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8–10장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진 것을 내려놓고 따르는 길

마가복음 10장의 마지막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지만 멈추지 않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런데 이 질문은 그날 처음 나온 말이 아닙니다. 조금 앞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별한 부탁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누리실 때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는 다시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다닌 제자들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저 길가에 앉아 있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면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더 잘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은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 동시에,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 중심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길의 맨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십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810장 본문 읽기 →

이혼의 허용 여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창조를 말씀하시다

마가복음 10:1–12 본문 →

「모세는 너희에게 무엇을 명령했느냐?」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방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십니다. 무리가 다시 모여들고,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해도 됩니까?」마가복음 10:2 · 두루새김

마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단순히 결혼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순수한 물음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문제 삼으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혼을 둘러싼 논쟁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신명기 24:1에서 말하는 이혼 사유를 얼마나 넓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에게 무엇을 명령했느냐?」마가복음 10:3 · 두루새김

그들은 「모세는 이혼 증서를 쓰고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명기 24:1–4는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때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남자가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보내고,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다시 그 결혼이 끝난 경우, 첫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고 규정합니다. 이혼이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을 바탕에 두고, 그 과정과 그 이후의 관계를 법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규정에서 이혼이 허용된다는 근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규정이 존재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이 계명을 써 준 것은 너희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5 · 두루새김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감정이 차갑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굳은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신명기 10:16에서는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라고 명령하고, 예레미야 4:4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촉구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혼 증서가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규정은 인간의 굳은 마음 때문에 생기는 현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결혼이 깨어지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모세보다 창조 이야기를 먼저 보게 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창세기의 두 본문을 연결하십니다.

「그러나 창조가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 때문에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고,』」 「『둘은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가복음 10:6–8 · 두루새김

첫 문장은 창세기 1:27에, 이어지는 결합과 한 몸의 말씀은 창세기 2:24에 근거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나아가 배우자와 새로운 결합을 이루는 일이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본문을 연결하여 결혼을 한 사람의 소유권이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두 사람이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한 몸」이라는 말은 두 사람의 개성이 사라져 하나의 인격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깊은 결합을 이루어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가복음 10:9 · 두루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은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결혼을 남자가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권리의 문제로만 생각하면, 아내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남자의 결정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혼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합을 두십니다.

「이혼한 아내에게 간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

집에 들어간 뒤 제자들이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이혼한 아내에게 간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마가복음 10:11 · 두루새김

당시 유대 사회의 일반적인 혼인법과 관행에서는 남성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을 더 폭넓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행위를 바로 「이혼한 아내에게」 짓는 간음의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남편의 행동을 단순히 율법 절차를 지켰는지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아내에 대한 잘못으로 규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2절에서는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께서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결혼 관계의 책임을 요구하신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다만 이 말씀을 오늘의 모든 결혼 문제에 대한 완결된 법률 조항으로 곧장 옮기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5:32와 19:9에는 성적 부정과 관련된 예외 표현이 등장하지만, 마가복음에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7:10–16에서 결혼과 별거,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본문들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도 견해가 갈립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학대와 폭력의 피해자가 위험한 관계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질문과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혼과 재혼의 윤리적 판단, 위험한 상황에서의 분리와 보호 문제는 구별해 다루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후대에 기록된 미슈나 기틴 9:10에는 이혼 사유를 비교적 좁게 이해하는 샴마이 학파와 폭넓게 이해하는 힐렐 학파의 견해 차이가 전해집니다. 다만 그 문헌이 최종적으로 정리된 시기는 예수님 시대보다 뒤이므로, 그 논쟁의 세부 내용을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그대로 일치시켜서는 안 됩니다. 12절에서 마가가 아내의 이혼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법적 환경을 반영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헤롯 가문의 결혼과 이혼 사건처럼 유대 사회 안에서도 여성이 이혼을 주도하는 사례가 알려져 있었으므로, 반드시 로마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적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

마가복음 10:13–16 본문 →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화가 나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손을 대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쁜 무리로부터 보호하려 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 예수님의 중요한 일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게 두어라. 막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1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받아들여도 괜찮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 나라에 누가 속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막으려던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가복음 10:15 · 두루새김

흔히 이것을 어린아이의 순수함, 겸손함, 의심 없는 믿음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의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가 먼저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제자들에게 가로막혔습니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은 두 방향으로 읽혀 왔습니다.

하나는 아이가 선물을 받듯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해석입니다. 아이는 자기 능력이나 사회적 성취로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자격과 업적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 태도가 강조됩니다.

