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5–29장 · 히스기야 때의 잠언

누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가

잠언 28장은 달아나는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악한 이는 뒤쫓는 자가 없어도 달아나지만, 의로운 이들은 젊은 사자처럼 자신만만하다」(1절).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뜻밖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악한 이들이 일어서면 사람들은 몸을 숨기지만, 그들이 망하면 의로운 이들이 많아진다」(28절).

처음에는 악인이 달아납니다. 마지막에는 악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숨습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그 원인은 서로 다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뒤쫓는 이가 없는데도 달아납니다. 마지막의 사람들은 실제로 두려워할 이유가 있어서 숨습니다. 악이 개인의 행실에 머물 때에는 그 사람 자신의 평안을 무너뜨리지만, 악이 권력을 얻으면 다른 사람들의 평안까지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잠언 28장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넘어섭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악이 어떻게 가정을 망가뜨리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파괴하며, 마침내 온 사회를 두려움 속에 살게 만드는지 보여 줍니다.

그 반대편에는 의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잘못을 숨기지 않고, 부자가 되는 데 서두르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무조건 믿지 않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합니다.

무엇이 한 사람을 참으로 담대하게 만듭니까? 재물입니까, 권력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옳다는 확신입니까?

잠언 28장은 하나의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잠언들이 이어지면서, 앞서 나온 생각을 새로운 자리에서 다시 비추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장은 잠언 25:1에서 시작하는 모음집에 속합니다. 그 머리말은 솔로몬의 잠언들을 유다 왕 히스기야의 사람들이 옮겨 적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장에 왕과 통치자에 관한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모음집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28장의 개별 잠언들이 히스기야 시대의 특정 사건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의 1–3절은 악과 의로움이 개인의 평안, 정치적 안정,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4–9절에서는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서 오는지 묻고, 10–14절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속이는지 드러냅니다. 15–18절에서는 통치자의 폭력과 피 흘린 죄가 등장하면서 악의 결과가 더욱 무거워집니다. 마지막 19–27절은 일, 재물, 말, 가족관계,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일상의 선택을 살핍니다. 그리고 28절은 다시 악인의 권력과 의인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이 흐름에는 반복되는 네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달아나는 발, 비뚤어진 길, 듣거나 닫는 귀, 보고도 외면하는 눈입니다. 잠언은 추상적인 도덕 원칙을 말하면서도 사람의 실제 몸짓을 통해 그 원칙이 어떤 삶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5분소단락 828장 본문 읽기 →

뒤쫓는 사람이 없어도 달아나는 사람

잠언 28:1–3 본문 →

보이지 않는 추격자와 젊은 사자

악한 이는 뒤쫓는 자가 없어도 달아나지만, 의로운 이들은 젊은 사자처럼 자신만만하다.잠언 28:1 · 본디새김

1절의 첫 문장은 역설입니다. 위험이 있어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추격자가 없는데도 달아납니다.

이것은 악인이 반드시 심리적인 죄책감을 느낀다는 진단이라기보다, 악이 만들어 내는 불안정한 삶을 그린 지혜의 초상입니다. 사람을 속이고 해치며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지킬 확실한 토대를 갖지 못합니다. 자신이 남에게 행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뒤쫓고 있는지보다 누구도 믿기 어려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반대편의 의인은 「젊은 사자처럼 자신만만하다」. 젊은 사자는 힘이 넘치고 다른 짐승의 움직임에 쉽게 위축되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인의 담대함을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나, 자기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태도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같은 장의 14절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고, 26절은 자기 마음을 신뢰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절의 담대함과 14절의 두려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불의한 삶이 만들어 내는 불안과 대조되는 담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경계심입니다.

의인의 담대함은 자신이 틀릴 수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굳이 거짓으로 지탱할 필요가 없다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데 사자의 이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5절에 이르면 악한 통치자가 으르렁대는 사자로 등장합니다. 같은 짐승의 힘이 한쪽에서는 의인의 담대함을, 다른 쪽에서는 약한 사람을 위협하는 권력을 나타냅니다. 무엇이 그 힘을 움직이는가에 따라 사자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많아지는데도 나라가 불안한 이유

2절은 갑자기 개인의 마음에서 나라의 운명으로 시야를 넓힙니다.

