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25–29장 · 히스기야 때의 잠언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잠언 29장은 한 사람의 목에서 시작합니다.

거듭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뻣뻣하게 하는 사람은 갑자기 부서져 회복할 길이 없다.잠언 29:1 · 본디새김

그는 아무런 경고도 받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 번 책망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바꿀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목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부서집니다.

그런데 이 장을 읽다 보면 목을 뻣뻣하게 하는 사람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왕이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를 섬기는 사람들까지 악해집니다(12절).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과 송사를 벌여도 상대방이 성내고 웃어 대는 바람에 평온함을 얻지 못합니다(9절).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절제를 잃습니다(18절).

반대로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신실하게 듣는 왕은 나라를 굳게 세웁니다(14절). 책망을 받아들이는 삶에는 지혜와 기쁨이 따릅니다(15–17절). 그리고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는 마지막 기준으로 여호와야훼가 등장하십니다(26절).

이렇게 보면 잠언 29장의 중심에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들을 귀가 있습니까?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잠언은 단순히 말을 잘 듣는 것이 좋은 태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은 거절해야 하고, 누구의 말은 들어야 하는지 분별하도록 이끕니다. 아첨하는 말은 듣기 좋지만 덫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불편한 책망을 듣는 사람은 파멸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지혜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수 있는 태도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개인의 마음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왕과 신하 사이에서, 재판하는 사람과 억울한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잠언 28장이 악한 권력 아래서 사람들이 몸을 숨기는 장면으로 끝났다면, 29장은 그런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으로 바로 설 수 있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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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굽히지 않는 사람과 신음하는 백성

잠언 29:1–4 본문 →

거듭된 책망과 갑작스러운 파멸

1절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종류의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거듭」이라는 긴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라는 짧은 순간입니다. 책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반복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파멸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파멸이 갑자기 일어난다고 해서 그 원인까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경고를 거절한 결과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을 뻣뻣하게 한다」는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익숙한 완고함의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 32:9에서 여호와야훼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신명기 9:6도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같은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목을 굽히지 않는 짐승의 모습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끌어 가려 해도 목을 곧게 세워 방향을 바꾸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끌림 자체를 거절한다는 데 있습니다.

잠언 29:1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가르침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책망을 거절하기 때문에 망합니다.

물론 「회복할 길이 없다」는 표현을 사람이 한 번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교리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반복적인 경고를 끝내 거절하는 완고함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혜의 경고입니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토록 책망을 거절한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2절은 그 질문을 공동체 전체로 넓힙니다.

백성의 기쁨과 신음은 통치의 결과를 보여 준다

의로운 이들이 많아지면 백성이 기뻐하지만, 악한 이가 다스리면 백성이 신음한다.잠언 29: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통치의 결과를 왕의 입장이 아니라 백성의 반응으로 보여 줍니다. 왕이 얼마나 많은 땅을 정복했는지, 궁궐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재물이 얼마나 쌓였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백성이 기뻐하는가, 신음하는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의로운 이들이 많아지면」이라는 표현은 의로운 사람들이 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을 가리키며, 문맥상 그들이 영향력을 얻는 상황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행의 표현은 완전히 대칭적이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뒤에서는 악한 통치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한 사람의 악한 통치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복수와 단수의 차이만으로 특별한 정치 이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기쁨과 신음이 통치의 도덕적 성격과 연결된다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잠언이 개인의 윤리만을 다루는 책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의 의로움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공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영향이 훨씬 넓게 나타납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아들과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

3절은 갑자기 가정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제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만, 매춘하는 여자들과 어울리는 이는 재산을 탕진한다.잠언 29:3 · 본디새김

2절에서는 백성이 기뻐했습니다. 3절에서는 아버지가 기뻐합니다. 공동체의 기쁨과 가정의 기쁨이 나란히 놓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지혜는 단순히 배우거나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판단을 유용한 기술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고 좋은지를 배우는 일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편의 사람은 성적 관계를 좇다가 재산을 탕진합니다. 본문은 매춘하는 여자들과 어울리는 남자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비판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며 재산과 삶의 책임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문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잠언 5–7장에서 지혜의 가르침을 버리고 성적 유혹을 좇는 젊은이의 모습이 길게 묘사되었습니다. 29:3은 그 주제를 짧은 대조 속에 압축합니다. 지혜가 가족에게 기쁨을 주지만, 무절제한 욕망은 가족이 의지할 재산까지 소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굳게 세우는 왕과 허무는 사람