다른 하나는 아이를 받아들이듯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은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해석은 마가복음 9:37과의 연결에서 힘을 얻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아이 하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원문에서는 10:15에서도 같은 「받아들이다」(δέχομαι)라는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 두 읽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본문이 분명하게 확정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이들을 품에 안고 손을 얹어 축복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16 · 두루새김

제자들은 아이들이 다가올 수 있는지를 문제 삼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미 예수님의 품 안에 두고 계십니다.

이 장면 다음에는 한 부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달리 스스로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알고 있으며,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의 배치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무엇을 이루었느냐 하는 문제일까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은 왜 슬퍼하며 떠났을까요

마가복음 10:17–22 본문 →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길을 떠나려 하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가복음 10:17 · 두루새김

그의 행동에는 진지함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묻는 것은 단순히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 자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소망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12:2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그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물려받는다는 것은 본래 상속자의 관계와 주어지는 몫을 바탕에 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마가복음 10:18 · 두루새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하지 않으시다고 부정하셨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르는 이유를 물으시고, 선함의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하나님께 두십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훔치지 마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마라. 남의 것을 속여 빼앗지 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라.』」마가복음 10:19 · 두루새김

그는 어려서부터 모두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대부분의 명령은 십계명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지만, 「남의 것을 속여 빼앗지 마라」는 십계명의 일반적인 목록에 그대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주지 않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 이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재산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아졌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열하시는 계명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과 가정뿐 아니라 재산과 생계를 존중할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반응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가복음 10:21 · 두루새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보고 화가 나셨습니다. 이제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시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말씀이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마가는 그 명령 앞에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놓아둡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인해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선한 일을 하나 더 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나누라는 선행 한 가지를 더하신 셈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명령의 마지막은 「와서 나를 따라라」입니다.

그 사람에게 부족했던 것은 또 하나의 종교적 업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들어오는 데 걸림돌이 되는 무엇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의 구체적인 내용, 곧 재산을 나누는 행위를 지워 버리고 단순히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재산 처분 절차를 요구하는 규정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실제 상황에 맞추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던 사람이 슬퍼하며 떠나다

그 사람의 반응은 짧고도 아픕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어두워져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0:22 · 두루새김

그는 화를 내며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슬픔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 말씀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슬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역설이 나타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기 위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업적을 내세우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반면 이 사람은 계명을 지켜 온 삶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어 부르시는 순간에는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것은 가난 자체를 자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람을 흔히 「부자 청년」이라고 부르지만, 마가복음은 그의 나이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태복음 19:20–22의 병행 본문에 근거한 것입니다. 「남의 것을 속여 빼앗지 마라」는 레위기 19:13의 이웃을 억압하거나 약탈하지 말라는 명령, 신명기 24:14–15의 가난한 품꾼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라는 규정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 사람이 할 수 없는 구원

마가복음 10:23–31 본문 →

재산이 많으면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구나!」마가복음 10:23 · 두루새김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구나!」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마가복음 10:24–25 · 두루새김

재산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고, 사회적 영향력과 안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의 복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신명기 28:1–14; 잠언 10:22). 물론 구약성경은 부가 언제나 하나님의 인정의 표시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아모스 2:6–7; 5:11–12). 그럼에도 재산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특별히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큰 동물이 바늘구멍이라는 지극히 작은 구멍을 지나가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면 가능한 일로 바꾸면 비유의 힘이 약해집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 서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어?」마가복음 10:26 · 두루새김

제자들도 그 말씀을 불가능한 일로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특별한 불리함이 있다고만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은 재산이 적은 사람은 더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훨씬 넓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바라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27 · 두루새김

부유한 사람이 충분히 재산을 나누면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재산이 적으면 자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결단과 순종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종조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이 사실은 앞서 등장한 아이들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그 나라를 얻어 내는 것과 다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무능한 인간에 대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소망을 열어 놓습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마가복음 10:28 · 두루새김

이 말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 아버지와 일꾼들을 남겨 두고 따랐습니다(1:16–20).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받고 떠났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버리고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단순히 베드로의 자랑이라고만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거나 무의미하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집과 가족과 밭을 떠난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박해를 겪으면서도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밭을 백 배로 받고, 오는 시대에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0:30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재산을 바치면 그만큼의 부동산이나 현금을 백 배로 돌려받는다는 재정적 보장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보상에는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처럼 인간관계도 포함되어 있으며, 박해라는 고통도 분명히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자연스러운 이해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전의 관계와 소유를 떠난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 집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31–35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부르신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다만 이 약속은 예수님을 위해 잃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는다는 더 넓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마가복음 10:3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먼저 따랐던 사람과 나중에 따르게 된 사람을 단순히 서로 바꾸어 놓는 기계적인 규칙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가가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순서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뿐 아니라, 예수님을 오래 따랐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요구할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곧 이어지는 제자들의 행동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때때로 예루살렘에 「바늘귀 문」이라는 작은 성문이 있었고, 낙타가 짐을 내려놓으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그런 이름의 문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또 떠나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있지만 받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새 공동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본문만으로 그 뜻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가시고,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따라간다