나라의 반역으로 그 통치자들이 많아지지만, 분별 있고 아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바른 질서가 오래간다.잠언 28:2 · 본디새김

보통 통치자가 많으면 나라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통치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안정적인 통치 역량이 늘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역과 혼란 속에서 통치자가 거듭 바뀌거나 권력이 분열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정치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통치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곧 나라가 안정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후반절은 분별 있는 사람에 의해 통치의 질서가 오래 유지된다는 읽기와, 나라 또는 그 통치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앞뒤의 대조가 보여 주는 방향은 같습니다. 나라는 통치자들의 경쟁이나 권력의 빈번한 교체만으로 굳건해지지 않습니다. 분별과 지식이 통치를 지탱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17:14–20에서 왕에게 요구한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군사력과 재물을 끝없이 늘리는 대신,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가까이 두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야 했습니다. 왕도 자기 욕망이 아니라 자신보다 높은 기준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억누를 때

3절은 더욱 뜻밖의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는 가난한 사람은 먹을거리를 남기지 않고 휩쓸어 버리는 비와 같다.잠언 28: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가난하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은 아님을 드러냅니다.

농사를 짓는 사회에서 비는 본래 생명을 살리는 선물입니다. 땅을 적시고 곡식이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너무 거세게 쏟아져 모든 것을 쓸어 가는 비는 오히려 먹을거리를 없애 버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을 겪었다는 경험이 저절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마음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약자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도리어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을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조차 다른 사람에게 파괴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2절에서 나라의 질서를 이야기했다면, 3절은 그 질서가 왜 필요한지 보여 줍니다. 좋은 통치는 통치자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 후반절의 히브리어는 문장 구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켄은 여기서 바른 상태나 질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무엇이 정확히 오래 지속되는지는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칭찬하고 무엇에 맞서는가

잠언 28:4–9 본문 →

가르침을 버리면 악한 사람을 칭찬하게 된다

가르침을 버리는 이들은 악한 이를 칭찬하지만,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은 그들과 맞서 다툰다.잠언 28:4 · 본디새김

가르침을 버리는 행동이 곧바로 악한 사람을 칭찬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가르침을 버린 사람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사람을 본받을 만하다고 평가하는지까지 달라집니다.

여기서 「가르침」은 반드시 개별적인 법 조항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따라야 할 가르침과 지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부모의 가르침을 가리키기도 하고(잠언 1:8), 여호와야훼의 뜻에 근거한 삶의 기준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28장에서는 이 단어가 4절, 7절, 9절에 네 차례 나타납니다. 4절은 가르침을 버린 사람이 악을 칭찬한다고 말하고, 7절은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이 분별 있는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9절은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마저 역겹다고 선언합니다.

곧 가르침은 사회적 판단, 가정에서의 생활,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관통합니다. 무엇을 듣느냐가 무엇을 칭찬하는지를 결정하고, 결국 어떻게 사는지를 결정합니다.

4절의 「맞서 다툰다」는 표현은 지혜로운 사람이 언제나 갈등을 피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악이 칭찬받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이 반드시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때로는 악을 악이라고 말하고 그것에 맞서는 일이 가르침을 지키는 태도입니다. 다만 이 구절이 개인의 공격성이나 무분별한 대립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맞서는가가 중요합니다.

여호와야훼를 찾는 사람은 무엇을 이해하는가

5절은 그 판단의 근원을 밝힙니다.

악한 사람들은 공정한 판단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호와야훼를 찾는 이들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잠언 28:5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여호와야훼를 찾는 사람이 모든 분야의 지식을 갖게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장의 앞부분에 이미 이해해야 할 대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공정한 판단」입니다. 이 말은 재판의 판단뿐 아니라 정의로운 질서와 정당한 판결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뒷부분의 「모든 것」은 우선 이러한 정의와 올바른 판단에 필요한 것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악한 사람도 계산이 빠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거나 자기 이익에 유리한 판단을 내리는 데 능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정함을 이해하는 능력과 다릅니다.