왕은 공정한 판단으로 나라를 굳게 세우지만, 공물을 거두는 사람은 나라를 허문다.잠언 29:4 · 본디새김

왕에게 나라를 굳게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요? 잠언은 군대나 성벽이 아니라 「공정한 판단」을 말합니다.

「공정한 판단」으로 옮긴 히브리어 미슈파트(⁨מִשְׁפָּט⁩)는 재판에서 내리는 판결뿐 아니라, 정의롭고 정당한 질서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왕이 나라를 굳게 세운다는 것은 백성의 삶을 지탱할 질서를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억울한 사람이 공정한 판단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편의 「공물을 거두는 사람」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뇌물을 받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지나친 공물이나 부담금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나라를 굳게 세우는 공정함과 나라를 허무는 재물의 요구를 대조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모든 조세 징수가 잘못이라는 주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나라는 단순히 외부의 적에게 공격받아서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나라를 안에서부터 허물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굳게 세우는 것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만이 아니라, 그 권력으로 누구의 삶을 지탱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공물을 거두는 사람」의 히브리어 표현은 이시 테루모트로, 문자적으로는 「공물들 또는 바쳐지는 것들의 사람」에 가깝습니다. 열왕기상 12:1–19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 시대의 무거운 부담을 덜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더 무거운 부담을 지우겠다고 대답했고, 결국 왕국은 분열되었습니다. 잠언 29:4가 그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왕이 백성의 부담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나라의 안정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달콤한 말이 어떻게 올가미가 되는가

잠언 29:5–7 본문 →

아첨하는 사람의 발 앞에 놓인 그물

5절은 통치자의 공적인 판단에서 이웃 사이의 말로 돌아옵니다.

제 이웃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펼친다.잠언 29:5 · 본디새김

아첨은 겉으로 보면 친절한 행동입니다.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 아첨을 그물에 비유합니다. 그물은 붙잡으려는 의도를 감추고 펼쳐 놓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들」에서 「그」가 아첨하는 사람인지 아첨받는 이웃인지는 문장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아첨받는 이웃을 가리킨다면 아첨은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덫입니다. 반대로 아첨하는 사람 자신을 가리킨다면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다가 스스로 덫에 걸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읽기 모두 아첨의 위험을 드러내지만 강조점은 다릅니다. 본디새김이 「그의 발」이라는 표현을 남겨 둔 것은 이러한 여지를 보존합니다.

그리고 6절은 그물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나쁜 사람의 죄에는 올가미가 있지만, 의로운 이는 환호하며 기뻐한다.잠언 29:6 · 본디새김

5절에서는 누군가의 발 앞에 그물이 펼쳐졌습니다. 6절에서는 악한 사람 자신의 죄에 올가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붙잡으려는 행동은 결국 자기 삶까지 얽어 놓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로운 사람에게는 환호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남을 속이는 데 성공해서 얻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을 조종하고 거짓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삶과 어울리는 기쁨입니다.

이 장의 첫부분에서 백성과 아버지가 기뻐했다면, 이제는 의로운 사람 자신이 환호합니다. 잠언은 의로운 삶이 단지 의무를 수행하는 고된 길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안다’는 것

의로운 이는 가난한 이들의 송사를 알지만, 악한 이는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잠언 29:7 · 본디새김

여기서 송사는 법적 주장이나 권리와 관련된 사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막연히 불쌍하다고 느끼는 태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부당한 일을 당했는지, 어떤 권리가 침해되었는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으로는 사람이 처한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겪는 일을 그 사람의 관점에서 살피고, 그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편의 악한 사람은 그 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것을 지능이 낮아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공정한 판단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23:6의 명령과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한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 그의 권리를 왜곡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7절이 보여 주는 의로움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억울함을 알려고 하는 관심과, 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공정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아는 것이 의로운 사람의 특징이라면,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신실하게 판결하는 것은 올바른 왕의 특징입니다(14절).

