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30장
이 장의 자리 · 30장 · 아굴의 말
모른다는 고백에서 발견한 지혜
잠언 30장은 뜻밖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참으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둔하고, 내게는 사람의 분별력이 없다.」 잠언이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는데, 새롭게 등장한 화자가 자신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곧 놀라운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왔는가? 누가 바람을 두 손에 모았는가? 누가 물을 겉옷에 싸매었는가?
그리고 몇 구절 뒤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나옵니다. 「가난도 부도 제게 주지 마십시오. 제게 정해진 몫의 양식을 먹여 주십시오.」 그는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가지거나 너무 적게 가지게 되어 하나님을 잊거나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합니다.
그 뒤에는 거머리와 개미, 바위너구리와 메뚜기, 도마뱀과 사자가 등장합니다. 저마다의 움직임과 살아가는 방식이 지혜의 교재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손을 입에 대어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지혜를 모른다고 고백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입을 다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이어 붙은 두 문장이 아닙니다. 잠언 30장을 읽다 보면, 이 장이 인간의 지식과 욕망과 힘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과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다: 아굴의 지혜
잠언의 마지막에 등장한 낯선 사람
30장은 새로운 표제로 시작합니다.
야게의 아들 아굴의 말, 곧 선언이다. 그 사람이 이디엘에게 한 말,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한 말이다.잠언 30:1 · 본디새김
잠언 25–29장은 히스기야의 사람들이 옮겨 적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표제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잠언 25:1). 그런데 30장에서는 아굴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31장도 르무엘 왕의 말이라는 별도의 표제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30장은 앞 장에서 계속된 솔로몬 잠언 모음의 연장이라기보다, 독립적인 목소리가 새로운 형태의 지혜를 들려주는 부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굴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언제 살았는지, 이디엘과 우갈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표제의 「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사(מַשָּׂא)는 무거운 말씀이나 신탁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지명인 마싸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디엘과 우갈 역시 전해진 히브리어 본문의 모음과 문장 구분에 따라 사람의 이름으로 읽는 것이며, 다른 방식으로 분절하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표제 뒤에서 나타나는 아굴의 목소리는 매우 뚜렷합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지혜자는 왜 자신을 우둔하다고 말하는가
참으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둔하고, 내게는 사람의 분별력이 없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했고, 거룩한 이의 지식도 알지 못한다.잠언 30:2–3 · 본디새김
이것을 아굴이 실제로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자서전적인 진술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 사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복잡한 비유를 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의 지혜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3절의 「거룩한 이의 지식」에서 히브리어 케도심(קָדוֹשׁ)은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거룩한 존재들과 관련된 지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문맥에 따라 「거룩한 이의 지식도 알지 못한다」고 옮겼습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창조의 권능을 묻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굴이 자신에게 없는 신적인 지식을 의식하고 있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아굴의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혜를 얻었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네 개의 질문으로 보여 줍니다.
바람을 두 손에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느냐? 누가 바람을 두 손에 모았느냐? 누가 물을 겉옷에 싸매었느냐? 누가 땅의 모든 끝을 세웠느냐? 네가 안다면, 그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냐?잠언 30:4 · 본디새김
바람은 두 손에 모으는 것으로, 물은 겉옷에 싸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일상에서 사람이 물건을 다루는 모습을 우주적인 규모로 확장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손에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습니다. 옷이나 천으로 물건을 감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물은 평범한 겉옷으로 온전히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여기서 묻는 대상은 작은 바람이나 물 한 그릇이 아닙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바람과 물입니다.
아굴은 인간에게 익숙한 동작을 사용하면서도 인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를 보여 줍니다.
이 질문들은 욥기 38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욥에게 던지시는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야훼는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욥이 어디 있었는지 물으시고(욥기 38:4–7),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일을 말씀하십니다(38:8–11). 두 본문은 인간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며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세계를 처음부터 세우고 유지하는 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지적 탐구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혼동하지 않게 합니다.
아굴은 마지막에 더욱 뜻밖의 질문을 덧붙입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냐?」 이 문장을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은 본문의 원래 문맥을 넘어섭니다.
