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10장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영광을 본 사람들과 가장 큰 자리
마가복음 9장은 눈부신 빛으로 시작해서 아주 작은 물 한 잔과 소금 이야기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옷이 세상 어떤 빨래꾼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빛나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은 귀신 하나를 내쫓지 못해 곤란을 겪고, 길에서는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투며, 자신들과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의 활동을 막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산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명령,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기대하던 영광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마가복음 9장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따라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는 드러났는데,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와 있는 것을 보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이들이 있다.」마가복음 9: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마가복음 8장의 마지막에서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시며 다시 일어나셔야 한다고 처음으로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8:29–31). 베드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8:34).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 모순됩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여기서 「와 있는」(ἔρχομαι)은 ‘오다’라는 동사의 완료 분사로, 도래한 결과가 성립해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단순히 언젠가 나라가 올 것이라는 약속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가운데 도래한 것을 목격한다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해석은 갈립니다. 바로 이어지는 모습의 변화 사건(9:2–8)을 가리킨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엿새 뒤 세 제자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며, 사건의 연결이 매우 긴밀합니다. 다른 읽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주목합니다. 더 멀리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와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모습의 변화는 가까운 문맥에서 가장 직접적인 연결점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약속의 의미를 모두 소진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8:38에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 앞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마가가 이 약속 다음에 무엇을 보여 주느냐입니다. 독자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온다는 말의 의미를, 눈앞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생각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산 위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영광
엿새 뒤, 높은 산에서
「엿새 뒤에」라는 표현은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구약성경을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익숙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4:15–16에서 모세는 시나이산에 올라갑니다. 구름이 산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산 위에 머물며, 엿새가 지난 뒤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엿새가 지난 뒤 높은 산에 올라가고, 구름이 나타나며,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두 장면의 유사성은 우연한 시간 표시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로 그와 비슷한 무대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새롭게 드러납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시나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난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34:29–35에서는 하나님과 이야기한 뒤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마가는 그 모습을 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놀랍도록 일상적인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의 옷이 빛나며 몹시 희어졌다. 땅 위의 어떤 빨래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마가복음 9:3 · 본디새김
세상의 어떤 기술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입혀 주는 명예나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영광입니다. 마가는 그 빛이 어떤 물리적 현상이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가 예수님을 단순한 교사나 기적을 행하시는 사람으로만 볼 수 없도록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왜 나타났을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이 두 사람을 흔히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로 이해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받은 인물이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등장은 이스라엘 성경의 역사가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율법과 예언자의 상징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하나님을 산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만난 인물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출애굽기 33–34장; 열왕기상 19:8–18).
따라서 두 인물의 등장에는 율법과 예언자의 연결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구약의 산상 계시들이 겹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을 등장 이유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이 광경을 보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에게 말했다. 「랍비,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는 당신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마가복음 9:5 · 본디새김
초막이라는 표현에서 이스라엘의 초막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베드로의 의도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마가복음 9:6 · 본디새김
따라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붙잡아 두거나 초막절의 완성을 앞당기려 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 베드로의 제안은 곧 다른 말씀 앞에서 중단됩니다.
세 초막보다 중요한 한 사람의 말씀
구름이 그들을 덮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구름이 나타나 그들을 덮었다. 구름에서 음성이 났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마가복음 9:7 · 본디새김
이 음성은 마가복음 1:11의 세례 장면과 짝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는 하늘의 음성이 예수님께 직접 「너는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그 음성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결정적인 명령이 추가됩니다. 이 표현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하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한 신명기 18:15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마가는 명시적인 인용 형식을 사용하지 않지만, 언어적·주제적 유사성이 뚜렷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이 가장 듣기 어려워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31). 베드로는 그 말씀을 꾸짖기까지 했습니다(8:32). 그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하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찬탄하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예수님의 말씀까지 듣는 것입니다.
갑자기 둘러보니 그들과 함께 있는 예수 말고는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가복음 9:8 · 본디새김
이것이 모세와 엘리야의 중요성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속한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 소망을 이해하려면 이제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초점이 분명해집니다.
