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7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악인이 잘되는 동안 의인이 사는 길

시편 37편은 의로운 사람이 품을 수 있는 불편한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기 길에서 성공하고(7절), 풍부한 재물을 소유하며(16절), 무성한 나무처럼 위세를 떨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35절).

그런데 시인은 그들을 보고 분을 내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의를 보면서도 화를 내지 말라는 뜻일까요?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일까요?

시편을 자세히 읽으면 시인이 염려하는 것은 불의에 대한 정당한 문제의식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악인들이 행하는 폭력과 약탈을 분명히 고발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곧은 길을 걷는 사람을 죽이려는 자들의 행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성공을 바라보며 분노와 시기에 사로잡히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그가 미워하던 악인의 방식을 자신도 따라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8절).

시인은 악인이 잘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악인의 성공을 목격한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 묻습니다. 이 시편의 핵심 질문은 ‘왜 악인은 잘되는가?’에서 ‘악인이 잘되는 동안 의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옮겨 갑니다.

시편 36편이 악인의 자기기만과 하나님의 인애를 대조했다면, 시편 37편은 그 대조가 일상의 선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 줍니다. 이 시편은 탄식시와 달리 하나님께 직접 항의하는 기도보다 사람을 가르치는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인은 듣는 사람에게 명령하고, 악인과 의인의 삶을 비교하며, 자신의 오랜 경험을 들려줍니다.

형식도 그 성격에 어울립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를 따라가는 알파벳 시로, 대체로 두 절씩 한 글자에 대응하지만 배열이 완전히 규칙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한 가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하기보다, 여러 각도에서 지혜를 익히도록 하는 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비슷한 교훈을 반복하는 시는 아닙니다. 처음에 제기한 악인의 번영이라는 문제를 재산과 땅, 생계와 자손, 일상의 발걸음과 재판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펴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약속 가운데 하나는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악인은 한동안 땅 위에서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 땅에 거주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누가 지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와 누가 마침내 그곳에 남을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1037편 본문 읽기 →

분노를 내려놓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아니다

시편 37:1–6 본문 →

다윗의 것.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분을 내지 마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마라.시편 37: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분을 내다(⁨חָרָ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분노로 뜨거워지거나 격해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단순히 잠깐 화가 나는 감정보다, 어떤 일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계속 달아오르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감정이 생기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불의한 사람들에게 재산이 있고 권력이 있으며, 그들이 계획한 일이 실제로 성공하는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악인이 언제나 즉시 벌을 받는 세상을 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가장 먼저 제시하는 이유는 뜻밖에도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풀처럼 금세 시들고, 푸른 풀처럼 말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37:2 · 본디새김

풀은 한때 푸르게 자랍니다. 멀리서 보면 넓은 땅을 덮을 만큼 무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은 나무와 달리 계절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시들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 번영의 지속성을 문제 삼습니다.

이 시편은 처음부터 두 가지 시간을 구별합니다. 하나는 악인의 성공이 눈앞에 드러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성공이 사라지고 그가 남긴 결과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사람은 흔히 현재 보이는 것만으로 삶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현재의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잘되는 동안 의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여라. 땅에 거주하며 신실함을 소중히 여겨라.시편 37:3 · 본디새김

시인의 대답은 현실에서 물러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불의한 세상이 싫다고 모든 관계와 책임을 떠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선을 행하며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신실함을 소중히 여겨라’에 해당하는 표현은 신실함을 기르거나 돌보라는 뜻으로도, 신실함을 먹고 살아가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읽는 전통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신실함을 소중히 여기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앞의 명령과 어울립니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한다는 것은 악인의 성공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를 기쁨으로 삼아라. 그가 네 마음이 구하는 것들을 네게 줄 것이다.시편 37: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먼저 명령은 ‘여호와야훼를 기쁨으로 삼아라’입니다. 그다음에 마음이 구하는 것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시인은 무엇을 기뻐하며 살아가는지가 무엇을 구하는가와 관계된다고 봅니다. 악인의 번영을 시기하는 사람은 악인이 가진 것을 자신도 갖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를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움 앞에서 다시 살피게 됩니다.

