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0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왕을 위한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전쟁에 나서는 왕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강한 군대, 충분한 병거와 말, 뛰어난 작전,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일 것입니다. 시편 20편에도 이 모든 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왕의 군사력을 칭송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왕이 백성에게 승리를 약속하는 연설도 아닙니다. 오히려 왕을 향한 백성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왕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지만, 그 왕 자신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백성은 왕에게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왕을 구해 주시기를 빕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왕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한 목소리가 「이제 나는 … 알았다」라고 선언하고, 다시 「우리는」이라는 공동체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모두가 여호와야훼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시편은 한 사람의 승리를 노래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왕과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왕의 운명은 백성과 떨어져 있지 않고, 백성의 운명은 왕의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의지해야 할 분이 따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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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하나님이 왕을 지키신다

시편 20:1–3 본문 →

첫 기도에서 뜻밖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가 고난의 날에 당신에게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당신을 안전한 높은 곳에 두기를 바랍니다.시편 20:2 · 본디새김

왜 하필 「야곱의 하나님」일까요?

야곱은 처음부터 강하고 안정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형을 만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삶에는 위협과 불안,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5:3에서 야곱은 자신이 고난을 겪던 날에 하나님이 응답하셨고, 가는 길에 함께하셨다고 회고합니다. 시편 20편의 「고난의 날에 … 응답하기를」이라는 기도는 그 표현과 특히 가깝습니다. 백성은 왕에게 낯선 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에 처했던 야곱을 버리지 않으신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왕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야곱과 왕은 처지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떠돌며 살아남아야 했던 조상이고, 다른 사람은 군대를 거느린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둘 다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왕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그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안전한 높은 곳에 두기를」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킵니다. 높은 곳은 적이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자리입니다. 위협 속에서도 왕을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그 보호가 어디에서 오는지 말합니다.

성소에서 당신에게 도움을 보내고, 시온에서 당신을 떠받쳐 주기를 바랍니다.시편 20:3 · 본디새김

시온은 예루살렘과 연결되는 장소이며, 성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공간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장막 안에 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사무엘하 6:17). 다만 시편 20편이 정확히 어느 시대, 어느 전쟁을 배경으로 불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서는 왕은 군대를 이끌고 성소를 떠나겠지만, 하나님의 도움은 성소에서 그에게 미치기를 바랍니다. 왕이 하나님의 보호가 미치는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든 그 보호를 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왕의 제물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

시편 20:4–5 본문 →

이제 백성은 왕이 하나님 앞에 드린 제물을 언급합니다.

당신의 모든 예물을 기억하고, 당신의 번제를 기름진 제물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셀라.시편 20:4 · 본디새김

여기서 「기억하다」는 하나님이 잊고 계시던 제물을 떠올리신다는 뜻이라기보다, 그것을 받으시고 그 드림에 호의적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이나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말은 종종 그들을 위해 행동하시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자 홍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고(창세기 8:1),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자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출애굽기 2:24~25).

번제를 기름진 제물로 받아 달라는 표현에는 제물이 하나님께 흡족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물이 승리를 얻어 내는 대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제물을 드렸으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성은 하나님이 받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행위는 사람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 다음에 왕의 마음과 계획이 등장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바라는 것을 당신에게 베풀고, 당신의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기를 바랍니다.시편 20:5 · 본디새김

「마음이 바라는 것」과 「계획」은 비슷하면서도 초점이 다릅니다. 앞의 표현이 왕의 내적인 소망을 가리킨다면, 뒤의 표현은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숙고한 방침이나 구상을 가리킵니다.

왕에게는 지켜야 할 백성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으며, 그 일을 위한 계획도 있습니다. 시편은 이런 인간의 의도와 판단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바라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왕의 계획은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독립된 힘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모든 개인적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일반적인 약속으로 읽으면, 왕이라는 문맥이 사라집니다. 지금 백성은 공동체의 안전을 책임진 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망과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왕 한 사람에게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다음 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왕의 구원이 우리의 기쁨이 된다

시편 20:6 본문 →

우리는 당신의 구원에 기뻐 외치고,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세웁시다. 여호와야훼가 당신의 모든 청을 이루어 주기를 바랍니다.시편 20: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왕에게 「당신」이라고 말하던 백성이 여기서는 자신들을 「우리」라고 부릅니다.