성읍을 들끓게 만드는 사람들

잠언 29:8–11 본문 →

조롱하는 사람은 왜 성읍 전체를 흔드는가

조롱하는 사람들은 성읍을 들끓게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분노를 돌이킨다.잠언 29:8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읍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거래하며 분쟁을 해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성문은 법적 판단과 공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룻기 4:1–12 참조).

그런데 조롱하는 사람들이 성읍을 들끓게 합니다.

조롱은 단순한 농담과 다릅니다. 잠언에서 조롱하는 사람은 훈계와 지혜를 업신여기며,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일을 비웃는 사람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잠언 9:7–8, 21:24). 그러한 태도가 공적인 논쟁에 들어오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화가 서로를 멸시하는 싸움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에 답하기보다 상대방 자체를 우습게 만들고, 서로의 분노를 자극합니다.

그 결과 한 사람의 조롱이 성읍 전체의 소란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돌이킵니다. 이것은 무조건 갈등을 덮어 두거나 불의를 못 본 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노가 더 큰 파괴로 번지지 않도록 상황을 바로잡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갈등이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다루는 능력입니다.

성내고 웃어 대는 사람과는 왜 평온함을 얻기 어려운가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과 송사를 벌이면, 그 어리석은 사람이 성내고 웃어 대어 평온함이 없다.잠언 29:9 · 본디새김

분노와 웃음은 서로 반대되는 반응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평온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분노로 대화를 압도할 수도 있고, 비웃음으로 논의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성내고 웃어 대는」 행동의 주어가 명시적으로 다시 제시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그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읽기가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지혜로운 사람을 주어로 이해하는 방식도 문법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송사를 벌인다」는 표현은 실제 법적 분쟁을 가리킬 수도 있고, 다툼이나 논쟁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한 것은 분쟁에 지혜로운 사람이 참여한다고 해서 반드시 평화로운 해결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대방이 이성적인 판단이나 공정한 절차 자체를 거부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도 갈등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를 현실과 무관한 만능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상대방의 반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

10절은 갈등을 더욱 어두운 자리로 끌고 갑니다.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들은 온전한 이를 미워하지만, 곧은 이들은 그의 목숨을 돌본다.잠언 29:10 · 본디새김

이제는 단순한 조롱이나 분노가 아닙니다. 본문은 그 미움의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피 흘리는 사람과 온전한 사람을 대립시키면서, 불의한 행동과 온전한 삶이 서로 충돌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후반절은 해석상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곧은 사람들이 「그의 목숨을 찾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보호하고 돌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생명을 노린다는 뜻으로 읽힐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대조를 살려, 피 흘리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곧은 사람은 그의 생명을 돌본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후반절도 생명을 노리는 행동으로 읽되, 그 행동의 주체나 앞뒤 문장의 관계를 달리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온전한 사람을 향한 적대와 위협이 더욱 강조됩니다.

본디새김의 번역을 따르면 이 구절은 7절과 깊게 연결됩니다. 의로운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알고, 곧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돌봅니다. 곧 의로움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권리와 생명을 지키려는 관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후반절의 의미를 보호로 읽을 때 성립하는 해석이라는 점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분노를 모두 쏟아 내는 것과 다스리는 것

11절은 앞의 소란과 분노를 한 사람의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어리석은 이는 제 분노를 다 쏟아 내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눌러 가라앉힌다.잠언 29:11 · 본디새김

문맥상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하지 않고 전부 밖으로 내보내는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감정이 생기면 그것을 모두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분노가 일어난 사실 자체가 말과 행동의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눌러 가라앉힙니다. 후반절은 분노를 뒤로 붙들어 두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나중까지 미루어 둔다는 시간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택해 「눌러 가라앉힌다」고 옮겼습니다. 두 독법 모두 분노가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구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다른 사람을 향해 곧바로 쏟아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잠언은 모든 분노가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어떤 판단도 거치지 않은 채 쏟아 내는 것입니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흐름을 보면 조롱, 분쟁, 폭력적인 미움, 분노의 분출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는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한 사건은 아니지만, 절제되지 않은 말과 감정이 공동체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여러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잠언은 권력을 가진 사람의 귀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 첫 행은 문자적으로 「어리석은 이는 자기 영을 모두 내보낸다」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루아흐는 바람이나 숨뿐 아니라 사람의 기운과 감정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후반절의 베아호르는 「뒤에」 또는 「뒤로」라는 의미를 지닌 표현입니다.

