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7장 · 쉰두 날의 성벽 공사

가까운 형제가 더 두려울 때

느헤미야 5장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환합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위협한 사람들은 성벽 바깥에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재건을 조롱했고, 주변 세력들은 공격을 모의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경비대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무기를 갖추게 하여 위협에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장에서 백성은 전혀 다른 상대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제 그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대상은 같은 민족의 사람들입니다. 성벽을 함께 세워야 할 사람들이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벽은 공동체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안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의 땅과 자녀를 빼앗는다면, 그 성벽은 누구를 보호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크게 두 장면으로 이루어집니다. 1–13절에서는 백성의 부르짖음과 경제적 불의를 바로잡는 과정이, 14–19절에서는 느헤미야 자신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관한 회고가 나옵니다.

두 부분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지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5장 본문 읽기 →

「우리 몸도 우리 형제들의 몸과 같소」

느헤미야 5:1–5 본문 →

백성의 아내들이 함께 부르짖었다

백성과 그들의 아내들이 자기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향해 크게 부르짖었다.느헤미야 5:1 · 본디새김

여기서 「부르짖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불평이나 불만보다 훨씬 강합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억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후손들이 서로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개인적인 다툼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이 장에서 가정의 경제적 위기는 자녀들의 운명을 직접 위협합니다. 특히 5절에서는 딸들 가운데 이미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아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항의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남편들의 목소리와 함께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가족이 겪는 경제적 문제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함께 호소하는 당사자들입니다.

같은 굶주림, 서로 다른 처지

2–4절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했다. 「우리와 우리 아들딸들의 수가 많으니, 곡식을 구해 먹고 살아야겠소.」느헤미야 5:2 · 본디새김

「먹고 살아야겠소」라는 말은 문제의 절박함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생활 수준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곡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했다. 「이 흉년에 곡식을 구하려고 우리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히고 있소.」느헤미야 5:3 · 본디새김

밭과 포도원은 앞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 하는 생산 수단입니다. 집은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담보로 맡긴 재산을 잃게 되면 현재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대신 미래의 생계까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먹을 곡식을 구하려다가 내일 곡식을 생산할 기반을 잃는 상황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했다. 「왕에게 세금을 내려고 우리 밭과 포도원에 대해 은을 빌렸소.」느헤미야 5:4 · 본디새김

여기서 왕은 페르시아 왕입니다.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주민들에게는 제국에 세금을 낼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밭과 포도원이 빚의 담보인지, 세금이 부과된 재산을 가리키는지는 원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금 때문에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정확히 어떤 순서로 일어났는지, 성벽 공사 자체가 흉년이나 빚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기록한 것은 서로 다른 경제적 어려움이 유다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장 비참한 상황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들과 같소」

「우리 몸도 우리 형제들의 몸과 같고, 우리 아들들도 그들의 아들들과 같소. 그런데 보시오. 우리는 우리 아들들과 딸들을 노예로 넘기고 있고, 우리 딸들 가운데는 이미 노예가 된 이들도 있소. 우리에게는 어찌할 힘이 없고, 우리 밭과 포도원은 남들의 것이오.」느헤미야 5:5 · 본디새김

빚을 갚지 못해 자녀를 넘겨야 하는 사람들과, 돈을 빌려주고 재산을 확보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민족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한쪽의 자녀는 자유롭게 살아가고, 다른 쪽의 자녀는 부모의 빚 때문에 노예로 넘겨집니다.

그들은 바로 이 불균형을 고발합니다.

땅을 잃었기 때문에 경제적 자립의 기반을 잃었고, 경제적 기반을 잃었기 때문에 자녀를 보호할 힘마저 잃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일시적인 구호 식량이 아닙니다. 빚과 담보와 노예화가 연결된 상황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비를 받을 만한 특별한 이유를 찾아 호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유다 사람들과 같은 몸을 가진 사람이며, 자신들의 자녀도 다른 가정의 자녀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같은 백성이라는 관계가 경제적 압박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노예로 넘기다」는 것은 경제적 빚 때문에 가족의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채무 노역 제도와 현대의 인종 기반 영구 노예제를 제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본문에 나타난 강제성과 고통을 약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느헤미야는 화를 냈지만, 먼저 생각했다

느헤미야 5:6–8 본문 →

분노 다음에 오는 뜻밖의 행동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다.느헤미야 5:6 · 본디새김

외부의 적들이 공격을 모의했을 때 그는 경비를 세우고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일을 듣고는 몹시 분노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한 뒤 귀족들과 관리들을 따져 나무라며 말했다. 「여러분은 저마다 자기 형제에게 이자를 물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상대로 큰 모임을 소집했다.느헤미야 5:7 · 본디새김

그는 여전히 귀족들과 관리들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를 생각한 뒤 행동합니다.

