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4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 계신 하나님
시편 14편은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편이 끝나기도 전에 그 말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며, 악을 행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도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동을 판단할 분이 없다고 여기는 듯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도 거리낌이 없고, 가난한 사람을 짓누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보고 계십니다.
시인은 이 문제를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에서 시작하여 온 인류의 부패로 확대했다가, 다시 구체적으로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에게 시선을 모읍니다. 이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시편은 세 장면을 거쳐 전개됩니다. 먼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살펴보십니다(1–3절). 이어서 다른 사람을 짓밟던 악인들이 오히려 두려워하는 역전이 일어납니다(4–6절). 마지막으로 시선은 시온으로 향하고, 시인은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을 기다립니다(7절).
처음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이 들리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환호가 예고됩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지휘자를 위하여. 다윗의 것. 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나님은 없다.」 그런 자들은 타락했고 역겨운 짓을 했다. 선을 행하는 이는 없다.시편 14:1 · 본디새김
시편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자」를 등장시킵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말은 지능이 낮거나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지혜문학과 다른 구약 본문에서 도덕적 분별력이 결여된 사람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신명기 32:6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백성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들을 지으시고 돌보신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합당하게 응답하지 않는 백성입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시편 14편의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도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주장으로만 제한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문장 자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관심은 그런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 말에 곧바로 행동의 문제를 연결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시편이 문제 삼는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 속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지를 형성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선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내면의 전제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듣도록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시편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호와야훼는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이가 있는지 보려고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시편 14:2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인간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인간을 바라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을 펼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이 장면에서 「하늘에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무관심하게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세계의 중심에서 판단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은 인간 전체를 바라보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창세기 11:5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이 건설하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십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능력과 계획에 몰두해 있을 때, 이야기는 그들의 시야 밖에서 하나님이 그 일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편 14편에서도 비슷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행동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시선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찾으십니까? 시인은 하나님이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이」가 있는지 보신다고 말합니다.
「깨닫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분별력과 통찰을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앞의 어리석은 자와 대조를 이룹니다. 어리석은 자의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깨닫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단순히 많은 사실을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해하고, 그분을 찾으며 자신의 삶을 그 관계 안에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살펴보심 뒤에 나오는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모두 돌아섰고 함께 썩어 버렸다. 선을 행하는 이는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시편 14:3 · 본디새김
처음에는 「어리석은 자」라는 단수의 인물이 등장했지만, 곧 복수의 악행이 이어지고, 마침내 「모두」라는 선언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악한 사람을 비판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펴보실 때 발견되는 부패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강조합니다.
「돌아섰고」라는 말은 어떤 길이나 방향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가 단순히 선한 일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향해야 할 방향에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썩어 버렸다」는 말은 그 결과를 묘사합니다. 인간의 부패는 고립된 몇 가지 잘못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한 가지 어려운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정말 아무도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뒤에 등장하는 「의로운 세대」와 「가난한 이」는 누구입니까?
한편으로 1–3절은 「모두」와 「단 한 사람도 없다」라는 표현으로 인간의 부패를 예외 없이 고발하는 듯합니다. 이 표현을 인간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선언으로 읽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4–6절은 악을 행하는 자들과 그들에게 피해를 입는 백성, 의로운 세대와 가난한 사람을 구별합니다. 시편은 실제 삶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를 지우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두 측면이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 시편은 인간의 부패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동하거나 모두가 동일한 책임을 진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의로운 세대라는 표현 역시 그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명시적인 선언은 아닙니다. 본문의 흐름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자들과 구별되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죄가 널리 퍼져 있다는 선언과, 그 죄로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선언은 서로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신약의 로마서 3:10–12에서는 시편 14:1–3과 시편 53:1–3에 해당하는 표현들이 직접 인용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논증에 사용합니다(로마서 3:9–20). 다만 이러한 신약의 적용과 시편 14편 자체의 문맥은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는 이 말씀을 통해 인류 전체의 죄 문제를 논증하지만, 시편 14편은 그 보편적인 부패의 고발을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난한 이를 억압하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 배치합니다.