여기서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름과 그 아들의 이름을 묻는 방식으로 정체를 추궁하는 것인지, 신적인 존재와 관련된 특별한 표현인지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질문이 인간의 지식에 도전한다는 사실입니다.
아굴은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독자에게 「네가 안다면」이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힘은 아굴 자신도 앞에서 모른다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만 무지를 지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 역시 그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인간이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말이 확실한 것
4절에서는 질문이 쏟아졌지만, 5절은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은 모두 정련되어 있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이들의 방패다.잠언 30: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 말합니다.
「정련되어 있다」는 표현은 금속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도를 높이는 과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은 그러한 정련을 거친 것처럼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편 12:6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정련된 은에 비유됩니다. 시편 18:30에는 하나님의 말이 정련되어 있으며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신다는 매우 가까운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이 참되다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이어서 아굴은 경고합니다.
그의 말에 덧붙이지 마라. 그러다 그가 너를 책망하여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 수 있다.잠언 30:6 · 본디새김
인간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하거나,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아굴은 바로 그 위험을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말에 덧붙인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길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장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4:2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명령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용해 인간 자신의 뜻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경계입니다.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배울 수 있지만, 자신이 모르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아굴의 첫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절제입니다. 그리고 이 절제는 곧바로 그의 기도 속에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전도서도 인간이 자신의 수고와 지식만으로 삶 전체를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인간의 수고와 시간의 한계를 폭넓게 성찰하고, 아굴은 자신이 관찰한 여러 장면을 통해 절제와 신뢰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또한 요한복음 3:13은 하늘에 올라가고 내려오는 문제를 예수와 관련하여 말합니다. 이는 잠언 30:4와 언어적으로 연결되지만, 잠언의 「그 아들의 이름」을 처음부터 예수의 이름을 맞히도록 주어진 수수께끼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의 원래 질문은 인간이 창조주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는 데 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아굴은 무엇을 구하지 않았는가
「제가 당신께 두 가지를 청했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제 청을 거절하지 마십시오.」잠언 30:7 · 본디새김
아굴은 두 가지를 구합니다. 첫째는 헛됨과 거짓말을 멀리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난도 부도 주지 말고 자신에게 정해진 몫의 양식을 먹여 달라는 것입니다.
두 청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진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거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9절까지 읽으면 두 청이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굴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모습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을 입에 담는 것만이 아니라, 부유함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궁핍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다루는 상황까지 두려워합니다. 그에게는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보다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정해진 몫의 양식
「헛됨과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 치워 주십시오. 가난도 부도 제게 주지 마십시오. 제게 정해진 몫의 양식을 먹여 주십시오.」잠언 30:8 · 본디새김
「정해진 몫의 양식」은 자신의 몫으로 정해진 양식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아굴은 끝없이 많은 양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을 이상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합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졌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16:4–21). 만나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양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필요한 몫을 거두었고, 안식일 전날이 아니면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굴의 기도가 만나 사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계를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탁한다는 점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굴은 왜 부유함까지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까요?
배부를 때 나타나는 위험
「제가 배불러 부인하며 『여호와야훼가 누구냐?』 할까 두렵고, 가난해져 도둑질하고 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일까 두렵습니다.」잠언 30:9 · 본디새김
풍족함의 위험은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능력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되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가 누구냐?」라는 말은 출애굽기 5:2에서 파라오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파라오는 모세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자 여호와야훼가 누구이기에 자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아굴은 풍족함이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오만을 낳을까 두려워합니다. 신명기 8:11–18 역시 약속의 땅에서 먹을 것이 풍족해지고 재산이 많아질 때 여호와야훼를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아굴은 가난의 위험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도둑질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자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가난해져도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아굴이 구하는 것은 많이 가지는 삶도, 적게 가지는 삶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입니다.