왕의 구원이 백성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왕은 단지 개인적인 영광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생존과 승리는 공동체의 안전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백성은 왕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구원」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왕이 구원을 받지만, 그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은 왕 혼자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백성과 왕이 함께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깃발 역시 의미 있는 이미지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깃발은 군대가 모이고 자신들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드러내는 표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시편은 깃발을 세우는 행위를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합니다. 출애굽기 17:15에서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 뒤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야훼 닛시라고 부른 장면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승리를 기뻐 외치는 말은 아직 기도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백성은 이미 승리한 전쟁의 경과를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구원을 바라며 기쁨을 앞당겨 노래합니다. 그러면서도 6절 끝에서는 다시 「여호와야훼가 당신의 모든 청을 이루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기뻐할 것을 기대하지만, 아직 간구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시편은 이 두 태도를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믿음이 현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멈추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알았다」 — 기도에서 확신으로

시편 20:7 본문 →

여기서 시편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이제 나는 여호와야훼가 자신이 기름 부은 이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의 거룩한 하늘에서 구원하는 자기 오른손의 위력으로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시편 20:7 · 본디새김

이 말을 누가 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왕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며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대표하여 선언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정할 만큼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분명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첫마디인 「이제」가 그 전환을 선명하게 만듭니다.

앞에서 반복되던 「바랍니다」라는 간구의 언어가 「알았다」라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실제로 승리의 소식을 들은 뒤의 선언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전투가 언제 끝났는지, 어떤 소식이 도착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승리가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너무나 확신하기 때문에 마치 이루어진 일처럼 선언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특별한 확신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선언자의 정체나 확신을 얻은 구체적인 경위보다, 그 확신의 대상인 여호와야훼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왕을 가리키는 「기름 부은 이」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음은 왕이 특별한 직무를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장면이 그 예입니다(사무엘상 16:13).

이 표현은 왕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왕에게 신적인 힘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왕이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기에,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을 위한 도움도 하나님께 구합니다.

7절 후반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앞서 백성은 「성소에서」, 「시온에서」 도움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한 하늘에서」 응답하십니다.

성소와 시온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장소라면, 거룩한 하늘은 하나님이 그 장소에 갇힌 분이 아니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섬김받으시지만, 그의 구원하는 능력은 시온의 건물이나 공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왕이 전쟁터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른손」은 능력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 15:6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은 원수를 무너뜨리는 강한 능력으로 노래됩니다. 시편 20편은 그 구원의 능력이 지금 하나님의 기름 부은 이를 위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이(⁨מָשִׁיחַ⁩)를 구원하셨다는 말에 완료된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가 사용되고, 이어지는 응답은 미래를 향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에 대한 이 시의 이해는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왕조에 대한 약속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 권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었습니다. 왕권의 지속과 안전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는 약속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사무엘하 7:12~16). 이러한 왕에 대한 기대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 발전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칭호도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에 대한 전통과 연결됩니다(누가복음 2:11). 그러나 시편 20편이 처음부터 예수의 특정 사건을 직접 예언한다고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스라엘 왕을 위한 기도로 읽을 때, 훗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맺는 주제적 연결도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병거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시편 20:8–9 본문 →

이들은 병거를, 저들은 말들을 내세우지만,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내세운다.시편 20: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의 신앙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병거와 말은 나쁘고 하나님의 이름은 좋다는 대조로 읽으면 중요한 점을 놓칩니다.

병거와 말은 고대 전쟁에서 실제적인 군사력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습니다. 병거는 이동성과 공격력을 제공했고, 말은 군대의 기동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많이 확보한 왕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시편은 그런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힘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병거와 말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문장의 대조에는 미묘한 특징이 있습니다. 앞의 두 부분은 각각 「이들은 병거로」, 「저들은 말들로」라고 표현하며,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기억하고 언급한다」는 동사가 나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위협 앞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며, 자신들이 누구의 도움을 의지하는지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왕을 지켜 주시기를 바랐고, 중간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백성은 병거와 말을 내세우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믿음을 대조합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군사력에 덧붙이는 종교적인 장식이 아니라, 그들의 안전과 구원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특별히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신명기 17:16은 왕이 자신을 위해 말을 지나치게 늘리거나, 말을 얻으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이 법은 왕이 군사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위험을 경계합니다. 이사야 31:1도 말과 병거를 의지하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20편은 군사적 준비 자체를 금지하는 시가 아닙니다. 실제로 앞에서는 왕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군사력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그 힘을 구원의 최종적인 근거로 삼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 대조는 곧바로 다음 절에서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쓰러졌지만, 우리는 일어나 다시 힘을 얻었다.시편 20:9 · 본디새김