마가복음 10:32–34 본문 →

이제 이야기의 무대가 분명하게 정해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앞장서서 걸으셨고, 제자들은 놀랐으며, 뒤따르던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32 · 두루새김

그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닥칠 일을 말씀하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 평범한 여행이 아니라는 분위기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에서 제자들을 위험한 곳으로 밀어 넣고 계시지 않습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0:33 · 두루새김

이번 예고는 앞선 두 차례보다 구체적입니다. 8:31에서는 지도자들에게 버림받는 일과 고난·죽음·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9:31에서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장소와 관계자들, 진행 과정까지 말씀하시고, 이어서 조롱과 침 뱉음, 채찍질과 죽음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실패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 길을 계속 가십니다.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함께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넘기고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이 예수님의 사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길을 계속 가십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지만,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장에서 곧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듣기 직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다리는 조롱과 죽음을 말씀하신 직후, 자신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놀란 사람들을 제자들로, 두려워한 사람들을 뒤따르던 사람들로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에서는 이들이 정확히 어떻게 구분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와 그 밖의 무리를 구별하는 읽기가 있지만, 마가는 그 구분을 확정할 만큼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를 구하는 제자들과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0:35–45 본문 →

「저희가 무엇을 부탁하든 그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무엇을 부탁하든 그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마가복음 10:35 · 두루새김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가복음 10:36 · 두루새김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영광을 누리실 때, 저희 중 한 사람은 선생님 오른쪽에, 한 사람은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0:37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에게 장차 큰 영광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문제는 그 영광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왕이나 통치자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특별한 명예와 가까움을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셔서 조롱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영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잔과 세례는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마가복음 10:38 · 두루새김

잔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뜻으로 사용됩니다. 복이나 기쁨을 나타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사람이 마셔야 할 고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편 75:8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에 있는 잔을 악인들이 마셔야 한다고 말하고, 이사야 51:17에서는 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세례 역시 여기서는 물로 행하는 의식 자체보다는 고난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이미지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69:1–2에서는 고난당하는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 잠기는 모습으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겪으실 고난을 잔을 마시고 물속에 잠기는 일처럼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0:39 · 두루새김

그들이 그 대답의 무게를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고난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이자 예고로 이해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거나 같은 구원의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뒤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겪을 고난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역할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른쪽과 왼쪽 자리는 자신이 주실 몫이 아니라, 그 자리가 마련된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그 자리가 누구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마가복음 뒤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15:27). 그들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제자들이 아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입니다. 이것이 10:40의 자리가 바로 그 강도들에게 준비되었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표현을 십자가 장면에서 다시 사용한다는 점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영광의 이미지와 예수님께서 실제로 걸어가실 길 사이의 차이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냅니다. 그들이 왜 화를 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높은 자리를 요청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모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백성을 억누르며 다스리고, 그들의 높은 사람들은 백성에게 권력을 휘두른다. 너희도 이것을 안다.」마가복음 10:42 · 두루새김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형태의 지도력이나 권한 행사가 그 자체로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 곧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며 다스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행동을 문제 삼으십니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가복음 10:43–44 · 두루새김

「그러나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전환점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권력의 질서를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는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종」이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말은 다른 사람에게 매인 신분의 노예를 뜻합니다.

두 표현 사이에는 강도가 높아지는 흐름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표현에는 「모든 사람의」라는 말이 붙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는 사람에게 자신의 지위를 낮추는 형식적인 겸손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내어 주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모범적인 지도자의 자세만 가르치시고 끝내지 않으십니다.

인자가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내주러 오셨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내주러 왔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4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장의 중심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직접 설명하시는 구절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섬기는 분으로 자신을 설명하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왜 오셨는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히 불의한 권력에 희생되실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죽음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시는 행동으로 설명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하는 폭력은 실제 폭력입니다. 그 책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폭력으로 이루어질 죽음이 자신의 사명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밝히십니다.

