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5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누가 하나님의 집에 머무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집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 15편은 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뜻밖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정해진 의식을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도,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가진 사람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을 헐뜯지 않는 사람, 약속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받지 않는 사람,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누가 살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그 사람이 이웃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집중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진실성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순간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앞선 시편 14편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현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편 15편은 그와 대조적으로, 하나님 가까이에 머무는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시편은 매우 짧지만 처음의 질문과 마지막의 약속이 전체를 감싸는 단단한 구조를 지닙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천막에 머물 사람을 묻고, 2–5절 앞부분에서 그의 삶을 묘사한 뒤, 5절 마지막에서 그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가운데 놓인 행실들은 흩어진 도덕적 규칙이 아닙니다. 마음의 진실함에서 시작하여 말과 인간관계, 약속과 재물의 사용으로 이어집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615편 본문 읽기 →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 살 수 있습니까?

시편 15:1 본문 →

다윗의 시편. 여호와야훼, 누가 당신의 천막에 머무를 수 있습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 살 수 있습니까?시편 15:1 · 본디새김

시인은 먼저 두 장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천막과 거룩한 산입니다.

천막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성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룩한 산은 여호와야훼의 임재와 통치가 특별하게 연결된 시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두 표현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장소를 나란히 가리키며 하나의 질문을 강화합니다.

「머무르다」(⁨גּוּר⁩)는 어떤 곳에 체류하거나 나그네로 거주한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에서 왔고, 「살다」(⁨שָׁכַן⁩)는 거처를 정하고 머문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표현에는 누군가의 거처에 받아들여져 머무는 모습이, 두 번째 표현에는 그곳에 자리 잡고 거주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누가 하나님의 집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곳에 머무르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소를 방문하는 행위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은 그 장소를 떠난 뒤에도 계속됩니다. 시인이 곧바로 일상적인 행동을 나열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머무를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집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사람에게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지 묻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런 구원의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질문은 이미 여호와야훼를 알고 그분의 거룩한 거처를 찾는 예배자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에게 어떤 성품과 행실이 합당한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룩하다면, 그분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의 일상도 그 거룩함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천막과 산을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성소나 역사적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머무르다」의 히브리어는 야구르, 「살다」는 이쉬콘이며, 두 동사 사이에 엄격한 시간적 차이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함께 놓이면 질문이 더욱 깊어집니다. 이런 질문은 시편 24:3–4에도 나타납니다. 거기에서도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르고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는지를 묻고,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대답으로 제시합니다. 두 시편 모두 성소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예배자가 성소에 들어갈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노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시편 15편이 실제로 어떤 예배 의식에서 사용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33:14–16도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지를 묻고, 의롭게 살아가며 뇌물과 부당한 이익을 거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미가 6:6–8도 예배자가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자리에서 정의와 인애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본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과 이웃에게 정의롭게 행동하는 일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마음속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시편 15:2 본문 →

온전하게 살아가고 정의를 행하며, 자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시편 15:2 · 본디새김

첫 번째 대답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언뜻 보면 비슷한 뜻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먼저 「온전하게 살아가고」에서 앞의 동사는 걷거나 살아간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흠이 없고 온전하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온전함은 반드시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는 절대적인 무죄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머무를 사람은 특정한 종교적 행위 하나만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가 온전함을 향하는 사람입니다.

이어서 「정의를 행하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은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에 대해 올바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표현은 갑자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보통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혀나 입술보다 먼저 마음을 말합니다. 원문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장소는 「그의 마음 안에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 마음속에서는 진실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자기 행동의 동기를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거나, 자기 이익에 맞는 설명만 선택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은 삶 전체의 방향이고, 정의를 행하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 행동의 내면에 놓인 진실성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마음속에서 인정하는 진실이 서로 갈라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의 진실함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곧바로 그 사람의 혀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봅니다.

조금 더 깊이

「온전하게 살아가고」의 히브리어는 홀레크 타밈입니다. 사람의 행실과 성품에 적용될 때 타밈은 흠잡을 데 없는 성실함과 진실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1에서 여호와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앞에서 살아가며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단 하나의 실수도 없는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문장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방향을 향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이웃의 명예를 해치지 않는 혀

시편 15:3 본문 →

자기 혀로 남을 헐뜯지 않고, 벗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까운 이를 모욕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시편 15:3 · 본디새김

2절이 온전한 삶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면, 3절은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세 행동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첫 번째는 혀로 남을 헐뜯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동사는 남에 관한 말을 돌아다니며 퍼뜨리거나 헐뜯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말은 손으로 사람을 때리지 않아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특히 상대방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명예를 무너뜨리는 말은 그 사람이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표현은 범위를 넓힙니다.