산 위의 영광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대상을 찾아 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과 이미 함께 걷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새롭게 보게 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초막절은 광야 시절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를 기념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레위기 23:39–43). 베드로가 그러한 종교적 기억을 떠올렸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광의 산에서 내려오며 다시 고난을 말씀하시다
이토록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면 당장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그는 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마가복음 9: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드러내실 영광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영광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명령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일을 조절하시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앞서 귀신과 치유받은 사람들, 제자들에게 자신에 관해 말하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1:34, 1:44; 8:30). 그러나 여기서는 침묵의 끝을 명시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자기들끼리 붙들어 두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따집니다.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개념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대교 안에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다니엘 12:2에는 마지막 때 죽은 사람들이 깨어난다는 소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 앞에 계신 사람이 고난받으셔서 죽임당하신 뒤 다시 일어나시는 사건입니다. 그 구체적인 의미와 순서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엘리야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마가복음 9:11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구약의 약속이 깔려 있습니다. 말라기 3:23–24(일부 성경의 4:5–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회복을 준비하게 할 인물입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면, 이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이 예상한 순서를 뒤흔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어찌하여 적혀 있느냐?」마가복음 9:12 · 본디새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가 이미 왔고, 사람들이 그에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그에 대해 적힌 그대로다.」마가복음 9:13 · 본디새김
마가는 여기서 엘리야가 누구인지 직접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으로 등장했고(1:6; 열왕기하 1:8), 헤롯의 손에 죽임당한 사건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6:17–29). 이 맥락에서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마태복음 17:13은 제자들이 이를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했다고 명시합니다.
다만 「그에 대해 적힌 그대로다」라는 표현을 요한의 죽음을 정확하게 예고한 어느 한 구약 구절의 직접 인용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엘리야가 박해받았던 열왕기상 19장의 이야기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지만, 마가는 해당 구절을 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도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고난받았다면, 하나님의 아들 역시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는 말씀이 더는 뜻밖의 예외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영광에 이르기 전에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영광이 나타나는 순서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으로 돌리십니다.
산 위에서 드러난 영광은 산 아래에서 시작될 고난을 무효로 하지 않습니다.
산 아래에서 만난 믿음 없는 세대
제자들의 논쟁 뒤에 가려진 한 아이의 고통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큰 무리가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고, 서기관들은 제자들과 따지고 있습니다. 조금 전 산 위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서기관들과 제자들이 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무리는 몹시 놀라 달려옵니다. 무엇 때문에 놀랐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무엇을 두고 서로 따지느냐?」마가복음 9:16 · 본디새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서기관도 제자도 아닙니다. 무리 가운데 있던 한 아버지입니다. 그는 말 못 하게 하는 영에 사로잡힌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제자들이 그 영을 내쫓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제야 논쟁의 한가운데 무엇이 있었는지 드러납니다. 마가의 이야기에서 독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논쟁에서 누가 이기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 논쟁 속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아,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겠느냐? 그를 나에게 데려오너라.」마가복음 9:19 · 본디새김
이 탄식이 정확히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 없는 세대」라는 표현은 한 개인의 부족함을 넘어 그 자리의 전반적인 상황을 드러냅니다. 서로 따지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능력에 의지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논쟁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보다 먼저 「그를 나에게 데려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아버지의 말
아버지는 예수님께 아이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이 계속되었고, 그 영은 아이를 불과 물에 던져 넣어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서 고통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반복된 위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영을 내쫓으실 수도 있는 분으로 묘사되지만, 먼저 아이가 얼마나 오래 고통받았는지 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단순한 기적의 장면이 아니라, 한 가족이 오래 견뎌 온 고통의 시간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마침내 이렇게 청합니다.
「그 영이 자주 아이를 불 속에도 물속에도 던져 넣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가복음 9:22 · 본디새김
아버지는 ‘이 아이를 도와주십시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아이의 고통과 아버지의 고통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아이의 몸이 무너질 때마다 아버지의 삶도 함께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에는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조심스러운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말은 예수님을 비난하기보다 더는 확실하게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의 간절함으로 읽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표현을 그대로 되받으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하실 수 있거든』이라니.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가복음 9:23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믿음만 충분하면 사람이 원하는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능력이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믿습니다. 나의 믿지 못함을 도와주십시오」
아버지의 다음 대답은 마가복음 전체에서도 특별히 인상적인 고백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곧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믿습니다. 나의 믿지 못함을 도와주십시오.」마가복음 9:2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얼핏 모순처럼 들립니다. 믿는다면 왜 믿지 못함을 도와 달라고 합니까?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할 만큼 믿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안에 남아 있는 불신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요청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간청에서,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청으로 깊어집니다.