물론 원문이 하나님께서 모든 소망을 자동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면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간구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다만 그 약속은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는 권면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욕망이든 충족된다는 무조건적인 보증으로 읽는 것은 문맥을 벗어납니다.

네 길을 여호와야훼에게 맡겨라. 그를 신뢰하여라. 그가 행동할 것이다.시편 37:5 · 본디새김

여기서 ‘맡겨라(⁨גָּלַ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본래 굴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길을 여호와야훼께 굴려 놓으라는 이미지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굴려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선을 행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갈 길의 모든 결과를 혼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특별히 주어를 강조합니다. 무엇을 하실까요?

그가 네 의로움을 빛처럼 드러내고, 네 정당함을 한낮처럼 드러낼 것이다.시편 37:6 · 본디새김

악인의 성공 앞에서 의인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어도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불의한 사람은 재산과 권력을 얻고, 정직한 사람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가 옳은지보다 누가 성공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판단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정당함을 빛처럼, 한낮처럼 드러내실 것이라는 약속은 감추어진 진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요청하는 것은 단순한 부의 역전이 아닙니다.

지금은 성공이 옳음의 증거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공과 정당함을 혼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실함을 소중히 여겨라’는 히브리어로 우르에 에무나인데, 앞의 동사는 먹이거나 돌보는 행위, 또는 풀을 뜯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신실함을 기르거나 돌보라는 읽기와 신실함을 먹고 살아가라는 읽기가 함께 가능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약속된 땅

시편 37:7–11 본문 →

여호와야훼 앞에서 잠잠하고 그를 간절히 기다려라. 제 길에서 성공하는 자 때문에, 음모를 실행하는 사람 때문에 분을 내지 마라.시편 37: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선을 행하고 자신의 길을 맡기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무엇 때문에 기다리기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악인은 단지 나쁜 생각을 품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세운 계획이 실제로 성공합니다. 더구나 그 성공이 부당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분노는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노여움을 내려놓고 격분을 버려라. 분을 내지 마라. 악을 행하게 될 뿐이다.시편 37:8 · 본디새김

1절에서 시작한 명령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노가 일으킬 수 있는 결과까지 밝힙니다.

이는 불의를 고발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분노가 정의를 위한 행동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악인처럼 행동하도록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분노는 때로 사람을 행동하게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올바르게 결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지만,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이들, 바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37:9 · 본디새김

‘땅을 차지하다’는 소유를 넘겨받거나 상속받는 것, 또는 어떤 땅을 차지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을 처음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37편의 땅은 처음부터 추상적인 행복이나 마음속 평안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땅은 사람이 살아가는 실제적인 터전입니다. 농사를 짓고,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에게 삶을 이어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이 땅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지금 힘이 세고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땅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인지는 본문이 한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시편은 그곳에 정당하게 거주하고 삶을 이어 가는 문제를 더 넓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악인은 없을 것이다. 네가 그의 자리를 살펴보아도 그는 없을 것이다.시편 37:10 · 본디새김

한때 악인이 차지했던 자리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며 바라보던 자리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2절의 풀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푸르게 자라던 풀이 사라지듯, 강하게 보이던 사람도 결국 그 자리를 잃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풍성한 평화를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시편 37: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겸손한 이들’에 해당하는 아나윔(⁨עָנָו⁩)은 마음을 낮추는 사람들뿐 아니라 가난하거나 억눌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시편에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려는 악인들이 등장합니다(14절). 따라서 11절의 약속은 단순히 겸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보상을 받는다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사람들, 그로 인해 낮은 자리에 놓인 사람들이 땅을 얻는다는 사회적인 의미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얻은 뒤 ‘풍성한 평화’를 누립니다. 그들은 단지 악인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위협하고 빼앗는 일이 아니라 평화를 누리는 삶을 기뻐하게 됩니다.

4절의 ‘기쁨으로 삼아라(⁨עָנַג⁩)’와 11절의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야훼를 기쁨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풍성한 평화를 기쁨으로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이 그리는 좋은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쁨과 평화로운 삶의 기쁨이 서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악인의 성공을 시기하던 사람에게 시인이 보여 주는 미래는, 악인처럼 강해지는 미래가 아니라 악인이 파괴하던 평화를 누리는 미래입니다.

