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2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사라지는 날들과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햇수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먹을 힘도 잃었으며, 몸은 뼈만 남을 만큼 야위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자신의 삶도 곧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뜻밖의 부탁을 합니다.
「이것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되기를. 창조될 백성이 야를 찬양하기를.」(19절) 자신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지금의 이야기를 기록해 달라고 합니다.
이 시는 고통받는 한 사람의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무너진 시온과 미래 세대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늘과 땅조차 낡아 없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다는 고백에 이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고백에 이르는 길에서도 자신의 고통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백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애 한가운데서 목숨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시편 102편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하기 위해 인간의 덧없음을 잊어버리는 시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끝나 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기도입니다.
이 시의 움직임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뉩니다. 먼저 시인은 자신의 육체와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하나님께 쏟아 놓습니다(1~12절). 이어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 시온을 회복시키시고 미래 세대의 찬양을 일으키실 것을 바라봅니다(13~23절). 마지막에는 다시 자신의 짧은 삶으로 돌아와 영원하신 창조주께 간구합니다(24~29절).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반복되는 하나의 질문입니다.
자신의 날들은 사라져 가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오래 계십니까?
이 기도에는 이름이 없다
고통받는 이가 기력이 다하여 여호와야훼 앞에 자기 탄식을 쏟아 놓을 때 드리는 기도.시편 102:1 · 본디새김
시편 102편의 표제는 다른 시편들과 비교할 때 독특합니다.
이 노래가 다윗의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특정한 사건이나 음악적 형식을 밝히지도 않습니다. 대신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이 기도를 드리는지 설명합니다. 시편 102편의 기도자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표제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는지 말합니다. 「탄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יחַ)는 묵상이나 생각, 탄식 또는 마음에 품은 이야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쏟아 내는 탄식입니다.
시인은 먼저 기도자의 신앙이 얼마나 훌륭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오래 하나님을 섬겼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통받고 기력이 다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기도는 특별한 지위나 업적을 가진 사람만의 기도가 아니라, 고통 때문에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누가 이 시를 처음 지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표제는 이 기도를 특정한 한 사람의 경험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자신의 기도로 삼을 수 있도록 열어 둡니다.
그런데 정작 기도는 매우 절박하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도움을 청하는 제 외침이 당신께 이르게 해 주십시오.시편 102:2 · 본디새김
시인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멀리 계신다는 객관적인 설명이라기보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느끼는 사람의 간절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곤경에 처한 날에 당신의 얼굴을 제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귀를 제게 기울여 주십시오. 제가 부르는 날에 서둘러 대답해 주십시오.시편 102:3 · 본디새김
이 세 요청은 단순히 기도를 들어 달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라며, 그 응답이 지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 절에서 이미 「제가 곤경에 처한 날」과 「제가 부르는 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앞으로 시 전체에서 「날들」과 「햇수」가 반복될 것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시간의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이 언젠가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는 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를 이렇게 절박하게 만들었습니까?
연기처럼 사라지는 날들
제 날들이 연기 속에서 사라졌고 제 뼈들이 불타는 덩어리처럼 타 버렸기 때문입니다.시편 102:4 · 본디새김
연기는 잠깐 형태를 이루다가 흩어집니다.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날들이 그렇게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뼈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집니다. 뼈는 몸의 형태를 지탱하는 단단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뼈마저 불타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삶의 시간이 흩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몸의 가장 깊은 곳까지 타들어 갑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도 견고하지 않고, 자신의 몸도 견고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풀처럼 얻어맞아 말라 버렸습니다. 제가 제 빵 먹기를 잊었기 때문입니다.시편 102:5 · 본디새김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좁힐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마음은 생각과 의지, 생명력까지 포괄하는 인간 내면의 중심을 나타냅니다. 풀은 생기를 잃으면 빠르게 시듭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생명력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먹는 일조차 잊었습니다.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 무너진 것입니다.