느헤미야의 분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분노가 향하는 곳은 무분별한 공격이 아니라 책임을 묻고 현실을 바꾸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출애굽기 22:25에서는 가난한 백성에게 돈을 빌려줄 때 채권자처럼 가혹하게 대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25:35–37에서는 형제가 가난해져 경제적으로 무너지면 그를 붙들어 주어 함께 살게 하고, 그에게 이자나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23:19–20 역시 같은 이스라엘 형제에게 돈이나 양식 등의 이자를 받지 말라고 규정합니다.

이 말씀들의 공통된 관심은 단순히 금융 거래의 형식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난해진 형제를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궁핍이 누군가의 재산을 늘리는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신명기 15:7–11은 이스라엘 형제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손을 넉넉히 펴서 필요한 것을 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그 말씀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또한 아모스 2:6–7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을 팔고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는 행위를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선포합니다. 느헤미야 5장의 경제적 불의는 이런 율법과 예언자의 가르침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모든 채무 관계를 이 구절 하나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금융 제도와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는 같은 구조가 아니며, 대출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 느헤미야 5장의 착취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른 민족에게서 사들인 형제를 다시 팔 것인가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힘이 닿는 만큼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까지 여러분의 형제들을 팔고, 그들이 우리에게 팔려 온단 말입니까?」 그들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느헤미야 5:8 · 본디새김

밖에서 노예가 된 형제들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동안, 안에서는 새로운 형제들이 노예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다시 사들여야 한다면 앞서 했던 속량의 일이 무색해집니다.

한쪽에서 자유롭게 해 준 형제를 다른 쪽에서 다시 노예로 만드는 공동체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회복되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레위기 25:39–43은 가난 때문에 자신을 팔게 된 이스라엘 형제를 일반적인 노예처럼 가혹하게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임시 거주자처럼 대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레위기 25:47–49에는 다른 사람에게 팔린 친족을 가까운 가족이 되찾아 올 수 있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구속과 형제 보호의 전통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형제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는 행위 하나에 있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형제를 보호해야 할 공동체가 오히려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질문은 그들의 재산과 권리에 관한 논쟁을 넘어, 그들이 같은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의 문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읽기 전통이 갈리는 부분을 포함합니다. 케티브와 케레에서 돈을 부과하거나 빚을 거두는 행위를 나타내는 형태가 달라지며, 문맥상 채무와 이자 징수에 관한 책망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본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출 계약을 가리키는지, 모든 채권자가 같은 방식의 이자를 받고 있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제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그들을 더욱 압박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느헤미야 5:9–11 본문 →

외부의 모욕보다 먼저 바로잡아야 할 일

나는 말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적인 민족들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느헤미야 5:9 · 본디새김

느헤미야 4장에서 사람들은 외부의 적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위대하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적들의 위협 앞에서 담대하게 행동하는 것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자기 형제를 경제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외부의 적과 싸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형제를 노예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다면, 그들의 삶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웃을 억압하는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창피하니 숨기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의 행동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외부의 모욕은 그 잘못이 가져오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다

「나와 내 형제들과 내 시종들도 그들에게 은과 곡식을 빌려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자를 받고 빌려 주는 일을 그만둡시다.」느헤미야 5:10 · 본디새김

그는 「여러분은 그만두십시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만둡시다」라고 말합니다. 자신 역시 돈과 곡식을 빌려주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그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담을 함께 바로잡자고 요구합니다.

「부디 오늘 당장 그들에게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나무와 집을 돌려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들에게서 받고 있는 이자, 곧 은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새 기름의 백분의 일도 돌려주십시오.」느헤미야 5:11 · 본디새김

느헤미야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루어져야 할 반환을 요구합니다. 이미 재산을 잃고 자녀까지 노예로 넘긴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막연한 선의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과 생산물이 채권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제는 그 흐름을 되돌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요구한 회복은 잘못을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으로 빼앗긴 것을 돌려주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대목은 희년의 정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25장에서 땅과 가족의 회복을 다루는 규정들은 이스라엘의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살아가야 했습니다(레위기 25:23).