조금 더 깊이

‘땅을 차지하다’의 히브리어 야라시는 창세기 15:7에서도 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을 차지하게 하려고 그를 이끌어 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에서도 이스라엘이 땅을 얻고 그곳에 거주하는 일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땅을 잃는 것은 단순한 자산 감소에 그치지 않고, 가족의 생계와 공동체 안에서의 안정된 삶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25장의 토지 규정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열왕기상 21장)은 땅이 단순한 거래 상품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신약에서 마태복음 5:5는 시편 37:11의 ‘겸손한 이들은 땅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직접 이어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연결은 시편의 원래 배경인 이스라엘의 땅과 의로운 삶에 관한 약속을 지우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 약속을 새롭게 읽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37편 자체의 관심은 먼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칼을 든 사람과 붙들리는 사람

시편 37:12–17 본문 →

악인은 의인을 해칠 궁리를 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간다.시편 37:12 · 본디새김

시인은 다시 악인의 행동을 보여 줍니다.

악인들이 칼을 뽑고 활을 당겼다. 가난하고 궁핍한 이를 쓰러뜨리고, 길이 곧은 이들을 도살하려는 것이다.시편 37:14 · 본디새김

칼과 활은 폭력의 도구입니다. 악인이 가진 힘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 공격 대상인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 길이 곧은 사람들은 악인의 힘에 맞서 자신을 충분히 방어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이 불균형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님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주는 그를 비웃는다. 그 악인의 날이 올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시편 37:13 · 본디새김

하나님이 누군가를 비웃으신다는 말은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웃음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즐기는 웃음이 아닙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악인의 자신만만함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악인은 현재 자신의 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인의 날’이 올 것을 보고 계십니다. 악인이 당장 성공하더라도 그의 삶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칼은 그들 자신의 심장에 박히고, 그들의 활은 부러질 것이다.시편 37:15 · 본디새김

남을 쓰러뜨리기 위해 꺼낸 무기가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시인은 폭력을 통해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확보하려는 삶이 결국 그 자체의 파괴성에 무너진다는 결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대조는 다음 두 절에 있습니다.

의인이 지닌 적은 것이 많은 악인들이 지닌 풍부한 재물보다 낫다.시편 37:16 · 본디새김
악인들의 팔은 부러질 것이지만, 여호와야훼는 의인들을 붙들기 때문이다.시편 37:17 · 본디새김

시인은 의인에게 적은 것이 있고 악인들에게 풍부한 재물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적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팔’은 사람이 자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신체 이미지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팔로 칼을 들고 활을 당깁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반면 의인은 자기를 지탱하는 능력이 자신의 팔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붙드십니다.

따라서 16절은 가난 자체가 언제나 부보다 낫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재산이 많으냐 적으냐만으로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안전하고 좋은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악인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자신을 지탱할 근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면 의인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삶을 궁극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그가 손에 쥔 재산입니까, 아니면 그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까? 이 질문은 다음 단락에서 재산과 생계의 문제로 더 구체화됩니다.

기근의 날에도 배부르다는 약속

시편 37:18–20 본문 →

여호와야훼는 흠 없는 이들의 날들을 안다. 그들의 유산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시편 37: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악인의 날이 올 것을 하나님께서 보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의인의 날들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날은 그의 힘이 끝나는 날과 연결됩니다. 반면 의인의 날들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날짜와 사건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아신다는 표현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 삶을 살피시는 관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약속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들은 재앙의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고, 기근의 날들에도 배부를 것이다.시편 37:19 · 본디새김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실제로 굶주리거나 재앙을 겪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재산과 건강을 잃습니다. 룻기 1장에서는 기근 때문에 가족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시편 44편의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처럼 느끼며 탄식합니다.

그렇다면 19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편 37편은 지혜의 가르침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돌보신다는 삶의 근본적인 질서를 확신하며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의인이 모든 기근에서 반드시 충분한 음식을 얻는다는 기계적인 보증으로 바꾸면, 성경의 다른 증언과 충돌하게 됩니다.

시인은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근의 날들이 실제로 찾아온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의인이 버림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뢰와 하나님의 공급을 확신하는 지혜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그 확신은 뒤의 25절에서 시인 자신의 오랜 경험과 연결됩니다.

