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9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말없는 하늘에서 내 마음의 말까지

시편 19편은 하늘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한 사람의 입술에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낮과 밤이 끊임없이 지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끝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말과 마음속 생각을 받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하늘은 말없이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말을 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해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을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배우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에 시편 19편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김없이 드러내는데,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자기 입의 말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은 이 역설을 세 움직임으로 펼쳐 보입니다. 2–7절에서는 하늘과 해가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8–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이 사람의 생기와 지혜, 마음과 눈에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12–15절에서는 그 가르침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와 보호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흐름은 자연에서 성경으로 주제를 바꾸는 단순한 전환이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 사람이, 마침내 자신도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719편 본문 읽기 →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온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

시편 19:1–4 본문 →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궁창은 그의 손이 이룬 일을 알린다.시편 19:2 · 본디새김

시인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하늘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존재처럼 등장합니다. 「이야기하고」(⁨סָפַ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말하거나 이야기하거나 자세히 전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알린다」(⁨נָגַד⁩)에 해당하는 말은 어떤 사실을 선언하거나 알려 준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하늘을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이야기꾼처럼, 궁창을 하나님의 일을 알리는 전달자처럼 그립니다. 그런데 두 문장은 서로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궁창」은 이 문맥에서 같은 하늘 세계를 가리키는 병행 표현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손이 이룬 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까닭은 그 하늘 자체가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입니다. 그러나 그 하늘을 통해 시인은 하늘을 만드신 분의 영광을 알아봅니다.

이러한 이해는 창세기 1:6–8과도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 궁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신 창조 세계의 일부입니다. 시편 19편에서도 하늘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성한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이며,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전한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낮은 낮에게 말을 쏟아 내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시편 19:3 · 본디새김

낮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다음 낮에게 말을 전합니다. 밤 역시 다음 밤에게 지식을 전합니다. 마치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를 물려주듯이, 낮과 밤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이어 갑니다.

「말을 쏟아 내고」(⁨נָבַע⁩)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무엇인가가 솟아나거나 풍성하게 흘러나오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늘이 아주 가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낮에서 낮으로, 밤에서 밤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증언이 특정한 사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났을 때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이 오고 밤이 찾아오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계속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은 지금까지의 설명을 뒤집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도 없고 말마디도 없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시편 19:4 · 본디새김

조금 전에는 낮이 말을 쏟아 내고 밤이 지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대조가 시인이 의도한 중요한 효과입니다.

하늘은 인간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문장을 만들지도 않고, 어떤 언어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늘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전합니다. 하늘의 증언은 소리를 듣는 일이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바라보며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이 지점에는 실제 번역상의 갈림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4절은 부정 표현들이 이어지는 압축적인 문장입니다. 하늘에 말이나 들리는 목소리가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없다는 방향으로 문장을 구성합니다. 이 경우 하늘의 증언이 모든 곳에 들린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말없는 증언을, 다른 하나는 그 증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본문의 앞뒤를 함께 읽으면 이 두 특징이 모두 나타납니다. 하늘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지만, 그 증언은 온 세상에 미칩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범위를 보여 줍니다.

그들의 줄은 온 땅으로 뻗어 나갔고, 그들의 말은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 그는 하늘에 해를 위한 천막을 세웠다.시편 19:5 · 본디새김

히브리어 카밤(⁨קַו⁩)은 측량하거나 경계를 정할 때 사용하는 줄과 관련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증언이 마치 온 땅에 줄을 펼쳐 놓은 것처럼 멀리 뻗어 나간다는 이미지가 됩니다. 다만 이 구절의 번역은 오래전부터 갈려 왔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말을 「소리」를 뜻하는 프통고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늘의 증언이 특정한 지역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언어에는 차이가 있고,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어느 한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낮과 밤을 경험합니다.

시인은 그 보편적인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난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하늘이 인간에게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를 가르친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이 전하는 내용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이루신 창조의 일입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죄를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는 뒤에서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늘이 전하는 이야기는 모든 곳에 미치지만, 시인은 아직 사람이 그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그는 하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 하나를 가까이 살펴봅니다.

