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갈릴리에서 시작
하늘이 찢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족보도 없고, 베들레헴도 없고,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없습니다. 첫 문장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한 뒤, 곧바로 독자를 광야로 데려갑니다.
그곳에는 왕궁도, 성전도, 군대도 없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은 사람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로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일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가는 그 답을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누구를 만나시는지, 예수님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광야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길
복음은 오래된 약속의 새로운 시작이다
첫 문장은 짧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가복음 1:1 · 본디새김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동사가 없는 간결한 문장입니다. 하나의 표제처럼 읽힙니다. 이 문장이 뒤따르는 세례 요한의 활동을 가리키는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여는 제목인지, 더 넓게 복음서 전체의 제목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독자는 이제 들려줄 이야기를 이미 일어난 어떤 사건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복음의 시작으로 읽도록 초대받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단순히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종교적 가르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장 안에서 그 내용은 곧 예수님 자신의 선포로 밝혀집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마가는 이 시작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적힌 그대로」라고 소개하면서 실제로는 여러 성경 본문을 함께 사용합니다.
2절의 사자와 길을 준비한다는 말씀은 말라기 3:1에서 왔으며, 출애굽기 23:20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3절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이사야 40:3입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나온 말씀들이 하나의 길을 가리키도록 배열된 것입니다.
이사야 40장은 바벨론 유배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을 선포합니다. 오랫동안 나라를 잃고 살아온 백성에게 하나님이 다시 그들과 함께하시며 돌아오는 길을 여신다는 소식입니다. 광야에 길을 마련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도로를 정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유배의 고통 가운데 있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선언입니다.
말라기 3장은 또 다른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백성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에서 멀어진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먼저 보내 길을 준비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뒤에 하나님 자신의 임재와 정화의 사건이 이어질 것입니다. 두 예언은 본래의 역사적 상황이 다릅니다. 하지만 마가는 두 본문을 연결하여 세례 요한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것은 본래 여호와야훼께서 오실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이야기에서는 요한이 준비하는 길 뒤로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가는 하나님이 오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오랜 기대가 예수님의 등장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찾아오는 요한은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요한은 광야에서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죄책감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이러한 돌이킴과 죄 용서의 기대를 연결하는 행위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세례가 어떤 방식으로 죄 용서와 연결되는지까지 하나의 교리적 공식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에서 요단강으로 나아옵니다. 마가의 표현에 따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에게 향했습니다. 이 말은 정확한 인구 통계라기보다 요한의 활동이 얼마나 널리 주목받았는지를 강조하는 서술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광야로 나갑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은 성전이 자리한 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첫 장면은 그 중심지에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새로운 일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익숙한 중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요한의 복장도 이러한 분위기와 어울립니다. 낙타 털옷과 가죽 띠는 열왕기하 1:8의 엘리야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는 요한을 직접 엘리야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의 모습을 통해 예언자적 전통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상황을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나보다 힘센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마가복음 1:7 · 본디새김
이어 요한은 자신의 활동과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구별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에게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가복음 1:8 · 본디새김
물과 거룩한 영의 차이는 단순히 두 가지 세례 방식의 차이가 아닙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부르지만, 뒤에 오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의 선물을 주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첫머리의 「하나님의 아들」은 사본에 따라 유무가 갈리는 표현입니다. 이 번역은 이 칭호가 포함된 본문을 따르지만, 생략하는 편집 본문도 있습니다. 다만 어느 본문을 따르더라도 예수님의 아들 됨은 11절에서 하늘의 소리를 통해 분명하게 선언됩니다. 또 8절의 약속은 에스겔 36:25–2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깨끗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새로운 영을 주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두 본문이 직접 인용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외적인 정결을 넘어 하나님이 사람의 삶을 새롭게 하신다는 주제에서 만납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열린 하늘, 그리고 광야의 시험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세례를 받으신다
그 무렵에 예수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마가복음 1:9 · 본디새김
놀랍도록 담담한 등장입니다.
앞에서 요한은 자신보다 힘센 분,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마가는 특별한 행렬이나 초자연적인 광경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독자가 궁금해할 문제가 있습니다.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던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가는 예수님께서 죄를 고백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만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 속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의 자리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회개하는 백성을 내려다보시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들과 같은 요단강에 들어가십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회복이 필요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자신을 함께 놓으시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문이 직접 제공하는 설명이라기보다 등장 장면의 배치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다음 마가의 문체가 갑자기 강렬해집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면서 그는 하늘이 찢어지고 그 영이 비둘기처럼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가복음 1:10 · 본디새김
하늘이 열렸다는 말과 찢어졌다는 말은 인상이 다릅니다. 단순히 닫힌 문이 열리는 정도가 아니라 경계가 갈라지는 모습을 그립니다.