악인들은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원수들은 풀밭의 아름다움처럼 사라질 것이다. 연기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시편 37:20 · 본디새김

여기서 ‘풀밭의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절은 본문 자체가 난해합니다. 풀밭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물로 바치는 숫양과 관련된 표현으로, 불에 타는 모습과 연결되는 다른 읽기로 갈립니다. 따라서 무엇이 정확히 사라지는 모습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절의 중심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악인들은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연기는 한때 하늘을 가릴 만큼 짙게 피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반면 의인의 유산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시편은 현재 가진 것의 크기와 그것이 지속되는가를 구별합니다.

조금 더 깊이

‘풀밭의 아름다움’을 제물로 바치는 숫양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고, 쿰란에서 발견된 시편 37편 관련 사본인 4QpPs37에는 불에 타는 모습과 연결되는 다른 읽기가 전해집니다. 한편 19절과 같은 약속을 둘러싸고, 실제로 의로운 사람들이 땅을 잃고 쫓겨나는 일이 있었고, 이스라엘 자신도 나라를 잃고 유배를 경험했습니다. 시편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긴장은 구약의 여러 책에서 계속 다루어집니다. 시편 73편은 악인의 번영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사람의 내면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전도서 8:14는 의인이 악인의 행위에 대한 보응을 받고 악인이 의인의 행위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욥기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반드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시편 37편의 약속을 모든 개인의 삶에 곧바로 적용되는 성공 공식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재산의 차이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시편 37:21–22 본문 →

악인은 빌리고 갚지 않지만,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나누어 준다.시편 37: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재물 이야기를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끕니다. 16절에서는 의인의 적은 재산과 악인의 풍부한 재산을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산의 양이 아니라 재산을 사용하는 방식을 비교합니다.

여기서 단순히 채무를 갚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악인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악인은 풍부한 재물을 가진 사람으로도 묘사됩니다. 또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은 악인의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대조는 경제적인 성공과 실패보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놓여 있습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합니다.

의인이 지닌 적은 것이 더 낫다는 말은 그가 재산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은 자신만을 높이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는 수단이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뿐 아니라, 그가 소유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가도 중요합니다.

여호와야훼에게 복을 받은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에게 저주받은 자들은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37:22 · 본디새김

재물을 나누는 삶과 땅을 얻는 약속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시편이 그리는 의로운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땅은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터전이고, 재물은 서로의 삶을 돌보는 수단이 됩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붙들리는 사람

시편 37:23–26 본문 →

여호와야훼로 말미암아 사람의 발걸음이 굳게 세워지고, 여호와야훼는 그 사람의 길을 기뻐한다.시편 37:23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은 다시 길이라는 이미지로 돌아옵니다. 5절에서는 자신의 길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굳게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발걸음’은 삶의 구체적인 행보를 나타냅니다. 사람은 큰 목표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한 걸음씩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굳게 세우신다는 것은 그가 걸어가는 삶을 붙드시고 안정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후반부의 ‘여호와야훼는 그 사람의 길을 기뻐한다’는 문장은 원문에 주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길을 기뻐하신다는 읽기와,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기뻐한다는 읽기입니다. 본디새김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길을 기뻐하신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의인이 올바르게 행동하는지 감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걷는 길을 기뻐하시며 발걸음을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그가 넘어지더라도 내동댕이쳐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그의 손을 붙들기 때문이다.시편 37:24 · 본디새김

시인은 의인이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넘어질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넘어지는 것과 완전히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다릅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손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걸어가다가 넘어지려 할 때, 곁에 있는 사람이 손을 붙잡아 주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넘어질 수 있지만, 붙드는 손 때문에 완전히 쓰러져 버리지는 않습니다.

의인은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계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시인이 갑자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젊었고 이제는 늙었다. 그러나 의인이 버림받거나 그의 자손이 빵을 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시편 37:25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주로 일반적인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신의 오랜 세월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악인은 잠깐 푸르게 자라는 풀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와 대조적으로 한 사람의 긴 생애를 펼쳐 보입니다.

