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7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길이 생기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일하던 사람들이 거센 폭풍을 만납니다. 물결이 배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가 깊은 곳으로 떨어뜨립니다. 뱃사람들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자신들이 알고 있던 모든 항해 기술은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폭풍이 고요해지고, 배는 바라던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폭풍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말합니다.
「그가 말하여 폭풍의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이 바다의 물결을 높이 들어 올렸다.」(25절)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그는 폭풍을 고요하게 했고, 그들의 물결은 잠잠해졌다」(29절)라고 말합니다.
폭풍을 일으키신 분과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분이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 장면은 시편 107편이 단순히 어려울 때 기도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구원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모든 위기가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으로 묘사되고, 죽음의 문에 가까워진 사람들은 자기 죄악 때문에 고난을 겪습니다. 반면 광야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과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런 잘못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네 무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 내십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네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기를, 그의 인애와 사람들에게 행한 그의 놀라운 일들 때문에.」
이렇게 반복해서 감사를 요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하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일까요?
시편의 마지막 절을 보면 그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가? 그런 이는 이 일들을 눈여겨보기를. 지혜로운 이들은 여호와야훼가 베푼 인애를 깊이 헤아리기를.」 시인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건들을 듣고 지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시편 107편은 네 가지 구원 이야기를 들려준 뒤,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묻는 시편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 사슬에 묶인 사람,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 폭풍에 휩싸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어서는 강이 광야로 변하고 광야가 물이 고인 못으로 변하며, 높은 사람들이 낮아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높아지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 모든 변화가 무엇을 보여 주는지 알아보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 찾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와 이야기하다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고, 그의 인애는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07:1 · 본디새김
시편은 익숙한 감사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여호와야훼가 되찾아 낸 이들, 그가 원수의 손에서 되찾아 내고, 여러 땅에서,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과 바다에서 모아들인 이들은 그렇게 말하기를.시편 107:2–3 · 본디새김
“되찾아 내다”는 잃었거나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인 것을 되찾는 행위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는 표현에는 단순히 위험에서 탈출시키셨다는 것 이상의 관계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고 되찾으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땅에서 모여 왔습니다. 동쪽, 서쪽, 북쪽이 나왔다면 자연스럽게 남쪽이 이어질 것 같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남쪽이 아니라 ‘바다(יָם)’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인이 어떤 구체적인 지리적 배치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러 방향과 지역에서 모여든다는 큰 뜻은 분명합니다.
시편 106:47에서 백성은 여러 민족 가운데서 자신들을 모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7:3에서는 하나님이 여러 땅에서 사람들을 모아들이신 일이 감사의 이유로 등장합니다. 두 시편을 나란히 놓으면 흩어진 백성의 기도와 다시 모인 사람들의 감사가 서로 마주 보는 것처럼 읽힙니다.
지난 시편의 마지막에는 “모아 주십시오”라는 간구가 있었습니다. 이번 시편의 시작에는 “모아들인 이들”의 찬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되찾으신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시인은 곧바로 네 가지 장면을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들을 모두 이스라엘의 특정한 네 역사적 사건과 정확하게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흩어짐과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한 회복의 찬양이면서도, 인간이 경험하는 다양한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을 폭넓게 묘사하는 노래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네 무리의 고난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술로도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르짖음은 같은 하나님께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되찾아 내다(גָּאַ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알은 구약의 친족법에서 가까운 친족이 가족의 재산을 되찾거나 어려움에 빠진 가족을 구하는 역할과도 관련된 말입니다(레위기 25:25, 47–49). 이 말의 모든 법률적 의미를 시편 107편에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3절의 ‘바다’(얌)는 히브리어에서 서쪽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므로, 이 표현의 지리적 의미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나타내려는 시적 구성을 전제하여 마지막 표현을 남쪽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지만, 현존하는 히브리어 문면은 바다입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바다라는 말을 그대로 남기는 것은 타당한 선택입니다. 또 시편 106편과 107편의 연결을 두고, 두 시편이 반드시 특정한 귀환 사건을 시간순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107편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과 집필 시기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시편 배열에서 이러한 연결은 분명한 문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성읍을 주시다
그들은 광야에서, 황무지 길에서 헤맸고, 살 곳이 될 성읍을 찾지 못했다.시편 107:4 · 본디새김
첫 번째 이야기는 광야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단순히 길의 끝이나 목적지가 아닙니다. “살 곳이 될 성읍”입니다. 성읍은 단지 건물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먹을 것을 얻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생활의 기반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언제 안전한 곳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굶주리고 목까지 말라, 그들 안에서 생명이 쇠약해졌다.시편 107:5 · 본디새김
