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3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가장 높이 계시며 낮은 곳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만나려면 보통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올라가야 합니다. 권력과 영광이 높은 곳에 모여 있을수록, 그곳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아래에 남겨집니다.
그런데 시편 113편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모든 민족과 하늘 위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기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시려고 몸을 낮추십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먼지와 쓰레기 더미에 있는 가난한 사람, 아이를 낳지 못해 슬픔을 겪던 여인에게 닿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시기 때문에 낮은 사람들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높이 계시면서도 낮은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시고 바꾸시는 분입니다.
시편 113편은 이 역설을 아주 짧고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보여 줍니다.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찬양에서 시작해 하늘 위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시선을 따라 땅으로 내려왔다가, 마침내 한 가정에 찾아온 기쁨으로 끝납니다.
온 세상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이름
할렐루야. 여호와야훼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라.시편 113:1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송받기를.시편 113:2 · 본디새김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찬양받는다.시편 113:3 · 본디새김
시편은 세 번 이어지는 찬양의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먼저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찬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부름을 받는 이들은 「여호와야훼의 종들」입니다. 이 표현은 성전에서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들만을 가리킨다고 제한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을 섬기는 백성 전체를 향한 부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찬양의 대상은 반복해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어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가 누구이며 어떤 성품과 명성을 지녔는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특정한 이름의 소리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역사 속에서 행동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을 이어 읽으면 찬양의 범위가 두 방향으로 확대됩니다. 2절은 「이제부터 영원까지」로 시간을 이야기하고, 3절은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로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표현이 함께 놓이면서 찬양은 한 시대와 한 장소에 갇히지 않게 됩니다.
본디새김은 2절을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대한 찬송의 기원으로 옮깁니다. 3절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찬양받는다는 선언으로 옮깁니다.
바람에서 선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속한 회중에게 찬양을 요청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곧 그 찬양의 지평을 동쪽에서 서쪽까지 확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게만 중요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다만 시편 113:3을 모든 민족이 이미 실제로 여호와야훼를 예배하고 있다는 역사적 보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이 찬양받으실 마땅한 범위가 온 세상임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그렇게 찬양받아야 할까요?
조금 더 깊이
말라기 1:11에서도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 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가 온 세상에 미친다는 공통된 전망을 지닙니다.
하늘보다 높이 계시면서 하늘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모든 민족 위에 높이 있고, 그의 영광은 하늘 위에 있다.시편 113:4 · 본디새김
지상의 어떤 민족이나 통치자도 여호와야훼보다 높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강력한 여러 통치자 가운데 가장 강한 통치자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은 땅의 권력만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인간이 바라보는 가장 높은 영역인 하늘조차 그분의 영광을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시적인 세계에서 하늘은 높이와 위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시인은 그것보다 높은 곳에 하나님의 영광을 둡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높으심은 결론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같으랴? 그는 높이 앉아시편 113:5 · 본디새김
자신을 낮추어 하늘과 땅을 살핀다.시편 113:6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출애굽기 15:11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후 부른 노래에서도 여호와야훼와 같은 분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놀라운 행동이 찬양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위대하심을 설명하는 방식이 특별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어 하늘과 땅을 살피십니다. 땅만이 아닙니다. 하늘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이 번역에서 여호와야훼는 하늘조차 내려다보십니다. 사람에게는 한없이 높아 보이는 하늘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이 살피시는 세계에 속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낮추어」라는 말은 하나님이 본래의 영광이나 권위를 잃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의 높으심과 세상을 향한 관심 사이의 거리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그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먼지와 쓰레기 더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위엄을 설명한 뒤,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그분의 시선을 가장 낮은 곳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보다 높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분이 인간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지에 있던 사람을 귀족들 가운데 앉히시는 하나님
그는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고, 궁핍한 이를 쓰레기 더미에서 들어 올린다.시편 113:7 · 본디새김
귀족들과 함께, 자기 백성의 귀족들과 함께 앉히려고.시편 113:8 · 본디새김
시편의 움직임이 여기서 완전히 바뀝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높이 앉아 계셨습니다. 6절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살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일으키시고 들어 올리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은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행 표현으로,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사람의 처지를 거듭 묘사합니다. 그들이 있는 장소도 「먼지」와 「쓰레기 더미」로 평행을 이룹니다. 먼지에 앉아 있거나 오물 더미에 있는 모습은 가난과 비천함, 사회적인 소외를 강렬하게 나타냅니다.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처지를 바꾸십니다. 이 행동은 6절의 「자신을 낮추어」라는 말과 서로 호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어 아래를 살피시고, 아래에 있는 사람을 들어 올리십니다.
하나님이 낮추시고, 사람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낮추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잃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행동을 통해 그분의 특별한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디까지 들어 올리실까요? 8절이 그 목적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는 일 이상의 변화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자리 자체가 바뀝니다.