8절의 대조가 9절에서는 사람들의 몸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무릎을 꿇고」는 경건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가리키기보다, 싸움에서 힘을 잃고 무너지는 장면에 어울립니다. 이어지는 「쓰러졌지만」이라는 말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일어나 다시 힘을 얻었다」는 말은 넘어지거나 약해진 상태에서 바로 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어의 마지막 동사는 다시 자신을 세우거나 굳게 서는 뜻을 담고 있어, 단순히 잠깐 몸을 일으킨 것 이상의 회복을 표현합니다.

병거는 사람을 싣고 빠르게 움직이게 해 주지만, 사람을 끝까지 서 있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말은 전쟁터를 달릴 힘을 주지만, 패배와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완전히 보호하지는 못합니다. 시편은 군사력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넘어, 구원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두 무리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다만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편적인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는 특정한 공동체가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고 그 구원을 확신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다른 모든 전쟁의 승패에 대한 무조건적인 약속은 본문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절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마지막 동사는 「기억하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어떤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언급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의 「내세운다」는 번역은 세 부분의 대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지만, 히브리어 원문에 「내세우다」라는 동일한 동사가 세 번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확신의 끝에서 다시 기도하다

시편 20:10 본문 →

여호와야훼, 구원해 주십시오. 왕이 저희가 부르는 날에 저희에게 응답하기를 바랍니다.시편 20: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원수들이 쓰러졌고 자신들은 다시 일어섰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승리의 환호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앞의 확신을 취소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끝까지 자신들의 구원을 여호와야훼께 맡기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확신을 얻은 뒤에도 기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는 의미가 갈리는 중요한 번역 문제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여호와야훼, 구원해 주십시오」에서 한 번 문장을 끊고, 이어지는 「왕이 … 응답하기를 바랍니다」에서 왕을 응답의 주어로 읽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쉼표 역할을 하는 악센트도 「구원해 주십시오」 뒤에 큰 끊김을 둡니다.

이렇게 읽으면 왕이 백성의 부름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됩니다. 여기서 왕을 앞서 등장한 인간 왕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왕으로 부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 왕으로 읽는다면, 백성이 왕을 위해 기도하던 시가 마지막에는 그 왕이 백성에게 응답하기를 바라는 기도로 끝납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주님, 왕을 구원하시고, 우리가 부르는 날에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옮깁니다. 이 읽기에서는 구원을 받을 대상이 왕이고, 백성의 부름에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두 읽기는 문장의 관계를 다르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시 전체의 흐름과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며, 백성은 그 구원이 자신들의 삶에까지 미치기를 바랍니다.

시작과 끝도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시편은 「고난의 날에 당신에게 응답하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부르는 날에 저희에게 응답하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로 끝납니다.

처음에 왕을 향하던 간구가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의 간구로 넓어집니다.

이것이 시편을 한 사람의 승리 기원으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왕은 혼자서 구원을 얻고 혼자 기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왕을 위한 기도는 결국 백성 전체의 안전과 회복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병거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구하다

시편 20:1–10 본문 →

시편이 보여 주는 믿음은 두려움이나 위험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위험을 알고, 계획을 세우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구원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는 태도입니다. 왕은 하나님 아래에 있으며,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왕이 강해지는 것 자체가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의 구원이 백성의 구원과 이어져야 합니다.

시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한쪽에는 병거와 말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힘만으로 판단한다면 어느 쪽이 더 강해 보이는지는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그리는 마지막 모습은 다릅니다. 병거와 말을 내세운 사람들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사람들은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외치며 노래를 끝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다시 「여호와야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들은 일어서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기에, 다시 그 이름을 부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