이 기도를 가난한 사람에게는 신앙을 위해 가난을 견디라고 요구하는 말씀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굴은 실제로 가난해지는 것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부자에게는 부를 포기해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부가 자신을 오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굴의 관심은 개인의 경건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살피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함부로 들먹이다」로 옮긴 히브리어의 「이름을 붙잡다」라는 표현은 여기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정확히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짓 맹세와 관련해서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본문이 구체적인 상황을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아굴의 양식에 관한 기도는 신약의 주기도문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6:11에서 예수는 필요한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잠언 30:8이 주기도문을 직접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두 말씀 사이에는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고 필요한 양식을 구한다는 신학적 공통점이 있습니다.
높아진 눈과 가난한 사람을 먹어 치우는 이빨
종을 주인에게 헐뜯지 마라
종을 그의 주인에게 헐뜯지 마라. 그러다 그 종이 너를 저주하고 네가 죄를 짊어질 수 있다.잠언 30:10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종은 주인에게 의존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주인에게 종을 헐뜯는다면, 종은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아굴은 바로 그 관계에 끼어드는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종을 헐뜯는 행동은 주인의 호의를 얻거나 종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일이 도리어 죄의 책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인 앞에서 힘이 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당한 불의를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굴은 종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 제도를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권력관계에서 취약한 사람을 헐뜯는 행위의 위험과 책임을 드러냅니다.
아굴은 자신의 입에서 거짓말이 나오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그 거짓되고 해로운 말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위협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네 부류의 사람들이 보여 주는 악의 모습
11–14절에는 「부류」라는 표현이 네 번 반복됩니다.
제 아버지를 저주하고 제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부류가 있다.잠언 30:11 · 본디새김
제 눈에는 깨끗하지만, 제 더러움이 씻기지 않은 부류가 있다.잠언 30:12 · 본디새김
한 부류가 있다. 그 눈이 얼마나 높은가. 그 눈꺼풀은 치켜올라가 있다.잠언 30:13 · 본디새김
이빨은 검이고 어금니는 칼인 부류가 있다. 가난한 이들을 땅에서, 궁핍한 이들을 사람들 사이에서 먹어 치우려 한다.잠언 30:14 · 본디새김
「부류」(דּוֹר)로 옮긴 말은 세대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특정한 역사적 세대 하나를 지목한다기보다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린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부모를 저주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생명과 돌봄을 가볍게 여기고,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존중을 잃어버리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자기 눈에 깨끗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실제로 깨끗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에서는 그 눈이 높아집니다. 눈꺼풀이 치켜올라간 모습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교만의 자세를 그립니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제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네 번째 부류에서는 마침내 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입에는 말이 아니라 검과 칼이 있습니다. 사람이 먹을거리를 씹는 기관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무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먹어 치우려는 대상은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입니다.
물론 네 부류가 반드시 한 사람이 차례로 거치는 네 단계라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나열한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배열된 모습은 의미 있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존중을 잃고, 자신의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을 높이고, 끝내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삶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보지 못하는 눈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이 될 수 있고, 그 교만은 다른 사람을 먹어 치우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굴의 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검소함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던 이유가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끝없이 높아지려는 욕망은 개인의 마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는 그러한 욕망을 한 번도 만족한다고 말하지 않는 거머리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주어라, 주어라」 — 끝없이 요구하는 것들
거머리에게 두 딸이 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다. 「주어라, 주어라.」 배부르지 않은 것이 셋, 「넉넉하다.」 하지 않는 것이 넷이다.잠언 30:15 · 본디새김
아굴은 이제 사람을 직접 비판하는 대신 거머리를 등장시킵니다.
거머리는 다른 생물의 피를 빨아 먹는 것으로 알려진 동물입니다. 「주어라, 주어라」는 실제 거머리의 가족관계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요구하는 욕망을 의인화한 시적인 표현입니다. 한 번 얻고 나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자마자 다시 요구합니다.
두 딸에서 시작하여, 배부르지 않은 것 셋과 넉넉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넷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히브리 지혜문학에서 사용되는 숫자 잠언의 형태입니다. 세 가지를 제시한 뒤 네 번째를 덧붙이면서 독자의 관심을 모으고, 여러 사례에 공통되는 특징을 관찰하게 합니다.