조금 더 깊이

「줄」을 칠십인역처럼 「소리」로 읽는 경우 앞의 말과 목소리 이미지가 더욱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어의 「줄」이라는 이미지를 보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 의미를 반드시 소리로 바꾸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로마서 10:18이 시편 19:5의 칠십인역 표현을 직접 인용하여 복음의 선포가 널리 퍼진다는 논의에 적용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보편적인 증언이라는 시편의 원래 문맥과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언어를 복음 전파의 문맥에서 새롭게 사용합니다.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길을 달리는 용사

시편 19:5–7 본문 →

시인은 하늘 전체의 이야기에서 해 하나로 시선을 좁힙니다.

「그는 하늘에 해를 위한 천막을 세웠다」는 짧은 문장에는 중요한 관계가 나타납니다. 해는 자기 마음대로 하늘을 차지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천막을 세우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해를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전통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해는 하나님과 경쟁하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늘 안에서 움직이는 피조물입니다. 시인은 해의 놀라운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능력의 근원을 하나님께 둡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는 해를 두 사람에 비유합니다.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용사처럼 길을 달리는 것을 기뻐한다.시편 19:6 · 본디새김

언뜻 보면 두 인물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혼인의 기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힘과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두 이미지를 통해 해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생생하게 만듭니다.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은 기쁨과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의 환희가 있습니다. 용사는 힘차게 자기 길을 달리는 사람입니다. 「용사」(⁨גִּבּוֹ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강한 사람이나 용사를 가리키며, 이 문맥에서는 정해진 길을 거침없이 달리는 힘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해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해는 기뻐하며 자기 길을 달립니다.

그런데 해가 달리는 길은 해 자신이 만들어 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하늘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일이 해에게는 속박이 아니라 기쁨으로 묘사됩니다. 해는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달리면서 온 세상에 빛과 열기를 전합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하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기쁨을 빼앗는 규칙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기쁘게 하고 생기를 되살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해의 질서 있는 움직임과 하나님의 가르침이 주는 기쁨은 시편 안에서 서로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해가 나오는 곳은 하늘 끝이고, 그것이 도는 길은 하늘의 끝들까지 이르며, 그 열기를 피해 숨은 것은 없다.시편 19:7 · 본디새김

시인은 해가 움직이는 범위를 하늘 끝에서 하늘 끝까지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구와 태양의 실제 운동 구조에 관한 천문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해가 떠오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해의 열기는 인간이 눈을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해를 바라보지 않아도 그 열기의 영향 아래 살아갑니다. 앞에서 하늘의 증언은 세상 끝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해의 열기는 피할 곳 없이 미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지닌 보편적인 영향력이 두 번 강조되는 것입니다.

해의 열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안다는 뜻일까요?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해의 열기를 경험하면서도 그 해를 만드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응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동일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 시편은 해를 떠나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종류의 빛을 이야기합니다. 그 빛은 눈에 보이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에서 옵니다.

사람의 마음과 눈을 밝히는 가르침

시편 19:8–10 본문 →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은 온전하여 생기를 되살리고, 여호와야훼의 증언은 믿을 만하여 순진한 이를 지혜롭게 한다.시편 19:8 · 본디새김