다만 느헤미야가 정식 희년을 선포했다거나, 여기서 요구한 반환이 희년 제도의 모든 조항을 그대로 시행한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보다 분명한 연결은 가난해진 형제를 붙들어 주고, 그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기반을 빼앗지 말라는 율법의 정신입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이 느헤미야 자신도 불법적인 이자를 받고 있었다는 뜻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원문의 문맥에서 그가 자신과 동료들의 대여 행위를 언급한 뒤, 공동체 전체가 문제 되는 채권 징수를 그만두자고 제안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으로 빌려주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11절의 「백분의 일」이 매달 부과된 1퍼센트였는지, 매년 부과된 1퍼센트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연이율 12퍼센트처럼 환산하거나 당시의 일반적인 이자율과 비교하는 것은 이 본문만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구절을 이자의 특정 몫을 돌려주거나 면제하라는 요구로 읽는 데에도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약속을 실제로 지키게 하다

느헤미야 5:12–13 본문 →

「돌려주겠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충분했을까?

그들이 말했다. 「돌려주겠습니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제사장들을 부르고,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이 말대로 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느헤미야 5:12 · 본디새김

이 장면은 8절과 대조됩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형제들을 다시 노예로 팔겠느냐고 책망했을 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침묵하던 사람들이 반환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의 대답만으로 일을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사적 합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맹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아 자신의 약속을 확증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맹세를 어기는 것은 사람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을 저버리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재산을 돌려준다는 것은 실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순간적으로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마음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약속을 공개적인 책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옷자락을 털어 보여 준 경고

느헤미야는 이어서 독특한 행동을 합니다.

나는 또 내 옷자락을 털며 말했다. 「이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하나님께서 그의 집과 애써 얻은 것에서 이처럼 털어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이처럼 털려 나가 빈털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온 회중이 「아멘.」 하고 말하며 여호와야훼를 찬양했다. 백성은 이 말대로 했다.느헤미야 5:13 · 본디새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밭과 포도원과 집을 잃었습니다. 채권자들은 그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채권자들 자신이 집과 재산을 잃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실제로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맹세를 어기는 사람을 심판해 달라는 상징적인 저주의 선언입니다.

느헤미야의 책망이 아무리 훌륭해도 실제로 바뀐 것이 없다면 문제는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공개적인 맹세와 찬양 역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약속대로 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에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자리는 가난한 형제에게서 빼앗긴 것을 돌려주기로 한 약속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성벽 재건을 둘러싼 외부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공동체 내부의 불의 가운데 하나가 바로잡혔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총독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총독이 자기 몫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

느헤미야 5:14–16 본문 →

이야기는 12년의 회고로 넘어간다

또 왕이 나에게 유다 땅에서 그들의 총독이 되라고 명령한 날부터, 곧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부터 제32년까지 12년 동안, 나와 내 형제들은 총독에게 배정된 양식을 먹지 않았다.느헤미야 5:14 · 본디새김

이 절에서 시간의 범위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 기록은 13절 직후에 12년이 흘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술자가 성벽 재건 당시의 일을 설명하다가, 자신이 총독으로 지낸 기간 전체를 돌아보는 회고를 덧붙인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요구했는지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가 같은 원칙을 자신의 권력과 경제생활에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총독에게 배정된 양식」은 총독의 직무에 따라 제공되는 몫으로 이해됩니다. 구체적인 징수와 지급 방식까지는 알 수 없지만, 느헤미야가 공식적인 지위에 따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그 몫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총독들도 그랬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나보다 앞서 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들에게서 은 마흔 세겔에 더해 빵과 포도주를 받아 냈다. 그들의 시종들도 백성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느헤미야 5:15 · 본디새김

총독의 권력은 행정적 지위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도 백성에게 부담을 줄 수 있었습니다.