갈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습니다. 광야의 문제는 단순히 길이 복잡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오래 헤매면 생명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시인은 그들이 왜 광야에서 길을 잃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뒤에 등장할 일부 무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겪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원인이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하자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었고, 그는 그들을 고난에서 건져 냈다.시편 107:6 · 본디새김
이것이 앞으로 반복될 첫 번째 후렴입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지, 어떤 특별한 신앙적 태도를 보였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을 곧은 길로 이끌어, 살 곳이 될 성읍으로 가게 했다.시편 107:7 · 본디새김
4절에서 그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7절에서는 곧은 길을 얻습니다. 4절에서 그들은 살 곳이 될 성읍을 찾지 못했습니다. 7절에서는 바로 그 성읍을 향해 인도받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지 광야에서 빠져나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 가셨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끄시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기를, 그의 인애와 사람들에게 행한 그의 놀라운 일들 때문에.시편 107:8 · 본디새김
그리고 감사의 이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그가 갈망하는 이를 흡족하게 했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웠기 때문이다.시편 107:9 · 본디새김
5절에서는 생명이 쇠약해졌습니다. 9절에서는 갈망하는 사람이 흡족해지고 굶주린 사람이 채워집니다. 9절의 “갈망하는 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물리적 배고픔보다 넓은 결핍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만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의 끝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갈 수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출애굽의 광야 여정을 떠올리게 하면서, 흩어진 백성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노래하는 이사야 35:8–10과 43:19에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심은 특정한 역사적 여정의 재현보다,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9절의 “갈망하는 이”(쇼케카)는 드문 표현이어서 정확한 뉘앙스를 한 가지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앞 절들의 갈증과 결핍을 배경으로 깊은 갈망을 표현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둠에 갇힌 사람들에게 문이 열리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 고난과 쇠에 묶인 포로들이 있었다.시편 107:10 · 본디새김
첫 번째 이야기에는 길이 없는 광야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어둠과 쇠사슬이 있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번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은 희망이 사라지고 죽음이 가까워진 처지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와 달리 이번에는 그들이 그런 처지에 놓인 이유가 명시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들을 거역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뜻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시편 107:11 · 본디새김
여기에는 앞선 시편 106편에서 보았던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07편이 이 포로들을 특정한 역사적 집단으로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들의 고난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고된 일로 그들의 마음을 낮추었다. 그들은 비틀거렸고, 돕는 이가 없었다.시편 107:12 · 본디새김
여기서 가장 비참한 표현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돕는 이가 없었다.” 쇠사슬에 묶인 데다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하자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었고, 그는 그들을 고난에서 구원했다.」(13절) 앞에서 광야의 사람들이 부르짖었을 때와 같은 구조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죄가 명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곤경을 겪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두 무리 모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잘못 없이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시는 데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거역을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기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11–12절은 이미 그들의 죄와 고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심판하신 뒤에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그들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이끌어 냈고, 그들을 묶은 줄들을 끊었다.시편 107:14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위로만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속하고 있던 상황 자체를 바꾸십니다. 15절에서 두 번째 감사의 후렴이 울린 뒤, 16절에서는 이 이미지가 더욱 극적으로 발전합니다.
그가 청동 문들을 부수었고, 쇠 빗장들을 잘라 냈기 때문이다.시편 107:16 · 본디새김
청동 문과 쇠 빗장은 견고한 감금과 차단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쉽게 부술 수 없는 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문을 부수십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곧은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닫힌 문을 부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다음 이야기에서 더욱 깊은 어둠에 가까워진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10:21–22에서도 죽음의 그늘과 어둠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곳의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11절의 포로 이야기를 반드시 바벨론 유배의 한 사건만을 기록한 것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6절의 표현은 이사야 45:2와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청동 문들을 부수시고 쇠 빗장들을 잘라 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고레스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을 설명하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먹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돌려주시다
어리석은 이들은 자기들이 거역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시편 107:17 · 본디새김
세 번째 이야기 역시 인간의 죄를 명시합니다.
