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6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우리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셨습니다
시편 106편에는 이상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꾸짖으시자 물이 갈라지고, 백성은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뒤쫓던 적들은 물에 잠깁니다. 그 광경을 본 백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그들은 그가 한 일들을 곧 잊었고, 그의 뜻을 기다리지 않았다」(13절)로 시작합니다.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고, 찬양까지 불렀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잊을 수 있었을까요?
시편 106편은 이 질문을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백성이 믿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행적을 잊어버리고 자기 욕망을 따릅니다. 그 결과 고통을 겪으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 내시지만, 백성은 또다시 거역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백성이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시편의 끝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자기 언약을 기억했고, 자기의 풍성한 인애에 따라 마음을 돌이켰다」(45절).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대조가 시편 106편 전체를 관통합니다.
앞선 시편 105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역사를 노래했습니다. 시편 106편은 같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배반했는지 보여 줍니다. 시편 105편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시편 106편은 그 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돌아봅니다.
하지만 시편 106편의 목적은 조상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저희는 저희 조상들과 함께 죄를 지었습니다」(6절)라며 자신을 그 역사 안에 포함합니다. 그는 과거의 죄를 이야기하면서 자신만은 그 죄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긴 역사의 끝에서 「저희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 가운데서 저희를 모아 주십시오」(47절)라고 다시 기도합니다.
시편 106편은 조상들의 죄를 조사하는 기록이 아니라, 그 역사를 자기 죄로 고백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인애를 구하는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었다
시편은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고, 그의 인애는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06:1 · 본디새김
그런데 시인은 곧바로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여호와야훼의 능력 있는 일들을 말하며, 그를 향한 모든 찬양을 들려줄 수 있겠는가?시편 106:2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이 하신 일이 너무 많아서 모두 셀 수 없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시인은 이제 긴 역사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건을 말해도 하나님의 능력과 인애를 완전히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 역사에는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수치스러운 실패도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어떻게 하나님의 찬양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먼저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정의를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 언제나 의를 행하는 이는 행복하다.시편 106: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곧이어 나올 죄의 고백을 준비합니다. 시인은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6절에 이르면 자신과 조상들이 죄를 짓고 악을 행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인간의 행동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사실이 함께 놓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백성은 죄를 지었습니다.
시인은 어느 하나를 없애지 않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4절에서는 시인이 갑자기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백성에게 호의를 베푸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의 구원으로 저를 돌보아 주십시오.시편 106:4 · 본디새김
왜 긴 공동체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적인 기도가 등장할까요? 시인은 하나님이 과거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구원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표현에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의 구원으로 저를 돌보아 주십시오”라는 다음 문장이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행동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제가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의 행복을 보고, 당신의 민족이 누리는 기쁨으로 기뻐하며, 당신의 유산과 함께 자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시편 106:5 · 본디새김
시인이 바라는 것은 자신만 따로 구원받아 행복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 “당신의 민족”, “당신의 유산”은 같은 공동체를 서로 다른 표현으로 가리킵니다. 자신의 구원이 공동체의 회복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공동체의 기쁨을 구하자마자 이어지는 말은 죄의 고백입니다.