제 신음 소리 때문에 제 뼈가 제 살에 달라붙었습니다.시편 102:6 · 본디새김
몸이 몹시 야위었다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단지 슬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슬픔과 고통은 육체의 상태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삶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세 마리의 새가 보여 주는 고독
저는 광야의 사다새와 같아졌고 폐허의 올빼미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잠 못 이루며 지붕 위에 홀로 있는 새처럼 되었습니다.시편 102:7–8 · 본디새김
세 비유가 공통으로 만들어 내는 장면은 선명합니다. 광야, 폐허, 지붕 위의 고독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새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풍요로운 장소가 아니라 황량하고 버려진 공간과 연결됩니다. 세 번째 새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이 이미지는 건물 위에 앉아 있어도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히 시인은 자신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루의 활동이 끝나고 사람들이 잠드는 밤에도 그는 깨어 있습니다. 낮의 고통이 밤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기도자의 외로움은 단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고, 잠조차 고통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을 보면 그는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공격받고 있습니다.
온종일 제 원수들이 저를 모욕했습니다. 저를 조롱하는 자들은 저를 두고 맹세했습니다.시편 102:9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서 맹세한다는 말은 문맥에 따라 저주나 악담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적들이 시인을 조롱하고 그를 저주의 본보기처럼 사용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몸이 쇠약해졌고, 잠을 이루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조롱까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가장 깊은 고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재를 빵처럼 먹는 사람
제가 재를 빵처럼 먹고 제가 마실 것에 눈물을 섞었기 때문입니다.시편 102: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빵 먹기를 잊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를 빵처럼 먹는다고 말합니다.
먹어야 할 빵은 잊어버렸고, 먹을 수 없는 재가 빵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마시고 먹는 행위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식사에는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기쁨이 아니라 재와 눈물이 있습니다.
슬픔이 일상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고통을 설명하면서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당신의 격분과 분노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들어 올려 내던지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02:11 · 본디새김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원수들의 모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을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잠시 들어 올려진 사람이 다시 아래로 던져진다면 그 충격은 더욱 클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그런 방식으로 무너졌다고 느낍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시인에게 이 고통을 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분노와 연결한다고 해서, 독자가 그에게 어떤 숨겨진 죄가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행동과 무관한 우연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던지셨다고 느끼며, 바로 그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어려운 감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자신의 경험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제 날들은 길게 드리운 그림자와 같고 저는 풀처럼 말라 갑니다.시편 102:12 · 본디새김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해가 낮아지고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하루가 끝나 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4절에서는 날들이 연기 속에서 사라졌고, 5절에서는 마음이 풀처럼 말랐습니다. 12절에서는 날들이 그림자 같고 자신이 풀처럼 말라 간다고 말합니다.
연기, 풀, 그림자.
서로 다른 이미지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자는 자신의 삶에서 견고한 것을 거의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의 방향이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의 새 이름들을 현대의 특정 종과 정확하게 대응시키는 일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 새를 가리키는 카아트는 사다새, 올빼미류 등으로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에서 특정 새의 생태적 특징을 근거로 지나치게 구체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또 재는 구약에서 슬픔과 애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자신의 고통을 겪었던 장면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욥기 2:8). 시인의 말이 실제로 재를 섭취했다는 기록인지, 애도 가운데 재를 뒤집어쓴 상태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 사라지는 사람과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호와야훼, 당신은 영원히 좌정해 계십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대대로 이어집니다.시편 102:13 · 본디새김
시편 102편의 첫 번째 큰 전환점입니다.
앞 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풀처럼 말라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날들은 사라져 가지만, 여호와야훼는 영원히 좌정해 계십니다.
「좌정해 계십니다」(יָשַׁב)에 해당하는 동사는 앉아 있거나 머물러 있다는 뜻을 가지며, 왕좌에 앉아 통치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앞선 시편들에서 계속 등장하던 하나님의 왕권이 여기에서도 배경이 됩니다. 그러나 시편 102편의 관심은 왕권의 위엄 자체에만 있지 않습니다. 영원히 계시는 왕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인간 사이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기도자는 지금 자기 삶의 끝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그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과 자신의 짧은 삶 사이의 거리가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 절에서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행동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당신께서 일어나 시온을 가엾이 여기실 것입니다. 시온에 은혜를 베푸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시편 102:14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히 좌정해 계셨습니다. 이제는 일어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움직임은 단순한 자세의 변화가 아닙니다. 왕좌에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신다는 기대를 표현합니다.
특히 행동의 대상은 시온입니다. 기도자는 자신의 몸과 삶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시온의 회복을 말합니다.
왜 자신의 병과 고통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입니까?