여호와야훼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넘어 판단의 기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은 하나님을 찾는 태도와 정의를 이해하는 능력을 연결합니다.

제 온전함으로 걷는 가난한 이가 두 길이 비뚤어진 부자보다 낫다.잠언 28:6 · 본디새김

일반적인 사회적 평가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여기서 「온전함」은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 절대적 완전함이라기보다, 삶이 한 방향으로 곧게 유지되는 성실함과 정직함을 가리킵니다. 반대편의 「두 길이 비뚤어진」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행실이 나쁘다고 평탄하게 표현하지 않고, 두 길이 비뚤어져 있다는 모습을 남깁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적지만 곧은 길을 걷고, 부자는 가진 것이 많지만 그가 걷는 길 자체가 비뚤어져 있습니다.

지혜의 기준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가난을 이상화하거나 부유함을 죄로 규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만으로 사람의 지혜와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아들과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재물

7절에서는 이 원칙이 가정으로 들어옵니다.

가르침을 지키는 이는 분별 있는 아들이지만, 흥청망청 쓰는 이들과 어울리는 이는 제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한다.잠언 28:7 · 본디새김

아들이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느냐는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지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흥청망청 쓰는 이들」은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데 절제가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가르침을 따르는 삶과 욕망에 끌려다니는 삶이 대조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족은 재산과 생계, 사회적 명예가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였기에, 한 사람의 방종은 가족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주제는 24절에서 더욱 심각한 형태로 돌아옵니다. 거기서는 아들이 부모의 재산을 빼앗고도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재물의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봅니다.

이자와 웃돈으로 제 재산을 불리는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를 위해 그것을 모은다.잠언 28:8 · 본디새김

여기서 겨냥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궁핍을 이용해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뜻밖의 결말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모은 재물이 결국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이의 몫이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재산이 실제로 어떤 법적 절차를 통해 이전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잠언의 힘은 재물의 최종적인 가치를 뒤집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는 재산을 모으는 일을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하지만, 잠언은 그 재산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를 묻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짓누르며 모은 재물보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재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듣지 않는 귀와 드리는 기도

9절은 이 단락의 가장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가르침을 듣지 않으려 귀를 돌리는 이의 기도마저 역겹다.잠언 28:9 · 본디새김

기도는 하나님께 말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먼저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는 일이 문제 됩니다. 자신은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는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이 구절은 기도의 문장이나 형식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삶이 자신이 듣기를 거부한 가르침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사야 1:15–17에서도 이와 유사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는 불의한 삶을 지속하는 백성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악한 행위를 그치고 공정을 추구하며 억눌린 사람을 도우라고 요구하십니다. 두 본문 모두 예배와 윤리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불의를 지속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만은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은 하나님께 듣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르침」은 히브리어 토라(⁨תּוֹרָה⁩)입니다. 「공정한 판단」은 히브리어 미슈파트(⁨מִשְׁפָּט⁩)입니다. 6절의 「두 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드라카임(⁨דֶּרֶךְ⁩)은 길을 뜻하는 말의 쌍수 형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반드시 두 가지 특정한 잘못이나 이중생활의 증거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어떤 두 길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8절의 배경으로, 율법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족을 돕기 위한 대여에서 이자를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합니다(출애굽기 22:25, 레위기 25:35–37). 신명기 23:19–20은 이자에 관한 규정을 상대방의 범주에 따라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잠언 28:8을 모든 시대의 모든 금융거래에 대한 일률적인 금지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이 놓인 법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일보다 더 위험한 자기기만

잠언 28:10–14 본문 →

다른 사람을 빠뜨리려고 판 구덩이

10절은 악의 결과를 구덩이라는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곧은 이들을 나쁜 길로 잘못 이끄는 이는 자기 구덩이에 스스로 빠지지만, 온전한 이들은 좋은 것을 물려받는다.잠언 28:10 · 본디새김

악인은 단순히 자기 길을 잘못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곧은 길을 걷는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앞의 4절에서 가르침을 버리는 사람이 악한 사람을 칭찬했다면, 이제는 그 악이 다른 사람의 행실까지 바꾸려 합니다.