8절에 이르면 시편의 언어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하늘과 궁창, 낮과 밤과 해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과 증언, 지침과 명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달라집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8절부터는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이 반복됩니다. 시인은 단순히 우주를 만드신 강한 존재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야훼를 이야기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모두 깨닫거나 올바른 길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처음 등장하는 효과는 의무나 복종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가르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תּוֹרָה⁩)는 법률 조항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가르침과 지도, 사람이 따라야 할 길을 알려 주는 교훈을 포함합니다. 이 문맥에서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은 인간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또한 「생기를 되살리고」에 사용된 네페시는 사람의 목숨이나 생명,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영혼만 따로 떼어 회복시키는 작용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이 쇠약해진 사람에게 다시 생기를 주고 삶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흔한 오해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명령들의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이 사람을 되살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가능합니까? 시인은 가르침이 「온전하여」라고 설명합니다. 「온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תָּמִים⁩)는 흠이 없고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은 결함이 있는 지도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바르게 알려 주는 온전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순진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פְּתִי⁩)는 아직 분별력이 충분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말이나 영향에 쉽게 이끌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반드시 지능이 낮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증언은 그런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도 믿을 만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단순히 지식이 많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실제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마음과 눈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지침들은 올곧아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야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힌다.시편 19:9 · 본디새김

먼저 마음의 기쁨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지침들이 올곧다는 것은 사람이 따라갈 방향이 바르다는 뜻입니다.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올바른 길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됩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끊임없이 방황하던 사람이 믿을 만한 방향을 발견할 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사람에게 새로운 부담만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알려 줌으로 마음에 기쁨을 가져옵니다.

다음에는 눈이 밝아집니다. 눈을 밝힌다는 표현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기와 분별력을 얻고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게 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시편 앞부분의 해가 떠오릅니다. 해는 온 하늘을 가로지르며 세상에 빛과 열기를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눈을 밝힙니다. 해가 바깥세계를 환하게 비춘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렇다고 이 시편을 단순히 자연은 육체를 비추고 말씀은 영혼을 비춘다는 이분법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는 말씀도 사람의 생기를 되살린다고 했고, 뒤에서는 그 말씀이 실제 삶의 행동을 바로잡는다고 합니다. 시인이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회복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지금까지의 목록 가운데 조금 다른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은 깨끗하여 영원히 서 있고, 여호와야훼의 판결들은 참되며 모두 의롭다.시편 19:10 · 본디새김

앞의 네 표현과 뒤의 「판결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이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보이는 경외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경건한 가르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그 말씀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인 경외심이 목록 가운데 포함되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단순히 외부에서 전달되는 지식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와 연결됩니다.

「깨끗하여 영원히 서 있고」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판단은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 옳다고 생각한 것이 내일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향한 올바른 경외와 그분의 판단을 일시적인 유행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깨끗하고 지속적이며 참되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의 「여호와야훼의 판결들은 참되며 모두 의롭다」는 표현은 앞의 모든 가르침을 하나로 묶습니다. 가르침은 온전하고, 증언은 믿을 만하며, 지침은 올곧고, 명령은 순수하고, 경외는 깨끗하며, 판결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그런데 이 목록의 목적은 단어들을 정확하게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표현 뒤에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생기가 되살아나고, 지혜로워지고, 마음이 기뻐하며, 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참된 삶의 기준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의 관점에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가의 관점에서도 설명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는 그 말씀을 금과 꿀에 비유합니다.

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달다는 말의 의미

시편 19:11–12 본문 →

그것들은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 탐낼 만하고, 꿀보다, 벌집에서 흐르는 꿀보다 더 달다.시편 19:11 · 본디새김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 귀한 것에 비유합니다.

금은 부와 가치를 나타내고, 꿀은 달콤함과 즐거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금이나 꿀만큼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탐낼 만하고 더 달다고 말합니다.

금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얻게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꿀은 입에 달콤한 즐거움을 주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재물이나 음식보다 언제나 즉각적으로 더 큰 쾌감을 준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사람에게 주는 유익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금은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이고, 꿀은 먹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 재산과 즐거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로만 생각하면, 시인이 그 말씀을 달다고 표현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발견하고, 자신을 해치는 길을 피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알아가는 사람에게 그 가르침은 소중한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율법을 억지로 견디는 짐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 자체가 탐낼 만하고 달콤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 아름다운 찬양은 시인 자신의 삶으로 들어옵니다.