성경에서 어리석음은 언제나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옳은 길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4절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17절의 사람들은 “거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앞에서는 길을 찾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는 잘못된 길을 걸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모든 음식을 역겨워했고, 죽음의 문들에까지 이르렀다.시편 107:18 · 본디새김
앞의 첫 번째 무리는 굶주렸지만 먹을 것을 갈망했습니다. 이번 사람들은 음식 자체를 역겨워합니다. 살아가려면 먹어야 하는데, 먹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죽음의 문들”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하나의 성읍처럼 묘사합니다. 성읍에 문이 있듯이, 죽음에도 문이 있습니다. 앞의 감옥 이야기에서는 인간을 가두는 청동 문이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하자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었고, 그는 그들을 고난에서 구원했다.」(19절)
그는 자기 말을 보내 그들을 고쳤고, 그들의 구덩이들에서 그들을 건져 냈다.시편 107:20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을 고치시기 위해 자신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11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20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고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거역할 수 있는 명령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시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생명을 회복시키시는 능력을 노래할 뿐, 그 구원이 어떤 의학적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죽음의 문들”과 이어 읽으면, 20절의 “구덩이들”은 죽음에 가까워진 처지를 묘사하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에 거의 도착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 번째 감사의 후렴 뒤에는 앞선 이야기들에 없었던 명령이 추가됩니다.
그들이 감사의 제물을 잡아 바치고, 기쁨의 외침으로 그가 한 일들을 이야기하기를.시편 107:2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감사는 단지 마음속에 품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예배의 행위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시편의 첫머리에서 되찾아진 사람들이 말하도록 부름받았던 장면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게 위기를 극복했는지 자랑하도록 요청받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고치시고 건지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야기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이야기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광야의 방랑자도, 감옥의 포로도, 병상에 누운 사람도 아닙니다.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뱃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7에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시인은 이들이 실제로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거부할 정도로 쇠약해진 모습은 심각한 질환을 떠올리게 하지만, 특정한 병명을 붙일 근거는 없습니다. 20절의 ‘그의 말을 보내신다’는 표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33:6–9에서는 하늘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으로 만들어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노래합니다. “구덩이들”(셰히토탐)은 구덩이나 파멸의 자리와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본디새김은 구체적인 이미지인 “구덩이들”을 남겼습니다. 22절의 “감사의 제물”은 레위기 7:12–15에 나오는 감사의 화목제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혜가 삼켜질 때 — 폭풍 가운데 있는 사람들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는 이들, 큰 물에서 일하는 이들, 바로 그들이 여호와야훼가 한 일들을, 깊은 물에서 행한 그의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시편 107:23–24 · 본디새김
이들은 관광하러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처음에는 구원이 아니라 폭풍입니다.
그가 말하여 폭풍의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이 바다의 물결을 높이 들어 올렸다.시편 107:25 · 본디새김
20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들을 고칩니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다에 거센 폭풍을 일으킵니다. 그 말씀은 바다와 바람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왜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키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뱃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키셨다는 진술과 뱃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는 판단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늘과 깊은 물 사이에서
그들은 하늘로 올라갔다가 깊은 물속으로 내려갔고, 그들의 마음은 재난 속에서 녹아내렸다.시편 107:26 · 본디새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듯하다가 깊은 바다로 추락하는 듯한 움직임입니다. 배가 물결에 흔들리는 동안 그들의 마음도 무너집니다.
그들은 술 취한 이처럼 휘청거리며 비틀거렸고, 그들의 모든 지혜는 삼켜져 버렸다.시편 107:27 · 본디새김
뱃사람들에게는 바람을 읽고, 배를 조종하며, 위험한 항로를 판단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센 폭풍 앞에서 그 모든 지혜가 소용없게 됩니다. 바다가 배를 삼킬 것처럼 위협하는 상황에서, 뱃사람들의 지혜마저 삼켜진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일에 능숙한 사람들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네 번째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하자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었고, 그는 그들을 고난에서 이끌어 냈다.」(28절)
그는 폭풍을 고요하게 했고, 그들의 물결은 잠잠해졌다.시편 107:29 · 본디새김
이것은 자연의 힘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그분과 싸우고 있다는 묘사가 아닙니다. 폭풍도 고요함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물결이 잦아들자 기뻐했고, 그는 그들이 바라던 항구로 그들을 이끌었다.시편 107:30 · 본디새김
첫 번째 사람들은 광야에서 길을 잃고 살 곳이 될 성읍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곧은 길로 인도하시어 성읍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네 번째 사람들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방향과 통제력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라던 항구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위험을 멈추게 하는 일이 아니라, 위험으로 가로막혔던 삶의 길을 다시 열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뱃사람들이 그 경험을 개인적인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 감사의 후렴 뒤에서 그들을 공동체 앞으로 부릅니다.