그런데 악인이 준비한 구덩이는 결국 그 자신이 빠지는 자리가 됩니다.

이러한 역전은 시편 7:15–16에도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함정을 판 사람이 도리어 그 함정에 빠집니다. 이 말은 모든 악행이 현세에서 곧바로 같은 방식의 보복을 받는다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악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 위해 만든 구조가 결국 악을 행하는 사람 자신까지 위협한다는 도덕적 통찰입니다.

11절은 더욱 미묘한 종류의 위험을 다룹니다.

부자는 자기 눈에 지혜롭지만, 분별 있는 가난한 이는 그를 꿰뚫어 본다.잠언 28:11 · 본디새김

이 잠언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문제는 부유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눈에 지혜롭다」는 데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의 말이 더 쉽게 받아들여지고, 그가 내리는 판단에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도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재물을 얻은 능력과 모든 사안을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혼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 있는 가난한 사람은 그를 꿰뚫어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 단순히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정도를 넘어, 부자의 겉모습 아래 있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어도 그 사람의 생각을 언제나 옳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몸을 숨기는 사회

12절은 다시 사회 전체를 비춥니다.

의로운 이들이 기뻐할 때 영광이 크지만, 악한 이들이 일어서면 사람들은 몸을 숨긴다.잠언 28:12 · 본디새김

여기서 「영광이 크다」는 말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명예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사회에 나타나는 공적인 영예와 번영을 생각하게 합니다.

악인이 권력을 얻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재산, 심지어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서 숨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악인의 득세가 공동체의 자유로운 삶을 위축시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악이 권력과 결합할 때, 다른 사람들의 삶의 공간까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숨기는」 행위가 전혀 다른 대상에 적용됩니다.

죄를 덮으면 숨겨지지만, 고백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제 죄들을 덮어 두는 이는 잘되지 못하지만,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리는 이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잠언 28:13 · 본디새김

앞 절에서는 사람들이 악한 권력을 피해 몸을 숨겼습니다. 이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 죄를 숨깁니다. 누군가는 악 때문에 숨어야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저지른 악을 숨기려 합니다.

「고백하다」와 「버리다」는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떠나는 행동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잘못을 고백하지만 계속 붙잡고 있다면, 잠언이 그리는 모습은 아직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말은 의외로 따뜻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버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순히 벌을 면할 가능성이 아니라 「불쌍히 여김」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덮어 두는 것과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 주시는 것은 다릅니다.

이 차이가 회개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회개는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시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 약속이 고백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죄를 인정하는 일과 죄에서 떠나는 일을 함께 요구합니다.

왜 두려워하는 사람이 복된가

늘 두려워하는 사람은 복되지만, 제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이는 재앙에 빠진다.잠언 28:14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사자처럼 자신만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합니다. 이 역설을 풀어 주는 열쇠는 후반절의 「제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모든 상황에 겁을 먹고 살아가는 불안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두려움의 대상을 직접 명시하지 않지만,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태도와 대조된다는 점에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그 결과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자기 잘못이 드러나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반면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돌아볼 여지가 있습니다.

참된 담대함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강한 마음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버릴 수 있기에 자기 삶을 거짓으로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태도입니다.