믿음은 자신의 내면에서 의심을 완전히 제거한 사람이 갖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까지 예수님께 가져오는 행위도 믿음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고백에 어떻게 응답하시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믿음이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번 확신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아이를 괴롭히는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는 무리가 함께 몰려드는 것을 보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그 영에게 말했다. 「말 못 하게 하고 귀먹게 하는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아이에게서 나와 다시는 아이에게 들어가지 마라.」마가복음 9:25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치유를 이루시는 분은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불완전한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완전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믿지 못함 사이에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주검처럼 된 아이가 일어서다
영이 나갈 때 아이는 심하게 경련한 뒤 주검처럼 됩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키자 아이가 일어섰다.마가복음 9:27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셨고(9:9–10), 조금 뒤에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는 점에서 이 장면이 독자에게 부활의 언어를 연상시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마가복음 5:41–42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도 어린아이가 일어섰습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더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아이의 손을 붙잡으십니다. 산 위에서는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빛 가운데 서 계셨던 예수님께서, 산 아래에서는 땅에 쓰러진 아이의 손을 붙잡으십니다.
제자들은 왜 실패했을까?
집에 들어간 뒤 제자들은 예수님께 따로 묻습니다.
그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우리는 그것을 내쫓지 못했습니까?」마가복음 9:28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권한을 기억하면 더욱 중요해집니다. 마가복음 6:7–13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더러운 영을 제어할 권한을 주셨고, 제자들은 실제로 많은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영은 기도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나갈 수 없다.」마가복음 9:29 · 본디새김
여기서 기도는 귀신을 내쫓는 특별한 기술이나 주문이 아닙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방금 어떤 정해진 기도문을 사용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영에게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어떤 영을 만나면 특정한 기도문을 외워야 한다는 뜻보다는, 제자들의 능력이 그들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는 가운데 행사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앞서 제자들은 실제로 귀신을 내쫓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왜 자기들에게 능력이 없었는지에 관한 것이고, 아버지의 간청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예수님께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이 차이를 명시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태도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독자가 능력을 행사하려는 제자들과 도움을 구하는 아버지 사이의 거리를 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무리가 놀란 까닭을 두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아직 빛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마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19절의 탄식에 대해서는 서기관들, 제자들, 아버지와 무리를 포함한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특별히 지목하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23절의 원문에서도 「할 수 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연결됩니다. 아버지의 에이 티 뒤네이,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다면을 예수님께서 토 에이 뒤네이,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로 되받아 말씀하시는 구조입니다. 이 구절은 사본에 따른 차이도 있습니다. 22절의 「도와주십시오」와 24절의 「도와주십시오」는 같은 동사 보에테오, 돕다의 형태들입니다. 26절에서 본문은 아이가 실제로 죽었다고 확정하지 않습니다. 「주검처럼」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과 실제 죽음은 구별해야 합니다. 27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예수님께서 아이를 일으키셨다는 뜻의 에게이렌과 아이가 일어섰다는 뜻의 아네스테를 잇습니다. 두 동사의 기본형은 각각 에게이로, 일으키다와 아니스테미, 일어서다·일어나다이며, 다른 문맥에서는 부활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됩니다. 이것만으로 아이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다투다
길 위에서 엇갈린 두 이야기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가시면서 자신들의 위치가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이번에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다. 그는 죽임을 당하고 사흘 뒤에 일어날 것이다.」마가복음 9:31 · 본디새김
이미 8:31에서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쓰러진 아이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장면을 하나의 의도적인 언어적 대조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나란히 읽으면 인상적입니다. 아이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신 분은 이제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고 그에게 묻기를 두려워했다.마가복음 9:32 · 본디새김
앞에서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한 이유를 따로 물었습니다(9:28). 실패한 능력의 문제는 질문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은 묻기조차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마가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제자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는 보여 줍니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사람들 위에 설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과는 다른 방향으로 위대함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는 것을 금지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집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길에서 무엇을 따졌느냐?」마가복음 9:33 · 본디새김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침묵했고, 이제는 자신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침묵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침묵과 자신의 행동을 드러내기 어려운 침묵이 이어지면서, 제자들의 내면이 점점 드러납니다.
그는 앉아서 열둘을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꼴찌가 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이가 될 것이다.」마가복음 9:3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첫째가 되려는 모든 열망을 단순히 금지하는 형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 싶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꼴찌」,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이」라는 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공동체 내부의 서열을 뒤집어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십니다.
누가 내 위에 있고 누가 내 아래에 있는지를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 내가 필요한지를 살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끝없이 착취당하라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과 대조되는 섬김의 방식입니다.