그들이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고, 장로들이 앉은 자리에서 그를 찬양하기를.시편 107:32 · 본디새김
이는 22절의 감사 제물과 증언을 더욱 확대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경험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도록 돕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 시인은 특정한 위기와 구원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세상 전체의 상황을 어떻게 뒤바꾸시는지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의 “삼켜져 버렸다”는 표현은 삼키다라는 동사와 연결됩니다. 30절의 “바라던 항구”(메호즈 헤프참)에서 메호즈는 매우 드문 낱말이어서 정확한 의미를 세부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항해의 문맥에서 도달하기를 바라던 장소라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강이 광야가 되고 광야가 샘이 되다 — 하나님이 뒤집으시는 세계
그는 강들을 광야로, 물 솟는 곳들을 메마른 땅으로 바꾸었다. 열매 맺는 땅을 소금 땅으로 바꾸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의 악 때문에.시편 107:33–34 · 본디새김
그런데 여기서부터 시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특정한 무리가 부르짖고 구원받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세상의 상태를 뒤바꾸시는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변화는 풍요에서 황폐함으로 향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언제나 황무지가 풍요롭게 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악한 행위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34절은 열매 맺는 땅이 황폐해진 이유를 명시합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의 악 때문에.” 땅이 풍요롭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의롭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가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현을 오늘날의 모든 가뭄과 환경 재해가 그 지역 사람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자체가 위기의 원인을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5절에 이르면 방향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그는 광야를 물이 고인 못으로, 마른 땅을 물 솟는 곳들로 바꾸었다.시편 107:35 · 본디새김
앞의 두 절과 정확히 반대 방향의 변화입니다. 땅의 상태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고정된 현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상태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단순히 인간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악을 심판하시고,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여시는 분입니다.
다시 등장한 굶주린 사람들과 성읍
그는 굶주린 이들을 거기에 살게 했고, 그들은 살 곳이 될 성읍을 세웠다.시편 107:36 · 본디새김
첫 번째 이야기에서 광야를 헤매던 사람들은 굶주렸고, 살 곳이 될 성읍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광야를 물이 있는 곳으로 바꾸신 뒤, 굶주린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성읍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성읍을 세우는 사람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밭에 씨를 뿌리고 포도밭을 가꾸어, 거둘 열매를 생산했다.시편 107:37 · 본디새김
하나님은 메마른 땅을 물이 있는 땅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밭에 씨를 뿌리고 포도밭을 가꾼 사람들은 그 땅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갈 조건을 마련하시고, 사람들은 그 조건 안에서 일하며 삶을 이어갑니다.
그가 그들에게 복을 주어 그들의 수가 크게 늘었고, 그는 그들의 가축이 줄어들게 하지 않았다.시편 107:38 · 본디새김
생명이 번성하고 사람이 늘어나며 가축도 불어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또다시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귀족은 광야에서 헤매고, 궁핍한 사람은 높이 들어 올려진다
그들은 억압과 재난과 슬픔 때문에 수가 줄고 낮아졌다.시편 107:39 · 본디새김
시인은 번영이 이루어진 뒤에도 고난과 쇠퇴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39절의 “그들”은 앞서 번성한 사람들을 이어받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시가 일반적인 상황의 변화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집단의 연대기로만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3–34절에서 땅이 황폐해진 이유는 그곳 사람들의 악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39절에서는 사람들이 억압과 재난과 슬픔 때문에 낮아졌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가난해지고 쇠약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귀족들에게 멸시를 쏟아붓고, 길 없는 황무지에서 그들을 헤매게 했다.시편 107:40 · 본디새김
시편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광야를 헤매던 사람들은 아무런 힘이 없는 방랑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귀족들이 광야에서 헤맵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길이 주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잃습니다.