왕의 귀와 여호와야훼가 밝히시는 눈

잠언 29:12–14 본문 →

통치자가 거짓말을 좋아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를 섬기는 이들이 모두 악한 이들이다.잠언 29: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왕이 직접 거짓말하는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상황을 말합니다.

왕이 듣기 싫어하는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왕이 직접 거짓말을 명령하지 않아도, 그 주변에 거짓이 모여들게 됩니다.

잠언의 「모두」는 이러한 부패의 광범위함을 강하게 표현합니다. 모든 신하가 예외 없이 똑같은 죄를 범한다는 통계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악한 통치자의 잘못은 그의 개인적인 행동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인정하느냐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열왕기상 22:1–28에는 이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합 왕 앞에서 많은 예언자가 전쟁의 성공을 말하지만, 미가야는 왕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씀을 전합니다. 아합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야기를 잠언 29:12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자가 듣고 싶은 말과 실제로 들어야 하는 말이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앞의 5절에서는 아첨하는 사람이 이웃 앞에 그물을 펼쳤습니다. 12절에서는 거짓된 말을 받아들이는 통치자가 자기 주변을 악하게 만듭니다.

듣는 사람의 태도는 말하는 사람의 행동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의 지혜는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말하느냐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진실을 얼마나 기꺼이 듣느냐에도 달려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억압하는 사람의 눈을 밝히시는 하나님

가난한 이와 억압하는 사람이 서로 만난다. 그 둘의 눈을 밝히는 이는 여호와야훼다.잠언 29:13 · 본디새김

왜 잠언은 가난한 사람과 억압하는 사람을 한자리에 세워 놓을까요?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억압받고, 의로운 사람이 그 송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하는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께서 두 사람의 눈을 밝히신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눈을 밝히다」는 표현은 시력을 주는 행위를 가리키며, 더 넓게는 살아 있는 힘과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시편 13:3에서도 시편 기자는 자신의 눈을 밝혀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요청은 죽음의 위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 29:13을 여호와야훼께서 가난한 사람과 억압하는 사람 모두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신다는 뜻으로 곧장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일차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생명을 의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호와야훼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도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여호와야훼께서 두 사람의 행동을 똑같이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께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억압하는 사람의 권력을 근본적으로 상대화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재산과 힘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의 생계를 좌우할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눈을 밝힐 능력조차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 역시 여호와야훼께 생명을 의존합니다.

잠언 22:2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서로 만나며, 여호와야훼가 그들 모두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29:13은 그와 유사한 구조를 사용하면서 부자 대신 「억압하는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 결과 사회적 차이를 넘어선 인간의 공통된 처지가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가난한 사람의 존엄을 밝혀 주고, 억압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왕좌가 오래 서는 이유

14절은 13절의 선언을 다시 왕의 책임에 연결합니다.

왕이 가난한 이들의 송사를 신실하게 판결하면, 그의 왕좌는 영원히 굳게 선다.잠언 29:14 · 본디새김

4절에서는 공정한 판단이 나라를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를 신실하게 판결하는 일이 왕좌를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 「신실하게」는 진실함과 신실함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적으로 옳은 판결을 내리는 능력뿐 아니라, 신뢰할 만하게 공정을 실천하는 태도입니다.