마가복음 10:43–45에서는 이 가르침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예수님 자신이 가실 길과 떨어진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전혀 다른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계신지 보여 주시면서, 그 길에 동참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한가운데 세우신 이유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가르침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운 뒤, 그 아이를 껴안고 그들에게 말했다.마가복음 9:36 · 본디새김
당시의 아이들이 사랑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는 일반적으로 성인과 같은 사회적 권한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사회적 위대함과 높은 자리를 이야기하던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런 지위가 없는 아이를 가운데 세우십니다.
이 장면에서 아이는 단순히 순수함이나 겸손의 상징이 아닙니다. 적어도 9:37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아이가 어떤 훌륭한 성품을 지녔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가복음 9:37 · 본디새김
이것은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작은 사람을 자신의 이름과 연결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 높은 지위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의 관계가 제자들의 지위를 높여 주는 통로라기보다, 작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책임을 부여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이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예수님을 가리키셨습니다. 이제 집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아이를 껴안으시며, 이런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0:45에 이르면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연결은 9장의 가르침을 단순한 겸손의 교훈으로 축소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은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삶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의 중심에 있습니다. 35절의 「섬기는 이」는 그리스어 디아코노스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거나 시중드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후대 교회의 직무 명칭과도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우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제자들은 하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껴안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자 요한이 말합니다.
요한이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그를 막으려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9:38 · 본디새김
조금 전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막으려 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경험한 직후, 자신들이 속한 무리 밖에서 일하는 사람을 통제하려 합니다.
요한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권한까지 얻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말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권능 있는 일을 행하고서 곧바로 나를 헐뜯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마가복음 9:3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아무나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만 하면 모두 정당하다는 무제한적인 허용을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은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 행위와 자신에 대한 태도를 근거로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판단 기준은 그 사람이 열두 제자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아닙니다.
여기서 민수기 11:26–29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이 회막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진영 안에서 예언하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그들을 말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히려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백성에게 자신의 영을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가가 직접 인용한 구절은 아니지만, 두 장면은 중요한 주제를 공유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 집단의 경계 안에 가두려는 태도가 문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과 권위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을 소유한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권능 있는 일에서 물 한 잔으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을 마시게 하면—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가 자기 삯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9:41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귀신을 내쫓는 권능 있는 일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물 한 잔을 건네는 아주 작은 일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을 생각할 때 놀라운 기적이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삯」이라는 말은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게 평가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물 한 잔을 건네는 행위가 구원을 구매하는 공로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속한 관계와 그 관계 때문에 베풀어진 작은 환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제자들은 물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도움받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에는 권능을 행하는 사람뿐 아니라 물을 건네는 사람도 있고, 그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은 왜 그렇게 심각한가
작은 사람을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
이제 예수님의 어조가 갑자기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면, 차라리 목에 연자맷돌이 매달린 채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그에게 낫다.」마가복음 9:42 · 본디새김
여기서 「작은 이들」은 앞서 예수님께서 껴안으신 아이와 연결됩니다. 다만 예수님은 「나를 믿는」이라는 표현을 덧붙이셨으므로, 실제 어린아이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거나 연약한 신자들까지 포괄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에 매다는 맷돌은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짐승의 힘으로 돌리는 큰 맷돌을 가리킵니다. 도저히 헤엄쳐 나올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왜 이렇게 강한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작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작은 사람은 강한 사람의 목적을 위해 희생시켜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과 삶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향력이나 지위를 이용해 그를 넘어지게 하는 일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걸려 넘어지게 하다」는 원래 걸림돌이나 덫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이 문맥에서는 사람이 죄에 빠지거나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 4:17에서도 쓰입니다. 말씀을 기쁘게 받았다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사람을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경고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연약한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 삶을 무너뜨리는 일의 심각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막으려던 제자들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손과 발과 눈을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게헨나로, 꺼지지 않는 불로 가는 것보다 한 손을 잃은 채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낫다.」마가복음 9:43 · 본디새김
발과 눈에 대해서도 같은 형식이 반복됩니다. 온전한 몸을 가지고 게헨나에 들어가는 것보다, 신체 일부를 잃더라도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라는 지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죄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비교하십니다. 신체를 훼손한다고 죄의 근원이 제거되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마가복음 7:20–23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42절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43절부터는 「네 손」, 「네 발」,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활동을 통제하려는 그들에게, 정작 자신들의 삶에서 제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피라고 하시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먼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할 대상은 자기 집단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지게 하고 다른 사람까지 넘어뜨릴 수 있는 자기 안의 악입니다.
