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8–10장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진 것을 내려놓고 따르는 길
마가복음 10장의 마지막에는 눈먼 거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지만 멈추지 않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날 처음 나온 말이 아닙니다. 조금 앞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별한 부탁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다시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동행한 제자들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저 길가에 앉아 있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면 오히려 눈먼 사람이 더 잘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은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 동시에,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 중심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길의 맨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십니다.
이혼의 허용 여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창조를 말씀하시다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을 명했느냐?」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역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십니다. 무리가 다시 모여들고,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묻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떠보며 남자가 아내와 이혼해도 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마가복음 10:2 · 본디새김
마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떠보며」 질문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단순히 결혼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순수한 물음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문제 삼으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혼을 둘러싼 논쟁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신명기 24:1에서 말하는 이혼 사유를 얼마나 넓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되돌려 주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을 명했느냐?」마가복음 10:3 · 본디새김
그들이 말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마가복음 10:4 · 본디새김
신명기 24:1–4는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때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남자가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보내고,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다시 그 결혼이 끝난 경우, 첫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고 규정합니다. 이혼이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을 전제하고, 그 과정과 그 이후의 관계를 법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규정에서 이혼이 허용된다는 근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규정이 존재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물으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마음이 굳어서 모세가 너희에게 이 계명을 써 준 것이다.」마가복음 10:5 · 본디새김
「마음이 굳어서」라는 표현은 단순히 감정이 차갑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굳은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신명기 10:16에서는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라고 명령하고, 예레미야 4:4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촉구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혼 증서가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규정은 인간의 굳은 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법은 이미 깨어진 현실 속에서 더 큰 피해를 막거나 분쟁을 다루기 위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법이 다루는 상황 자체가 이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결혼이 깨어지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모세보다 창조 이야기를 먼저 보게 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창세기의 두 본문을 연결하십니다.
「그런데 창조의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할 것이다.」 「그리고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더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가복음 10:6–8 · 본디새김
첫 문장은 창세기 1:27에, 이어지는 결합과 한 몸의 말씀은 창세기 2:24에 근거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나아가 배우자와 새로운 결합을 이루는 일이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본문을 연결하여 결혼을 한 사람의 소유권이나 처분할 수 있는 권리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두 사람이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한 몸」이라는 말은 두 사람의 개성이 사라져 하나의 인격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깊은 결합을 이루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가복음 10:9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은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결혼을 남자가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권리의 문제로만 생각하면, 아내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남자의 결정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혼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이 맺으신 결합을 두십니다. 결혼은 한쪽이 다른 쪽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책임져야 할 관계입니다.
「버린 아내에게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다」
집에 들어간 뒤 제자들이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버린 아내에게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다.」마가복음 10:11 · 본디새김
당시 유대 사회의 일반적인 혼인법적 관행에서는 남성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을 더 폭넓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행위를 바로 그 아내에게 저지르는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남편의 행동을 단순히 율법 절차를 지켰는지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아내에 대한 잘못으로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절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는 경우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마가가 아내의 이혼을 언급한 이유를 두고는 그리스·로마 세계의 법적 환경을 반영한다는 해석과 유대 사회 안의 사례로도 설명된다는 해석이 갈립니다.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께서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결혼 관계의 책임을 요구하신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다만 이 말씀을 오늘의 모든 결혼 문제에 대한 완결된 법률 조항으로 곧장 옮기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5:32와 19:9에는 성적 부정과 관련된 예외 표현이 등장하지만, 마가복음에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7:10–16에서 결혼과 별거,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본문들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도 견해가 갈립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학대와 폭력의 피해자가 위험한 관계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질문과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혼과 재혼의 윤리적 판단, 위험한 상황에서의 분리와 보호 문제는 구별해 다루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후대에 기록된 미슈나 기틴 9:10에는 이혼 사유를 비교적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샴마이 학파와 폭넓게 이해하는 힐렐 학파의 견해 차이가 전해집니다. 다만 그 문헌의 최종 편집 시기는 예수님 시대보다 뒤이므로, 그 논쟁의 세부 내용을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그대로 일치시켜서는 안 됩니다. 마가가 아내의 이혼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법적 환경을 반영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헤롯 가문의 결혼과 이혼 사건처럼 유대 사회 안에서도 여성이 이혼을 주도하는 사례가 알려져 있었으므로, 반드시 로마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적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노여워하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쁜 무리로부터 보호하려 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 예수님의 중요한 일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단순한 허용이 아닙니다.