이 두 관점을 함께 읽으면 죄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에만 가두지도 않고, 사회적 가해자를 비판하면서 인간 전체의 부패라는 더 깊은 문제를 외면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시편의 날카로운 사회적 고발이 희미해집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인간의 부패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어리석은 자」로 옮긴 히브리어는 나발(נָבָל), 「깨닫고」는 마스킬(שָׂכַל), 「돌아섰고」는 동사 사르(סוּר)입니다.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일부 표현과 특히 악인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시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소망을 함께 드러냅니다.
사람을 빵처럼 먹어 치우는 세상
악을 일삼는 자들은 모두 알지 못하느냐? 그들은 빵을 먹듯 내 백성을 먹어 치웠고, 여호와야훼를 부르지 않았다.시편 14:4 · 본디새김
이 구절에 이르면 앞에서 말한 타락과 역겨운 짓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악인들은 다른 사람을 먹어 치웁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사람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묘사하는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괴롭혔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시인은 왜 하필 빵을 먹는 모습을 가져왔을까요? 빵을 먹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입니다. 매일 먹는 빵을 입에 넣을 때 사람은 특별한 결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너무나 익숙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합니다.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빵을 먹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폭력이 일상의 습관이 된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미가 3:2–3에서도 발견됩니다. 그곳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은 사람의 살과 뼈를 해체하는 자들처럼 묘사됩니다. 지도자가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대상으로 삼는 현실을 고발하는 비유입니다.
시편 14편은 가해자들의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치 지도자인지, 경제적으로 강한 자들인지, 적대적인 외부 세력인지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를 온전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내 백성」이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시편은 누가 이 말을 하는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리키시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시인이 자신이 속한 백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든 이 백성은 앞에서 말한 인류 전체와 달리, 악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특정한 공동체로 등장합니다. 시인은 그 공동체의 고통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봅니다.
이어서 나오는 「여호와야훼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은 앞의 2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실 때 찾으셨던 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는 자들은 여호와야훼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먹어 치우면서도 하나님을 찾거나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하는 태도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지의 문제를 단순한 종교적 주장이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행동의 문제로 다룹니다.
그러나 이 절은 「악을 일삼는 자들은 모두 알지 못하느냐?」라는 역설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깨닫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짓밟을 만큼 힘이 있고, 자기 이익을 얻을 만큼 계산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먹어 치우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음 장면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두려워하지 않던 자들이 두려움에 떨다
거기서 그들은 큰 두려움에 떨었다.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시편 14:5 · 본디새김
시편은 갑자기 악인들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장소도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심판이나 사건이 일어났는지, 시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며 그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 본문만으로는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시편의 첫 문장과 나란히 놓아 보면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강렬한 반전을 만듭니다. 처음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무시하던 자들이 바로 그 사실 앞에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안을 느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을 그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을 두렵게 하십니까?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거나 군대를 보내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먹어 치울 수 있으니 그들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억압하는 사람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운데」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세대와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와 함께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이제 6절은 그 사실을 더욱 구체적인 상황으로 옮깁니다.
너희는 가난한 이의 계획을 수치스럽게 만들지만, 여호와야훼는 그의 피난처다.시편 14:6 · 본디새김
시인은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켜 말하다가 이제 직접 「너희」라고 부릅니다. 그들을 향한 고발이 정면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는 단순히 재산이 적은 사람만을 뜻한다고 제한하기 어렵습니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가난과 비천함, 억압으로 고통받는 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악인들에 비해 힘이 없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악인들이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가난한 사람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려는 방책일 수도 있고, 도움과 보호를 얻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계획이 악인들에 의해 멸시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곧바로 정반대의 사실을 말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악인들이 그의 계획을 비웃을 수 있고, 그가 의지하려는 수단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피할 수 있는 곳은 악인들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 그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모든 일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세운 계획이 반드시 실현된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악인들이 아무리 가난한 이를 수치스럽게 만들어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까지 없앨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함께 읽으면, 악인들은 사람을 먹어 치우는 힘을 가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에 떱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계획마저 수치스럽게 되는 약한 처지에 있지만, 여호와야훼를 피난처로 가집니다.
