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언제까지입니까, 여호와야훼?

시편 13편은 하나님께 네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시인은 하나님께 노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호소하던 사람이 끝에서는 하나님의 인애를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시편은 아무 사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기록도 없고, 원수가 물러났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환경이 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변화는 오직 시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시인은 고통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기 전에, 고통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 변화는 고통을 부정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끝까지 말하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시편은 크게 세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 2–3절에서는 네 번의 「언제까지」로 탄식하고, 4–5절에서는 세 차례 하나님께 행동을 요청하며, 6절에서는 자신이 의지해 온 것과 앞으로 할 일을 고백합니다. 질문에서 간구로, 간구에서 노래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단순히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감정의 변화로 이해하면 본문의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 14분소단락 413편 본문 읽기 →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습니까?

시편 13:1–3 본문 →

언제까지입니까, 여호와야훼? 저를 영원히 잊으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당신의 얼굴을 제게서 숨기시겠습니까?시편 13:2 · 본디새김

첫 문장에는 시간에 관한 두 표현이 부딪힙니다. 「언제까지」와 「영원히」입니다.

「언제까지」는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영원히 잊으셨다고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이 너무 길어져서, 이 기다림에 끝이 있기나 한지 묻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언제까지」를 네 차례 반복합니다. 그런데 네 질문은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는 두려움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졌다는 경험입니다. 셋째는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방책을 세워야 하는 고단함이며, 넷째는 원수가 자신보다 높아진 현실입니다.

이 네 질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니, 시인은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원수가 우위를 차지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단순히 외모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향해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민수기 6:24–26에서 제사장의 축복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얼굴을 비추시고 들어 올리시기를 구합니다.

따라서 얼굴을 숨기셨다는 탄식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시각적 불편함이 아닙니다. 자신을 아시고 돌보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호소입니다. 다만 이것은 시인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부재이지, 하나님이 실제로 그를 버리셨다는 객관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시편은 이 차이를 해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하나님께 말을 겁니다. 자신을 잊으셨다고 느끼는 분을 여전히 「여호와야훼」라고 부르며, 얼굴을 숨기셨다고 생각하는 분에게 그 얼굴을 돌려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는 두려움조차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의 시선은 하나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내려옵니다.

언제까지 제가 제 속으로 방책을 세우며 낮 내내 제 마음에 슬픔을 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제 원수가 제 위로 높아지겠습니까?시편 13:3 · 본디새김

「방책을 세우며」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여러 계획인지, 해결책을 찾으려는 내적 숙고인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기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남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일 때문에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또 다른 고통을 겪습니다. 시인은 생각하는 일이 무익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숙고에도 슬픔이 계속되는 현실을 하나님께 내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서 외부의 현실이 드러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았는데, 현실에서는 원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지고, 원수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낮아진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시편은 원수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시인이 보여 주려는 것은 원수의 신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사람이 자기 안과 자기 밖에서 동시에 겪는 무력함입니다.

이제 그는 그 상태를 설명하는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직접 행동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방책을 세우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에는 복수형 명사 에초트(계획들·조언들)가 사용됩니다. 표제에는 다윗의 시편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윗 생애의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지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박해나 압살롬의 반역 같은 특정 사건으로 한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다른 탄식들과도 이어집니다. 시편 22:2–3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탄식과 밤낮의 부르짖음이 나타납니다. 시편 27:9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 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탄식은 시편 22:2를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마태복음 27:46). 시편 13편이 그 장면에서 직접 인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그분을 향한 관계를 놓지 않는 탄식의 언어라는 점에서는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제 눈을 밝혀 주십시오

시편 13:4–5 본문 →

보시고 제게 대답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저의 하나님. 제 눈을 밝혀 주십시오, 제가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시편 13:4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네 차례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 가지를 요청합니다. 보아 달라, 대답해 달라, 눈을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숨겨져 있다고 말했던 시인이 이제 하나님께 자신을 보아 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느꼈던 시인은 대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순히 위기에서 구해 달라는 요청만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저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감정과 신앙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감정은 버림받았다고 외치지만, 신앙은 바로 그 하나님을 붙들며 응답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요청이 뜻밖입니다. 원수를 물리쳐 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눈을 밝혀 달라고 합니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눈에 빛을 주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표현은 생기와 기력이 되살아나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4:27에서 요나단이 꿀을 먹은 뒤 눈이 밝아졌다고 하는 장면이 그 예입니다.

시편 13편에서는 바로 뒤에 「죽음의 잠」이 등장하므로, 눈을 밝히는 일은 생명을 되살리고 보존하는 간구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상황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붙들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잠」은 죽음을 잠에 빗댄 표현입니다. 이 표현으로부터 시인이 실제로 병들어 있었는지, 원수의 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위기를 죽음과 연결할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에서는 낮 내내 슬픔을 품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잠에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시인에게 고통은 하루를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삶 자체의 지속을 위협하는 문제로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셨다고 탄식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바라보아 주시는 일과 자신이 다시 눈을 뜨고 살아가는 일이 하나의 기도 안에서 만납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 주셔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말합니다.