이제는 말만이 아니라 행동 전체의 문제입니다. 「벗」은 친구나 동료뿐 아니라 이웃,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말하는 선함은 가까운 친구에게만 잘해 주는 성품이 아닙니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세 번째 표현은 다시 말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모욕이나 치욕을 뜻하는 낱말을 「들어 올리다」(⁨נָשָׂא⁩)라는 동사와 함께 표현하여, 다른 사람을 향한 모욕을 제기하거나 퍼뜨리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앞에서는 헐뜯는 행위 자체가 두드러졌다면,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불명예를 안겨 주는 행동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천막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묻는 자리에서 시인은 예배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을 하나님께 드리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 입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어떤 말이 나오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는 입술과 이웃을 대하는 입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2절의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과 3절의 「자기 혀로 남을 헐뜯지 않는 사람」이 연결됩니다. 진실한 마음은 단순히 자기 내면이 올바르다는 확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언어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잘못에 침묵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평가하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뿐 아니라, 그 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행하고 있느냐입니다.

조금 더 깊이

「헐뜯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라갈입니다. 레위기 19:16에서도 백성 가운데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을 헐뜯는 행위를 금합니다. 그 바로 뒤에는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는 험담이 단순히 예의에 어긋나는 사소한 습관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삶과 안전을 해칠 수 있는 행동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줍니다. 「벗」(⁨רֵעַ⁩)의 히브리어는 레아, 「모욕」은 헤르파입니다.

누구를 존중하며, 무엇을 지키는가

시편 15:4 본문 →

비열한 자를 업신여기지만,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존중하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맹세를 했어도 바꾸지 않는 사람이다.시편 15:4 · 본디새김

4절은 앞의 구절보다 해석하기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머무를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자기 약속에도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어떤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지 말할 때 재산이나 지위나 권력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제시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열한 자를 업신여기지만」이라는 표현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사람이나 다른 이들에게 멸시받는 사람을 업신여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앞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모욕하지 말라고 한 말씀과 충돌합니다.

문맥상 강조점은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도덕적 평가에 있습니다. 곧 악한 행실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을 사람에 대한 무제한적인 모욕이나 학대의 허가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앞 절이 이미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누구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따라 존중의 대상을 정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그 악을 칭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낮추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설명한 뒤, 시인은 다시 뜻밖의 행동을 제시합니다.

맹세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벼운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하나님을 자신의 말에 대한 증인으로 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15편은 단지 약속을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처음 약속할 때에는 그것을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상황이 달라져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약속을 지킬 것인지는 그 사람에게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약속을 지킨다면, 그 약속은 결국 자기 이익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가 생기더라도 정당하게 맺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 이익보다 진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구절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맹세로 읽는 해석과, 칠십인역처럼 이웃에게 한 맹세로 읽는 전승으로 갈리지만, 두 전승은 정당한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이 악한 맹세까지 반드시 실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편 전체가 정의를 행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하므로, 해악을 저지르겠다는 맹세를 지키는 것까지 온전한 행실에 포함된다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진실함이 마음의 문제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진실함이 실제 비용을 요구하는 상황까지 나아갑니다.

정직함이 어떤 사람의 성품인지는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비열한 자」에는 멸시받는 자 또는 경멸할 만한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표현이 사용되며, 그와 대조되는 사람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맹세 부분의 히브리어 니슈바 레하라는 직역하면 「해를 끼치는 일에 맹세하다」라는 방향으로 읽힐 여지가 있으며, 「자신에게」라는 말이 명시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문맥을 따라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약속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널리 알려진 해석입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이웃에게 맹세하고 그것을 어기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민수기 30:2는 맹세한 사람이 자기 말을 어기지 말고 입에서 나온 대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명기 23:21–23에서도 여호와야훼께 서원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 문제를 다룹니다.

