒤 제자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8:3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앞의 사건과 분리해서 읽으면 쉽게 오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삶에 어려움이 생길 때 참고 견디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 역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만 특별한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신 뒤 누구든지 자신을 따라오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을 구경하거나 도움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자신의 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단순히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마가복음에서 여기 처음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상징이지만, 예수님 시대의 청중에게 십자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사용하는 처형 도구였습니다. 특히 노예와 비시민권자 등을 처형할 때 사용되었으며, 공개적인 수치와 권력의 과시를 동반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단순히 불편한 일을 참고 견딘다는 뜻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고 두려워하던 죽음의 형벌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시험에 실패한 일이나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 일상적인 불편함을 자신의 십자가라고 부르는 수준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자신의 안전과 지위, 명예,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제자가 실제로 처형당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따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대가까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핵심은 누구를 따르기 위해 어떤 대가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다’는 말은 흔히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거나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하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삶의 주도권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개인적인 욕구를 줄이라는 말보다 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기대가 예수님의 길을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을 자신이 바로잡으려는 태도를 내려놓는 일을 뜻합니다. 모든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기대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행동하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기대를 새롭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추상적인 생각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려면 자신의 지위와 명예, 안전을 지키기 위한 선택보다 예수님과 복음에 충실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지키려는 사람이 오히려 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8:35 · 본디새김
그리스어 프쉬케(ψυχή)는 생명, 목숨,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낱말입니다. 이 낱말을 한국어 ‘영혼’이라는 뜻으로만 한정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역설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처음의 ‘목숨을 구하려 한다’는 표현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단순히 신체적 죽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삶 자체를 궁극적으로 잃는다는 더 깊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지만 문맥에 따라 의미의 폭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역설은 앞에서 베드로가 보인 반응과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임당하시는 일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피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목숨을 잃으면 언제나 구원받는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중요한 조건을 명시하십니다.
모든 희생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모한 행동이나 불필요한 고통, 자기 파괴적인 선택이 그 자체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과 복음에 대한 충성 때문에 삶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고통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고통의 위험 때문에 예수님과 복음을 버리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타인에게 부당한 고통을 강요하거나, 학대받는 사람에게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요구하는 일을 이 말씀으로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자기 부인은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에 관한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자신의 안전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방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온 세상을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마가복음 8:36 · 본디새김
「사람이 무엇을 내놓아 자기 목숨과 맞바꾸겠느냐?」마가복음 8:37 · 본디새김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상상하게 합니다. 재산이나 명예, 권력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얻은 모든 것이 자기 목숨을 잃는 대가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두 번째 질문은 더 날카롭습니다. 자기 목숨을 잃은 뒤 무엇을 내놓아 그것을 다시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은 인간의 삶을 경제적인 계산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얻습니다.
잃습니다.
맞바꿉니다.
그러나 그 계산은 마지막에 가서 무너집니다.
세상에는 돈이나 지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런 선택의 기준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삶의 가치를 작게 여기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생명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길을 잘못 선택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하는 길은 예수님을 떠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과 복음에 충실한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수치와 장차 나타날 영광
「간음하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8:38 · 본디새김
앞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표징을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왜 표징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8:12). 이제 그 세대는 ‘간음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묘사됩니다. 여기서 간음은 특정한 성적 죄만을 가리키기보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은 세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언약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대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배척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상,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이 존중하는 방식의 영광을 언제나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자신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베드로가 원했던 방식으로 고난을 없애 버리는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고난받고 죽임당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는 고난받으셔야 하는 사람의 아들과 영광 가운데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같은 분으로 제시됩니다. 고난과 영광은 서로 무관한 두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이해하려면 그 두 모습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당시의 명예와 수치에 관한 사회적 감각이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수치를 당하는 것은 개인의 감정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서를 뒤집는 전망을 제시하십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장차 사람의 아들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예수님의 인정을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고난을 피하기 위한 보상이 아니라, 누구의 판단이 마지막까지 유효한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로마의 처형 관행에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처형 도구의 일부를 운반하는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형태의 목재를 운반했는지, 모든 처형에서 같은 절차가 적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특정한 십자가 구조나 운반 절차로 지나치게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8:36–37의 질문은 시편 49:7–9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시편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이 자기 형제의 생명을 속량할 수 없으며, 생명의 속량값은 너무나 크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본래 관심은 재물과 사회적 지위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질문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문제로 옮겨옵니다. 성경의 예언서에서 간음은 종종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호세아 2장과 예레미야 3장이 대표적입니다. 8:38에서는 다시 다니엘 7장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다니엘 7:13–14).
예수님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마을들로 이어지는 길 위에 서 계신 예수님과 제자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 자신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예수님을 이끌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바라보며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고백한 그리스도를 따라갈 일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예수님의 앞이 아니라 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