제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제가 흔들릴 때 제 적들이 기뻐하지 않도록.시편 13:5 · 본디새김

시인은 자기의 죽음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몰락을 원수가 승리로 선언하는 상황도 두려워합니다.

원수가 이미 승리를 선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어 문장에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표현이 사용되며, 4절의 죽음과 5절의 원수의 자랑은 모두 시인이 피하고자 하는 결과들입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원수의 자랑이 중요한가요?

고대 이스라엘의 탄식시에서 원수의 승리는 개인적인 패배를 넘어 신앙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악한 자가 승리하고 의지하던 사람이 무너진다면,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3:3에서도 적대자들은 시인을 향해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시편 13편에는 그런 신학적 조롱이 직접 인용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원수가 하나님을 조롱할 것이라고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자기 생명의 보존과 원수의 승리 선언을 함께 다루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기도는 원수를 향한 보복으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원수를 어떻게 처벌할지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원수의 승리를 막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일은, 시인 자신이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제 시편은 마지막 절에 이릅니다. 그런데 독자가 기대하던 장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알려 주지 않은 채 시인은 뜻밖의 고백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애를 의지해 왔습니다

시편 13:6 본문 →

그러나 저는 당신의 인애를 의지해 왔습니다. 제 마음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할 것입니다. 저는 여호와야훼께 노래하겠습니다. 그분이 제게 선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3:6 · 본디새김

마지막 절은 「그러나 저는」으로 시작합니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그러나 나는」 또는 「나로 말하자면」이라는 대조를 나타냅니다. 앞서 시인은 원수가 자신을 이겼다고 말하고 적들이 자기 몰락을 기뻐할 가능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수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서 벗어나, 자신은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로 시선을 돌립니다.

시인은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인애(⁨חֶסֶד⁩)를 의지해 왔습니다」(⁨בָּטַח⁩)라는 고백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시인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처음의 탄식과 마지막의 신뢰는 서로 모순되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의지해 왔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겪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어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 언제나 이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알고 믿어 온 하나님과 지금 경험하는 현실 사이에 깊은 간격이 생깁니다.

시편 13편의 탄식은 바로 그 간격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의지하는 대상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그는 「당신의 인애」를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인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면서, 특히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신실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향해 보여 주시는 지속적인 은혜와 성실함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시인이 믿는 것은 상황이 저절로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아닙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가 지금의 고통으로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이 이미 의지해 온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노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노래하겠습니다」는 말하는 사람의 의지나 결심을 나타낼 수 있는 형태로, 단순히 언젠가 노래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보다는 하나님께 노래하겠다는 적극적인 뜻을 드러냅니다.

3절에서 시인의 마음은 슬픔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슬픔이 모두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앞으로 무엇으로 기뻐하게 될 것인지를 말합니다.

원수들이 자신의 몰락을 기뻐할까 두려워했던 사람은, 이제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가 기뻐할 것인가, 무엇을 기뻐할 것인가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6절의 마지막 문장은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말하면서, 마지막에는 이미 선을 베푸셨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선을 베푸셨다」(⁨גָּמַל⁩)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인이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의 은혜를 근거로 앞으로의 구원을 기대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인이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찬양한다는 해석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부분을 응답에 대한 확신이나 감사의 언어로 이해하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도 본문이 명시하지 않은 사건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셨는지를 알려 주는 문장이 없습니다. 다만 두 해석 모두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는지 묻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선을 말하며 끝맺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애가 3:21–24에서도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여호와야훼의 인애와 성실하심을 기억하여 소망을 말합니다. 시편 22편, 27편과 이 본문들은 고통의 원인이나 해결 방식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기억하는 일이 현재의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언제까지라는 질문이 노래가 되기까지

시편 13:1–6 본문 →

시편 13편의 마지막에는 원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인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설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네 번이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보시고 대답하시며 눈을 밝혀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동안 의지해 온 하나님의 인애를 고백하며 노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신뢰가 탄식을 대신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탄식을 통과하여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3편을 단순히 「고난 중에도 감사하라」는 교훈으로 줄이면, 처음의 네 번의 탄식이 지닌 무게를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성경이 보여 주는 신뢰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때에도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관계를 붙드는 태도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13편은 응답받은 기도의 기록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응답이 명시되지 않은 기도 속에서도 신뢰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이 시편을 읽는 사람도 네 번의 「언제까지」 가운데 어느 한 질문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시편 13편은 그런 사람에게 슬픔을 서둘러 끝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슬픔을 품고 있는 바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에 시인은 여전히 자신의 눈이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이미 노래하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것처럼 느껴지는 자리에서, 시인은 그분을 향해 얼굴을 들고 노래를 결심합니다.

시편 13편은 그 노래가 실제로 울려 퍼지기 전, 바로 그 결심의 순간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