특히 본문은 왕이 모든 사람에게 신실하게 판결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말하는 대신 가난한 사람을 특별히 언급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공정한 판결을 받는가는 그 나라의 정의가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여러 수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재판 자체가 억울함을 해결할 거의 유일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송사가 신실하게 다루어진다면, 왕이 세우는 질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왕좌는 영원히 굳게 선다」는 표현도 단순히 한 왕이 아무리 잘못해도 왕조가 계속 유지된다는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통치가 지속성 있는 왕권의 토대라는 왕실 지혜의 이상적인 표현입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왕조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다윗의 후손들에게 정의를 행할 책임을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22:15–16은 왕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의 송사를 공정하게 다루는 일이 여호와야훼를 아는 삶과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왕좌의 안정은 단지 왕 자신을 위한 복이 아닙니다. 왕이 가난한 사람에게 신실하게 판결할 때 백성도 그 통치 아래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9장의 통치에 관한 가르침은 이스라엘 왕정에 관한 성경의 다른 말씀과도 이어집니다. 신명기 17:14–20은 왕이 자신을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높이지 않고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이 말씀들은 왕권의 정당성을 단지 힘이나 혈통에서 찾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뜻에 따라 공정을 실천하는 책임에서 찾습니다. 또한 시편 72:1–4는 왕이 가난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결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원하며 억압하는 사람을 꺾기를 간구합니다. 잠언 29:14가 말하는 왕의 이상과 깊이 어울리는 기도입니다.

지혜는 저절로 자라나는가

잠언 29:15–18 본문 →

내버려 둔 아이와 훈계를 받은 아이

매와 책망은 지혜를 주지만, 내버려 둔 아이는 제 어머니를 수치스럽게 한다.잠언 29:15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는 교정을 받는 아이와 내버려 둔 아이입니다.

본문의 「매」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가리킵니다. 고대의 훈육 문맥에서는 실제 신체적 징계와 관련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원래부터 오직 상징적인 훈육만을 뜻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오늘날 부모가 자녀에게 신체적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옮기는 것 역시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잠언은 고대 사회의 훈육 관습을 배경으로 지혜가 교정과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이를 방치하지 않고 책임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원칙이 들어 있지만, 현대의 모든 양육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징계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매와 책망」은 함께 등장합니다. 지혜는 단순히 고통을 경험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이끄는 가르침과 관련됩니다.

반대편의 아이는 「내버려 둔」 아이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을 책임 있는 돌봄을 받지 못합니다. 그 결과 어머니가 수치를 당합니다. 이것은 아이가 부모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도구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대 가정에서 자녀의 행동이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결과가 가정 안에 고통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17절은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다시 말합니다.

네 아들을 훈계하여라. 그가 너를 편히 쉬게 하고, 네 마음에 기쁨을 줄 것이다.잠언 29:17 · 본디새김

15절에서는 훈육의 부재가 수치로 이어졌습니다. 17절에서는 훈계가 평안과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지혜를 배워 자기 삶을 책임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면, 부모는 계속해서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수습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통제하면 편해진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지혜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을 돌보는 이에게도 평안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과 17절 사이에는 전혀 다른 내용처럼 보이는 16절이 놓여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진다

악한 이들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지만, 의로운 이들은 그들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잠언 29: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2절의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단지 악한 사람의 숫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자체가 많아집니다.

악이 퍼지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 행동을 모방하거나, 예전에는 용납되지 않았던 행동이 일상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악한 사람의 증가와 죄의 증가를 결합함으로써 죄가 개인에게 고립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무너짐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는 악한 사람들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도 끝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의로운 사람이 악인의 불행을 즐기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잠언 24:17은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자녀의 훈육에 관한 두 잠언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엄격한 하나의 논증을 구성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란히 읽으면 중요한 통찰이 생깁니다. 가정이 어떤 사람을 길러 내느냐는 가정 안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는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의 행동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계시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8절은 이 장에서 가장 자주 오해되기 쉬운 구절입니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절제를 잃지만, 가르침을 지키는 이는 복되다.잠언 29:18 · 본디새김

여기서 「계시」를 어떤 지도자가 제시하는 원대한 목표나 조직의 미래 계획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하존(⁨חָזוֹן⁩)은 기본적으로 환시나 예언적 계시와 관련된 말입니다. 개인이나 조직이 스스로 고안한 목표를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따라서 잠언 29:18의 첫 행은 단순히 장기적인 계획이 없는 조직은 실패한다는 경영 원칙이 아닙니다.