이제 잠언은 그렇게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과 13절이 같은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이어 나타나는 두 장면은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고백하다」는 야다에서, 「버리다」는 아자브에서 나온 형태입니다. 13절은 시편 32:1–5와 함께 읽으면 한층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시편 32편에서는 죄를 숨기고 있을 때의 고통과 죄를 인정했을 때의 용서가 대비됩니다. 1절은 죄가 덮이는 일을 복으로 말하는데, 5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죄악을 감추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잠언 28:13의 「덮어 두는」(⁨כָּסָה⁩)과 시편 32:1의 죄가 「덮이는」 데에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 카사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주체가 다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덮으려는 것은 죄를 감추는 행동이고, 시편에서 죄가 덮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본문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자비를 베푸는지 상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잠언 전체에서 여호와야훼가 인간의 길을 살피시고 의와 악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자비를 하나님과 분리해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14절의 완고함은 출애굽기의 파라오를 떠올리게 합니다. 파라오는 반복적으로 경고를 받고도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 했습니다(출애굽기 7–11장). 출애굽기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행동과 파라오 자신의 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완고함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자가 왕이 되고, 사람의 피가 흘러갈 때

잠언 28:15–18 본문 →

백성에게 으르렁대는 통치자

가난한 백성을 다스리는 악한 이는 으르렁대는 사자와 덤벼드는 곰과 같다.잠언 28:15 · 본디새김

1절의 젊은 사자가 다시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자가 의로운 사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악한 통치자를 나타냅니다. 1절의 사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였지만, 15절의 사자는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사자가 내는 위협적인 소리와 곰이 덤벼드는 움직임이 결합하면서, 통치자는 백성을 보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이 피해야 할 맹수가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과 통치자는 군사력과 재판권, 조세 및 노동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한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데 쓰일 수도 있지만, 거꾸로 약한 사람에게서 마지막 생계 수단까지 빼앗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잠언이 굳이 「가난한 백성」을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권력의 폭력은 누구에게나 해롭지만, 자신을 방어할 자원과 연결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더욱 치명적입니다.

15절은 백성을 보호해야 할 권력이 백성을 잡아먹는 힘으로 변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분별이 없는 통치자는 왜 착취하는가

분별이 모자란 지도자는 착취를 많이 하지만, 부당한 이득을 미워하는 이는 오래 산다.잠언 28:16 · 본디새김

착취는 단순히 악한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분별의 부족과 연결됩니다. 통치자가 눈앞의 이익만을 본다면 백성에게서 최대한 많이 빼앗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재물은 공동체의 생산력과 신뢰를 무너뜨리고, 장기적으로는 통치의 토대 자체를 약하게 만듭니다.

2절에서는 분별과 지식이 바른 질서를 오래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16절에서는 부당한 이득을 미워하는 태도가 오래 사는 길과 연결됩니다. 후반절의 주체를 앞의 지도자와 연결하면 통치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되며, 일반적인 삶의 원칙으로 읽더라도 부당한 이득을 멀리하는 것이 삶을 지키는 길이라는 대조는 유지됩니다.

예레미야 22:13–17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는 부당한 노동과 탐욕으로 자기 집을 세우는 왕의 행동을 꾸짖으시고,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의 권리를 돌보는 일이 올바른 왕의 통치와 관계있음을 밝히십니다. 왕이 얼마나 큰 건물을 지었는가보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피를 흘린 죄와 멈출 수 없는 도주

17절은 갑자기 한 사람의 피 흘린 죄로 시야를 좁힙니다.

한 사람의 피를 흘린 죄에 짓눌린 이는 구덩이에 이를 때까지 달아난다. 아무도 그를 붙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잠언 28:17 · 본디새김

여기서 1절의 「달아난다」는 표현이 다시 나타납니다. 장 전체를 열었던 악인의 도주가 이제 더 심각하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아무도 그를 붙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역시 무겁습니다. 이 말씀을 곧바로 사적인 보복이나 폭력을 허락하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35:9–34는 고의적인 살인과 의도하지 않은 죽음을 구분하며, 피 흘린 사건을 판단하는 절차도 규정합니다. 본문 자체가 구체적인 법적 절차를 규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책임을 외면한 채 파멸의 결과에서 보호해 주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13절의 자비와 17절의 책임 사이에 중요한 긴장이 생깁니다. 잠언은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피 흘린 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자비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서로 반대되는 가치가 아닙니다.