예수가 보고 노여워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나에게 오게 두어라. 막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14 · 본디새김
그 나라에 누가 속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접근을 통제하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막으려던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십니다.
아이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가복음 10:15 · 본디새김
흔히 「아이처럼 받아들인다」를 어린아이의 순수함, 겸손함, 의심 없는 믿음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의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가 먼저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제자들에게 제지당했고, 그때 예수님께서 개입하시어 그들을 받아들이십니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은 두 방향으로 읽혀 왔습니다.
하나는 아이가 선물을 받듯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해석입니다. 아이는 자기 능력이나 사회적 성취로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자격과 업적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 태도가 강조됩니다.
다른 하나는 아이를 받아들이듯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에는 앞서 예수님께서 아이를 받아들이시는 일을 강조하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은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두 번째 해석은 마가복음 9:37과의 연결에서 힘을 얻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아이 하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10:15에서도 「받아들이다」라는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 두 읽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본문이 명시적으로 확정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껴안고 손을 얹으며 거듭 축복했다.마가복음 10:16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대를 넘어서 아이들을 껴안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다가올 수 있는지를 문제 삼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미 예수님의 품 안에 두고 계십니다.
이 장면 다음에는 한 부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달리 스스로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알고 있으며,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은 왜 슬퍼하며 떠났을까요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길로 나서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길로 나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선한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가복음 10:17 · 본디새김
그의 행동에는 진지함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묻는 것은 단순히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 자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소망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12:2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그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물려받는다는 것은 본래 상속자의 관계와 주어지는 몫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호칭을 문제 삼으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선한 이가 없다.」마가복음 10:18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선하지 않으시다고 부정하셨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르는 이유를 물으시고, 선함의 궁극적인 기준을 하나님께 두십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지금까지 무엇을 잘했는지 평가하시는 데 머무르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살피도록 이끄십니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속여 빼앗지 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마가복음 10:19 · 본디새김
그는 젊을 때부터 모두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명령은 「속여 빼앗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대부분의 명령은 십계명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지만, 이 표현은 십계명의 통상적인 목록에 그대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낱말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주지 않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3의 이웃을 억압하거나 약탈하지 말라는 명령, 신명기 24:14–15의 가난한 품꾼에게 정당한 품삯을 지급하라는 규정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의 재산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아졌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거하시는 계명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과 가정뿐 아니라 재산과 생계를 존중할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러한 계명들에 부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반응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를 바라보고 사랑했다」
예수는 그를 바라보고 사랑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너에게 한 가지가 모자란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보물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가복음 10:21 · 본디새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보고 노여워하셨습니다. 이제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시며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 예수님의 명령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 명령 앞에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놓아둡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인해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가 모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선한 일을 하나 더 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나누라는 선행 한 가지를 추가하신 셈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가 명령의 마지막입니다.
그 사람에게 부족했던 것은 또 하나의 종교적 업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들어오는 데 장애가 되는 무엇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명령의 구체적인 내용, 곧 재산을 나누는 행위를 지워 버리고 단순히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재산 처분 절차를 일률적으로 요구하는 규정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실제 상황에 맞추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던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다
그 사람의 반응은 짧고도 아픕니다.
