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9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입김 같은 인생이 기다리는 희망

시편 39편은 입을 다물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관해 말하지 않기로 합니다. 특히 악인이 자신 앞에 있는 동안에는 더욱 조심하려고 합니다(2절). 그러나 침묵은 그를 평안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속 고통이 더 심해지고, 마침내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입을 엽니다.

그런데 그가 꺼낸 말은 예상과 다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에 대한 고발도, 억울한 상황에 대한 긴 설명도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야훼, 제 끝을, 제 날들의 길이가 얼마인지 알려 주십시오. 제가 얼마나 덧없는지 알고 싶습니다」(5절) 하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고통을 말하려다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악인 앞에서 말하지 않으려던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께 자신의 남은 날들을 알려 달라고 요청할까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아는 것이 지금 겪는 고통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시인은 자신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붙들고 있는 삶 자체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바로잡고 싶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으며,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생각하면서, 그 모든 소망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시편의 한가운데서 그는 「그런데 이제 주, 제가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제 희망은 당신에게 있습니다」(8절) 하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시편 전체의 방향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이어서 자기 삶이 얼마나 짧은지 묻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묻게 됩니다.

그렇다고 시편이 평안한 확신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께 눈물을 보시고 침묵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눈길을 돌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라보아 달라는 마음과, 하나님의 시선이 너무 무거워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편 38편에서도 시인은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시편 39편은 그 침묵을 새롭게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제 문제는 자신의 말을 억누르는 일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침묵이 어떤 기도로 바뀌는가 하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39편 본문 읽기 →

입을 지키려다가 마음이 타오르다

시편 39:1–4 본문 →

지휘자를 위하여. 여두툰을 위하여. 다윗의 시편.시편 39:1 · 본디새김

여두툰은 역대상 25:1–3에서 아삽과 헤만과 함께 성전 음악과 관련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의 집안은 악기를 연주하고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시편 39편뿐 아니라 시편 62편과 77편의 표제에도 여두툰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 표제가 그에게 노래를 맡겼다는 뜻인지, 그와 관련된 음악적 전통을 가리키는지, 특정한 연주 방식을 나타내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도 시인이 처한 사건의 구체적인 배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말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내 혀로 죄짓지 않도록 내 길들을 지키겠다. 악인이 내 앞에 있는 동안 입마개로 내 입을 지키겠다.」시편 39:2 · 본디새김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문제 삼기에 앞서 자신의 말을 경계합니다. 악인이 왜 그 앞에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악인이 시인을 공격하거나 조롱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시인이 악인의 행동을 지켜보며 분노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시인은 그 앞에서 잘못된 말을 할 위험을 느낍니다.

억울한 상황에서는 말이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혀로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고통을 표현하다가 하나님을 향해 경솔한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가능성을 경계하며 입에 ‘입마개’를 씌우겠다고 결심합니다. 입마개는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강하게 제어하는 이미지입니다. 단순히 말을 조금 조심하겠다는 결심보다 훨씬 단호합니다.

그러나 그다음 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나는 말없이 잠잠해졌다. 좋은 말조차 하지 않았고, 내 고통은 더 심해졌다.시편 39:3 · 본디새김

본디새김은 시인이 좋은 말조차 하지 않았다고 읽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그의 침묵은 처음의 의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처음에는 죄짓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좋은 말까지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이 절이 침묵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의 상황에서 말을 절제하는 일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침묵이 시인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내 속에서 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불이 타올랐다. 나는 내 혀로 말했다.시편 39:4 · 본디새김

여기서 ‘곰곰이 생각하다’는 표현은 묵상하거나 되뇌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평온한 명상보다 고통스러운 생각이 마음속에서 계속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입을 다물었다고 해서 생각까지 멈춘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상황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합니다.

처음에는 악인이 자기 앞에 있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여호와야훼께 말을 건넵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절제를 포기하고 아무 말이나 쏟아 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고통을 하나님께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은 악인 앞에서 삼켰던 말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바꿉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첫 내용은 자기 고통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짧은지를 알려 달라는 요청입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좋은 말조차 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미토브를 포함하는데, 문자적으로는 ‘좋은 것에서’ 또는 ‘좋은 것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악한 말뿐 아니라 좋은 말까지 삼켰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반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없어 말할 수 없었다거나, 좋은 일에 관한 말이나 기대마저 그쳤다는 뜻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손바닥 몇 폭으로 재어지는 인생

시편 39:5–6 본문 →

「여호와야훼, 제 끝을, 제 날들의 길이가 얼마인지 알려 주십시오. 제가 얼마나 덧없는지 알고 싶습니다.」시편 39:5 · 본디새김

이것을 자신이 정확히 몇 살에 죽을지 예언해 달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문장이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기 삶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의 관심은 악인이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겪는 고통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남은 생애 전체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겪는 문제를 더 큰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이 자신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가 끝없이 계속될 것 같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삶 자체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가 겪는 고통뿐 아니라 그 고통을 겪는 자신의 시간도 끝이 있습니다.