예수님은 그 악을 사소하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손과 발과 눈은 모두 사람에게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잃는다는 비유는 가벼운 포기나 일시적인 불편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나라에 반하는 것을 얼마나 결연하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표현합니다.
게헨나와 꺼지지 않는 불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열왕기하 23:10에서는 요시야가 사람들이 자녀를 몰렉에게 불로 바치지 못하도록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을 더럽혔다고 기록합니다. 예레미야 7:31–33에서도 그곳은 자녀를 불태워 제물로 바치던 장소이며, 앞으로 심판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따라서 게헨나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폭력,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억이 겹쳐 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하십니다. 48절에서는 이사야 66:24의 표현을 가져오십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마가복음 9:48 · 본디새김
이사야 66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여호와야훼를 거역한 자들의 주검입니다. 구더기와 불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두려운지를 드러냅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말을 예수님의 경고 안에 놓습니다. 구약의 예언적 심판 이미지가 이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본문은 주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문장만으로 죽음 이후의 의식 상태나 심판의 구체적인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의 여러 심판 본문과 함께 해석하는 신학적 논의가 가능하지만, 마가복음 9:48 자체가 그 모든 질문에 답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역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그 나라에서 배제되는 일의 차이를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엄중한 경고가 등장하는 위치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사람이 되라고 격려하신 뒤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신 다음에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걸려 넘어지게 하다」는 그리스어 스칸달리조입니다. 43절 다음에 45절, 47절이 나오는 것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44절과 46절이 없고, 일부 후대 사본에 48절의 문장이 그 두 자리에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는 구절이 실수로 빠진 것이 아니라 사본 전승에 따른 차이입니다.
불과 소금, 그리고 평화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 치듯 절여질 것이다」
마가복음 9장은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 치듯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9:49 · 본디새김
앞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등장했고, 이제는 소금 치듯 절여지는 불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불을 심판의 불로 보는 읽기, 제자들이 겪는 시험과 고난으로 보는 읽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연결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해석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앞의 불이라는 표현, 레위기의 제사 규정, 소금의 보존 기능이 각각 근거를 제공하지만 본문은 이 이미지들을 명시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특정한 영적 체험이나 고난의 과정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삶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단순히 높은 지위나 놀라운 능력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죄를 엄중하게 다루고, 고난을 마주하며, 자기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야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명령은 왜 평화입니까?
예수님은 소금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소금은 좋다.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맛나게 하겠느냐? 너희 안에 소금을 가지고 있어라.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가복음 9:50 · 본디새김
여기서 소금의 의미를 하나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금에는 맛을 내고 보존하는 기능이 있으며, 고대의 제사와 식탁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무엇을 명령하시는지는 분명합니다.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는 마가복음 9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놓고 따졌고, 서기관들과도 논쟁했으며, 길에서는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 모든 장면에서 제자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더 큰지, 누가 자신들의 편에 속하는지를 판단하려 했습니다.
이 평화의 명령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만들라는 단순한 지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죄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평화를 위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모두 포기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관계가 경쟁과 배제, 서열 다툼으로 조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문맥에서 드러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와 있는 것」을 보게 될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은 귀신을 내쫓는 놀라운 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가치는 한 아이를 받아들이는 일,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 일, 물 한 잔을 건네는 일,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관계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49절의 세 읽기는 각각 다음 근거를 가집니다. 첫째는 심판의 불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게헨나와 꺼지지 않는 불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불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겪는 시험과 고난을 가리킨다는 읽기입니다. 소금이 보존하는 역할을 하듯, 불이 제자들을 시험하고 정련하는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셨다는 문맥에서 이 읽기가 의미를 얻습니다. 셋째는 제사와 연결하는 읽기입니다. 레위기 2:13에서는 모든 예물에 소금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따르면 불과 소금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과정이나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사본에는 제물에 소금을 친다는 표현이 추가되어 있어, 이러한 제사적 이해가 사본 전승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 주시는 전혀 다른 위대함
마가복음 9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결국 위대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다른 사람들 위에 높이 서시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받아들이며 섬기시는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하나는 아주 작고 조용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은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껴안으셨습니다.
그 아이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해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데려오셨기 때문에 한가운데 서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그를 껴안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아이를 다시 보아야 했습니다.
산 위에서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빛으로 빛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제 평범한 집 안에서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9장은 그 두 장면을 모두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