저희는 저희 조상들과 함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릇된 일을 했고 악을 행했습니다.시편 106:6 · 본디새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저희는”입니다. 시인은 “우리 조상들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살던 세대가 출애굽 당시의 사건들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은 후손들이 조상들과 시간적으로 같은 범죄 행위에 참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상들의 죄를 자신들의 역사와 무관한 남의 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고백입니다. 그들의 실패가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느헤미야 9:6–37과 다니엘 9:4–19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본문들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와 이스라엘의 반복된 불순종을 함께 회고하면서, 현재의 공동체가 그 죄를 자기 문제로 고백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찾아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죄의 역사를 하나씩 되짚어 봅니다. 첫 번째 장면은 갈대 바다입니다.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야 믿었다 — 갈대 바다의 신앙
저희 조상들은 이집트에서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깨닫지 못했고, 당신이 베푸신 많은 인애를 기억하지 않았으며, 바닷가에서, 갈대 바다에서 거역했습니다.시편 106:7 · 본디새김
이 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통해 행하신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그 일들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기적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는 보았지만,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인애를 기억하지 않았으며」라는 말도 기억력이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들을 지금 닥친 위기 속에서 신뢰의 근거로 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4:10–12를 보면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 앞에서 이집트 군대를 보자 몹시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죽느니 차라리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편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인이 “바닷가에서 거역했습니다”라고 회상하는 사건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갑자기 문장이 전환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했다, 자기의 능력을 알리려고.시편 106:8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푸신 인애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순간 훌륭한 믿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자기 이름을 위해 구원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과 뜻에 따라 행동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응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갈대 바다를 꾸짖자 바다가 말랐다. 그는 광야를 지나듯 그들을 깊은 물 사이로 이끌었다.시편 106:9 · 본디새김
바다를 꾸짖는다는 표현은 물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꾸짖으시자 백성이 지나갈 길이 생깁니다. 특히 “광야를 지나듯”이라는 표현은 물로 가득했던 곳이 마른 땅처럼 변했다는 놀라움을 강조합니다.
바다는 인간이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서 그 바다가 백성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됩니다.
그 뒤로 바다가 다시 적들을 덮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길이 되었던 바다가 이집트 군대에게는 심판의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백성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제야 그들은 그의 말들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시편 106:12 · 본디새김
그들은 바다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이루어진 뒤에는 믿고 노래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에서의 구원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노래 자체는 진실한 찬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믿음과 찬양이 다음 위기에서도 지속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4:7에서도 하나님이 물을 꾸짖으시자 물이 달아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땅과 물의 질서를 세우시는 창조의 모습이 중심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종류의 이미지가 역사적 구원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았지만, 그분의 뜻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한 일들을 곧 잊었고, 그의 뜻을 기다리지 않았다.시편 106:13 · 본디새김
이것은 시편 전체의 핵심적인 문제를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해서 불신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경험하고도 그 경험이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뜻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말은 단지 하나님이 일을 빨리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뜻하시며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구하기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욕망을 불태웠고, 황무지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시편 106:14 · 본디새김
이 사건은 특히 민수기 11:4–34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백성은 먹을 것을 요구하면서 이집트에서 먹던 음식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죄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배고픔과 음식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집트의 종살이를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불신하는 태도로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보다,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는지에 따라 하나님을 판단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뜻밖입니다.
그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었지만, 그들의 몸에 쇠약함을 보냈다.시편 106:15 · 본디새김
민수기 11:31–34에서도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보내시지만, 백성이 고기를 먹는 가운데 큰 재앙이 닥칩니다. 요구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욕망을 옳다고 인정하셨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13절의 “그의 뜻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지만,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 아래 두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다음에 시인은 먹을 것에 대한 욕망에서 공동체 안의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쇠약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존(רָזוֹן)은 마름이나 야윔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뒤에 나오는 네페쉬는 문맥상 사람의 생명이나 몸, 욕구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몸에 쇠약함이 왔다는 읽기는 가능하지만, 이 표현을 단순히 영적인 공허함으로만 바꾸어 해석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 육체적 재앙이 묘사된 민수기 11장의 문맥도 고려해야 합니다.
권위를 시기하고 땅이 갈라지다 — 다탄과 아비람의 반역
그들은 진영에서 모세를 시기했고,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사람 아론을 시기했다.시편 106:16 · 본디새김
이번에는 먹을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위가 문제가 됩니다.
이 구절은 민수기 16장의 고라와 다탄과 아비람의 반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라와 그의 무리는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합니다. 그들은 온 회중이 거룩한데 왜 모세와 아론만 스스로를 높이느냐고 묻습니다(민수기 16:3). 이 말만 떼어 놓고 보면 공동체의 거룩함과 평등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았습니다(출애굽기 19:6).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민수기 16장의 이야기에서 고라는 자신에게 맡겨진 레위인의 직무로 만족하지 않고 제사장직까지 요구합니다(민수기 16:8–10). 다탄과 아비람도 모세의 지도력을 거부하며, 오히려 이집트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묘사합니다(민수기 16:12–14).