하늘이 찢어진 뒤 내려오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영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는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두고 기뻐했다.」마가복음 1:11 · 본디새김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거나 병을 고치시기 전의 일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늘의 소리가 「그는」이 아니라 「너는」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 장면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향합니다. 마가는 그 선언을 독자에게 들려주지만,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차이가 앞으로 전개될 수많은 질문의 출발점이 됩니다.
성령은 아들을 편안한 곳으로 보내지 않으신다
곧 그 영이 그를 광야로 내쫓았다.마가복음 1:12 · 본디새김
앞 장면의 온화한 이미지와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영은 예수님을 영광스러운 자리로 모시지 않습니다.
마가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받으셨고,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으며, 천사들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저항 없는 순탄한 길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사랑과 기쁨을 선언받으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곧 시험과 대결의 현장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의 성격을 미리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곳에는 동시에 그 나라에 맞서는 힘들과의 충돌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가 하늘이 「찢어지고」라고 쓸 때 쓴 낱말은 스키조, 찢다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사야 64:1에는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바라는 탄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 보이는 현실 속에서, 그분이 직접 개입하시기를 간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가가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늘이 찢어지는 장면은 그 오래된 갈망과 깊이 공명합니다. 11절의 하늘 음성에는 구약의 중요한 두 흐름이 겹쳐 들립니다. 시편 2:7은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왕실 시편의 언어입니다. 본래 시편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권위와 통치가 중심에 있습니다. 이사야 42:1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고,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마가복음의 하늘 음성은 이 왕의 언어와 종의 언어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단순한 강압이나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사명과 연결됩니다. 12절의 그리스어 동사 에크발로, 밖으로 내보내다·몰아내다는 강한 동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같은 동사가 곧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을 내쫓으시는 장면에서도 사용됩니다. 사십 일이라는 기간은 모세의 사십 일(출애굽기 34:28), 엘리야의 사십 일 여정(열왕기상 19:8), 이스라엘의 사십 년 광야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받았다는 신명기 8:2의 전통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마가는 마태복음 4:1–11처럼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과 대화를 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떤 시험을 어떤 순서로 겪으셨는지를 마가의 기록만으로 복원해서는 안 됩니다.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표현도 해석이 갈립니다. 광야의 위험을 강조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고,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창조 세계의 평화를 암시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마가는 어느 쪽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
요한이 넘겨진 뒤에 예수가 갈릴리로 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마가복음 1:14 · 본디새김
마가는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을 요한이 「넘겨진 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요한의 체포와 구금이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마가는 그 사연을 6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독자는 이미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아무런 저항 없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자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한 종교 지도자가 다른 지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아닙니다. 요한이 준비하던 일이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마가복음 전체를 읽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15 · 본디새김
여기서 「때」는 단순히 달력상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정해진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킵니다. 「때가 찼다」(πληρόω)와 「가까이 왔다」(ἐγγίζω)는 그리스어에서 모두 완료형입니다. 약속된 시점이 이미 도래했고,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이 현재의 현실이 되었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다만 「가까이 왔다」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뜻하는지, 그 나라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졌음을 뜻하는지는 이 동사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어떻게 활동하고 미래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죽어서 가는 장소로 이해한다면 이 장의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현실, 곧 그분의 통치와 깊이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지도를 그려 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과 함께 직접 행동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실 때 그 권세가 물러납니다. 병든 사람을 일으키실 때 무너진 삶이 회복됩니다. 깨끗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사람을 만지실 때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선언에는 두 명령이 뒤따릅니다.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사람에게 새로운 응답이 요청됩니다.
이제 마가는 그 초대에 처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내 뒤로 오너라」 — 새로운 삶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는 곳은 회당도, 학교도 아닙니다. 갈릴리 바닷가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손보고 있었습니다. 모두 평소 하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뒤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가복음 1:17 · 본디새김
요한은 앞서 자신의 뒤에 더 힘센 분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자신의 뒤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장면에서 뒤에 선다는 말의 기능은 서로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뒤에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위치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누가 중심이고 누가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표현은 훗날 마가복음 8:33에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의 자리는 단순히 예수님 곁에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앞에서 예수님의 길을 결정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뒤에서 배우고 따라가는 자리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도 생각보다 복잡한 배경을 지닙니다. 마가의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사역과 연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부들의 익숙한 일상이 예수님의 부름을 통해 전혀 새로운 목적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의 미래를 만들어 가시는 주체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은 이미 준비된 자격을 증명한 뒤 부름받지 않습니다. 부름받은 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마가는 두 번의 떠남을 보여 줍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었습니다. 남겨진 것이 서로 다릅니다. 한쪽에서는 생업을 상징하는 그물이 강조되고, 다른 쪽에서는 가족과 일터가 함께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따라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그들 자신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그 질문이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제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오늘날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주로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사역의 비유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사람을 낚는 이미지는 반드시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6:16이나 하박국 1:14–17에서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일이 심판과 정복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구약의 심판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여기서 뒤집혔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삯꾼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세베대가 일정한 규모의 어업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아들들이 떠나더라도 그가 배에 홀로 남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여기서 제자들을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경제적 형편보다 예수님의 부름이 익숙한 삶의 관계와 일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에 관심을 둡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이들이 예수님을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만으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결단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르침이 권위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가르침의 내용보다 가르치는 분에게 놀란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의 반응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가 서기관들과 달리 권위를 가진 이처럼 가르쳤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22 · 본디새김
이 차이를 서기관들은 모두 무능하고 예수님만 훌륭한 교사이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가르침 전체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조의 초점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독특한 권위입니다.