본문은 계시가 없을 때 백성이 「절제를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 동사는 억제되지 않거나 통제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지도자의 구호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후반절의 「가르침」은 문맥에 따라 율법이나 가르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앞부분의 계시와 나란히 놓이면서 사람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합니다.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전해지는 말씀의 측면을 강조하고, 가르침을 지킨다는 말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삶으로 따르는 측면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사라진 자리에서 백성은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할지 잃어버립니다. 반면 그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은 복됩니다.

백성을 지탱하는 것은 단지 강한 통제력이 아니라, 함께 따라야 할 바른 기준입니다.

앞에서는 왕이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면 신하들이 악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백성이 하나님의 계시와 가르침을 잃으면 절제를 잃는다고 말합니다. 통치자의 귀가 거짓에 열려 있는 사회와 백성의 귀가 하나님의 가르침에 닫혀 있는 사회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판단의 기준을 잃는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상 3:1은 사무엘이 어릴 때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희귀하고 환시가 흔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존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전달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절제를 잃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파라에서 나온 형태입니다. 출애굽기 32:25에서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금송아지 사건에서 아론이 백성을 통제하지 못하여 그들이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후반절의 「가르침」은 토라입니다.

알아듣는 것과 응답하는 것은 다르다

잠언 29:19–21 본문 →

종이 말을 이해하고도 응답하지 않을 때

종은 말로 바로잡히지 않는다. 알아들어도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잠언 29: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는 노예와 종의 제도가 존재했고, 종의 법적·사회적 지위는 주인과 같지 않았습니다. 본문도 그러한 위계적 관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현대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성격 판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종이 본질적으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알아들어도」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해의 능력과 실제 반응 사이의 간격입니다.

말을 듣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응답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교정의 상황에서 사용되었으므로 실제 행동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징계 방식을 요구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로 교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강압이나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자체에는 고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당연한 사회적 배경으로 전제하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는 말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과 그 말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일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1절의 완고한 사람은 반복적인 책망을 받아도 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12절의 통치자는 진실보다 거짓된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18절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와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잠언은 사람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는 일만으로 지혜로운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상황에서 보여 줍니다.

말이 너무 빠른 사람

20절은 뜻밖에도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희망이 적은 사람을 소개합니다.

말을 서두르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이에게 희망이 있다.잠언 29:20 · 본디새김

말을 빨리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충분히 생각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말을 내놓는 사람입니다. 잠언 18:13은 사정을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일을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29:20도 같은 위험을 더욱 강하게 표현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리석은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를 서두르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듣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살피지 않습니다. 말을 빨리 끝내는 것이 생각을 깊이 하는 것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모든 성급한 말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라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언 특유의 강한 비교를 통해, 숙고 없이 말을 내놓는 습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분노를 모두 쏟아 냈습니다. 여기서는 말을 서둘러 내놓습니다. 감정과 말 모두에 지혜로운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응석받이로 기른 종의 결말

제 종을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기르면, 그 종은 끝내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잠언 29: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29장에서 번역상 불확실성이 특히 큰 본문입니다. 「응석받이로 기른다」는 지나치게 부드럽거나 호사스럽게 대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후반절의 핵심 단어 마논(⁨מָנוֹן⁩)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의미를 분명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나 오만한 사람이 된다는 해석, 주인에게 근심을 가져온다는 이해, 아들처럼 된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그러므로 본디새김의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번역을 이 구절의 확정된 유일한 의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앞뒤의 흐름에서 이 구절은 책임 있게 관계를 다루지 못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고대의 위계적 관계 안에서, 어떤 대우가 실제로 상대방을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만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고용관계에 그대로 옮겨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엄격해야 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합니다. 고대의 노예제 관계와 현대의 자유로운 노동계약은 동일하지 않으며, 본문 후반절 자체의 뜻도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 오히려 앞뒤의 더 분명한 잠언들이 선명해집니다. 지혜는 단순히 강하게 대하거나 부드럽게 대하는 방식 하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가르치고, 들은 말을 실제 행동으로 이어 가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응석받이로 기른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메판네크입니다. 마논의 뜻을 두고 여러 전통이 갈리며,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상당히 다르게 표현하여 원문의 이해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그러한 상태에 이르는지에 대해서도 문맥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높아지려는 사람이 낮아지고, 낮은 사람이 영예를 얻는다