그는 그 말에 낯빛이 흐려져 슬퍼하며 떠나갔다. 가진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2 · 본디새김
그는 화를 내며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슬픔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내면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업적을 제시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반면 이 사람은 계명을 지켜 온 삶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어 부르시는 순간에는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것은 가난 자체를 자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마가는 그가 떠난 뒤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본문이 남겨 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예수님의 사랑과 초대를 받고도 슬퍼하며 떠나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람을 흔히 ‘부자 청년’이라고 부르지만, 마가복음은 그의 나이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가 젊을 때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태복음 19:20–22의 병행 본문에 근거한 것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 사람이 할 수 없는 구원
재산이 많으면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
그 사람이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둘러보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재물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마가복음 10:23 · 본디새김
제자들은 그 말에 놀랐다. 예수가 다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가복음 10:24–25 · 본디새김
재산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고, 사회적 영향력과 안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의 복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신명기 28:1–14; 잠언 10:22). 물론 구약성경은 부가 언제나 하나님의 인정의 표시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부유한 자의 압제와 가난한 자에 대한 불의를 비판하는 말씀도 많습니다(아모스 2:6–7; 5:11–12).
그럼에도 재산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특별히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큰 동물이 바늘구멍이라는 지극히 작은 구멍을 지나가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면 가능한 일로 바꾸면 비유의 힘이 약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어려움의 정도가 아니라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몹시 놀랐다. 서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마가복음 10: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특별한 불리함이 있다고만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은 재산이 적은 사람은 더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훨씬 넓습니다.
예수가 그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7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드십니다. 부유한 사람이 충분히 재산을 나누면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재산이 적으면 자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결단과 순종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람에게 재산을 팔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종조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무능한 인간에 대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소망을 열어 놓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왔습니다.」마가복음 10:28 · 본디새김
이 말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 아버지와 일꾼들을 남겨 두고 따랐습니다(1:16–20).
예수님께서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거나 무의미하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집과 가족과 밭을 버린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때에 박해와 함께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밭을 백 배로 받고, 오는 시대에 영원한 생명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0:3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버린 것을 백 배로 받는다고 약속하시지만, 그 약속에 「박해와 함께」라는 말을 붙이십니다. 이 구절을 재산을 바치면 그만큼의 부동산이나 현금을 백 배로 돌려받는다는 재정적 보장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보상에는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처럼 인간관계도 포함되어 있으며, 박해라는 고통도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자연스러운 이해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전의 관계와 소유를 떠난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 집과 삶의 자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31–35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부르신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다만 마가복음 10:30이 이러한 공동체적 보상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을 위해 잃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는다는 더 넓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인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인 이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마가복음 10:3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먼저 따랐던 사람과 나중에 따르게 된 사람을 단순히 서로 바꾸어 놓는 기계적인 규칙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가가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순서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뿐 아니라, 예수님을 오래 따랐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요구할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곧 이어지는 제자들의 행동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때때로 예루살렘에 ‘바늘귀 문’이라는 작은 성문이 있었고, 낙타가 짐을 내려놓으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그런 이름의 문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이 설명을 본문의 실제 배경으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또 떠나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있지만 받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새 공동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본문만으로 그 의도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가시고,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따라간다
이제 이야기의 무대가 분명하게 정해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었다. 예수가 그들보다 앞서 갔고 그들은 놀랐다. 따라가는 이들은 두려워했다. 그는 다시 열둘을 데리고 자기에게 닥칠 일을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마가복음 10:32 · 본디새김
그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닥칠 일을 말씀하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 평범한 여행이 아니라는 분위기는 분명합니다.
「보아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0:33 · 본디새김
이번 예고는 앞선 두 차례보다 구체적입니다. 이제는 장소와 관계자들, 진행 과정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조롱과 침 뱉음, 채찍질과 죽음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실패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 길을 계속 가십니다.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함께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넘기고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이 예수님의 사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길을 계속 가십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지만,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장에서 곧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듣기 직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다리는 조롱과 죽음을 말씀하신 직후, 자신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높은 자리를 구하는 제자들과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 우리에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 우리에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마가복음 10:35 · 본디새김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가복음 10:36 · 본디새김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신 오른쪽에, 한 사람은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0:37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에게 장차 큰 영광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문제는 그 영광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들도 예수님 곁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왕이나 통치자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특별한 명예와 가까움을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셔서 조롱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영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잔과 세례는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거나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가복음 10:38 · 본디새김
잔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뜻으로 사용됩니다. 복이나 기쁨을 나타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사람이 마셔야 할 고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편 75:8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에 있는 잔을 악인들이 마셔야 한다고 말하고, 이사야 51:17에서는 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은 예수님에게 닥칠 고난과 깊이 연결됩니다.