스올과 자궁과 땅과 불
스올과 닫힌 자궁, 물을 받아도 배부르지 않은 땅, 「넉넉하다.」 하지 않는 불이다.잠언 30:16 · 본디새김
스올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든 죽음은 이제 충분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닫힌 자궁입니다. 여기서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상태와 생명을 낳고자 하는 갈망이 연결됩니다. 이것을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성을 탐욕스럽거나 도덕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30:1에서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아굴은 그러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다른 이미지들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물을 받아도 배부르지 않은 땅입니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땅이 끝없이 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입니다. 네 번째는 불입니다. 태울 것이 있는 한 불길은 이어지고, 스스로 이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올은 죽음의 영역이고, 자궁은 생명을 바라는 자리이며, 땅은 물을 받아들이고, 불은 물질을 태웁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대상들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으로 묶입니다. 「넉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아굴은 자신에게 정해진 몫의 양식을 구했습니다. 이제는 한계를 모르는 것들을 바라봅니다.
지혜는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아는 능력만이 아니라, 언제 충분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아는 능력입니다.
부모를 조롱하는 눈의 결말
17절은 다시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아버지를 조롱하고 어머니에게 순종하기를 업신여기는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들이 쪼아 내고, 어린 독수리들이 먹어 치운다.잠언 30:1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1절의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13절에서는 교만한 사람의 눈이 높이 치켜올라갔습니다. 이제는 그 눈을 까마귀와 독수리가 먹어 치웁니다.
고대 세계에서 시신이 장사되지 못하고 들짐승이나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은 심각한 수치와 파멸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28:26도 그러한 모습을 저주의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잠언 30:17 역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새에게 눈을 쪼이는 죽음을 맞는다고 예고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행동이 얼마나 파괴적인 길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극단적인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를 부모의 모든 요구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확대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부모를 조롱하고 순종을 멸시하는 태도를 경고하지, 부모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11–17절 전체를 돌아보면 자신을 깨끗하다고 여기는 눈, 교만하게 치켜든 눈, 가난한 사람을 먹어 치우는 이빨, 끝없이 요구하는 거머리의 입, 그리고 새에게 먹히는 눈이 이어집니다. 욕망과 교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요구하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6:16–19에서도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를 나란히 언급하며 여호와야훼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을 나열합니다. 잠언 30장에서는 이러한 숫자 배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18절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 셋과 넷이, 21절에서는 땅을 떨게 하는 것 셋과 넷이, 29절에서는 걸음걸이가 보기 좋은 것 셋과 넷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장의 숫자는 숨겨진 암호라기보다, 여러 대상을 비교하며 세계를 관찰하도록 이끄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네 가지 길을 바라보는 놀라움
모른다는 고백이 다시 등장한다
내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셋,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넷이다.잠언 30:18 · 본디새김
아굴은 처음에 지혜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도 다시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늘과 바람과 물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번에는 세상 안에서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네 가지 움직임을 제시합니다.
하늘에서 독수리의 길, 바위 위에서 뱀의 길, 바다 한가운데서 배의 길, 젊은 여자와 함께하는 남자의 길이다.잠언 30:19 · 본디새김
아굴은 이 모든 것을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문자적인 길뿐 아니라 행동의 방식이나 살아가는 양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하늘에 고정된 길이 없어도 날아갑니다. 뱀은 바위 위를 지나갑니다. 배는 넓은 바다 위에 만들어진 도로 없이 나아갑니다. 하늘과 단단한 바위와 바다는 서로 성질이 전혀 다른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는 존재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이 네 가지 길을 모두 흔적이 남지 않는 길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독수리의 비행 경로나 바다를 지나간 배의 자취가 오래 남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러한 관찰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본문 자체가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18절은 그 길들이 자신에게 너무 놀랍고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헤아리기 어렵다」(פָּלָא)로 옮긴 말은 단순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뿐 아니라 놀랍고 경이롭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자연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감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젊은 여자의 길
네 번째 길은 앞의 세 가지와 조금 다릅니다. 독수리와 뱀과 배는 이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본문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반드시 결혼의 신비를 찬양하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거나, 반대로 처음부터 성적인 부정행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세 가지 길과 나란히 놓인다는 점에서 사람 사이의 이끌림과 만남이 지닌 놀라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의 움직임을 완전히 붙잡기 어렵듯,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의 움직임도 단순한 공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갑자기 이 아름다운 경이의 분위기를 깨뜨립니다.