잠언 29:22–23 본문 →

성내는 사람은 어떻게 죄를 늘리는가

성내는 사람은 다툼을 부추기고, 격분하는 이는 죄가 많다.잠언 29:22 · 본디새김

8절에서는 조롱하는 사람들이 성읍을 들끓게 했습니다. 11절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분노를 모두 쏟아 냈습니다. 22절은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압축합니다.

문제는 격분하는 태도가 일상적인 행동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이 옳은지 살피기보다 자기 분노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기 쉽습니다. 분노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처음에는 하나의 갈등이었을 일이 여러 죄로 번질 수 있습니다.

23절은 분노 다음에 교만을 배치합니다.

사람의 교만은 그를 낮추지만, 마음이 낮은 이는 영예를 붙든다.잠언 29:23 · 본디새김

22절과 23절을 나란히 읽으면,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는 문제 뒤에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태도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본문은 두 구절 사이의 인과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모든 분노가 반드시 교만에서 나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23절 자체의 역설은 분명합니다.

「영예를 붙든다」(⁨תָּמַךְ⁩)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붙잡거나 지탱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낮은 사람의 처지가 반드시 곧바로 사회적 성공으로 바뀐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잠언이 말하는 영예는 다른 사람을 억누르거나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해서 얻는 명성과 다릅니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존중입니다.

이 장의 첫 구절에서는 목을 뻣뻣하게 하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책망을 받아도 자신을 굽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23절에서는 마음이 낮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길을 바꿀 수 없을 만큼 완고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이 사람을 낮추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마음이 오히려 영예를 붙듭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도 예수는 높아지려는 사람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대조하십니다(누가복음 14:11). 이는 잠언 29:23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잠언이 그 말씀을 예언하거나 신약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넓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신 말씀(마가복음 10:42–45)도 힘과 지위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섬기는 책임으로 이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나 잠언 29장의 본래 관심은 먼저 이스라엘의 일상과 통치 속에서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도둑의 동료는 왜 침묵하는가

잠언 29:24–26 본문 →

죄를 짓는 일과 죄를 감추는 일

도둑과 몫을 나누는 이는 제 목숨을 미워한다. 저주를 동반한 맹세 요구를 듣고도 알리지 않는다.잠언 29:24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첫 행은 도둑의 동료가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얻기 위해 도둑과 결탁하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 행동을 「제 목숨을 미워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이 실제로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심리 진단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해치는 행동을 한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레위기 5:1은 어떤 사건을 보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 증언을 요구하는 엄숙한 선언을 듣고도 말하지 않으면 죄의 책임을 진다고 규정합니다. 잠언 29:24도 이러한 증언의 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도둑과 결탁한 사람은 사건에 관해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함으로써 자신이 얻은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정의를 회복할 기회를 막고 자신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본문은 맹세의 구체적인 의식이나 그 뒤에 어떤 처벌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도둑의 동료는 알지 못해서 침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습니다.

1절의 완고한 사람은 책망을 받으면서도 행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19절의 종은 말을 알아들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24절의 사람은 알려야 할 사실을 알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상황이지만, 모두 진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침묵이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말을 삼가야 할 때가 있지만, 정의를 위해 증언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침묵이 잘못이 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 올가미가 되는가

25절은 그러한 침묵과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사람을 두려워함은 올가미를 놓지만,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이는 높은 곳에 안전하게 놓인다.잠언 29: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24절의 사람이 왜 진실을 알리지 않는지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올가미가 된다는 사실은 도둑의 동료가 처한 위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관점을 제공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람의 반응과 평가, 권력이 자신의 판단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진실을 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의 호의를 잃을까 봐 거짓된 말에 동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잘못된 행동을 따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올가미가 되는 이유는 사람에게서 안전을 얻으려는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더 위험한 관계에 묶어 놓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호의를 지키기 위해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 안전하게 놓입니다. 이 표현은 성벽이나 높은 요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낮은 곳에서 위협받던 사람이 쉽게 침범할 수 없는 높은 곳에 놓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를 신뢰한다는 말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감정 상태를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도 사람에게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판단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사람의 호의나 위협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라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사람의 발걸음 앞에 그물이 펼쳐졌습니다(5절). 이제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 자체가 올가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올가미와 대조되는 것이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높은 곳의 안전입니다.