6절은 그 깨달음을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제 날들을 손바닥 몇 폭으로 정하셨고, 제 일생은 당신 앞에서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참으로 꼿꼿이 선 사람도 모두 온통 입김일 뿐입니다. 셀라.」시편 39:6 · 본디새김

‘손바닥 몇 폭’은 손 너비로 재는 길이 단위의 복수형입니다. 고대에 길이를 잴 때 손을 기준으로 삼는 일은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일생을 그렇게 작은 단위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수십 년에 걸친 긴 이야기로 경험합니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가족을 이루는 시기와 늙어 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날은 손바닥 몇 폭처럼 짧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들을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중심은 인간이 자기 삶의 길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꼿꼿이 선 사람(⁨נָצַב⁩)’이라는 표현은 자신 있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문의 낱말은 굳게 서 있거나 안정된 상태를 나타내는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가장 안정되어 보이는 사람조차 예외가 아니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입김’입니다.

‘입김’은 숨결이나 입김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키며, 그 이미지에서 덧없음과 붙잡기 어려움을 나타내는 의미로 발전합니다. 이 낱말은 전도서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입김’은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입김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는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깐 나타났다가 흩어져 버립니다. 손으로 붙잡아 오래 간직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단단히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재산이 있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도 받으며, 미래를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안정감이 삶의 유한함을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시인은 약하고 고통받는 사람만 덧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안정되어 보이는 사람조차 입김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발견은 다음 절에서 인간이 하는 일 전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열심히 쌓아 두지만 누가 가져갈지 모른다

시편 39:7 본문 →

「참으로 사람은 허상으로 걸어 다닙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피우는 소란도 한낱 입김입니다. 사람은 쌓아 두지만 누가 그것들을 거두어 갈지 모릅니다.」시편 39: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세 개의 짧은 관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표현의 ‘허상(⁨צֶלֶם⁩)’은 형상이나 모습을 나타내는 낱말입니다. 창세기 1:26–27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할 때에도 같은 낱말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시편 39편에서는 그 단어가 전혀 다른 강조점을 지닙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실체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붙들고 있는 삶의 형태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만으로 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와도 문맥이 다릅니다.

두 번째 표현은 인간의 소란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고, 경쟁하고, 계획하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소란을 ‘입김’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 표현은 그 소란의 한 가지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축적합니다. 여기서는 특히 재산을 모으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면서 재산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마지막에 누가 가져갈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자녀가 물려받을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재산을 모으는 행위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신이 쌓아 둔 것을 끝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모으더라도 자신의 생애가 끝난 뒤 그 재산을 누가 가져갈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도서 2:18–19와 매우 가까운 문제의식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자기 뒤에 오는 사람에게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괴로워합니다. 그 사람이 지혜로울지 어리석을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39편도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사람은 자신이 끝까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그토록 많은 소란을 피웁니까?

시인의 관심은 그보다 근본적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수고가 낳는 결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달은 뒤에 시인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소란’에 해당하는 표현은 분주하게 웅성거리거나 동요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지만, 문장 구조가 간결하여 정확히 무엇을 수식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사람들이 피우는 소란 전체가 덧없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

시편 39:8 본문 →

「그런데 이제 주, 제가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제 희망은 당신에게 있습니다.」시편 39: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39편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시인은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인간의 활동이 얼마나 덧없는지, 사람이 쌓아 둔 것도 끝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일까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살아가는 일일까요?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시인의 결론입니다. 자신의 생애가 짧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그는 모든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소망의 대상을 새롭게 정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혀를 지키려고 했고, 자신의 고통을 견디려고 했으며,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자신을 희망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것을 주실 것인가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긴 수명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많은 재산을 쌓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이 입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과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을 구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 역시 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수고의 결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그 사실 때문에 모든 삶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날들과 그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전도서 3:12–13). 시편 39편에서는 그 깨달음이 직접적인 기도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끝까지 붙잡을 수 없다면, 누구에게 희망을 둘 수 있습니까? 시인의 대답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 뒤에도 그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다시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하셨기에 잠잠하지만, 그래서 더욱 괴롭다

시편 39:9–12 본문 →

「제 모든 허물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저를 어리석은 자의 조롱거리로 만들지 마십시오.」시편 39:9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허물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허물’은 반역이나 의도적인 잘못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덧없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죄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한정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한정된 삶 속에서 실제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 둘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애가 짧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자신의 허물이 사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그 허물에서 자신을 건져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요청은 처음의 악인과 다시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말을 하여 죄짓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악인이나 어리석은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일과 다른 사람들의 부당한 조롱을 두려워하는 일이 함께 존재합니다.

다음 절에서는 침묵이 다시 등장합니다.

「저는 잠잠해졌고, 제 입을 열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39:10 · 본디새김

처음의 침묵과 무엇이 다를까요?

2–3절에서 시인은 악인 앞에서 죄짓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침묵은 자신의 혀를 지키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당신이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의 침묵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하나님의 행동이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과 연결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일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거나 다투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자신에게 이해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께 그 타격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타격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 손의 공격으로 저는 쇠진했습니다.」시편 39:11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행동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자신에게 가져온 고통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과 관련되어 계신다고 믿기에 바로 그 하나님께 타격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체념과 다릅니다. 체념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께 행동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어지는 12절은 인간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징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 줍니다.