짧은 시간만 보면 악인의 성공이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지나며 삶의 결말을 바라보면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인이 말한 것은 ‘나는 보지 못했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관찰과 경험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의 모든 시대와 모든 의인의 삶을 조사한 뒤 예외가 없다고 선언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25절을 근거로 가난한 의인이나 생활고를 겪는 신앙인에게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취지를 벗어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고 관찰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온종일 은혜를 베풀고 빌려주며, 그의 자손은 복이 된다.시편 37:26 · 본디새김

25절에서는 의인의 자손이 빵을 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의인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빌려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시인이 기뻐하는 것은 의인과 그의 자손이 남의 도움을 전혀 받을 필요 없는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의 자손은 복이 된다’는 표현은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에서 의인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흐름을 따라, 그의 자손이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된다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의인의 신실한 삶은 자신만의 안녕에 머물지 않고 다음 세대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삶은 자신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삶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넘어질 때 그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있는 사람

시편 37:27–34 본문 →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여라. 영원히 거주하여라.시편 37:27 · 본디새김

시인은 다시 처음의 권면으로 돌아옵니다. 3절에서도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며 땅에 거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악에서 떠나라’는 명령이 더해집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악인의 행동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폭력과 속임수, 약탈, 빚을 갚지 않는 행위가 등장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본 독자에게 이제 구체적인 결단을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정의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신실한 이들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히 지켜지지만, 악인들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다.시편 37:28 · 본디새김

하나님은 단지 힘이 강한 분이 아닙니다. 정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붙드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어떤 사람들에게 무조건 편애를 베푸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는 단지 악인을 벌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신실한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삶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지키십니다.

의인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 위에 영원히 거주할 것이다.시편 37:29 · 본디새김

처음에 시인은 악인의 성공을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악인의 일시적인 성공과 달리, 의인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삶을 약속합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읊조리고,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한다.시편 37:3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재물을 나누는 행동이 의인의 특징이었습니다. 이제는 지혜와 정의를 말하는 입술이 그의 특징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 만듭니까?

그의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의 발걸음은 미끄러지지 않는다.시편 37:31 · 본디새김

여기서 ‘가르침’은 문맥에 따라 율법이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가르침이 단지 외부에서 지켜야 할 규칙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편 1:2에서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기뻐하며 밤낮으로 되뇌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사람이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묘사됩니다. 시편 37편에서는 그 가르침이 마음에 있는 사람의 발걸음이 안정되게 된다고 말합니다.

24절과 31절을 함께 읽으면 작은 긴장이 보입니다. 24절에서는 의인이 넘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31절에서는 발걸음이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모순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의인은 삶에서 어려움과 실패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그 길을 따라가려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지탱할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악인은 의인을 엿보며, 그를 죽이려 한다.시편 37:32 · 본디새김

이것은 앞에서 악인이 의인을 해칠 궁리를 한다는 12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악인은 단지 우연히 의인과 부딪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를 엿보고 공격할 기회를 찾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않고, 그가 재판받을 때 그를 유죄로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시편 37:3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의인이 실제로 고발당하거나 재판받는 상황이 반영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인은 폭력뿐 아니라 법적인 절차를 이용해 의인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의 손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억울한 사람이 부당한 판결을 받는 사건들도 등장합니다. 시인의 확신은 인간의 법정이 언제나 공정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잘못되더라도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마지막 기준이라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그의 길을 지켜라. 그가 너를 높여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다. 악인들이 끊어질 때 너는 보게 될 것이다.시편 37:34 · 본디새김

시인은 기다리라는 것과 길을 지키라는 것을 함께 명령합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을 계속하면서,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삶입니다.

악인의 성공을 보고 조급해진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결과를 앞당기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길을 떠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옳은 길을 포기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무성한 나무는 어디로 갔는가

시편 37:35–38 본문 →

나는 위세가 무서운 악인을 보았다. 그는 제 땅에서 자란 무성한 나무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시편 37:35 · 본디새김

시인은 다시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25절에서 그는 젊었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이 직접 본 악인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2절에서 악인은 금세 시드는 풀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풀보다 훨씬 크고 견고해 보이는 나무입니다. 왜 이미 풀에 비유했던 악인을 다시 나무에 비유할까요?