두 길 가운데 한 길에서 넘어지다

온전하게 걷는 이는 구출되지만, 두 길이 비뚤어진 이는 그중 한 길에서 넘어진다.잠언 28:18 · 본디새김

6절에서는 온전하게 걷는 가난한 사람이 두 길이 비뚤어진 부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길들의 결과가 제시됩니다. 길이 비뚤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목적지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길 자체가 넘어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마지막 표현인 「그중 한 길에서」는 해석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 베에하트를(⁨אֶחָד⁩) 앞의 두 길 중 하나에 연결하면, 비뚤어진 길들 가운데 한 길에서 넘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한꺼번에 또는 갑자기 넘어진다는 방식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앞의 「두 길」이라는 표현을 살린 본디새김의 번역은 문장 안의 연결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다른 읽기는 넘어짐의 갑작스러움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이든 비뚤어진 길에는 결국 넘어짐이 따른다는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 잠언은 통치자의 폭력과 생명을 빼앗는 죄에서 벗어나, 훨씬 평범한 일상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삶을 무너뜨리는 뿌리는 같습니다. 욕망이 판단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 첫부분의 히브리어는 표현이 압축적이어서 문법적 관계를 세밀하게 풀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피의 책임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으며, 구덩이를 향해 달아난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구덩이」가 여기서 죽음의 종착점을 가리키는지, 심판과 파멸을 형상화하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처형 방식이나 도주 경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배부를 것인가

잠언 28:19–22 본문 →

땅을 일구는 사람과 헛된 것을 뒤쫓는 사람

제 땅을 일구는 이는 먹을거리로 배부르지만, 헛된 것들을 뒤쫓는 이는 가난으로 배부르다.잠언 28:19 · 본디새김

잠언은 여기서 단순히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대비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기 땅을 일굽니다. 땅을 일군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결과를 얻을 수 없는 일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땅을 돌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날씨와 계절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헛된 것들」은 빈 것들을 뜻할 수도 있고, 실속 없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산적인 일을 버리고 허황된 일을 추구한다는 의미와, 빈둥거리는 사람들의 무리를 따라다닌다는 의미가 모두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는 실제로 삶을 지탱하는 일을 지속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토대가 없는 것을 뒤쫓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두 사람 모두 배부르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는 먹을거리로 배부르고, 다른 하나는 가난으로 배부릅니다.

가난으로 배부르다는 것은 가난이 넘칠 만큼 가득해진다는 풍자적인 표현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결국 자신이 추구한 삶의 방식에 걸맞은 결과를 충분히 얻게 된 셈입니다.

잠언은 노력하면 반드시 부자가 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삶을 지탱하는 성실한 노동과 실체 없는 것을 쫓는 행동의 차이에 초점을 맞춥니다.

부자가 되려는 속도가 빠를수록 보지 못하는 것

신실한 사람에게는 복이 많지만, 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이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잠언 28:20 · 본디새김

여기서 첫 번째 사람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한순간에 큰 성과를 내는 능력보다, 믿을 만한 태도를 지속한다는 데 있습니다.

본문은 재산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부유해지는 일을 지나치게 서두르며,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기준을 잃어버리는 태도입니다.

22절은 이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그립니다.

인색한 사람은 재물을 얻으려고 서두르며, 궁핍이 자기에게 닥칠 줄은 모른다.잠언 28:22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인색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기를 꺼리고 자신의 재물을 움켜쥐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의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돈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보면서,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보지 못합니다.

탐욕은 원하는 것을 크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 밖의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무너지는 공정함

20절과 22절 사이에는 21절이 놓여 있습니다.

얼굴을 보아 편드는 것은 좋지 않다. 사람은 빵 한 조각 때문에 죄를 짓는다.잠언 28:21 · 본디새김

얼굴을 보아 편든다는 것은 사람의 지위나 관계,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재판에서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당하게 편들어서도 안 되고, 힘 있는 사람이라고 편들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레위기 19:15). 중요한 것은 누구의 얼굴을 보고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공정한가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갑자기 빵 한 조각을 언급합니다.

