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3장 · 예루살렘에서

환호받은 왕과 성전 심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펼쳐 놓고 가지를 잘라 깔며 환호합니다. 다윗의 나라가 다가온다고 외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축복합니다.

마침내 왕을 맞이하는 듯한 행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가가 기록한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뜻밖에도 조용합니다.

환호하던 사람들은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어떤 선언도, 기적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나가십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무화과나무는 뿌리부터 말라 있습니다.

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왕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성전을 향한 이토록 엄중한 행동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고 계셨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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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왕

마가복음 11:1–11 본문 →

왕은 왜 나귀 새끼를 준비하셨을까?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릅니다. 올리브산 곁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다가가자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다. 풀어서 데려오너라.」마가복음 11: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가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이 물으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지까지 일러 주십니다. 제자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나귀 새끼를 발견하고 데려옵니다.

마가는 이 준비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고만 적어도 될 일을, 제자들을 보내시고 나귀를 풀고 질문받고 대답하는 과정까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일이 우연히 구한 짐승을 타고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뜻을 가지고 준비하신 행동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다면 나귀 새끼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요? 가장 중요한 구약의 배경은 스가랴 9:9–10입니다.

스가랴는 시온에게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그 이유는 왕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왕은 의롭고 구원을 이루는 왕이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옵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전차와 군마와 전쟁의 활이 사라지고, 그 왕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은 본래 전쟁과 적대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왕이 오시리라는 소망과 평화의 소망을 전합니다. 나귀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의 탈것이라는 의미만 지니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노새도 왕의 탈것으로 등장합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 다윗의 노새를 탔던 장면이 그 예입니다(열왕기상 1:33–40).

그러므로 스가랴의 왕은 왕답지 않은 모습으로 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군사력과 정복을 중심으로 왕의 권한을 이해하는 방식과 다른 다스림을 보여 주는 왕입니다. 마가는 스가랴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은 그 예언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왕으로 오시는지를 말로 설명하시기 전에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주님이 이 나귀를 필요로 하세요」

「누가 너희에게 『왜 이런 일을 해요?』 하고 물으면, 『주님이 이 나귀를 필요로 하세요. 곧 이리로 돌려보내실 거예요』라고 말해라.」마가복음 11:3 · 두루새김

여기서 「주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호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주님, 주인, 임자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나귀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읽는 가능성도 논의되어 왔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읽기를 택해 「주님」으로 옮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돌려보낼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십니다. 이 부분은 전해 내려온 본문의 차이와 문장 해석에 따라 읽기에 차이가 있지만, 나귀를 데려오는 일이 단순히 남의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는 행동으로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마가는 실제로 나귀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주인과 미리 약속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모든 것을 미리 아셨다는 해석과, 이미 준비된 약속에 따라 제자들을 보내셨다는 해석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가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렬의 진행을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호산나」 — 구원을 청하는 기도가 환호가 되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데려오자 제자들은 그 위에 겉옷을 얹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 위에 앉으시자 많은 사람이 자기 겉옷을 길에 펼쳐 놓고,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이 달린 가지들을 잘라 길에 깝니다. 겉옷을 길에 까는 행위는 왕을 환영하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십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됩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호산나!」마가복음 11:9–10 · 두루새김

이 외침은 시편 118:25–26과 연결됩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표현으로, 본래 구원을 간청하는 말입니다. 시편 118편에서는 하나님께 구원과 일이 잘 풀리기를 구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를 축복하는 말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이 시편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구원을 청하던 말이 왕을 맞이하는 환호의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다윗의 나라가 다가온다는 외침에는 이스라엘의 왕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이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정치적 해방의 소망도 이 외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환호하는 사람들 각각의 생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로마를 몰아낼 군사적 지도자를 기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외침과,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실 일 사이에 긴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다음 왕궁이나 로마 총독의 관저로 향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환호 뒤에 찾아온 뜻밖의 침묵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둘러보고 나니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마가복음 11:11 · 두루새김

마태복음 21장에서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일과 성전에서의 행동이 더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마가는 이 사이에 하루의 간격을 둡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성전을 살펴보시는 장면이 따로 드러납니다.

이 간격은 다음 날의 행동을 다르게 읽도록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갑자기 화가 나서 탁자를 뒤엎으신 것처럼 그려지지 않으십니다.

물론 마가는 예수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보셨는지,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의 눈으로 보면 첫날의 침묵과 둘째 날의 행동은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첫날에는 성전을 둘러보셨습니다.

다음 날에는 그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십니다.