출애굽의 의미가 뒤집혀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낸 사건을 자유의 시작으로 기억하기보다, 자신들이 기대한 보상을 얻지 못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시편은 이 복잡한 사건을 “시기했다”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권위 자체에 관한 모든 문제 제기를 죄라고 판단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지도자의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이 맡기신 직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반역입니다.
그 결과 시편은 무서운 장면을 들려줍니다.
땅이 벌어져 다탄을 삼켰고, 아비람의 무리를 덮었다. 그들의 무리 가운데 불이 타올랐고, 불꽃이 악인들을 불살랐다.시편 106:17–18 · 본디새김
민수기 16:31–35에는 땅이 갈라져 다탄과 아비람에게 속한 이들을 삼키고,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 불이 분향하던 사람들을 불사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그분의 심판을 드러내는 도구로 묘사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이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은 채, 눈앞에 있는 권력과 지위를 얻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지보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그러한 왜곡이 더욱 근본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지도자를 시기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다른 형상과 바꾸어 버립니다.
자신들의 영광을 소의 형상과 맞바꾸다 — 금송아지 사건
그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속을 부어 만든 형상에 엎드렸다.시편 106:19 · 본디새김
이것은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동안 백성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론은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전혀 다른 신을 믿게 되었다는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출애굽기 32:4–5에서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신과 연결하고, 아론은 여호와야훼를 위한 축제를 선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이 만든 형상으로 나타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그분의 말씀으로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기들이 볼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과 맞바꾸었다.시편 106:20 · 본디새김
“자기들의 영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이시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이스라엘이 누리는 존귀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적인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과 맞바꾸었습니다.
왜 시인은 소가 풀을 먹는다는 사실까지 덧붙였을까요? 소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로 그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의 형상과 맞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보다 작은 존재의 모습에 가두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잊었다, 이집트에서 큰일들을 행한 이를,시편 106:21 · 본디새김
이것이 금송아지 사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한 기억이 사라지자, 그분을 자신들의 욕망에 맞는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는 그들을 없애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모세가 그의 앞에서 무너진 틈에 서서 그의 분노를 돌려 파멸을 막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들을 없애 버렸을 것이다.시편 106:23 · 본디새김
성벽에 틈이 생기면 그곳으로 적이 들어옵니다. 모세가 무너진 틈에 섰다는 것은 공동체가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앞을 막아섰다는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 32:11–14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결백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과 이집트에서 행하신 구원,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근거로 간구합니다. 그들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에 호소했습니다.
모세가 무너진 틈에 서지 않았더라면 백성은 없어졌을 것이라는 반사실 조건은 그의 중재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강조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인간의 중재가 아무 의미 없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통해 백성을 멸망에서 돌이키셨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을 지나서도 이스라엘의 불신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자체를 거부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무너진 틈은 히브리어 바페레츠(פֶּרֶץ)로, 무너진 틈이나 뚫린 곳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과 모세의 중재가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가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약속한 땅을 거부하다 — 믿음의 실패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다
그들은 탐스러운 땅을 거부했고,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시편 106:2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민수기 13–14장의 정탐꾼 사건을 가리킵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이 좋은 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도 그들의 보고를 듣고 두려워하며 원망합니다.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좋은 땅은 거부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아야 할 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그 문제를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라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앞서 갈대 바다를 건넌 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12절과 대조됩니다. 그때는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진 뒤에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 앞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그 두 번째 자리에서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천막에서 투덜거렸고,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시편 106:25 · 본디새김
그들이 불신을 표현한 장소는 전쟁터가 아니라 천막입니다. 가족이 머무는 생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일이 언제나 공개적인 반역이나 거창한 선언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들의 천막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세대가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26–27절은 그 심판을 두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그 세대가 광야에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후손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지는 것입니다.