돌과 흙을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좋아하고 그 흙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시편 102: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온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왜 하필 돌과 흙입니까?
화려한 건물이나 웅장한 성벽도 아니고, 왕궁의 영광도 아닙니다. 그저 돌과 흙입니다.
이것은 시온이 황폐해졌거나 무너진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돌과 흙이 특별히 언급되는 까닭은 사람들이 그 장소를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너진 성읍의 돌 하나, 먼지와 흙까지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온의 돌과 흙이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온 장소와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시온은 하나님을 예배하던 장소입니다. 그곳이 무너졌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사라졌다는 것보다 큰 상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의 앞부분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시인은 자신이 풀처럼 말라 가고 뼈가 드러날 만큼 쇠약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시온 역시 돌과 흙으로 표현됩니다.
한 사람의 몸이 무너지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성읍도 무너진 모습입니다.
본문은 두 고통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탄식과 시온의 황폐함이 하나의 기도 안에 놓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도자의 고통은 공동체의 고통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시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14절의 「정해진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시온을 가엾이 여기실 때가 왔다는 강한 확신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시간이 언제인지 날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알려 주신 구체적인 시간표를 소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시온을 향한 긍휼을 바라보며, 이제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주의와는 다릅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짧지만, 시온을 회복하실 하나님은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으시다는 사실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돌과 흙에 대한 표현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백성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읽을 가능성을 높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예루살렘이 언제, 누구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를 바벨론 유배기의 특정 시점이나 귀환 직후의 특정 사건에 확정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해진 때」로 옮긴 히브리어 모에드는 정해진 때나 약속된 시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온의 회복은 어떻게 온 세계의 일이 되는가
민족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땅의 모든 왕들이 당신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입니다.시편 102:16 · 본디새김
이제 시인은 시온의 회복이 여러 민족에게 알려질 것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하는 반응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놀라움이 아닙니다. 시온의 회복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온이 황폐해졌다고 해서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을 다시 세우신다면, 그 행동은 그분이 여전히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세우고 자기 영광 가운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헐벗은 이의 기도에 눈길을 돌렸고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았다.시편 102:17–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시온을 가엾이 여기실 것이라고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미 시온을 세우셨고 자기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도 17절의 「세우고」(בָּנָה)는 완료된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 형태를 사용합니다.
이 변화는 해석의 갈림길을 만듭니다.
하나는 시인이 실제로 이루어진 회복을 회상하고 있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앞부분의 미래 전망은 이미 경험한 회복을 예배 가운데 다시 선포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확실한 미래로 바라보면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한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완료형은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강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어느 쪽인지는 이 시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앞뒤에서 미래의 회복을 기대하는 표현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시 전체를 단순히 이미 회복이 끝난 뒤의 감사 노래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나 시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행동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시온을 세우시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설명하는 18절이 뜻밖입니다. 온 세상의 왕들이 두려워할 영광이 무엇과 연결됩니까? 헐벗은 이의 기도입니다.
시인은 헐벗은 이의 기도를 하나님이 업신여기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고통받는 한 사람이 자신의 외침이 하나님께 이르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궁핍한 이의 기도를 돌아보셨다고 선언합니다.
2절의 기도는 18절에서 응답의 전망과 만납니다.
온 땅의 왕들이 두려워할 하나님의 영광은 힘없는 사람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한 성읍의 명예를 회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헐벗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아르아르는 정확한 의미와 어원에 불확실성이 있는 말입니다. 문맥에서는 아무런 보호나 의지할 것을 갖지 못한 궁핍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기록
이것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되기를. 창조될 백성이 야를 찬양하기를.시편 102:19 · 본디새김
처음에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기록이 다음 세대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하여 미래의 사람들에게 전하려 합니다.
「창조될 백성」(בָּרָא)으로 옮긴 표현은 문자적으로 「창조되는 백성」 또는 「창조될 백성」을 뜻합니다. 이 표현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온의 회복을 통해 새롭게 세워질 백성이라는 의미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만을 명시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현재의 고난을 넘어 미래의 공동체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통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짧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라는 것은 자기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이후에 살아갈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그분이 행하신 일을 남기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은 자신의 고난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와 베푸신 구원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다 경험하지 못하는 미래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알려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날들이 사라져 가는 사람이, 자기보다 오래 남을 하나님에 대한 증언을 기록하려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신 하나님
그가 자기의 거룩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여호와야훼가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시편 102:20 · 본디새김
3절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아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바라보십니다.
