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8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죄를 인정하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하다

시편 38편에는 쉽게 하나로 묶이지 않는 두 가지 고백이 등장합니다.

19절에서 시인은 「저는 제 죄악을 털어놓으며, 제 죄 때문에 걱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그러나 제 원수들은 활기차고 강해졌으며, 저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은 많아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당하는 적대가 부당하다고 호소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의 삶을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만 판단하려 합니다. 그가 잘못했다면 지금 당하는 고통도 마땅하다고 생각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면서도, 그 죄와 무관하게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38편의 기도자는 바로 그런 복잡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계하신다고 느끼며,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틈타 자신을 공격하는 원수들의 행동까지 정당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가까운 사람들마저 그에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몸은 아프고, 마음은 짓눌려 있으며, 가까운 사람들은 떨어져 서 있고, 원수들은 점점 강해집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관계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시편 38편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그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 시편은 그 기도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선 시편 37편에서는 의인이 넘어지더라도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손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37:24). 시편 38편에서는 기도자가 실제로 비틀거릴 지경에 이릅니다(38:18). 그러나 이곳에서는 자신의 죄까지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절박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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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무엇을 기억하게 하려는 시인가

시편 38:1–3 본문 →

시편의 표제는 간결합니다.

다윗의 시편. 기억하게 하려고.시편 38:1 · 본디새김

‘기억하게 하려고’는 어떤 것을 기억하게 하거나 상기시키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무엇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표제는 그 대상을 밝히지 않습니다.

기도자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드리는 시라는 이해가 가능합니다. 공동체가 어떤 사건이나 하나님의 행위를 기억하도록 부르는 노래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편 38편이 특정한 제의에서 사용되었다거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표제의 기능을 지나치게 구체화하기보다, 이 시편이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호소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여, 당신의 노여움으로 저를 책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격분으로 저를 징계하지 마십시오.시편 38:2 · 본디새김

이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전혀 책망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과는 조금 다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과 격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징계입니다.

이것은 시편 6:2에도 나타나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분노가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화살들이 제게 박혔고, 당신의 손이 제 위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시편 38:3 · 본디새김

화살은 적을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쏘신 화살이 시인에게 박혀 있습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손은 흔히 구원과 보호의 힘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기도자를 짓누르는 힘으로 경험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과 무관한 우연한 사건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망하시고 계신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근거로 시인이 겪는 특정한 질병이나 모든 불행이 실제로 어떤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시인이 자기 죄와 고통을 연결하여 고백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사람의 죄를 추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가장 먼저 요청하는 것은 징계를 끝내 달라는 말보다 조금 더 깊습니다.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마지막 절까지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같은 표현이 시편 70편의 표제에도 나타나며, 레위기에서는 제사의 ‘기념’과 관련된 낱말이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칠십인역의 표제에는 안식일과 관련된 말이 추가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표제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고통을 언제나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기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큰 고난을 당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 고난을 욥의 죄와 연결하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그들의 설명이 옳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욥기 42:7). 또한 시편 73편은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죄가 머리를 넘어서고 몸이 무너지다

시편 38:4–9 본문 →

당신의 분노 때문에 제 살에는 성한 곳이 없고, 제 죄 때문에 제 뼈에는 평안이 없습니다.시편 38:4 · 본디새김

여기서 ‘평안’은 단순히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온전함과 안녕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뼈에 그 평안이 없다고 합니다. 그의 고통은 피부에 드러나는 상처만이 아닙니다. 몸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안정과 온전함을 잃어버린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다음에는 죄악의 무게가 두 가지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제 죄악들이 제 머리를 넘어섰고, 무거운 짐처럼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시편 38:5 · 본디새김

첫 번째 이미지는 물에 잠기는 모습과 어울립니다. 죄악이 머리를 넘어섰습니다.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이 너무 무거워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덮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짓누르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악을 단순히 과거에 저지른 몇 가지 잘못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악이 지금 자신의 삶 전체를 압도하는 무게로 경험됩니다.

제 상처들이 악취를 내며 곪았습니다. 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시편 38:6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기 죄를 ‘어리석음’과 연결합니다. 이 낱말은 잠언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낱말로, 단순히 지적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실수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추상적인 죄책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뒤틀리고 몹시 굽었습니다. 온종일 침울하게 걸어 다녔습니다.시편 38:7 · 본디새김
제 허리에는 타는 듯한 열기가 가득하고, 제 살에는 성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시편 38:8 · 본디새김
저는 감각이 무뎌지고 몹시 짓눌렸습니다. 제 마음의 신음 때문에 울부짖었습니다.시편 38:9 · 본디새김

몸이 굽고, 열기가 느껴지고, 힘이 빠지고, 마음의 신음이 울부짖음으로 터져 나옵니다. 특히 8절의 허리에 가득한 열기는 실제적인 신체 통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표현만으로 질병의 종류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나는 슬프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시편에서 인간은 영혼과 몸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의 괴로움은 몸으로 느껴지고, 몸의 고통은 마음을 짓누릅니다.