사람은 거대한 재물을 얻기 위해서만 자신의 판단을 팔지 않습니다. 빵 한 조각처럼 하찮게 보이는 이익 때문에도 공정함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빵 한 조각은 반드시 굶주린 사람이 생존을 위해 저지르는 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부분의 편파적인 판단과 연결하면, 지극히 작은 이익에도 사람이 공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9절에서는 땅을 일구는 사람이 먹을거리로 배부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빵 한 조각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자기 땅에서 먹을거리를 얻고, 다른 사람은 공정함을 희생하면서 작은 이익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말 사람을 풍족하게 만듭니까? 잠언은 재물의 액수만으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헛된 것들」은 히브리어 레킴(⁨רֵיק⁩)입니다. 20절의 「신실한 사람」에 쓰인 히브리어 에무노트(⁨אֱמוּנָה⁩)는 신실함과 충실함의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듣기 싫은 말과 보기 싫은 사람

잠언 28:23–27 본문 →

아첨보다 책망이 더 큰 호의를 얻는 이유

사람을 책망하는 이는 나중에 혀로 아첨하는 이보다 더 많은 호의를 얻는다.잠언 28:23 · 본디새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불편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잠언은 시간이 흐른 뒤에 드러나는 차이를 보여 줍니다.

아첨하는 사람은 당장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을 숨기거나 잘못된 판단을 강화한다면, 듣는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 책망하는 사람은 당장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망이 정당하고 유익하다면, 나중에는 오히려 더 큰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나중에」(⁨אַחַ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읽기가 쉽지 않아, 시간적인 의미 외에 「뒤로 돌아서는」 사람을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분석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시간적 의미를 채택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지금 듣기 좋은 말과 나중에 가치가 드러나는 말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이 구절이 거칠고 부정확한 비난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4절과 연결됩니다. 가르침을 버리는 사람은 악한 이를 칭찬하지만,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은 악에 맞섭니다.

좋은 말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듣기 좋은 말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의 재산을 빼앗고도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24절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것을 빼앗고도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파괴하는 사람의 동료다.잠언 28:24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 잘못이 결합됩니다. 첫째는 부모의 것을 빼앗는 행동입니다. 둘째는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탐욕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책임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를 존중하라는 계명(출애굽기 20:12)은 단순히 공손한 말투를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부모를 향한 실제적인 책임과도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더구나 「죄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행동을 평가하는 기준까지 스스로 바꿉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선언하기 시작하면, 그 행동을 고쳐야 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13절에서는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사람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잠언은 그를 단순히 불효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파괴하는 사람의 동료」라고 부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신뢰와 책임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그 자체로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큰 사람과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

25절에 이르면 재물과 관계의 문제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욕심이 큰 이는 다툼을 부추기지만,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이는 풍족해진다.잠언 28:25 · 본디새김

「욕심이 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넓은 영혼」 또는 「넓은 욕구」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문맥에서는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다른 사람의 몫을 인정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욕심은 관계를 경쟁으로 바꾸고, 경쟁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재산이 늘어난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은 지나칩니다. 이 장에는 가난하면서도 온전하게 걷는 사람이 있고(6절), 착취당하는 가난한 백성도 있습니다(15절). 여기서 핵심적인 대조는 무엇을 의지하는가에 있습니다.

욕심이 큰 사람은 자신이 더 많이 차지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과 삶의 근거를 끝없이 소유하는 데서만 찾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26절은 25절의 신뢰라는 주제를 이어받습니다.

제 마음을 신뢰하는 이는 어리석은 이지만, 지혜로 걷는 이는 빠져나온다.잠언 28:26 · 본디새김

25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26절에서는 자기 마음을 신뢰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잠언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살피는 일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할 수 있고(11절), 부모의 것을 빼앗은 사람도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4절).