세례 역시 여기서는 물로 행하는 의식 자체보다는 고난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69:1–2에서는 고난당하는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 잠기는 모습으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 시편을 직접 인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것이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0:39 · 본디새김
그들이 그 대답의 무게를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고난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이자 예고로 이해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거나 동일한 구원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뒤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겪을 고난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역할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른쪽과 왼쪽 자리는 자신이 주실 몫이 아니라, 그 자리가 마련된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그 자리가 누구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마가복음 뒤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15:27). 그들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제자들이 아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입니다.
이것이 10:40의 자리가 바로 그 강도들에게 준비되었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표현을 십자가 장면에서 다시 사용한다는 점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영광의 이미지와 예수님께서 실제로 걸어가실 길 사이의 차이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머지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노여워합니다. 그들이 왜 노여워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높은 자리를 요청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보다 더 깊이 예수님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예수가 그들을 불러 말했다. 「너희가 알고 있듯이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그들 위에 주인 노릇을 하고, 그들 가운데 큰 사람들은 그들에게 권세를 휘두른다.」마가복음 10:42 · 본디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이 잘 아는 세상의 통치 방식을 예로 드십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형태의 지도력이나 권한 행사가 그 자체로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 곧 다른 사람들 위에 주인 노릇을 하고 권세를 휘두르는 행태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런데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너희 사이에서 큰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 사이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될 것이다.」마가복음 10:43–44 · 본디새김
「그런데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말이 전환점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권력의 질서를 그대로 복제해서는 안 됩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는 큰 사람이 되려는 사람에게 「섬기는 이」가 되라고 합니다. 이 낱말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첫째가 되려는 사람에게 「노예」가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낱말은 종속된 신분의 노예를 뜻합니다.
두 표현 사이에는 강도가 높아지는 흐름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표현에는 「모든 사람의」라는 말이 붙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는 사람에게 자신의 지위를 낮추는 형식적인 겸손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내어 주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모범적인 지도자의 자세만 가르치시고 끝내지 않으십니다. 이런 삶이 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인지를 자신의 사명으로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왔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4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장의 중심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직접 설명하시는 구절입니다.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과 함께 나타나 옛적부터 계신 분 앞에 나아가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집니다. 다니엘서의 그 장면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존재는 세상의 폭력적인 제국을 상징하는 짐승들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자신의 백성에게 나라를 주시고, 짐승 같은 통치가 영원한 권위를 갖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 그 환상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다니엘서의 이 모습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칭호가 사용될 때마다 다니엘 7장의 모든 세부 사항이 자동으로 적용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자로 자신을 설명하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속박이나 포로 상태에서 풀어 주기 위해 치르는 값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에서 사용된 전치사는 교환과 대신함의 의미를 지닙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을 넘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다는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장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이사야 53:10–12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며, 많은 사람의 죄악을 담당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마가는 이사야 53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한 사람의 생명, 타인을 위해 고난받는다는 주제는 강하게 겹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해 읽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히 불의한 권력에 희생되실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목숨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죽음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시는 행위로 설명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하는 폭력은 실제 폭력입니다. 그 책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폭력으로 이루어질 죽음이 자신의 사명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밝히십니다.
물론 「대속물」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지불되는지, 이 표현 하나만으로 속죄의 모든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신학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0:45는 대속물을 받는 상대를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만으로 구원의 대상이 누구까지 포함되는지에 관한 모든 논쟁을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자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대가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을 단순한 도덕적 모범으로 축소하지 못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요구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을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권력의 크기로 위대함을 판단한다면, 예수님은 그 권력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를 통해 전혀 다른 위대함을 보여 주십니다.