돈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어도 하지 않는 일

시편 15:5 본문 →

자기 돈을 이자를 받고 빌려주지 않고,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시편 15:5 · 본디새김

마지막에 나오는 두 행동은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문제 삼는 것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의 돈이나 돈을 받을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입니다.

첫 번째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입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현대의 금융 제도를 곧바로 적용하면 본문이 놓인 상황을 놓치기 쉽습니다.

출애굽기 22:25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레위기 25:35–37에서는 가난해져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형제를 도와야 하며,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 규정들을 보면 당시의 대여가 단순한 투자나 상업적 거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약한 처지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돈을 가진 사람이 그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는 것은 공동체의 책임과 충돌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그를 도와야 할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그의 어려움에서 이익을 얻을 기회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제시하는 사람은 자기 재물을 이웃의 곤경에서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행동은 더욱 심각합니다.

뇌물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돈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죄 없는 사람이 피해를 입습니다.

시편 15편에서 중요한 것은 뇌물의 액수가 아닙니다. 뇌물이 죄 없는 사람을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받는 사람은 이익을 얻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두 경우 모두 돈이 인간관계와 정의를 지배하게 되는 위험을 보여 줍니다.

앞서 시인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맹세도 지키는 사람을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손해가 되더라도 정당한 약속을 지키고, 이익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진실을 버리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팔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시편은 마지막에 하나의 약속으로 돌아옵니다.

1절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천막에 머무르며 거룩한 산에 살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사람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머무를 자리를 묻고, 마지막에는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을 말하는 셈입니다.

「흔들리다」는 흔들리거나 비틀거리거나 굳게 서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시편 15편은 이 모든 행실을 지키는 사람에게 평생 아무런 고난도 닥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행동들은 오히려 때때로 현실적인 손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뇌물을 거절하여 이익을 포기해야 하며, 강한 악인을 높이지 않음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이 시편의 역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유리해 보이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얻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자기에게 불리한 약속은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런 고난도 없으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견고함을 선언하는 시적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행실들을 칭찬하는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행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2절에서도 정의를 「행하며」라고 했는데, 마지막에도 행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 전체가 행동으로 감싸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셰크입니다. 이 단어 자체는 이자를 뜻하며, 반드시 비정상적으로 높은 이자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단순히 고리대금만 금지하는 것으로 좁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구약의 이 구절을 현대의 모든 형태의 금융 이자에 대한 포괄적인 규정으로 곧바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신명기 23:19–20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자를 받는 것과 외국인에게 이자를 받는 것을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역사적 문맥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23:8은 뇌물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말을 뒤틀 수 있기 때문에 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신명기 16:19에서도 뇌물이 지혜로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며 의로운 사람의 말을 왜곡한다고 경고합니다. 「흔들리다」(⁨מוֹט⁩)의 히브리어 동사는 무트입니다. 시편 16:8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거룩함은 성소의 문턱을 넘어 일상으로 이어진다

시편 15:1–5 본문 →

시편 15편을 다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 「누가 당신의 천막에 머무를 수 있습니까?」가 새롭게 들립니다. 처음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자격을 묻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시인의 대답을 따라가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인 문제인지 깨닫게 됩니다.

남을 헐뜯지 않는 일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벗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은 관계와 갈등 속에서 드러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일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에 시험받습니다. 이자와 뇌물의 문제는 경제적인 거래와 사회적 판단의 자리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제사와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를 전제로 시작합니다. 다만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행위라면, 그 관계에 합당한 삶 역시 일상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이 묘사하는 삶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가요? 죄를 범한 사람이 어떻게 용서받고 회복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받아들이시는지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이 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자신의 행실로 구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읽는 것도,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이러한 행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읽는 것도 본문의 강조점을 놓칩니다.

산은 높이 서 있고, 천막은 그 산 위의 거룩한 거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까지 바라보는 것은 건물이나 장소 자체가 아닙니다. 그곳에 머무르기에 합당한 사람의 삶입니다.

그 사람은 특별한 말을 많이 해서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품은 진실이 혀와 손과 돈의 사용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온전한 삶을 살아갑니다.

거룩한 산에 머무를 사람은 그 산에 올라가는 순간만이 아니라, 산 아래에서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그 사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처음에 머무를 곳을 묻던 사람은 이제 어떤 삶이 그곳에 굳게 설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