9절에서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같은 이유로 총독의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물리는 사람이든, 백성에게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총독이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원칙은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을 자신의 권력에도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권력이 없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권력이 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땅을 사들이지 않았다는 말

나는 또 이 성벽 공사에 힘을 쏟았고, 우리는 밭을 사들이지 않았다. 내 시종들도 모두 공사를 하려고 그곳에 모여 있었다.느헤미야 5:16 · 본디새김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갚지 못해 밭과 포도원을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남들이 잃어버리는 땅을 사들일 수 있습니다. 특히 행정적 권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왜 모든 토지 매입을 피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토지를 소유하거나 구입하는 행위 자체가 악하다는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은 빚 때문에 자신의 땅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독은 그 시기에 자기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밭을 사들이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그가 맡은 권력을 개인적인 경제적 이익과 어떻게 구별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 절에서 이전 총독들의 시종들은 백성 위에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시종들은 공사에 모여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지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람들도 공동체의 일에 투입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은 마흔 세겔과 빵과 포도주에 관한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은 마흔 세겔을 받고 그 외에 음식과 포도주를 더 거두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거둔 음식과 포도주의 가치가 은 마흔 세겔이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금액이 어떤 주기로 부과되었는지, 한 가정에 부과된 것인지 다른 행정적 단위의 부담을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금액을 현대 화폐로 환산하거나 가구당 세금 부담을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150명이 앉은 총독의 식탁

느헤미야 5:17–18 본문 →

총독의 몫을 받지 않았는데 식탁은 풍성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총독에게 배정된 양식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뜻밖입니다.

유다 사람들과 관리들 모두 150명, 그리고 우리 주변 민족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온 사람들이 내 식탁에서 먹었다.느헤미야 5:17 · 본디새김
하루에 소 한 마리와 양과 염소 가운데 고른 여섯 마리, 그리고 새들도 나를 위해 마련되었다. 열흘마다 온갖 포도주도 넉넉히 마련되었다.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총독에게 배정된 양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노역이 이 백성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느헤미야 5:18 · 본디새김

느헤미야가 묘사하는 식탁은 결코 검소한 식탁이 아닙니다.

먼저 본문은 느헤미야가 모든 음식을 직접 생산했다거나, 그 비용을 어떤 재산에서 얼마나 지출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많은 음식을 전적으로 그의 개인 재산으로 충당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식탁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한 자리로 이해하는 것도 본문에 없는 내용을 보태는 것입니다. 참석자로 명시된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과 관리들, 그리고 주변 민족들 가운데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음식의 양 자체보다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을 누구에게 부담시켰는가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식탁의 규모를 자랑하기 위해 이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그런 비용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백성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통치나 행정에 드는 정당한 비용이 언제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역시 많은 사람을 접대하고, 시종들을 거느리며, 성벽 재건을 조직했습니다.

그가 총독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몫보다, 이미 힘겨운 백성이 더 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앞부분의 귀족들과 총독의 차이

한쪽은 자기에게 있는 경제적 권한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부담을 늘렸습니다. 다른 쪽은 자신에게 허용된 권리를 포기하여 다른 사람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이 차이는 단지 탐욕스러운 사람과 관대한 사람의 성격 차이가 아닙니다.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채권자는 돈을 빌려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일정한 요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총독은 행정 책임자였기 때문에 백성에게서 일정한 몫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떤 권한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권한을 행사하는 일이 언제나 옳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 줍니다.

그는 경제적 거래와 공적 권한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기준 아래 놓습니다.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미 고통받는 사람에게 어떤 부담을 주는지 살펴야 합니다.

「저의 하나님, 기억해 주십시오」

느헤미야 5:19 본문 →

느헤미야 5장은 기도로 끝납니다.

「저의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위해 한 모든 일을 저에게 선이 되도록 기억해 주십시오.」느헤미야 5:19 · 본디새김

여기서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있다는 교리가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점도 지워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기도는 앞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때 반복했던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라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12–13절에서 귀족들과 관리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를 바랐습니다. 19절에서는 느헤미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기억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 두 장면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일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경제적 불의와 통치자의 권한을 다루면서 반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맺음 — 누군가의 밭이 다시 그 사람의 것이 되다

느헤미야 5:1–19 본문 →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은 돌을 제자리에 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에는 빼앗긴 사람의 삶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도 포함됩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에게서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성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는 성벽의 높이를 재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 자기 밭을 되찾았는지, 누가 더 이상 부당한 요구를 받지 않게 되었는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의 부담을 덜어 주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느헤미야 5장의 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총독의 권위가 얼마나 높아졌는가가 아닙니다. 한때 자기 밭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그 밭을 돌려받고, 자기 형제에게 짓눌렸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회복을 위해 총독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마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이 백성을 위해 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