눈먼 바디매오 — 제자들이 구하지 않았던 것을 구한 사람
길가에 앉아 있던 사람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여리고에 도착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말씀하셨고, 이제 그 길을 계속 가고 계십니다.
그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여리고로 들어갔다. 그가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올 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었다.마가복음 10:46 · 본디새김
마가는 이 사람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이 복음서에서 치유받은 사람의 이름이 직접 나오는 일은 드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이 위치는 단순히 그가 어디에서 구걸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때 같은 길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이 작은 장소 표현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는 지나가는 이가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 시작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마가복음 10:47 · 본디새김
사람들이 그에게 알려 준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지나가는 치유자로만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과 연결되는 특별한 기대를 담아 부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바디매오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나 자격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예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사람들은 꾸짖고,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신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는 더욱더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마가복음 10:48 · 본디새김
그들의 행동은 이 장의 앞부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두 장면에서 예수님께 다가오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지당합니다.
예수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를 불러라.」 그들이 눈먼 사람을 부르며 그에게 말했다. 「용기를 내어라.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른다.」마가복음 10:49 · 본디새김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고 계시며, 그 길에서 뒤따르는 사람들보다 앞서 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눈먼 거지 한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고 멈추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크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길가에 앉은 한 사람의 고통을 지나쳐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는 그를 잠잠하게 하려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부릅니다. 바디매오의 접근을 막던 분위기 속에 예수님의 부르심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그 부르심을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곧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이 동작은 이야기의 긴박함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질문, 전혀 다른 대답
예수가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랍부니,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0:51 · 본디새김
35–36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마가는 같은 질문을 두 장면에 배치합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자신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곁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를 보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바디매오가 영적인 통찰을 구했다고까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실제로 눈이 멀었고, 실제 시력을 회복하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마가가 이 장면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문제와 연결해 읽도록 구성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을 생각하면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또 한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보고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이 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러자 그는 곧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길에서 예수를 계속 따라갔다.마가복음 10:52 · 본디새김
26절에서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가 어떤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만들어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고쳐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며 나아온 그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마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시력을 되찾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마가복음에서 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그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삶을 가르치셨고, 이제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있던 사람이 길 위로 들어왔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아람어의 ‘아들’을 뜻하는 바르(bar)와 디매오라는 이름이 결합한 형태입니다. 따라서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표현은 그 관계를 두 언어의 형태로 겹쳐 전하는 셈입니다. 왜 마가가 이 사람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메시아적 소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후손과 왕권에 관한 약속을 주셨고, 이사야 11:1–10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인물이 의로운 통치를 이루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바디매오가 이러한 전통 전체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가는 꾸짖던 무리와 그를 부르는 무리가 정확히 동일한 사람들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겉옷은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소유물이었고,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는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었습니다(출애굽기 22:26–27). 바디매오가 겉옷을 던졌다는 장면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영구히 버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26절의 「구원받다」와 52절의 「구원했다」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의 형태들입니다. 이 단어는 위험에서 구출하거나 병에서 회복시키는 일과 더 넓은 의미의 구원을 모두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8:22–26에서는 눈먼 사람이 치유받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다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따르는 삶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고백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처음 치유받은 사람은 시력이 단계적으로 회복되었고, 이번에는 바디매오가 곧바로 다시 보게 됩니다. 이 두 치유 이야기가 8:22–10:52의 제자도 가르침을 앞뒤에서 감싼다는 문학적 해석이 있습니다. 두 사건 자체가 실제 시력의 치유를 다루면서, 그 사이에 놓인 제자들의 이해 부족을 비추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는 자신을 내어 주시어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따라온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처음에 길 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오른쪽이나 왼쪽 자리를 요구할 지위도 없었고, 내려놓기를 주저할 많은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길가에 앉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걸어가시는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계속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