고통이 잠시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온종일 침울하게 걸어 다닙니다. 고통은 하루의 어느 한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고, 그가 살아가는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자세히 이야기하지만, 정작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의 관심은 특정한 잘못의 내용을 밝히는 데보다, 그 잘못 때문에 무너진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하는가에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지만, 자신의 고통을 말할 권리까지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께는 숨겨지지 않는 탄식

시편 38:10–11 본문 →

주, 제 모든 바람이 당신 앞에 있으며, 제 탄식은 당신에게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시편 38:10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시편의 분위기가 잠시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자신의 상처와 죄악을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 일일이 나열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바람 전체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지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무너져 있을 때에는 잘 정리된 기도문을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바람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지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추상적인 진술이 아닙니다. 지금 이 기도자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위로의 근거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충분히 설명할 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이 하나님께 숨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다음 구절에서 그의 신체 상태는 다시 악화됩니다.

제 심장은 마구 뛰고, 제 힘은 저를 떠났으며, 제 눈의 빛마저 제게 없습니다.시편 38:11 · 본디새김

‘눈의 빛’은 생기와 활력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시인의 눈빛마저 흐려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10절과 미묘한 대조가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더 이상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하나님 앞에서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볼 힘은 점점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보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이제 그를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멀리 서 있는 고통

시편 38:12–13 본문 →

저를 사랑하는 이들과 제 벗들은 제 상처에서 떨어져 서 있고, 제 가까운 이들도 멀리 서 있습니다.시편 38:12 · 본디새김

시인의 고통은 이제 몸과 마음을 넘어 인간관계로 번져 갑니다.

그들이 시인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의 상처가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다는 것까지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들이 왜 멀리 서 있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동기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거리입니다.

원래 가까워야 할 사람들이 멀리 있습니다.

관계의 이름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난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외로움이 깊어지는 순간은 단순히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만이 아닙니다. 자신과 가까운 관계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에도 외로움은 깊어집니다.

그런데 시인의 처지는 단순한 고립보다 더 위험합니다.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덫을 놓았고, 제가 해를 입기를 바라는 자들은 파멸을 말했으며, 온종일 속일 궁리를 합니다.시편 38:13 · 본디새김

가까운 사람들은 멀어지는데, 원수들은 적극적으로 다가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보호할 수 있는 관계는 약해지고 공격하는 세력은 강해집니다.

또한 7절에서는 시인이 온종일 침울하게 걸어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적들이 온종일 속일 궁리를 한다고 합니다. 시인은 고통으로 하루를 보내고, 적들은 그를 해칠 계획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그는 반박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상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상처나 타격, 질병으로 인한 환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낱말은 레위기의 피부 질환과 관련된 규정에서도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이 시편의 기도자가 의례적으로 부정하다고 판정받았거나,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여 피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했을 수도 있고, 시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귀먹은 사람처럼, 말 못 하는 사람처럼

시편 38:14–16 본문 →

그러나 저는 귀먹은 사람처럼 듣지 않고, 말 못 하는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다.시편 38:14 · 본디새김
저는 듣지 못하는 사람, 입에 반박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시편 38:15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15절의 ‘반박할 말(⁨תּוֹכֵחָה⁩)’은 논박이나 책망, 변론과 관련된 낱말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יָכַח⁩)’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책망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원수들에게 반박할 말조차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는 시인이 극심한 고통 때문에 자신을 변호할 힘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몸이 무너지고 가까운 사람들이 멀어진 상황에서 적들의 비난에 대응할 능력마저 사라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그들과 다투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적들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는 대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은 두 번째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여호와야훼, 저는 당신을 기다려 왔기 때문입니다. 주, 제 하나님, 당신이 대답하실 것입니다.시편 38:16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포기했다기보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이 하나님에게서 오기를 기다립니다. 또한 그의 침묵에는 실제적인 무력감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기도자의 신뢰를 보여 주지만, 그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부당한 공격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편은 특정한 고통 속에서 기도자가 선택하거나 경험한 침묵을 묘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당한 행위를 고발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행동을 금지하는 본문은 아닙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원수들에게 할 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하나님께 대답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때 ‘당신이 대답하실 것입니다’라는 고백은 아직 응답이 이루어졌다는 보고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넘어지는 것을 원수들이 기뻐할 때