민수기 14:28–35에는 믿지 않은 세대가 광야에서 죽고, 그 자녀들이 그 이후에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106편은 거기에 후손이 민족들 가운데 흩어지는 심판까지 함께 언급합니다. 따라서 시편은 정탐꾼 사건 하나만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후대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한 세대의 불신에서 여러 세대에 걸친 불순종으로 넓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흩어짐의 표현은 레위기 26:33이나 신명기 4:27에 나타나는 언약의 심판과도 연결됩니다. 에스겔 20:23–24에서도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지는 심판이 연결됩니다.
바알브올과 비느하스 — 누가 공동체의 파멸을 막는가
그들은 바알브올과 결합했고, 죽은 이들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다.시편 106:2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민수기 25:1–9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바알브올을 섬기게 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결합했다”라는 표현은 우연히 이방 종교와 접촉했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죽은 이들에게 바친 제물”은 죽은 존재들을 위한 제의적 음식으로 볼 수도 있고, 생명 없는 우상들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방 신 숭배에 참여한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죽은 이들”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강조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단지 이방 사람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와의 언약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데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역병이 발생합니다. 이어서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개입했고, 역병이 멎었다.시편 106:30 · 본디새김
시편 자체는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25:7–8에는 그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창을 들고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를 찔러 죽입니다. 그 사건 이후 역병이 멎었다고 민수기는 말합니다.
그 일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대대로 영원히.시편 106:31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창세기 15:6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에서 의로 여겨진 구체적인 내용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일이, 비느하스에게는 공동체의 불순종을 제지한 행동이 강조됩니다. 민수기 25:10–13에서는 하나님이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과 영원한 제사장직의 언약을 주시는 장면이 나오며, “대대로 영원히”라는 표현은 이러한 언약적 인정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특정한 언약적 위기에서 이루어진 비느하스의 행동을 오늘날 개인이 종교적 이유로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허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특정한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과 제사장직에 관한 민수기의 이야기 안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개인에게 다른 사람을 처벌할 권한을 부여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시편의 전체 흐름에서 비느하스의 행동이 갖는 의미는 공동체의 죄가 파멸로 이어질 수 있었던 순간에 그 흐름이 중단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틈에 섰습니다.
비느하스는 공동체의 불순종 가운데 일어서서 개입했습니다.
두 사람의 방식은 달랐지만, 시인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공동체가 파멸로 향하던 과정이 멈추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오랫동안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 자신이 그들의 거역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결합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마드(צָמַד)는 서로 결합하거나 붙는다는 의미를 지니며, 이 문맥에서는 바알브올 숭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죽은 이들에게 바친 제물”의 히브리어 지브헤 메팀(זֶבַח)은 문자적으로 ‘죽은 이들의 제물’ 또는 ‘죽은 것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이해할 수 있고, 민수기 25:2에서는 백성이 그 신들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다고 설명합니다. “개입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예팔렐(פָּלַל)은 판단하거나 중재하는 행위와 관련된 동사입니다. 따라서 시편 106편의 “개입했다”를 단지 비느하스가 기도했다고만 설명하는 것은 배경 이야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시편 106편 자체가 살해 장면을 상세히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그의 개입과 역병의 중단을 간결하게 연결합니다.
모세도 경솔하게 말했다 — 므리바에서 드러난 지도자의 한계
그들은 므리바 물가에서 여호와야훼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들 때문에 모세가 해를 입었다.시편 106:32 · 본디새김
이 사건은 민수기 20:1–13의 므리바 물 사건과 연결됩니다. 백성은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향해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에게 화를 내며 말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은 나왔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자신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스라엘 회중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이 모세의 마음을 거슬러, 모세가 자기 입술로 경솔하게 말했기 때문이다.시편 106:33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는 루호(רוּחַ)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그의 영’, ‘그의 숨’, ‘그의 마음’ 또는 ‘그의 기질’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 말의 소유자를 모세로 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백성이 모세의 마음을 격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모세가 입술로 경솔하게 말했다는 뜻이며, 이어지는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반면 “그의 영”을 여호와야훼의 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백성이 하나님의 영을 거역했고, 모세 또한 그 상황에서 경솔하게 말했다는 흐름이 됩니다. 히브리어의 소유격만으로 어느 읽기가 옳은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편이 명시적으로 모세의 경솔한 말을 문제 삼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앞에서는 모세가 백성의 파멸을 막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같은 모세가 잘못된 말을 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모세는 중요한 중재자였지만, 죄와 실수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거역은 지도자에게 실제로 큰 압박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이 지도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민수기 20장의 하나님은 모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십니다.