입을 닦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
간음하는 여자의 길도 그러하다. 먹고 제 입을 닦고는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잠언 30:20 · 본디새김
음식을 먹고 입을 닦는 행동은 일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동작이 간음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취급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행위는 성적 행동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간음의 행위 자체를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거부하는 말에 있습니다.
네 가지 길의 공통점을 흔적이 쉽게 남지 않는 데서 찾는다면, 20절은 자신의 잘못을 지워 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19절을 자연과 인간관계의 경이로 읽는다면, 20절은 그러한 신비로운 관계의 세계가 부정직한 행동의 구실로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조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20절이 도덕적 판단의 문제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12절에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러움이 씻기지 않은 사람이 등장했듯, 20절의 사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성 일반에 관한 판단이 아닙니다. 잠언은 이 장면에서 간음하는 여성을 등장시키지만,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는 태도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굴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와, 자신의 잘못 앞에서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날카롭게 대비시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잘못까지 부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젊은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마는 젊은 여성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만으로 그 여성이 반드시 처녀인지, 결혼한 여자인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땅이 견딜 수 없는 네 가지 일
왜 사회적 지위가 뒤바뀌면 땅이 떨리는가
땅을 떨게 하는 것이 셋, 땅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넷이다.잠언 30:21 · 본디새김
이번 숫자 잠언에서는 자연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불안정함이 등장합니다.
종이 왕이 되는 것, 어리석은 이가 양식으로 배부른 것, 미움받는 여자가 혼인하는 것, 여종이 제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잠언 30:22–23 · 본디새김
이 목록은 현대 독자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종이 왕이 되는 것과 미움받는 여자가 혼인하는 것이 왜 땅이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본문은 고대 사회의 계층과 관계에 관한 통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을 그대로 오늘날에도 지켜야 할 도덕적 질서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종이 왕이 되는 일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뜻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통치자가 될 능력을 갖출 수도 있고, 부당하게 억눌리던 사람이 새로운 지위를 얻는 일이 정의로운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움받거나 사랑받지 못하던 여성이 혼인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기대되는 사회적 위치와 실제로 차지하게 된 위치가 크게 뒤바뀌는 상황을 나열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종이 왕이 되고, 여종이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소외되던 여자가 혼인으로 새로운 지위를 얻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먹을거리를 넉넉히 얻습니다.
이 가운데 어리석은 사람이 양식으로 배부르게 되는 사례는 특히 9절의 아굴의 기도와 대조됩니다. 아굴은 배부르게 되어 여호와야훼를 부인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서는 지혜 없는 사람이 배부르게 된 모습이 땅이 견디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로 언급됩니다.
하지만 네 사례를 모두 동일한 종류의 도덕적 잘못으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낮은 신분의 사람이나 소외된 여성의 지위 상승 자체를 비난하는 교훈으로 사용하기보다, 고대 지혜자가 사회의 예상 밖의 역전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함을 어떻게 관찰했는지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읽는 것이 신중합니다.
잠언은 특정한 시대의 언어와 사회적 경험 속에서 지혜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모든 비유와 사회적 전제를 곧바로 보편적인 명령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목록의 한가운데 놓인 어리석은 사람의 풍족함은 분명한 질문을 남깁니다. 사람에게 재물과 지위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지혜도 함께 있습니까?
바로 다음 단락에서는 지위도 힘도 크지 않지만 놀랍도록 지혜롭게 살아가는 작은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미움받는」으로 옮긴 말은 미움받는 여성을 가리키지만, 문맥에 따라 사랑받지 못하거나 소외된 여성을 뜻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9:31에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할 때도 같은 계열의 표현이 사용됩니다. 마지막의 「제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히브리어 야라시가 물려받는 것과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차지하는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어서 확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에게 배우는 지혜
세상에서 작은 네 가지
땅에서 작은 것이 넷 있지만, 그들은 더없이 지혜롭다.잠언 30:24 · 본디새김
앞의 네 가지는 땅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땅에서 작은 것들이 등장합니다.