악인의 번영이 실제로 매우 강하고 오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자라났다 금세 사라지는 풀만으로는 악인의 위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악인은 자신의 땅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오랫동안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땅에서 자란(⁨אֶזְרָח⁩)’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본래 그 땅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옮겨 심은 나무가 아니라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나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악인은 자신의 자리가 영원히 유지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가 버렸고, 보라, 그는 없었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시편 37:36 · 본디새김

여기서 ‘지나가 버렸다’는 표현의 주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읽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인이 그곳을 지나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악인 자신이 지나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악인이 지나가 버렸다고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이 전달하려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한때 너무나 강하게 보였던 사람이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편의 앞부분에서 시인은 악인의 자리를 살펴보아도 그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0절). 이제는 자신이 실제로 그와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현재의 강함이 지속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악인의 사라짐만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흠 없는 이를 눈여겨보고 곧은 이를 살펴보아라. 평화로운 사람에게는 앞날이 있기 때문이다.시편 37:37 · 본디새김

처음에 독자는 악인이 잘되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바라볼 대상을 바꾸라고 합니다. 악인의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면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악인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데서 벗어나, 평화를 추구하며 곧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목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반역하는 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의 앞날은 끊어질 것이다.시편 37:38 · 본디새김

시인은 두 부류의 사람을 나란히 놓습니다. 평화로운 사람에게는 앞날이 있습니다. 악인들의 앞날은 끊어집니다.

악인은 지금 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반대로 의인은 지금 가진 것이 적고 위협을 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시편 37편이 가르치는 지혜는 누가 지금 가장 높이 서 있는가를 보는 눈에서, 누가 끝내 설 자리를 갖게 되는가를 보는 눈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37절과 38절의 ‘앞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리트는 이후의 상태, 결말, 장래를 뜻할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후손이나 남겨지는 것을 가리키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으로 후손이 이어지는가의 문제만을 말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은 악인의 현재와 의인의 앞날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

시편 37:39–40 본문 →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온다. 그는 고난의 때에 그들의 요새다.시편 37:39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지금까지 그는 선을 행하라,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 악에서 떠나라, 하나님의 길을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의인의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밝힙니다. 의인이 선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최종적인 안전을 확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요새가 여호와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악인의 칼과 활이 등장했습니다. 의인은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서 공격받는 사람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요새가 되십니다. 요새는 공격받는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견고한 장소입니다.

시인은 고난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때’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의인들의 요새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돕고 건져 냈다. 그가 그들을 악인들에게서 건져 내고 구할 것이다. 그들이 그에게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시편 37:40 · 본디새김

시인은 마지막에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도우시고, 건지시고, 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마지막 문장이 밝힙니다. 그들이 그에게 몸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이 말하는 신뢰는 추상적인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를 보지 않는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인이 강하고, 의인이 위협받고, 재난과 기근이 일어나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피하는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동사들은 완료된 행동과 앞으로의 구원을 바라보는 표현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도움과 미래를 향한 확신이 함께 놓인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모든 동사의 시간적 관계를 하나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성한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서

시편 37:1–40 본문 →

시편 37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처음 등장한 분노의 대상이 다시 떠오릅니다.

한때 악인은 무성한 나무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는 위세가 대단했고, 자기 땅에서 뿌리를 깊이 내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힘을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가진 것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시인이 다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처음의 질문에 조용한 대답을 줍니다. 왜 악인의 성공을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가 가진 것이 영원히 남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악인과 의인을 비교하는 이유는 단순히 착하게 살면 언젠가 부자가 된다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와 권력만을 삶의 성공 기준으로 삼는 시선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악인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아 소유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 아래에서 삶의 자리를 얻고, 평화를 누리며, 그 자리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시인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좋은 삶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삶,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 하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정의를 말하는 삶, 평화를 추구하며 그 길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손을 붙드시고, 고난의 때에 요새가 되어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가장 오래 남는 이미지는 어쩌면 거대한 나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손일지 모릅니다.

무성한 나무처럼 보였던 악인은 어느 날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넘어질 때에는 그를 붙드는 손이 있습니다. 「그가 넘어지더라도 내동댕이쳐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그의 손을 붙들기 때문이다」(24절).

시편 37편은 악인보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악인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바라보느라 자신의 길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그의 길을 지켜라」(34절)라고 말합니다.

높이 솟은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여호와야훼께 붙들린 사람은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