사람들의 눈에 강해 보이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불안하고, 사람들의 눈에 약해 보이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는 피할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4편은 그 문제를 더욱 넓은 시야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 행동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을 끝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 가운데 계시고 가난한 사람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개인과 특정 공동체의 보호를 넘어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큰 두려움에 떨었다」는 표현은 파하두 파하드(פָּחַד)로, 같은 어근의 동사와 명사를 함께 사용합니다. 두려움의 강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가난한 이」로 옮긴 낱말은 아니(עָנִי)입니다. 이런 대조는 시편 9–10편에서 반복되는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악인은 가난한 사람을 짓누르고,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이의 고통을 보시고 억압받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시온에서 구원이 오기를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킬 때, 야곱은 환호하고 이스라엘은 기뻐할 것이다.시편 14:7 · 본디새김
마지막 절은 갑자기 시온을 바라봅니다.
앞에서는 인간 전체를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시선이 등장했고, 이어서 악인들과 그들에게 억압받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나타납니다.
이 변화는 시편이 말하는 문제가 한 개인의 도덕적 실패나 한 사람의 불행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악인들이 백성을 먹어 치우는 현실은 공동체가 겪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또한 공동체 전체의 회복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왜 구원이 시온에서 오기를 바랄까요? 시온은 예루살렘과 관련된 이름이며, 특별히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왕적 통치와 예배의 중심으로 여겨졌습니다. 시편 2:6에서 여호와야훼는 시온에 자신의 왕을 세우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시편 9:11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시온에 계시는 분으로 노래되십니다.
따라서 시온에서 구원이 온다는 말은 단순히 어느 지리적 장소에서 군사적인 도움이 출발한다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 점에서 시온은 앞서 등장했던 두 장소와 연결됩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셨습니다. 5절에서는 의로운 세대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제 7절에서는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하나님의 위치들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인간을 살피시는 분이자,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분이며, 그들을 위해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처지를 회복시킬 때」는 어떤 사건을 뜻합니까?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처지를 되돌리거나 회복하시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포로 상태나 민족적인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회복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들에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이 포로 귀환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예레미야 29:14).
다른 하나는 반드시 특정한 포로 귀환 사건으로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백성의 곤경을 바꾸시고 잃어버린 복된 처지를 회복하신다는 넓은 의미로 읽는 해석입니다. 욥기 42:10에도 비슷한 회복의 표현이 나타납니다.
시편 14편에는 특정한 추방이나 귀환 사건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어느 역사적 사건을 직접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회복의 주체가 여호와야훼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상황을 바꾸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실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결과는 환호와 기쁨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두 집단이 아닙니다. 한 백성을 두 이름으로 부르며 기쁨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 기쁨은 악인들이 가난한 사람을 짓누르며 누리던 우월감과는 다릅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 얻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심으로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킬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베슈브 여호와야훼 셰부트 암모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시편 14편의 첫 문장 때문에 이 시를 무신론에 대한 논쟁으로만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끝까지 따라가면 시인이 관심을 두는 것이 훨씬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논리를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 실제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사람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을 내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대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시편 바깥에서 가져온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와 사람을 먹어 치우는 행동을 직접 연결해 놓았기 때문에 나오는 결론입니다.
시편 14편이 보여 주는 신앙은 그래서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살펴보심 앞에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사람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자신을 지킬 힘이 없고, 자신의 계획이 다른 사람의 조롱을 받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가치와 미래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 절도 이미 성취된 구원을 보고하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오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들이 빵을 먹듯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십니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수치스럽게 만들 때,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사람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시인은 아직 억압받는 백성의 현실 한가운데 서 있지만, 자신의 노래를 악인들의 목소리로 끝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기뻐할 날을 바라보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던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실 날을 기다립니다.
그날이 오면 빵처럼 먹혀 버릴 만큼 힘없어 보였던 백성에게서 다른 소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야곱은 환호하고, 이스라엘은 기뻐할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