개미와 바위너구리, 메뚜기와 도마뱀은 모두 인간의 눈에 크고 강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굴은 그들을 더없이 지혜롭다고 부릅니다. 여기서 지혜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힘이 센가, 몸집이 큰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각자가 자신의 조건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개미는 강하지 않지만 미래를 준비한다
개미는 강하지 않은 백성이지만, 여름에 제 양식을 준비한다.잠언 30:25 · 본디새김
아굴은 개미를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작은 곤충의 무리를 사람들의 공동체에 빗댄 표현입니다.
개미는 계절을 자기 뜻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겨울에 먹을거리가 부족해질 수 있다는 자연의 조건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잠언 6:6–8에서도 게으른 사람에게 개미를 보고 지혜를 배우라고 권합니다. 개미는 감독자나 통치자가 없어도 양식을 준비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30장에서는 개미의 약함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그 한계를 알고도 적절하게 준비하는 능력입니다.
바위너구리는 약하지만 안전한 곳을 안다
바위너구리는 힘세지 않은 백성이지만, 바위에 제 집을 마련한다.잠언 30:26 · 본디새김
자신의 몸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아굴이 5절에서 말했던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의 모습과도 어울립니다.
물론 바위너구리의 은신처가 그 자체로 하나님을 직접 상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동물의 실제 생존 방식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구절은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위험을 이겨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바위너구리에게 지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안전하게 살아갈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메뚜기에게는 왕이 없다
메뚜기에게는 왕이 없지만, 모두 무리를 나누어 나아간다.잠언 30:27 · 본디새김
잠언 29장에서는 왕이 공정한 판단으로 나라를 굳게 세운다고 말했습니다. 잠언 30장에서도 곧 군대와 함께하는 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메뚜기에게는 왕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 왕이나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정치적 주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메뚜기의 움직임을 관찰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서 있는 행동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강력한 통치자 한 사람의 존재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왕의 궁전에 사는 도마뱀
도마뱀은 네가 두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도, 왕의 궁전들에 있다.잠언 30:28 · 본디새김
네 번째 생물은 가장 뜻밖의 장소에 등장합니다.
궁전은 왕의 권력과 부를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도마뱀은 왕의 권력을 갖지 않았습니다. 궁전을 세울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아갑니다.
본문은 도마뱀이 어떤 특별한 지략으로 궁전에 들어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굴이 보여 주는 것은 작고 연약한 생물의 놀라운 삶의 자리입니다.
4절에서는 누가 바람을 두 손에 모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람의 두 손으로는 바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두 손으로 붙잡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도마뱀이 왕의 궁전에 있습니다. 아굴은 거대한 창조 세계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도록 했고, 이제는 작고 연약한 생물에게서도 배워야 할 지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생물의 공통점은 강해지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미는 여전히 작고, 바위너구리는 여전히 연약하며, 메뚜기에게는 왕이 없고, 도마뱀은 여전히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생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갈 길을 압니다.
조금 더 깊이
「네가 두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도」라는 표현은 도마뱀의 작음을 잘 드러냅니다. 다만 히브리어 문장은 도마뱀이 자기 발로 붙잡는다는 식으로도 분석할 여지가 있어, 붙잡는 주체의 이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사람의 손을 강조하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사자의 걸음과 입을 가리는 손
보기 좋은 네 가지 걸음
발걸음이 보기 좋은 것이 셋, 걸음걸이가 보기 좋은 것이 넷이다.잠언 30:29 · 본디새김
이번에는 작은 생물들과 정반대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짐승 가운데 힘세고 어느 것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사자, 허리를 동여맨 것 또는 숫염소, 군대가 함께하는 왕이다.잠언 30:30–31 · 본디새김
사자의 걸음에는 자신감과 힘이 드러납니다. 숫염소는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허리를 동여맨 것」이 어떤 동물인지, 「군대가 함께하는 왕」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갈리지만, 이 목록은 힘과 위엄이 드러나는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아굴은 작은 생물에게서 지혜를 발견하고, 힘세고 위엄 있는 존재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힘과 아름다움이 곧 도덕적 지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뚜기에게는 왕이 없어도 질서가 있었고, 군대와 함께하는 왕에게는 위엄이 있습니다. 왕의 힘만을 보고 그가 지혜로운 통치자인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힘은 힘대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아굴은 갑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을 향해 입을 다물라고 말합니다.