이것은 권력이 인간에게 궁극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모든 귀족이나 권력자를 예외 없이 악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교만한 권세를 낮추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궁핍한 이를 고난에서 높이 들어 올렸고, 집안들을 양 떼처럼 불어나게 했다.시편 107:41 · 본디새김
40절에서는 높은 사람들이 낮아졌습니다. 41절에서는 낮은 사람이 높아집니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판단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궁핍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힘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질서를 뒤집으실 수 있습니다.
올곧은 사람들이 보고 기뻐하는 이유
올곧은 이들은 보고 기뻐했고, 모든 불의는 제 입을 다물었다.시편 107:42 · 본디새김
왜 의로운 사람들이 기뻐할까요? 그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해지고 가난한 사람이 부유해지는 모습을 즐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고 궁핍한 사람을 돌보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한 운명의 변덕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안에서 공의와 자비를 발견합니다. 불의를 의인화한 “모든 불의는 제 입을 다물었다”는 말처럼, 하나님이 올바른 일을 행하실 때 불의는 더 이상 자기를 정당화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시인은 다시 감사하라고 말하는 대신, 이번에는 지혜를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40–41절의 모습은 사무엘상 2:7–8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여호와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으로 찬양받으십니다. 특히 궁핍한 사람을 들어 올리신다는 표현이 시편 107편과 가깝습니다.
누가 지혜로운가 — 하나님의 인애를 깊이 헤아리는 사람
누가 지혜로운가? 그런 이는 이 일들을 눈여겨보기를. 지혜로운 이들은 여호와야훼가 베푼 인애를 깊이 헤아리기를.시편 107:43 · 본디새김
이것이 시편의 마지막 절입니다. 그리고 시편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단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여겨보기를(שָׁמַר)”은 지키다, 주의 깊게 살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에서 나왔고, “깊이 헤아리기를(בִּין)”은 깊이 살피고 분별한다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깊이 헤아려야 할까요? “여호와야훼가 베푼 인애”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는 ‘여호와야훼의 인애들(חֶסֶד)’이라는 복수형 표현을 사용합니다. 시편 첫 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그 인애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리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하나입니다. 그분이 신실하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인애가 나타나는 방식은 하나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인도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포로에게는 해방으로 나타납니다.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에게는 치유로 나타납니다.
폭풍 속의 사람에게는 고요함과 안전한 도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역사에서는 악에 대한 심판과 궁핍한 사람을 높이시는 공의로 나타납니다.
시편 107편이 말하는 지혜는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시험인지 곧바로 판정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편은 서로 다른 원인의 고난들을 의도적으로 나란히 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고난에는 죄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는 그런 설명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억압과 슬픔 때문에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고통을 한 가지 공식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무조건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묻는 태도는 시편 107편의 다양한 묘사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네 가지 이야기에서 모두 구원을 경험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방식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보편적인 보증을 읽어 낼 수도 없습니다. 시편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의 증언입니다. 모든 인간의 고난이 반드시 똑같은 결말을 맞이한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행동을 쉽게 단정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깊이 헤아리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는 욥기와 잠언에서도 중요한 지혜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잠언은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적 질서를 배우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 질서를 인간이 언제나 단순한 인과관계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편 107편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를 확신하면서,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상황을 한 가지 원인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길 없는 광야에서 성읍이 세워지다
구원의 사건은 단순히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네 번 반복되는 감사의 후렴은 모든 구원 이야기를 같은 하나님께 연결하고, 한 사람의 감사는 자신이 경험한 구원을 말하지만, 공동체의 찬양은 서로 다른 삶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애를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시편 107편에는 두 번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길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황무지에서 헤매며 살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곧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마침내 그들은 살 곳이 될 성읍에 도착합니다.
두 번째는 시편 후반부의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을 물이 고인 못으로 바꾸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십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직접 성읍을 세웁니다.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애는 이 두 장면 모두에 있습니다.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이끄시는 인애와, 황폐한 땅을 다시 살아갈 곳으로 바꾸시는 인애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 아름다운 장면만 기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강이 광야로 변하는 모습도, 귀족들이 길을 잃는 모습도, 궁핍한 사람들이 높아지는 모습도 함께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애를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로 축소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여러 이야기 속에서,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만 일하시지는 않지만 자신의 인애를 드러내시는 여호와야훼를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광야에는 이제 물이 흐릅니다.
굶주리던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밭에 씨를 뿌립니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할 것 같았던 땅에서 포도밭이 자라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성읍이 세워집니다.
시인은 독자에게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가 베푸신 인애를 깊이 헤아리라고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