시편은 모세의 위대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잘못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광야의 역사를 돌아본 시인은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죄의 결과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우상숭배는 결국 아이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없애 버리라고 말한 백성들을 없애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민족과 뒤섞여, 그들의 행실을 배웠다.시편 106:34–35 · 본디새김
이 부분은 사사기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사기 1장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가 가나안의 주민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사사기 2:11–13에 이르면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 문제를 단순히 다른 민족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36절은 그들이 배운 행실의 핵심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그들은 그 민족들의 우상들을 섬겼고, 그 우상들이 그들에게 덫이 되었다.시편 106:36 · 본디새김
문제는 여호와야훼를 섬겨야 할 백성이 우상숭배를 받아들였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민족의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곧 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는 이방 출신이면서도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참여한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룻기의 룻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그들은 자기 아들들과 딸들을 귀신들에게 제물로 잡아 바쳤다.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렸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물로 잡아 바친 자기 아들들과 딸들의 피를. 그 피로 땅이 더럽혀졌다.시편 106:37–38 · 본디새김
우상숭배는 단지 잘못된 종교적 선택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희생된 사람들은 남의 아이들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시인은 그들의 피를 “무죄한 피”라고 부릅니다. 희생된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사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들은 무죄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그들을 제물로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땅이 더럽혀졌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편은 38절 끝에서 「그 피로 땅이 더럽혀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땅의 오염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질적 더러움으로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폭력이 하나님이 주신 땅의 거룩함을 훼손한다는 신학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시편의 흐름을 돌아보면 무거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그 땅을 주셨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6편에서는 그 땅이 무죄한 아이들의 피로 더럽혀졌다고 말합니다.
약속의 성취가 자동으로 순종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땅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땅에서 저지르는 악을 정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살리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자녀들의 생명까지 파괴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분노가 타오릅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18:21과 20:2–5는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열왕기하 16:3과 21:6에는 유다 왕들의 시대에도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행위가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예레미야 7:31에서도 자녀들을 불사르는 제의 행위가 강하게 비판됩니다. 레위기 18:24–28에서도 가나안 주민들의 행위로 땅이 더럽혀졌다는 표현이 나오고, 민수기 35:33에서는 피를 흘리는 일이 땅을 더럽힌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건지셨지만, 그들은 계속 거역했다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그의 백성을 향해 타올랐고, 그는 자기 유산을 혐오했다.시편 106:40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그들을 혐오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이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이 언약을 심각하게 훼손했기 때문에 심판이 임합니다.
그 심판은 「그는 그들을 여러 민족의 손에 넘겼고」(41절)처럼 구체적인 역사적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 표현은 사사기의 반복적인 역사와 잘 연결됩니다. 사사기 2:11–19를 보면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 결과 원수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다시 다른 신들을 섬기며 타락합니다.
그는 여러 번 그들을 건져 냈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따라 거역했고,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낮아졌다.시편 106:43 · 본디새김
하나님은 한 번만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거듭 실패하는 동안에도 여러 번 그들을 건져 내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 구원을 경험하고도 다시 거역했습니다.