손을 입에 대어라
네가 자신을 높이느라 어리석게 굴었다면, 또 네가 꾀를 꾸몄다면, 손을 입에 대어라.잠언 30:32 · 본디새김
사자처럼 당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 왕처럼 높은 자리에 서고 싶어 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굴은 자신을 높이는 일이 어리석음으로 이어졌다면 멈추라고 말합니다.
손을 입에 대라는 명령은 말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말수가 적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자신의 교만이나 잘못된 꾀가 더 큰 결과로 번지기 전에 행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욥기 40:4에서도 욥은 여호와야훼의 질문 앞에서 자신의 입에 손을 얹겠다고 말합니다. 욥은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규모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아굴도 장의 첫부분에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을 높이며 말을 이어 가려는 사람에게 입을 가리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겸손이 단지 지혜로운 척하지 않는 태도였다면, 마지막의 겸손은 실제로 말을 멈추는 행동이 됩니다.
젖과 코와 분노를 눌러 짜면
젖을 눌러 짜면 엉긴 젖이 나오고, 코를 눌러 짜면 피가 나오며, 분노를 밀어붙이면 다툼이 나오기 때문이다.잠언 30:33 · 본디새김
세 행에서 누르거나 짜는 행위를 가리키는 같은 명사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나오게 한다는 동사도 세 번 반복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행에는 히브리어의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코」와 「분노」는 모두 아프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신체의 코를 뜻하면서, 분노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코를 압박하면 피가 나오듯, 분노를 계속 자극하면 다툼이 나옵니다.
아굴은 분노가 생기는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분노를 계속 밀어붙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 줍니다. 다툼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누군가가 분노를 계속 자극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고 상대방을 몰아붙이거나, 화가 난 상태에서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상처를 주는 행동이 다툼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32절의 「손을 입에 대어라」는 명령은 단순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큰 파괴를 만들어 내기 전에 멈추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31절의 히브리어 자르지르 모트나임은 정확히 어떤 동물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허리 부분의 모습이나 힘찬 움직임이 특징인 동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수탉이나 사냥개 등으로 구체화하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본문 자체만으로 특정 동물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의 왕도 군대와 함께하는 왕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지만, 히브리어의 해당 표현은 불분명합니다. 왕에게 맞설 자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바람과 손으로 가릴 수 있는 입
잠언 30장은 독립적인 관찰과 비유들이 이어진 모음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절이 하나의 논증을 이루도록 억지로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장에는 반복해서 나타나는 분명한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가져야 합니까? 얼마나 높아져야 합니까? 자신의 욕망을 어디에서 멈추어야 합니까?
아굴은 이 질문들에 대해 언제나 더 많이, 더 높이, 더 강하게 되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지나친 욕망과 교만을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잠언 30장의 처음에 아굴은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누가 바람을 두 손에 모았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인간은 작아집니다. 인간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붙잡고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굴은 그 사실을 슬퍼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필요한 양식을 구했고, 작은 생물들에게서 지혜를 발견했으며, 사람들이 끝없이 요구하고 자신을 높이는 모습을 경계했습니다.
처음에는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손으로 가릴 수 있는 입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바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땅의 끝을 자기 뜻대로 세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입에 손을 대고, 분노를 더 밀어붙이지 않기로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이 장의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른다고 말할 줄 알고, 필요한 양식을 구할 줄 알고, 작고 연약한 생물들에게서 배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더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에도 손을 입에 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멈추게 하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바다도 아닙니다. 더 밀어붙이면 다툼이 되어 나올 자신의 분노입니다.
인간에게는 세상을 모두 붙잡을 지혜가 없지만, 자신이 더 이상 밀어붙이지 말아야 할 때를 배울 지혜는 주어져 있습니다.
아굴은 그렇게 손을 입에 댄 채 자신의 말을 마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