「당신은 죄악 때문에 책망으로 사람을 징계하셨고, 좀이 먹어 없애듯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녹여 없애셨습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입김일 뿐입니다. 셀라.」시편 39:12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 인간 전체에 관한 진술을 합니다.

좀은 강한 힘으로 물건을 단번에 부수지 않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게 조금씩 갉아먹습니다. 겉으로는 온전해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약해지고 사라집니다. 시인은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6절에서 처음 등장했던 선언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맥락은 다릅니다. 6절에서는 인간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짧은지를 말했습니다. 12절에서는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것마저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시간도 짧고, 인간이 의지하는 것들도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그렇게 덧없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계하시는 가운데 그 소중한 것들까지 사라지고 있다면, 자신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두 절은 그 질문에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무도는 사람이 바라고 귀하게 여기는 대상과 관련됩니다. 아름다움이나 매력, 소중한 소유물 등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특정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재산이나 외모, 생명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을 말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을 지탱한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약하고 사라지기 쉬운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잠잠하지 말라고 구하는 나그네

시편 39:13 본문 →

「여호와야훼,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도움을 구하는 제 외침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제 눈물 앞에서 잠잠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 곁에 머무는 나그네이며, 제 모든 조상처럼 몸붙여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시편 39:13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처음부터 반복된 침묵의 문제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잠잠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행동을 인정하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 잠잠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말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깊어지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말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일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하다가 마지막에는 눈물을 언급합니다. 눈물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드러냅니다. 기도자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자신의 눈물이 하나님께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나약한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앞에서 시인은 인생이 짧고 덧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자기 소유의 땅이나 완전한 정착 기반 없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 머무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한 ‘몸붙여 사는 사람’은 그곳에 거주하지만 완전한 소유권이나 독립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한 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낱말은 레위기 25:23에서도 함께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땅이 자신의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에 머무는 나그네와 거류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땅의 궁극적인 소유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는 말입니다.

시편 39편의 기도자도 자신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조상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사람들이 살다가 떠났고, 자신도 언젠가 떠나게 됩니다.

시인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낯선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곁에 머무는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앞의 8절과 연결됩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를 깨달은 뒤 그는 자신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유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에게는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땅도, 끝까지 붙들 수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마지막으로 놀라운 요청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나그네(⁨גֵּר⁩)’는 히브리어 게르, ‘몸붙여 사는 사람(⁨תּוֹשָׁב⁩)’은 토샤브입니다. 역대상 29:15에서도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며, 조상들도 그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날들이 그림자와 같고 머무름이 없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시편 39편과 매우 가까운 표현과 문제의식입니다. 그렇다고 두 본문이 반드시 같은 상황에서 나왔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나그네의 처지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게서 눈길을 돌려 주십시오

시편 39:14 본문 →

「제게서 눈길을 돌려 제가 미소 지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떠나 더는 있지 않게 되기 전에.」시편 39:14 · 본디새김

시편 39편의 마지막 문장은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눈물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에게서 눈길을 돌려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아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라보지 않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앞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행동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타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공격으로 자신이 쇠진했다고 했습니다.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징계하시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녹여 없애신다고도 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눈길을 돌려 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관심이나 돌보심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돌리고 싶다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미소 지을 수 있게’라고 옮겼습니다. 이 번역을 따르면 시인은 거창한 성공이나 완전한 회복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시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징계하고 계신다고 느끼며,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구하는 것은 잠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 밝아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요청에는 기한이 있습니다.

시인은 죽음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떠나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지 않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이 문장은 5절의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끝과 날들의 길이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끝이 오기 전에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덧없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덧없는 삶이 끝나기 전에 잠시 기쁨을 누리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소망이 작아졌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한지를 더욱 선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짧은 인생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짧은 인생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잠시 누릴 평안과 미소조차 소중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떠나기 전에, 지금 이 삶에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미소 지을 수 있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아블리가는 의미를 정확히 한 가지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밝아지거나 기력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으며, 안도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상태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한 나그네가 남긴 마지막 부탁

시편 39:1–14 본문 →

시인은 하나님 곁에 머무는 나그네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라는 표현은 단지 슬픈 처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삶의 궁극적인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시편 39편의 중심에는 인간의 덧없음에 관한 반복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6절과 12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입김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사람들이 피우는 소란도 입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깨달음 끝에 모든 소망을 버리는 대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과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주장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은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 바로 그 입으로, 하나님의 타격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께 계속 질문하고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길게 늘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많은 재산을 쌓게 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 눈길을 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이 떠나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게 되기 전에, 잠시라도 다시 밝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통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마지막 문장 「제게서 눈길을 돌려 제가 미소 지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떠나 더는 있지 않게 되기 전에」는 더욱 절실하게 들립니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이 입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입김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시편 39편이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하는 냉혹한 결론이 아닙니다. 짧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 수 없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지금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손바닥 몇 폭에 지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다시 한 번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