물론 「몸값」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지불되는지, 이 표현 하나만으로 죄를 씻는 모든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신학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0:45는 몸값을 받는 상대를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만으로 구원의 대상이 누구까지 포함되는지에 관한 모든 논쟁을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자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대가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을 단순히 도덕적 모범으로만 보지 못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요구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을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과 함께 나타나 옛적부터 계신 분 앞에 나아가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집니다. 다니엘서의 그 장면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존재는 세상의 폭력적인 제국을 상징하는 짐승들과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인자」라는 표현을 다니엘서의 이 모습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는 하나님이 마침내 자신의 백성에게 나라를 주시고, 짐승 같은 통치가 영원한 권위를 갖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 그 환상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인자」라는 칭호가 사용될 때마다 다니엘 7장의 모든 세부 사항이 자동으로 적용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값」은 그리스어 뤼트론(λύτρον)을 옮긴 말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에게 매여 있거나 포로로 붙잡힌 사람을 풀어 주기 위해 치르는 값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에서 사용된 전치사는 교환과 대신함의 의미를 지닙니다. 「대신하여」에 쓰인 전치사는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을 넘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다는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장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이사야 53:10–12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며, 많은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마가는 이사야 53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한 사람의 생명, 다른 사람을 위해 고난받는다는 주제는 강하게 겹칩니다. 시편 69편의 깊은 물 이미지도 예수님께서 그 시편을 직접 인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눈먼 바디매오 — 제자들이 구하지 않았던 것을 구한 사람

마가복음 10:46–52 본문 →

길가에 앉아 있던 사람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여리고에 도착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와 일행은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였습니다. 길가에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였습니다.마가복음 10:46 · 두루새김

이 복음서에서 치유받은 사람의 이름이 직접 나오는 일은 드뭅니다. 바디매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독자의 주의를 끕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이 위치는 단순히 그가 어디에서 구걸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때 같은 길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이 작은 장소 표현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마가복음 10:47 · 두루새김

사람들이 그에게 알려 준 것은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디매오가 이러한 전통 전체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지나가며 병을 고쳐 주는 분으로만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과 연결되는 특별한 기대를 담아 부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바디매오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일이나 자격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예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사람들은 꾸짖고,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신다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아들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마가복음 10:48 · 두루새김

그가 왜 조용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시끄러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지가 예수님께 그렇게 소리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이 장의 앞부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두 장면에서 예수님께 다가오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로막힙니다.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불러라.」 사람들이 그 눈먼 사람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힘내세요. 일어나세요. 예수가 당신을 부릅니다.」마가복음 10:49 · 두루새김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고 계시며, 그 길에서 뒤따르는 사람들보다 앞서 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 한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고 멈추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크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길가에 앉은 한 사람의 고통을 지나쳐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는 그를 조용히 하게 하려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부릅니다. 마가는 이 두 집단이 정확히 같은 사람들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의 접근을 막던 분위기 속에 예수님의 부르심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그 부르심을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곧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겉옷은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소유물이었고,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는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었습니다(출애굽기 22:26–27). 이 동작은 이야기의 긴박함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질문, 전혀 다른 대답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0:51 · 두루새김

35–36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자신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곁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를 보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바디매오가 영적인 깨달음을 구했다고까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실제로 앞을 보지 못했고, 실제 시력을 되찾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마가가 이 장면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문제와 연결해 읽도록 구성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는 곧바로 다시 보게 되었고, 길을 가며 예수를 따랐습니다.마가복음 10:52 · 두루새김

그가 어떤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은 그가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만들어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고쳐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며 나아온 그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시력을 되찾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처음에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길을 가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길가에 있던 사람이 길 위로 들어왔습니다.

마가복음에서 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그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삶을 가르치셨고, 이제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후손과 왕권에 관한 약속을 주셨고, 이사야 11:1–10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인물이 의로운 통치를 이루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마가복음 8:22–26에서는 눈먼 사람이 치유받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다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따르는 삶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고백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긴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시 눈먼 사람이 치유받습니다. 이 두 치유 이야기가 8:22–10:52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 관한 가르침을 앞뒤에서 감싼다는 문학적 해석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을 생각하면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이 됩니다. 26절에서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사용된 「구원받을」과 52절의 「구원했다」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 소조(σῴζω)의 형태들입니다. 이 단어는 위험에서 구출하거나 병에서 회복시키는 일과 더 넓은 의미의 구원을 모두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아들’을 뜻하는 말과 디매오라는 이름이 결합한 형태입니다. 따라서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표현은 그 관계를 두 언어의 형태로 겹쳐 전하는 셈입니다. 바디매오가 겉옷을 던졌다는 장면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영구히 버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처음 치유받은 사람(8:22–26)은 시력이 단계적으로 회복되었고, 이번에는 바디매오가 곧바로 다시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 10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10:1–52 본문 →

그 나라의 중심에는 자신을 내어 주시어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부르심은 때로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며, 높은 자리보다 섬김을 선택하는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자신이 구원의 주인이 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에서 나타나는 응답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따라온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처음에 길 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오른쪽이나 왼쪽 자리를 요구할 지위도 없었고, 내려놓기를 주저할 많은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길가에 앉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걸어가시는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계속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