시편 38:17–19 본문 →

저는 「그들이 저를 두고 기뻐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 발이 흔들릴 때 그들은 저를 향해 거만하게 굴었습니다.시편 38:17 · 본디새김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넘어지는 것을 원수들이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그의 고통을 보고 안타까워하기보다 자신의 승리로 여깁니다. 그는 넘어질 위기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그 장면이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17절에서 적들의 기쁨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어디까지 직접 인용된 것인지는 원문에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앞부분을 시인의 두려움으로, 발이 흔들릴 때 적들이 거만하게 굴었다는 부분을 그가 이미 경험한 일로 구분했습니다. 이러한 읽기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두려움을 설명합니다. 이미 자신의 약함을 조롱당했던 사람이 다시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금방이라도 비틀거릴 지경이며, 제 고통이 언제나 제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38:18 · 본디새김

10절에서는 자신의 모든 바람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18절에서는 자신의 고통이 언제나 자기 앞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그의 바람이 놓여 있고, 그 자신의 눈앞에는 고통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에서 시선을 돌리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고통이 먼저 보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자신의 바람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죄에 관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저는 제 죄악을 털어놓으며, 제 죄 때문에 걱정하기 때문입니다.시편 38:19 · 본디새김

처음에는 죄악이 머리를 넘어섰고, 무거운 짐처럼 자신을 짓눌렀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죄악을 털어놓는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잘못을 말하는 행동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털어놓다’는 알리거나 말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숨기지 않고 밝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했으므로, 이제 원수들이 자신을 공격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다음 두 절은 전혀 다른 대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시편 32편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32편에서는 자신의 죄를 숨겼을 때 뼈가 쇠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를 하나님께 인정한 뒤 용서를 경험합니다(시편 32:3–5). 두 시편 모두 죄를 숨기는 대신 하나님 앞에 내놓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다만 시편 32편은 죄의 고백과 용서의 경험을 뚜렷하게 연결하는 반면, 시편 38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통 속에서 끝납니다.

죄를 인정하는 일과 부당한 공격을 인정하는 일은 다르다

시편 38:20–21 본문 →

그러나 제 원수들은 활기차고 강해졌으며, 저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은 많아졌습니다.시편 38:20 · 본디새김

시인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심장은 마구 뛰고, 힘은 떠났으며, 눈의 빛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은 활기차고 강해집니다. 또한 원수들은 많아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미움은 ‘부당한’ 미움입니다. 시인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원수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데에는 정당한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향한 모든 적대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행위가 옳은 것은 아니라고 호소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 제가 선을 뒤쫓는다는 이유로 저를 적대합니다.시편 38:21 · 본디새김

시인은 선을 추구하는데, 그들은 악으로 갚습니다. 본디새김은 시인이 선을 뒤쫓는다는 읽기를 채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의 고백은 더욱 복합적입니다. 그는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은 선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시편은 인간을 하나의 행동만으로 완전히 규정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선을 향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관계에서 잘못한 사람도 다른 관계에서는 부당한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시인의 구체적인 죄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선을 추구했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모든 행동이 정당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도 원수들의 부당한 행동을 고발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까지 인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행한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무제한의 공격을 당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과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구하는 일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제가 선을 뒤쫓는다’는 표현에는 본문 전통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마소라 본문의 기록된 형태와 낭독 형태는 철자가 다르지만, 두 형태 모두 선을 추구하는 주체는 시인입니다.

멀리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와 달라고 기도하다

시편 38:22–23 본문 →

여호와야훼,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제 하나님, 저에게서 멀리 계시지 마십시오.시편 38:22 · 본디새김

앞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리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시인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저에게서 멀리 계시지 마십시오’입니다.

몸이 아픈 것도 괴롭습니다. 죄악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원수들의 공격을 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 가운데 하나님마저 멀어지시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분의 화살이 자신에게 박혔고, 그분의 손이 자신을 짓누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자신에게서 떠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가 끝까지 의지하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두렵다고 해서 하나님에게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께 가까이 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망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서둘러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 저의 구원이시여.시편 38:23 · 본디새김

그의 고통이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몸은 쇠약해졌고, 가까운 사람들은 멀어졌으며, 원수들은 강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발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는 일을 넘어, 지금 행동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자신의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화살과 손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의 처지가 바뀌었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병이 나았다는 말도 없고, 원수들이 물러났다는 말도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고통 가운데 있기 때문에 더욱 그분의 구원을 구합니다.

죄책감과 고통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

시편 38:1–23 본문 →

시편 38편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다는 선언이 없습니다. 기도자의 몸이 회복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습니다.

죄를 고백한 뒤에도 고통이 계속된다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까요?

시편 38편의 대답은 고통이 사라졌다고 선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사실이 그분의 도움을 구할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정죄하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시편 38편은 죄가 없는 사람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무너진 사람도, 바로 그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하는 것만도 아니고, 원수들을 이기는 것만도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힘을 잃었습니다. 눈의 빛도 사라졌습니다. 친구들은 멀리 있고 원수들은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탄식은 하나님께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은 ‘저의 구원’입니다.

그는 아직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응답의 소리가 아니라, 「서둘러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 저의 구원이시여.」라는 도움을 구하는 이 마지막 외침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