갇힌 이의 신음을 듣고 죽음에 넘겨진 이들을 풀어 주려는 것이었다.시편 102:21 · 본디새김
「죽음에 넘겨진 이들」은 문자적으로 죽음에 속한 사람들, 곧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 절에서는 감금과 죽음의 위협이 함께 나타납니다.
기도자는 앞부분에서 자신의 기력이 다하고 삶이 끝나 가는 모습을 말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기 한 사람을 넘어 갇힌 사람들과 죽음의 위협 아래 놓인 사람들의 신음까지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시지만, 그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권력자들의 영광스러운 자리만이 아닙니다. 갇힌 사람들의 신음이 들리는 곳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높으심은 인간의 고통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시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한 사람의 기도에서 여러 왕국의 예배까지
시온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그를 찬양하는 말을, 백성들과 왕국들이 여호와야훼를 섬기러 함께 모일 때 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시편 102:22–23 · 본디새김
이제 시편의 시야는 다시 넓어집니다.
한 사람의 탄식으로 시작했던 기도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지나, 여러 백성과 왕국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장면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갇힌 사람들의 신음을 들으시는 일과 여러 민족의 예배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풀어 주십니다. 그 결과 시온에서 그분의 이름이 선포되고, 여러 백성과 왕국이 함께 모여 그분을 섬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지역의 정치적 승리가 다른 나라에 알려진다는 이야기보다 넓습니다.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 여러 민족이 그분을 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시편 102편은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을 그분의 백성만 누리는 폐쇄적인 승리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될 여러 민족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 전망을 당시 모든 나라가 이미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을 바라보면서 온 세상이 그분을 예배하는 미래를 그립니다.
그런데 시편 102편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보편적인 예배의 전망이 이름 없는 고통받는 사람의 기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외침이 하나님께 이르기를 바랐던 사람이 이제 여러 왕국이 하나님께 모여드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전망을 말한 뒤에도 자신의 고통을 잊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21절의 장면은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장 23~25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종살이로 신음하며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돌아보셨다고 전합니다. 또 22~23절의 장면은 이사야 2장 2~4절에서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올라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는 전망과도 연결됩니다. 두 본문 모두 시온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여러 민족에게 알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제 날들의 한가운데서 저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그가 길에서 내 힘을 약하게 했고 내 날들을 짧게 했다.시편 102:24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의 분위기가 다시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회복시키시고 여러 민족이 함께 예배할 것을 바라보던 시인이 갑자기 자신의 쇠약한 삶으로 돌아옵니다. 문장의 주어인 「그」는 명시적으로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앞뒤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다시 자신의 힘이 약해진 일을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합니다.
나는 말한다. 「제 하나님, 제 날들의 한가운데서 저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당신의 햇수는 대대로 이어집니다.」시편 102:2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시편 전체의 긴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인간의 수명과 하나님의 영원함을 비교하는 것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시인은 방금 전까지 시온의 회복과 미래 세대의 찬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미래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기도에 새로운 절박함을 더합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그 회복을 보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입니까?
본문이 이러한 질문을 직접 문장으로 적지는 않지만, 미래 세대를 위한 기록을 바란 직후 자신의 생애가 짧아지는 일을 탄식하는 흐름은 이러한 긴장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오늘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의 고통을 자동으로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시편은 이 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시인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삶이 너무 일찍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과 두려움이 같은 기도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리거나,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날들을 더 허락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삶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기 때문에 바로 그분께 간구합니다.