히브리어 네디빔(nedivim)은 너그럽거나 고귀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고, 이 문맥에서는 높은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귀족들과 함께 앉는다는 것은 그가 존귀한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먼지에서 일으키신 뒤 멀리 떨어진 다른 장소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귀족들과 같은 자리에 「함께 앉히」십니다. 낮은 처지에서 벗어나는 것과 공동체 안에서 존귀한 자리를 얻는 것이 함께 묘사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존중받고, 공동체에 참여하며, 자신의 자리를 갖는 일도 중요합니다. 시편은 그 회복을 귀족들과 함께 앉는 장면으로 나타냅니다.
물론 이것을 가난한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귀족의 신분을 얻게 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이 얼마나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 사회적 지위의 역전을 통해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단순히 마음속 위로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가난과 사회적 멸시가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이 그러한 처지의 변화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본문의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약의 다른 노래 하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상 2:8의 한나의 노래입니다. 한나는 여호와야훼가 가난한 사람을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사람을 쓰레기 더미에서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히신다고 찬양합니다. 시편 113:7–8과 표현이 거의 일치합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3편 역시 마지막에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쓰레기 더미」는 현대적인 도시의 쓰레기 수거장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낱말은 재나 오물이 쌓인 더미를 가리킬 수 있으며, 그 장소의 정확한 모습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놓인 사람의 처지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과 낮은 사람을 돌보시는 행동을 한데 묶는 모습은 신명기 10:17–18에서도 확인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신들 가운데 하나님이며 주들 가운데 주라고 높이면서도, 곧바로 그분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13편은 그 관계를 더욱 선명한 시적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왕궁에서 한 가정으로 —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의 기쁨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자를 자녀들을 둔 기쁜 어머니로 집에 살게 한다. 할렐루야.시편 113:9 · 본디새김
시편은 한 가정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앞에서는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온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모든 민족과 하늘 위에 계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이 귀족들과 함께 앉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시인이 선택한 장면은 왕궁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왜 시인은 이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했을까요?
구약의 이야기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일은 여러 여성에게 깊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가문의 지속과 자녀를 통한 미래가 중요했던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깊은 불안과 수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이 이런 고통을 기록한다는 사실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성의 가치가 낮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당시의 사회적 기대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를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시편 113편은 그 고통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여인의 처지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는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특히 한나의 경우가 중요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는 아이를 얻지 못해 괴로워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고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이어지는 사무엘상 2:5에서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자녀를 낳게 되는 역전을 노래합니다. 그다음 2:8에서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사람을 들어 올리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13편은 그 두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한나가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모든 회중이 함께 찬양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시편 113편이 한나의 개인적인 경험만을 다시 노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노래와 표현 및 주제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지막 절의 「집에 살게 한다」는 여인이 자녀들을 둔 어머니로서 집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읽을 수도 있고, 여인을 가정에 정착하게 하시는 행동과 어머니가 되는 변화를 함께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여인의 처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편 전체를 이어 주는 중요한 단어가 다시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야샤브(yashav)는 앉거나 거주한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높이 앉아」 계십니다. 8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귀족들과 함께 「앉히려고」 하십니다. 9절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을 기쁜 어머니로 집에 「살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 표현은 같은 히브리어 어근과 연결됩니다.
그 결과 시편 안에는 세 개의 자리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높이 앉아 계신 자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이 귀족들과 함께 앉게 되는 자리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기쁜 어머니로 집에 머무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높은 자리에만 머무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바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주적인 규모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한 사람의 깊은 슬픔을 돌아보시는 일에서도 자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다만 이 장면을 모든 불임의 문제가 반드시 출산으로 해결된다는 보편적인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전의 한 모습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녀를 얻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외면하셨다고 판단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찬양이 온 세상을 향한 부름이었다면, 마지막의 찬양은 한 가정에 찾아온 기쁨을 바라보면서 울려 퍼집니다. 이 두 찬양은 서로 다른 이유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자녀를 얻지 못하는 고통은 여러 이야기에 나옵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자녀를 얻지 못했습니다(창세기 16:1; 18:11–12). 라헬은 자녀를 얻지 못하는 고통을 야곱에게 토로했습니다(창세기 30:1). 한나는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그로 인해 울며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고통받았습니다(사무엘상 1:6–7). 「집에 살게 한다」의 히브리어 원문은 매우 압축적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과 집,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잇지만, 그 문장 안에서 집과 여인이 어떤 문법적 관계를 맺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먼저 여인에게 집을 마련해 주셨고 그다음에 자녀를 주셨다는 식으로 정확한 시간 순서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46–55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양이 높은 사람을 낮추고 낮은 사람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노래합니다. 이는 시편 113편과 한나의 노래에 나타난 역전의 주제를 이어받는 연결로 볼 수 있지만, 시편 113편을 직접 인용한 문장은 아닙니다.
높으신 하나님은 왜 낮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는가
시편 113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높으심과 낮추심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사람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시는가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위대하심은 자신보다 낮은 이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회복시키시는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먼지와 쓰레기 더미에 있는 사람, 집에서 슬픔을 겪는 여인이 하나님의 관심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그분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시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처음에 온 세상을 향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다음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끝날 때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먼지에 있던 사람이 귀족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슬픔을 겪던 여인은 자녀들을 둔 기쁜 어머니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이 몸을 낮추어 바라보신 그곳에서, 낮은 사람이 일어나고 한 가정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 다시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