예수님의 왕권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 이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이라는 설명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정해 둔 짐승에게는 이전에 멍에를 메지 않았다는 조건이 붙기도 합니다(민수기 19:2; 사무엘상 6:7). 이런 배경 때문에 나귀 새끼가 특별한 용도로 따로 정해 둔 짐승이라는 의미를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마가는 왜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반드시 종교 의식에 필요한 조건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겉옷을 까는 장면으로는 열왕기하 9:13에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될 때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그의 발아래 깔았던 장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사람들이 그 장면을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행동이 예수님을 특별한 인물로 환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시편 118편은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노래입니다. 그 본래 흐름에서, 마가복음이 인용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처음부터 미래의 메시아만을 가리키는 고정된 이름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닌데 열매를 찾으신 이유

마가복음 11:12–14 본문 →

예수님은 왜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셨을까?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가까이 가십니다. 혹시 열매가 있을까 생각하셨지만 잎사귀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는 일이 없기를!」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마가복음 11:14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셔서 열매를 찾으셨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은 왜일까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가가 그 이유를 설명하며 덧붙인 문장입니다.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여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가 보니 잎사귀밖에 없었습니다. 무화과 열매가 나는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1:13 · 두루새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었다면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요?

이른 무화과 열매를 고려하여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마가는 분명히 무화과 열매가 나는 철이 아니었다고 적었습니다. 따라서 나무가 제때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어려운 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이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답을 찾으려면 무화과나무 자체뿐 아니라, 그 앞뒤에 어떤 이야기가 놓여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4절에서 마가는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라는 특이한 말을 덧붙입니다. 왜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록했을까요? 이야기의 끝에 가면 이유가 드러납니다. 20–21절에서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즉 마가는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11:12–14에서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시지만 발견하지 못하시고 나무를 향해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11:15–19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을 문제 삼으시며 탁자를 뒤엎으시고 성전의 본래 목적을 선포하십니다. 11:20–25에서는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믿음과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마가는 한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다른 이야기로 옮겨 간 다음,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는 구성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런 구성에서는 가운데 이야기가 바깥의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돕고, 바깥의 이야기 또한 가운데 사건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나무에는 잎이 무성했지만 예수님께서 찾으신 열매는 없었습니다.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제물을 사고팔며 종교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이 하나님이 뜻하신 기도의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장면을 연결하면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은 성전의 현실을 드러내는 예언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표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질그릇을 깨뜨린 일(예레미야 19:1–13)이나 에스겔이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황을 행동으로 나타낸 일(에스겔 4:1–3)이 그 예입니다.

이렇게 읽는 것은 예수님께서 열매를 얻지 못하셔서 화가 나셨다는 마음속 추측보다, 마가가 실제로 구성해 놓은 이야기의 흐름에 더 잘 맞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전체의 상징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무화과나무와 그 열매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 주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8:13에서는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의 모습이 심판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호세아 9:10에서는 하나님이 처음 이스라엘을 발견하신 일을 광야의 포도와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발견한 기쁨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하나님과의 약속에 충실하지 못한 백성에 대한 심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은 이 나무가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바로 가운데 이야기가 성전에서 벌어지고, 예수님께 적대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해석은 반드시 어느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1장의 직접적인 흐름에서는 성전의 상태와 그 지도자들의 책임에 가장 가까이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하나님이 유대 민족 전체를 버리셨다는 선언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며,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야기가 겨냥하는 것은 특정 민족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뜻에 어긋난 방향으로 운영되는 종교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은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시는 성경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잎이 나오기 전이나 잎이 나오는 무렵에 작은 열매가 맺히기도 합니다. 주요 수확기에 앞서 생기는 이른 열매가 있기 때문에,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혹시 먹을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전혀 비현실적이지는 않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잎이 무성한 나무라면 반드시 먹을 만한 열매가 있어야 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른 열매가 어느 정도 자라 있었을지,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찾으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누구를 위한 집인가

마가복음 11:15–19 본문 →

예수님은 성전에서 무엇을 문제 삼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십니다.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탁자를 뒤엎으시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뒤엎으십니다. 짐을 가지고 성전 안을 가로질러 다니는 일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이 장면은 흔히 ‘성전 정화’라고 불립니다. 그 이름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는 조금 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제사에는 짐승이 필요했습니다. 먼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이 제물로 바칠 짐승을 현지에서 사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비둘기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제물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5:7과 12:8에서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정합니다.

돈을 바꾸는 일 역시 성전과 관련된 헌금이나 제사를 위한 경제적 활동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모두 부당하게 높은 가격을 받거나 순례자들을 속이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거래 가격이나 상인들의 구체적인 부정행위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 모두를 내쫓으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일부 악덕 상인의 행동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와 사람들의 이동 자체를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십니다.