이 기도에는 아직 응답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바라봅니다. 이번에는 시온의 회복이 아니라 창조 전체의 시작과 끝을 떠올립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에는 작은 본문 전승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소라 본문의 기록된 자음은 「그의 힘」으로 읽을 수 있으나, 전통적인 읽기는 「내 힘」을 따릅니다. 본디새김도 이 읽기를 선택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낡아도 하나님은 그대로이십니다
「오래전에 당신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은 당신 손으로 만드신 것입니다.」시편 102:26 · 본디새김
여기서 창조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너무 짧다는 고통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시인은 창조 세계의 시작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로 바라봅니다. 자신의 날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짧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것들은 멸망하겠지만 당신은 서 계실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해어질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것들을 의복처럼 갈아 바꾸실 것이며 그것들은 바뀔 것입니다.」시편 102:27 · 본디새김
옷은 시간이 지나면 낡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옷이라도 계속 사용하면 해어지고 결국 바꾸어야 합니다. 시인은 하늘과 땅을 그런 옷에 비유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늘과 땅이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수명에 비하면 거의 영원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조차 창조주 앞에서는 낡아 가는 옷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갈아 바꾸실 것」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인 우주 종말의 과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가 창조 세계의 완전한 소멸을 말하는지, 변화와 새로움을 강조하는지, 그 구체적인 방식까지 본문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행동 아래 있으며 그분만큼 변함없이 지속되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하늘과 땅의 변화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것들과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대로이시며 당신의 햇수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102:28 · 본디새김
이 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러나 당신은 그분이십니다」 또는 「당신은 그대로이십니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앞의 창조 세계가 낡고 바뀐다는 선언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늘과 땅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로이십니다.
그분의 햇수는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날들이 연기 속에서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자신의 날들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자신의 날들이 짧아졌다고 했고, 25절에서는 생애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 모든 문장에는 자신의 시간이 끝나 간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햇수가 끝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단순히 인간은 덧없고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결론입니까?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다시 인간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후손들이 자리 잡고 삽니다
「당신 종들의 자녀들은 자리 잡고 살 것이며 그들의 후손은 당신 앞에 굳게 설 것입니다.」시편 102:29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말한 뒤 인간의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영원함을 바라보는 이유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과 세대가 하나님 안에서 지속될 수 있다는 소망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 세대가 오래 살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그들의 미래를 지탱한다는 믿음입니다. 그분의 햇수가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은 한 세대가 지나간 뒤에도 다음 세대를 돌보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와 후손들에게도 변함없이 신실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마지막 절이 기도자 자신에게 반드시 긴 생애가 보장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은 그에게 몇 년의 수명이 더 주어졌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시온의 회복을 직접 보았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소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의 미래도 자신의 짧은 생애에만 달려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2편은 시편 90편과 함께 읽을 때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90편 5~6절에서는 인간이 아침에 자라다가 저녁에 시들어 마르는 풀처럼 묘사됩니다. 또 시편 90편 2절은 산들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시편 90편이 인간의 날들을 헤아리는 지혜를 구한다면(90:12), 시편 102편은 자신의 날들이 다하기 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돌보실 것인지를 간절히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사야 51장 6절에는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옷처럼 낡는다는 표현이 등장하며, 그러한 피조 세계의 덧없음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며 그분의 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두 본문이 서로를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과 피조 세계의 덧없음 속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바라본다는 공통된 신학적 주제를 보여 줍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1장 10~12절은 시편 102편 26~28절을 직접 인용하여 아들에게 적용합니다. 원래 시편에서 이 고백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야훼를 향한 기도이며, 히브리서는 그 창조주에 관한 언어를 그리스도의 위엄을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시편 102편 자체의 중심은 먼저 한 고통받는 사람의 기도에 있습니다.
자기보다 오래 남을 노래를 남기는 사람
시편 102편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성급하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충분히 들려줍니다. 시인은 고통을 감추거나 종교적인 언어로 덮어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일이 해결되어야만 하나님의 신실함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02편의 기도자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은 그 소망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자는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자기 생애보다 크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신의 수명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하나님은 계시며, 그분의 백성을 돌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이 아무 의미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짧은 삶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더 큰 이야기 안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고통의 모든 원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는 자신의 날들이 사라진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햇수는 끝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에서 미래를 향한 소망을 발견합니다.
자신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자신은 모든 세대를 돌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자신은 시온의 회복을 모두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그의 짧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삶이 더 넓은 시간 속에 놓이도록 합니다.
그래서 시편의 마지막 장면은 처음과 크게 다릅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홀로 지붕 위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종들의 자녀와 후손들이 그분 앞에 굳게 서 있습니다.
고독한 한 사람에게서 시작한 기도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까지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날들이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탄식했습니다. 그 연기를 붙잡아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겪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고, 그 이야기가 다음 세대에 기록되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는 언젠가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하나님은 다음 세대가 태어날 때에도 계실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