바로 그때 회당 안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를 없애러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마가복음 1:24 · 본디새김
이 외침에는 두 가지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에게 맞서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라는 표현은 상대방의 개입을 거부하는 관용적 질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계속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관해 옳은 말을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 장면에서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증언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가 그 영을 꾸짖으며 말했다. 「입을 다물어라.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마가복음 1: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과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의식이나 주문을 사용하셨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그저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더러운 영은 나갑니다.
이 사건 뒤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모두 크게 놀랐고, 그래서 서로 이렇게 논의했다. 「이게 무엇이냐?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들에게도 명령하니 그것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마가복음 1:27 · 본디새김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따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권위가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했던 약속이 새롭게 들립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공개 활동에서 등장하는 것은 더러운 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자, 이전까지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힘이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입을 다물어라」의 그리스어 동사는 피모오, 재갈을 물리다입니다. 조용히 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강하게 제압하는 명령입니다. 1:8의 「거룩한 영」과 1:23의 「더러운 영」은 그리스어에서 모두 프뉴마, 영이라는 같은 명사를 사용하며 서로 대조됩니다. 요한이 예고한 거룩한 영의 사역과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는 더러운 영의 패배가 연결되어 읽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회당 장면은 거룩한 영을 주시는 약속이 더러운 영을 내쫓는 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가 어떤 세력과 충돌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권위
회당에서의 사건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계속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시는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가십니다. 방금 전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던 분이 이제 한 가정의 아픈 사람 곁으로 가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나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가 다가가 그 여자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러자 열이 떠났고, 그 여자는 그들을 섬겼다.마가복음 1:31 · 본디새김
앞선 회당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습니다. 여기서는 한 여자의 손을 잡으십니다. 마가는 이 여자의 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마나 오래 앓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권위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가 향하는 방향은 같습니다.
회당에서는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더러운 영이 물러났습니다. 집에서는 한 사람을 눕혀 놓았던 열이 물러났습니다. 두 사건 모두 사람을 억누르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 여자는 그들을 섬겼다」는 표현을 단순히 여자가 회복되자마자 다시 집안일을 했다는 식으로 읽으면 이야기의 의미가 좁아집니다. 앞서 13절에서 천사들이 광야에 계신 예수님을 섬겼다고 할 때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광야에서 천사들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제 집에서는 회복된 여자가 예수님 일행을 섬깁니다. 이 반복은 섬김이 단순히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마가복음 10:45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병의 제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회복시킵니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자 온 도시 사람들이 집 문 앞에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십니다. 귀신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활동은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집 밖으로 나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해가 진 뒤라는 시점은 앞서 안식일이 언급된 것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질 때 새로운 날로 넘어갔으며, 안식일과 관련된 활동 제한 역시 이 시간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다만 마가는 사람들이 해가 진 뒤에 찾아온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찾는 예수님은 왜 떠나시는가
이른 새벽 아직 아주 캄캄할 때 그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했다.마가복음 1:35 · 본디새김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전날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고, 병든 여자를 일으키시고, 해가 진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이튿날 새벽에는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냅니다.