이 점 때문에 이 사건을 단순히 거래의 부패를 바로잡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성전에서 행해지는 예배 체계 전체를 향한 예언적 항의나 심판의 표시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성전의 본래 목적을 되찾으려는 정화 행동에 더 무게를 두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강조점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제사 체계를 그 자리에서 완전히 없애셨다고 본문이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단지 상인 몇 명의 장사 방식을 바로잡으려 하셨다고 보기에도 행동의 범위가 넓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행동을 길게 해설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 말씀에서 왜 성전의 상태가 문제가 되었는지가 드러납니다.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

사람들을 가르치며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가복음 11:17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구약 본문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앞의 말씀은 이사야 56:7이고, 뒤의 말씀은 예레미야 7:11입니다. 그런데 이 두 본문은 원래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이사야 56장은 하나님이 누구를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 장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밀려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방인과 고자가 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할 수 있는지 염려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붙들고 뜻을 따르는 이방인들을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그들의 예배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집 안에서 끊어지지 않을 이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을 선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씀이 바로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입니다.

이사야의 본래 흐름에서 하나님의 집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차지하는 공간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여 그분을 섬기려는 이방인에게도 열리는 예배의 장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근거는 기존 공동체가 너그럽게 허락해 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성전에서 다시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마가는 특별히 「모든 민족을 위한」이라는 표현을 남깁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태복음 21:13과 누가복음 19:46에서는 그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성전의 현재 모습을 판단하십니다.

성전이 아무리 많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제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예배의 목적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도둑질하는 장소인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두 번째 표현, 「너희는 이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더욱 날카롭습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 7:11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표현을 성전 안에서 물건을 비싸게 팔거나 돈을 속여 빼앗는 일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행동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7장의 본래 흐름은 그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문에 서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 믿고 안심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이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에는 불의가 가득합니다.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며,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립니다.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 거짓 맹세와 우상숭배를 행합니다.

그러고도 성전에 들어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예레미야 7:4–11).

여기서 강도들의 소굴은 단순히 강도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소가 아닙니다.

강도들이 범죄를 저지른 뒤 돌아와 숨어 지내는 은신처입니다.

그들은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자기 소굴 안에서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비판한 것은 바로 그런 종교적 자기기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부르신 것은 단순히 성전 안의 거래 방식만을 비판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안전하다고 여기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는 예언적 고발을 불러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함께 인용하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집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집이 어떻게 잘못 사용될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자신의 집으로 부르시지만, 사람들은 그 집을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의 존재 자체가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어서 실로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예레미야 7:12–15).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가져오신 것은 성전이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뒤에 마가복음 13:1–2에서 성전 건물의 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과도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성전 비판은 유대교라는 종교 전체가 본래 잘못되었다는 외부인의 비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이미 선포했던 말씀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힌 바로 그 성경 말씀으로 성전을 심판하십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까?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무리가 모두 예수의 가르침에 크게 놀라고 있어서, 이 지도자들은 예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1:18 · 두루새김

종교 지도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예수님의 행동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특별히 무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크게 놀랐다고 말합니다. 성전에서 탁자를 뒤엎으신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권위와 운영을 맡고 있던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허가를 받아 성전에서 활동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문제 삼으시고, 성전의 본래 목적에 대한 해석을 내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던지신 질문은 이제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갈등으로 커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무화과나무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헤롯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바깥뜰이 있었고, 더 안쪽의 성전 구역에는 이방인의 출입이 제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탁자를 뒤엎으신 곳도 바깥뜰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마가는 정확한 장소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기도 공간을 상인들이 차지했기 때문에만 분노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뿌리째 마른 나무 앞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믿음

마가복음 11:20–25 본문 →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의 의미보다 믿음을 말씀하셨을까?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다시 그 길을 지납니다.

그때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이제 앞에서 시작된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의미를 설명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심판의 표시라거나, 열매 없는 예배가 어떤 결과를 맞는지 설명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마가복음 11:22 · 두루새김

이어지는 말씀도 기도와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전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성전을 향한 예언적 심판의 의미를 지닌다면, 이제 예수님은 왜 그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시는가요?

두 주제는 서로 경쟁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와 성전 이야기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이 대목의 초점은 성전이라는 장소를 부정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는 무엇을 뜻하는가?

두루새김은 이 말씀을 「하나님을 믿어라」로 옮겼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에케테 피스틴 테우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뜻하는 명사는 속격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 속격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읽기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믿음, 또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연결하는 해석도 논의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해석들이 문맥에서 똑같이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뒤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 자체에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믿음이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시선을 나무가 말라 버린 놀라운 현상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옮기십니다.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에게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 사람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가복음 11:23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이 산」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냥 산이라고 하지 않고 「이 산」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의 해석은 실제로 제자들의 눈앞에 보이는 산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특정한 산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나타내는 과장된 비유에 주목합니다. 특히 성전이 자리 잡은 산을 가리킨다는 해석에서는 산이 옮겨지는 모습이 성전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상의 근거를 지니지만,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산을 옮기는 능력을 자기 소유로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마가복음 11:24 · 두루새김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λαμβάνω)라는 표현에는 그리스어에서 ‘받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 사용됩니다. 아직 눈앞에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를 이미 받은 것으로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라는 심리적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고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사람이 원하는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인가요?