또한 당신의 종은 그것들로 경고를 받습니다. 그것들을 지키는 데에는 큰 보상이 있습니다.시편 19:12 · 본디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시인 자신이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하늘과 해가 등장했고, 이어서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에 관한 찬양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밖에서 관찰하고 칭찬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으로 경고를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편의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경고를 받습니다」는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뜻보다 구체적입니다.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 길에서 벗어나도록 주의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듣기 좋은 위로만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경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경고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지는 경고는 그 자체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 길이 위험하다고 알려 주는 일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위험을 피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지키는 데에는 큰 보상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말씀을 지키면 반드시 많은 재물을 얻게 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시인은 말씀 자체가 많은 순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보상을 단지 재산의 증가로 제한하면 앞의 대조가 약해집니다.

본문은 그 보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열거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삶에 큰 유익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 유익은 이미 앞에서 생기와 지혜, 마음의 기쁨과 눈의 밝아짐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12절의 보상과 정확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시편의 흐름에서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야 할 의무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시인은 그 말씀 앞에서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잘못들을 누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지혜를 준다고 노래했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저지른 잘못조차 모두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시편 19편에서 가장 깊은 전환입니다.

내 잘못을 나도 모두 알지 못합니다

시편 19:13–14 본문 →

잘못들을 누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숨겨진 잘못들의 죄책에서 저를 풀어 주십시오.시편 19:13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찬양했습니다.

그 말씀은 온전하고 참되며,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눈을 밝힙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씀 앞에 선 시인은 자신의 잘못을 모두 분별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가르침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이 사람의 삶을 비추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에는 잘못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기준을 만나면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문제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모르는 잘못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잘못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גִיאָה⁩)는 실수나 잘못, 그릇된 행동을 나타냅니다. 반드시 의식적으로 계획한 악행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숨겨진 잘못들」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숨겨져 있다는 뜻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숨겨 둔 죄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앞의 「누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생각하면 자신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잘못을 가리킨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특별히 후자의 문제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무지를 변명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는 몰랐으니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잘못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 간구는 하나님의 가르침 앞에 서는 인간이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아는 만큼만 잘못하고, 스스로 인정한 만큼만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7절의 「그 열기를 피해 숨은 것은 없다」는 이미지가 새롭게 들립니다. 해의 열기는 온 세상에 미칩니다. 아무도 그 영향에서 완전히 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신도 분별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두 표현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대응하도록 배치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함께 읽으면 의미 있는 대조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해의 열기가 모든 곳에 미치듯, 인간은 자기 삶도 하나님의 살펴보심 밖에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 일은 해의 열기를 느끼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그 가르침을 받은 뒤에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시인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거만한 자들에게서 당신의 종을 지켜 주십시오. 그들이 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온전해지고, 큰 범죄의 죄책에서 벗어날 것입니다.시편 19: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숨겨진 잘못과는 조금 다른 위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거만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두고 중요한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제딤(⁨זֵד⁩)은 거만하고 주제넘게 행동하는 자들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를 사람으로 읽으면 시인은 오만한 자들의 영향력이나 지배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반면 이 표현을 고의적이고 거만한 죄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시인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주제넘은 죄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단어와 문맥은 두 해석 모두를 검토할 여지를 남깁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거만한 사람들로 읽으면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악한 영향과 지배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가려 하더라도 주변의 강압이나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의적인 죄들로 읽으면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교만과 반역을 경계합니다. 잘못을 모르고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라,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위험을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지배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몇 가지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악한 힘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13–14절에는 죄에 대한 두 가지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신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잘못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여 큰 범죄로 이끌 수 있는 거만함입니다.