그러므로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모든 확신을 따르는 태도와 다릅니다. 지혜롭게 걷는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가르침을 듣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고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직 새로운 가르침이 들어올 여지가 있습니다.

눈을 가리는 순간 사라지는 사람

27절은 이 장에서 가장 구체적인 행동 하나를 보여 줍니다.

가난한 이에게 주는 이는 부족함이 없지만, 제 눈을 가리는 이는 저주를 많이 받는다.잠언 28:27 · 본디새김

여기서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행동은 단순히 주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제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심리적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가리는 행동은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11절에서 부자는 자기 눈에 지혜로웠습니다. 22절에서는 인색한 사람이 재물을 얻으려고 서두르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궁핍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27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자기 눈을 가립니다. 이 세 장면은 모두 자신의 욕망과 판단에 갇힌 사람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27절은 신명기 15:7–11과 깊이 연결됩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거나 손을 닫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을 인색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않는 태도를 경고합니다. 신명기와 잠언은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손을 닫는 사람, 인색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눈 자체를 가려 버리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의 존재를 보지 못한 척하는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욕심이 큰」은 히브리어 레하브(⁨רָחָב⁩) 네페시(⁨נֶפֶשׁ⁩)입니다. 27절의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나누어 주는 모든 금액이 물질적으로 되돌아온다는 계산식이 아닙니다. 잠언 특유의 지혜로운 삶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입니다. 신명기 15장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여호와야훼의 구원과 돌보심에 의존해 살아가는 백성임을 기억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말아야 했습니다(신명기 15:7–15).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궁핍을 볼 수 있는 눈과 연결됩니다.

마지막 장면: 숨어 있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난다

잠언 28:28 본문 →

악한 이들이 일어서면 사람들은 몸을 숨기지만, 그들이 망하면 의로운 이들이 많아진다.잠언 28:28 · 본디새김

12절과 거의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만, 마지막에는 새로운 장면이 덧붙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악인들이 사라진 자리를 의인들이 차지한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부분에서 악인이 권력을 잡았을 때 사람들이 몸을 숨겼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의로운 사람들이 다시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는 상황도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의 「많아진다」는 표현 자체는 수적인 증가를 뜻하므로, 이것을 숨어 있던 사람들이 단순히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로만 제한해서도 안 됩니다. 악한 권력이 물러나면서 의로운 삶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넓은 변화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자동으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자신의 삶을 드러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회는 개인에게만 용기를 요구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의롭게 살아도 두려움 때문에 숨어야 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다음 장인 잠언 29:2와도 맞닿습니다. 거기서는 의로운 사람이 많아질 때 백성이 기뻐하지만, 악한 사람이 다스리면 백성이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맺음말: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는 땅

잠언 28:1–28 본문 →

잠언 28장의 첫 장면에는 뒤쫓는 사람이 없어도 달아나는 악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악인들의 권력이 두려워 몸을 숨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의 장면 사이에서 잠언은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재물이나 권력, 자신의 확신은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이 장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은 5절과 25절에 직접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이 공정한가를 배우는 일입니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과 재물을 절대적인 의지처로 삼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책망을 들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재물과 판단, 지위를 삶의 최종적인 근거로 삼는 사람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더욱 많은 것을 움켜쥐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해치는 일로 변합니다.

물론 이러한 지혜를 따른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28장 자체가 가난한 의인과 착취당하는 백성의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의 지혜는 고난 없는 삶을 보장하는 공식이 아닙니다.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도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분별하도록 이끄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그 상태로 끝나지 않습니다.

악한 이들이 망하자 의로운 이들이 많아집니다.

한때 사람들이 몸을 숨겨야 했던 자리에, 이제 의로운 삶이 다시 자라날 여지가 생깁니다.

좋은 세상은 아무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의롭게 살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숨어야 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입니다.

잠언 28장은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 주면서 끝납니다. 악한 사람들의 권력이 사라지고, 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는 땅. 사람들이 자신을 숨기는 대신, 곧은 길을 걸으며 살아갈 수 있는 땅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