그들은 그를 찾아내고 말했다. 「모두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마가복음 1:37 · 본디새김
짧은 말이지만 그 안에는 당시 상황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가버나움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충분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상과 다른 답을 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거기서도 선포하도록 다른 데로, 가까운 시골 마을들로 가자. 나는 바로 그 일을 하려고 나왔으니 말이다.」마가복음 1:38 · 본디새김
「나는 바로 그 일을 하려고 나왔다」라는 말씀에서 「나왔다」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한적한 장소로 나오신 행동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의 사명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시는 목적은 다른 곳에서도 선포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전날 밤까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 찾는다는 이유만으로 한곳에 머무르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은 한 지역의 특별한 경험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치유와 선포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보여 줍니다. 치유는 복음과 무관하게 덧붙여진 부차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선포는 치유로 대체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능력에 놀라는 것만으로 자신의 사명이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시며 선포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한 도시의 문 앞에 모였던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복음은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 여정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그가 가진 문제가 단순히 병든 몸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의 병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깨끗해질 수 있느냐가 아니라, 원하시느냐
한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병 환자 하나가 그에게 와서 간청하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가복음 1:40 · 본디새김
이 사람의 요청은 앞서 나온 병자들의 이야기와 다르게 표현됩니다. 그는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부정은 반드시 그 사람이 도덕적인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정은 죄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구별되는 의례적 질서와 공동체 생활의 문제를 다룹니다. 레위기 13:45–46에 따르면 부정한 상태로 판정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어 생활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14장은 그 상태에서 회복된 사람이 제사장의 확인을 받고 정결 예식을 거쳐 공동체 생활로 돌아오는 절차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단순히 피부의 증상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능력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인정합니다. 문제로 남겨 둔 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원하시기만 하면」이라는 말에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실 수 있는 분 앞에서 예수님의 의사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그를 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해져라.」마가복음 1:41 · 본디새김
환자가 물었던 바로 그 지점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그를 만지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지셔야만 병을 고칠 수 있으셨다고 마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말씀만으로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몸에 직접 닿으십니다.
정결과 부정의 경계가 중요한 상황에서 이 접촉은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의 상태 때문에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그 접촉 자체가 어떤 의례적 결과를 가져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연민인가, 분노인가
본문은 「그를 불쌍히 여겨」라고 읽지만, 베자 사본을 비롯한 일부 증거는 「화가 나서」라고 읽습니다.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주어진 길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깨끗하게 된 뒤에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 대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라. 그리고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네가 깨끗해진 일에 대해 모세가 명한 것을 바쳐라.」마가복음 1:44 · 본디새김
이 명령을 예수님께서 율법의 정결 규정을 폐지하셨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명한 절차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일은 이미 깨끗해진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받고, 정해진 절차를 통해 공동체 생활로 복귀하는 길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이라는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그 사람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인지,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증거인지, 혹은 더 강한 의미의 증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마가는 여기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풀어 주지 않습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침묵을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앞서 귀신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두 장면에서 반드시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귀신들에게는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지만, 이 사람에게는 별도의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 전체를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에 관한 소문을 무조건 널리 퍼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가서 자꾸 선포하고 그 말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어느 도시에도 들어갈 수 없었고, 도리어 바깥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 왔다.마가복음 1:4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장을 아주 독특한 역전으로 마무리합니다.
깨끗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사람에게는 공동체로 돌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반면 그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도시 바깥에 머무르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부정을 자신에게 옮겨 받으셨다는 문자적인 설명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의례적 전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위치가 만들어 내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마가는 복음의 확산을 무조건적인 성공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널리 알려지고 있음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움직이시고 선포하시는 일에는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41절의 차이는 연민을 뜻하는 스플랑크니스테이스와 분노를 뜻하는 오르기스테이스 사이의 차이입니다. 다수의 그리스어 사본은 「그를 불쌍히 여겨」라는 읽기를 지지합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 취향의 차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바라보시는 순간의 감정을 다르게 그립니다. 연민의 읽기는 광범위한 사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 분노의 읽기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증거를 갖지만, 문맥상 더 어려운 표현이 원래 있었고 후대에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뀌었을 가능성 등을 근거로 지지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분노 읽기의 사본 증거가 충분히 독립적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분노의 읽기를 택할 경우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질병 자체, 그 사람의 처지, 혹은 다른 대상을 향했다고 해석할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연민의 읽기를 따르면 이 장면은 예수님의 연민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바로 뒤의 43절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엄하게 다그치시고 내쫓으신다는 사실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연민이 표현되었다고 해서 이어지는 엄격한 명령을 부드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두 읽기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도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하게 하셨다는 사건은 동일하게 서술됩니다. 구약에서 나병이라고 번역해 온 피부 질환의 범주는 오늘날 의학에서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특정 질병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러 종류의 피부 이상을 포함하는 고대의 분류이며, 그 상태에 따라 사람은 의례적으로 부정하다고 판정될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3–14장). 45절의 「선포하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사용된 것과 같은 그리스어 동사 케뤼소, 공적으로 선포하다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같은 동사가 쓰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과 똑같은 복음을 전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가는 그가 무엇을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널리 알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광야에서 시작해, 다시 광야에서
마가복음 1장의 처음과 끝에는 모두 광야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요한이 광야에서 외칩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광야로 나옵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도시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의 광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속된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광야로 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사방에서 광야 같은 한적한 곳으로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오실 길을 마련하라는 이사야의 오래된 말씀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약속으로만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 시작을 화려한 승리의 행렬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계시지 않습니다. 한적한 바깥에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셨고, 이제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아직 많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지, 예수님의 권위가 앞으로 어떤 반대에 부딪힐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처음에 요한이 준비하라고 외쳤던 그 길 위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도시 바깥 한적한 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시는 분이 그곳에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