이 말씀 자체는 매우 강한 약속입니다. 그 강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확신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보장으로 읽는 것은 마가복음 전체의 흐름에 맞지 않습니다. 뒤에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고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십니다(14:35–36).

이 두 기도를 함께 생각하면, 믿음의 확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서로 반대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자신의 확신을 최대한 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히 일하실 수 있음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또한 어떤 기도가 바란 대로 응답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기도한 사람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모든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명령하시는 것은 실패한 기도자의 믿음을 평가하라는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왜 갑자기 용서를 말씀하실까?

「또 서서 기도할 때 누군가에게 마음에 맺힌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용서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시도록 말이다.」마가복음 11:2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앞의 산을 옮기는 믿음과 비교하면 아주 일상적으로 들립니다. 산을 바다에 던지는 일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두 말씀을 나란히 놓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자세에 관한 규정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를 문제 삼으십니다. 예레미야 7장의 핵심은 사람들이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하나님 앞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와 인간관계가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을 끝없이 붙들고 살아가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는 삶과 긴장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자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용서가 불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행위와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용서를 피해를 부정하거나 가해자에게 다시 다가가도록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라는 명령으로 곧바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관계의 회복에는 진실의 인정과 책임, 안전의 문제가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전의 본래 목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다면, 이제 제자들은 그 관계가 성전이라는 장소에 들어가 기도하는 행위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산」을 실제 산으로 보는 쪽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므로 올리브산이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로 앞에서 성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자리 잡은 산을 가리킨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경우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사건과 성전 체계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과장된 비유로 보는 쪽에서는 산을 바다로 옮긴다는 말씀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7:20과 고린도전서 13:2도 산을 옮기는 일을 특별히 큰 능력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사용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라는 표현은 당시 기도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여 줍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서서 기도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11:26이 없는 이유도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지만, 비평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25절 자체만으로도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의 관계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마가복음 11:27–33 본문 →

성전의 권한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묻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거닐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공동체의 종교적·사회적 질서에서 중요한 권한을 지닌 집단들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이런 일을 하도록 누가 당신에게 그 권한을 주었습니까?」마가복음 11:28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성전의 질서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한 사람에게 어떤 권한으로 그 일을 했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미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11:18). 따라서 이 질문을 단순한 행정 절차나 중립적인 사실 확인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정당한 권한에 근거한 것인지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인정하는 권한의 체계 안에서 예수님을 판단하려 합니다.

마가복음 독자는 이미 예수님의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한 중요한 장면을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내려오며,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1:9–11).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지 판단하려 하지만, 독자는 이미 마가가 이야기의 시작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실을 직접 선언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질문 하나를 하십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하늘에서 왔는가?

「요한이 베푼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내게 대답해라.」마가복음 11:30 · 두루새김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질문을 피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하신 행동에 대해 물었는데 왜 갑자기 요한의 이야기를 꺼내시는가요?

그러나 마가복음의 시작을 기억하면 이 질문은 권한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등장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뒤에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4–8).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하늘은 단순히 공간적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권한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가 하늘에서 왔는지 묻는다는 것은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전 지도자들의 질문을 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권한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시험하시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의 사역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권한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이 질문으로 요한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이 모든 면에서 같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할지 여부는 예수님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됩니다.

지도자들은 왜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을까?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왔다』라고 하면, 예수가 『그러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거야.」마가복음 11:31 · 두루새김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대답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참된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된 대답인지 살피기보다, 어떤 대답을 하면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계산합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들에게 불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가복음 11:33 · 두루새김

여기서 그들이 속으로는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 거짓말했다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들의 대답이 순수하게 몰라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답했을 때의 결과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이제 다시 나타납니다. 11:18에서는 무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11:32에서는 무리가 요한을 참된 예언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그들의 판단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태도보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은 왜 대답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한을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권한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중요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고, 갈릴리에서 권위 있게 가르치셨으며(1:22),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이르러서는 성전의 본래 목적을 밝힌 성경 말씀을 근거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판단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재치 있는 대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은 질문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을 요구하지만, 자신들이 이미 마주했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책임 있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오신 왕

마가복음 11:1–33 본문 →

이 장의 시작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성전의 지도자들이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외침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과 성전의 권한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보는 것도 아닙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계신 장면에서 이 장을 끝냅니다.

예수님 앞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고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그 성전 한가운데서 권한을 묻는 지도자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가 권한을 주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드러내신 더 근본적인 질문은 아직 대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과연 하나님이 뜻하신 집인가요?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