시인은 이 두 위험 앞에서 모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을 단순히 충분히 배우기만 하면 완전해질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지만, 그것을 듣는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그는 가르침이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하며, 악한 지배에서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시편이 말하는 온전함은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얻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자기 잘못이 전혀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악한 길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러면 저는 온전해지고」라고 기도할 때, 그 온전함은 자신의 독립적인 도덕 능력에 대한 자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책에서 풀어 주시고 악한 지배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일에 기대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 이르면 시인은 다시 자신의 입과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거만한 자들」의 자리를 「낯선 자들」 또는 「외부의 자들」과 관련된 표현으로 옮겨, 사람을 가리키는 읽기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말씀이 잘못을 드러내고 그 말씀 앞에서 바로잡아 주시기를 구하는 이러한 흐름은 시편 119편에서도 풍성하게 발전합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바로잡고 깨닫게 해 달라고 거듭 기도합니다(시편 119:18, 33–40).

내 입의 말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야 한다

시편 19:15 본문 →

제 입의 말과 제 마음의 읊조림이 당신 앞에 기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야훼, 제 반석이시며 제 속량자이신 분이여.시편 19:15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은 처음과 놀라운 대응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했습니다. 낮이 낮에게 말을 쏟아 내고, 밤이 밤에게 지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들리는 목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마음속의 읊조림을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마음의 읊조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הִגָּיוֹן⁩)는 마음속의 묵상이나 낮은 읊조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소리로 드리는 기도와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생각, 되뇌는 말,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13절의 숨겨진 잘못에 대한 간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 모두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뿐 아니라 그 말을 만들어 내는 마음의 움직임까지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자기 말이 반드시 옳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기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기쁘게 받아들여짐이나 호의를 나타내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받아들여지는 일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기도는 예배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은 하늘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드리는 말이 자동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관해 참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설명하고,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지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내용을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언제나 올바르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도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나올 수 있고, 진리를 설명하는 말도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지만, 자기 입의 말과 마음의 읊조림이 함께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를 구함으로써 내면과 언어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기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두 이름으로 부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보호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바로 앞선 시편 18편에서도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반석으로 찬양받으셨습니다.

시편 19편에서는 그 이미지가 조금 다른 자리에서 등장합니다. 시인은 지금 원수의 칼이나 죽음의 급류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숨겨진 잘못과 죄책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인에게도 여호와야훼는 반석이십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한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견고한 분이십니다.

「속량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알리(⁨גָּאַל⁩)는 나의 속량자 또는 되찾아 주는 이를 뜻하며, 가알이라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구약에서 이 어근은 가족의 잃어버린 땅이나 권리를 되찾아 주는 친족의 역할과 연결됩니다. 속량자는 단순히 재물을 주는 후원자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사정을 맡아 그를 구하고 회복시키는 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이제 그 하나님을 자신의 속량자라고 부릅니다. 왜 마지막에 이 호칭이 나올까요? 그는 바로 앞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잘못의 죄책에서 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죄책에서 자유로워지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는 그 일을 여호와야훼께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만드신 분이고, 사람을 가르치시는 분이며, 동시에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을 구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해져서 땅을 팔게 된 사람의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찾아 주는 일을 설명합니다. 룻기 4장에서도 기업을 무를 자의 역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속량하셨다는 표현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출애굽기 6:6).

하늘의 노래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하는 사람

시편 19:1–15 본문 →

시편 19편을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면서 스스로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해는 자기 길을 기쁘게 달리면서 잘못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이 언제나 그 가르침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주어져도 자신이 그것을 완전하게 지킨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와 보호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관한 지식만 있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일이 없다면, 그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잘못을 드러내지만,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그 잘못의 죄책에서 풀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시편 19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낮과 밤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전합니다.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며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그 열기를 피하여 숨을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면에는 인간의 말소리가 없습니다. 하늘은 자기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자기 입을 엽니다.

하늘과 달리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찬양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두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가장 좋은 말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구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둘 앞에 서서 하나님께 말과 마음을 받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은 마지막에 다시 하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해가 지거나 새로운 낮이 시작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입술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은 채 노래를 끝냅니다.

온 세상에 뻗어 나가던 하늘의 말없는 증언은 이제 한 사람의 작고 조심스러운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도를 자신의 완전함이 아니라, 자신의 반석이시며 속량자이신 여호와야훼께 맡깁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