왕의 얼굴을 구하지만 판결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

많은 이들이 통치자의 호의를 구하지만, 사람의 판결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잠언 29:26 · 본디새김

여기서 「통치자의 호의를 구한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통치자의 얼굴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왕의 호의에 따라 재판의 결과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기회가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얼굴을 구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판결에 대한 궁극적인 기준은 여호와야훼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판결」은 4절의 「공정한 판단」과 같은 단어입니다. 4절에서는 왕이 공정한 판단으로 나라를 굳게 세웠습니다. 26절에서는 사람의 판결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왕은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공정함 자체를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최종 권위자는 아닙니다.

왕도 여호와야훼의 정의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인간의 재판이나 제도를 무시하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의 재판이 반드시 더 높은 정의의 기준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치자에게 호의를 구하는 일 자체가 언제나 잘못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통치자의 호의를 정의보다 높은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보다 통치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먼저 살피게 됩니다. 왕이 자신의 호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말만 듣는다면, 왕의 주변에서는 거짓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12절). 반대로 왕이 자기보다 높은 정의의 기준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호의와 다른 사람의 권리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왕의 얼굴은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는 자리지만, 정의의 최종적인 근원은 왕이 아닙니다.

마지막 대조: 서로를 역겨워하는 두 사람

잠언 29:27 본문 →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의로운 이들에게 역겹고, 길이 곧은 이는 악한 이에게 역겹다.잠언 29:27 · 본디새김

잠언 29장은 뜻밖에도 화해나 평화의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싫어한다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각자 상대방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까?

본문의 대조를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첫 행에서 의로운 사람이 역겨워하는 대상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행에서 악한 사람이 역겨워하는 대상은 「길이 곧은 이」입니다. 즉 두 사람의 감정이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은 불의와 충돌하고, 다른 한쪽은 곧은 삶 자체와 충돌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의 도덕적 판단이 결국 상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길이 서로 다르면 무엇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뻣뻣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책망 자체가 불쾌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말이 우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왕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따르는 길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옳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싫어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기 때문에 싫어합니까, 아니면 나의 불의를 드러내기 때문에 싫어합니까?

뻣뻣한 목과 높은 곳의 피난처

잠언 29:1–27 본문 →

잠언 29장은 목을 뻣뻣하게 하는 사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듭 책망을 듣고도 자기 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끝내 자신의 완고함 때문에 부서지고 맙니다. 왕이 나라를 세우는 것은 공정한 판단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의 판결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옵니다. 여호와야훼는 인간의 판단과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판단과 권력이 그분의 정의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조언을 받았느냐보다, 그 조언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돌아볼 수 있느냐입니다. 잠언 29장의 마지막 구절은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두 길의 차이는 단순히 서로에 대한 호불호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무엇을 옳다고 여기며 어떤 길을 따라 살아가는가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장의 후반부에는 정반대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교만은 그를 낮추지만, 마음이 낮은 이는 영예를 붙든다」(23절). 그리고 조금 뒤에는 「사람을 두려워함은 올가미를 놓지만,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이는 높은 곳에 안전하게 놓인다」(25절)는 약속이 나옵니다.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은 낮아집니다. 반면 자신의 힘과 판단을 최종적인 의지처로 삼지 않는 사람은 높은 곳에 안전하게 놓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힘으로 높은 곳을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가운데 그곳에 놓입니다.

첫 구절에서 목을 뻣뻣하게 세웠던 사람은 결국 부서집니다.

그러나 사람의 호의보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은 올가미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 안전하게 놓입니다.

자신을 굽히지 않으려는 사람은 무너지고, 자신보다 높으신 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안전한 곳에 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