시편이 여기서 보여 주는 문제는 단순히 교육이나 정보가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뜻을 따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13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43절에서는 자기들의 뜻을 따라 거역했습니다. 이 두 표현이 긴 죄의 역사를 하나로 묶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웠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이 겪는 고난을 살폈다.시편 106:44 · 본디새김
다시 “그러나”입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에서 거역했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23절에서는 모세의 중재로 파멸이 막혔습니다. 이제 44절에서는 반복된 죄와 심판의 역사 뒤에 하나님이 다시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백성이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자기 언약을 기억했고, 자기의 풍성한 인애에 따라 마음을 돌이켰다.시편 106:4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105편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시편 105:8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05:42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백성을 인도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시편 106편에서는 백성의 거듭된 불순종을 모두 이야기한 뒤, 다시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언제나 신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신실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돌이켰다”는 말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이 마지막 행동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은 이미 백성이 원수들의 손에 넘겨지고 압제받았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풍성한 인애”라는 표현의 깊이
본디새김은 45절을 “풍성한 인애”라고 옮겼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양적으로 많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시편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비도 반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한 번 베풀고 끝나는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46절에서는 그 인애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는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이들 앞에서 그들이 동정을 받게 했다.시편 106:4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열왕기상 8:46–50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적들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사로잡은 사람들 앞에서 동정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06편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이 하나님의 인애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아직 완전한 회복이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시인은 여전히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있는 백성을 모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45절에는 히브리어 본문의 기록과 읽기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히브리어 본문에서 적힌 형태는 하스도(חֶסֶד), 곧 ‘그의 인애’라는 단수형입니다. 그러나 읽도록 지정된 형태는 하사다브로, ‘그의 여러 인애’라는 복수형입니다. 본디새김은 복수형을 따라 “풍성한 인애”로 옮겼습니다. 이는 앞에 나오는 “많음”이라는 표현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점에서 시편 106편은 출애굽기 34:6–7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인애가 풍성하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동시에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시편 106편은 그 성품이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저희를 모아 주십시오” — 죄의 고백이 귀환의 기도가 되다
여호와야훼, 저희 하나님, 저희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 가운데서 저희를 모아 주십시오.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당신을 찬양하는 일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시편 106:47 · 본디새김
이것이 시편 전체가 향하고 있던 자리입니다.
시인은 과거의 역사를 긴 시간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기도는 공동체가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진 상황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여전히 회복을 기다리는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이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4절에서는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47절에서는 “저희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 가운데서 저희를 모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개인의 기도에서 시작된 소망이 공동체 전체의 회복을 구하는 기도로 넓어집니다.
시인은 단지 이전의 땅과 생활을 되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도록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47절에서는 그 감사를 온전히 드릴 수 있도록 자신들을 모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처음의 찬양 명령이 마지막에는 구원을 구하는 기도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했지만, 찬양은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받기를. 온 백성은 「아멘」이라고 말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06:48 · 본디새김
시인은 혼자 찬양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온 백성이 함께 응답하도록 부릅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저희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은 공동체 전체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찬양에 응답하도록 요청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주체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흩어진 백성의 아멘
시편 106편의 시작에서 시인은 「할렐루야.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증하는 아름다운 사건들만 나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역사를 들려줍니다. 바다 앞에서 두려워하던 사람들, 광야에서 불평하던 사람들, 금송아지 앞에 엎드린 사람들, 약속한 땅을 거부한 사람들, 자기 자녀들을 제물로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시인은 이 모든 사건에서 공통된 문제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망각은 기억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정보가 사라지는 일보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알고 계셨고 실제로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언약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죄를 보지 못하는 무관심이 아니라, 죄를 정확히 아시면서도 언약을 기억하시는 신실함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마친 뒤 시인은 현재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흩어진 백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자랑스럽기 때문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희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 가운데서 저희를 모아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아직 흩어진 자리에서 찬양이 시작됩니다. 시인은 온 백성에게 응답하라고 부릅니다.
“아멘.”
이것은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선하시고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다는 고백에 참여하는 응답입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아멘입니다.
시편 106편은 그 아멘 뒤에 한마디를 더 남깁니다.
“할렐루야.”
아직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진 백성이, 자신들을 다시 모아 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